안식과 평온
2P
“귀신이 앓아누웠대.”
은밀한 중얼거림은 전장의 스산한 피바람을 타고 퍼진다. 높게 올려 묶은 백발이 뱀과 같은 궤적으로 흔들리는 동안 모노는 청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따닥, 따닥, 모닥불 타들어 가는 소리. 곳곳에 친 천막 안에선 부상자들이 앓는 신음과 생존자들의 흐느낌이 번잡하게 뒤섞인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병사들은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쓴 채, 그러나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음울과 향수를 눈물처럼 떨구며 목소리를 내리깐다. 모노는 제가 근처를 지날 때면 한층 낮아지는 그들의 수런거림을 안다.
“누가 그래?”
“옆 막사 쓰던 놈. 어젯밤부터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니, 꼭두새벽에 치유사가 다녀갔다나 뭐라나.”
짧은 침묵과 이어지는 중얼거림.
“이참에 그냥 콱 뒈져버렸으면 좋겠는데.”
모노는 그 또한 듣는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지나칠 때 모노는 병사들이 제게 보내는 인사와 그 속에서 비어 나오는 갈급을 모르는 체하며 그저 웃는다. 그것이 지금의 모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이자 하잘것없는 최선이다.
이 바닥에서 나도는 소문은 의외로 정직한 구석이 있었다. 진위를 가리기 힘드니 헛소문이라도 한번 퍼질 만한데도. 모노가 여태껏 귀동냥한 소문은 전부 진실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새벽이 점차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것. 가면 갈수록 포악해지는 걸 보아 귀신은 점점 미쳐가는 게 틀림없다는 것. 또 어쩌면. 그런 광인과 함께 다니는 영웅이란 작자도 꼭 제정신일 리는 없다는 것.
모퉁이를 꺾어 천막 사이사이를 헤매던 모노의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춘다. 제 천막 앞에서 모닥불을 피우거나 모여 앉아 무기를 다듬는 병사들이 없다. 문을 가린 천이 바람에 한 번 흔들리는 순간. 모노는 주먹을 그러쥐며 생각한다. 바람이 을씨년스럽다.
병사들이 맞았다. 이번에도 소문엔 거짓 한 점 없다. 카엘이 앓아누웠다. 사람을 죽이는 건지 고기를 도륙하는 건지 모를 낯으로 전장을 헤집던 검은 사신이 지독한 감기에 패배한 것이다.
치유사는 단순한 감기는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스트레스와 이런저런 요인들이 겹쳤을 거라고. 설명을 늘어놓으면서도 치유사는 카엘이 손끝 한번 바르작거릴 때마다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그게 꼭 겁을 잔뜩 집어먹은 쥐새끼처럼 보였다는 사실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모노는 이른 새벽 입막음과 함께 치유사를 내보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몸이 아픈 카엘은 주위가 번잡한 걸 더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천막을 걷고 들어선다. 굳게 닫힌 문고리를 잡으며 모노는 상상한다. 평소엔 핏기 하나 없는 피부는 열꽃이 피어 얼룩덜룩할 것이다. 세상만사가 지루하기 그지없어서, 자극이랄 것이 머리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서, 또 어쩌면 무료해서 미쳐버린 사람처럼 반질거리던 눈동자를 반추한다. 열감에 몽롱하게 풀렸을 동공과 살짝 벌어진 입, 그 안에서 흘러나올 뜨거운 숨이란. 모노는 종종 카엘이 더운 숨을 뱉는다는 것이 낯설다. 지금 또한 예외는 아니다.
“몸은 좀 괜찮아?”
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열감이 훅 끼쳤다. 제대로 환기조차 하지 않아 무거워진 공기에 숨이 막힌다. 아마 인기척이 싫다는 이유로 문이란 문을 죄 걸어 잠근 탓이겠지. 불을 켜지 않아 침침한 천막 안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구석진 바닥에 쌓인 옷 몇 벌과 그 위에 놓인 스태프로 이 방의 주인을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삭막한 공간에선 엷게 먼지와 땀, 그리고 이젠 지워지지 않을 피 냄새가 얼룩덜룩 묻어났다.
모노는 천막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에 걸쇠를 걸어 잠근 후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침대에 이불과 뒤엉킨 인영이 있다. 시야는 침침하나 모노는 틀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빗나갈 수 있을지언정 그를 대상으로 잡으면 엇나감이 없다. 껍질처럼 보이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얕고 불규칙하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삶이 있었다.
“카엘.”
돌아오지 않는 반응을 헤아리며 모노는 고민한다. 잠든 걸까. 카엘은 평소 자는 시간이 길지 않으나 사람이 아프면 우선 몸부터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짧은 어림 끝에 모노는 침대를 향해 걸음을 뗀다. 문안 인사차 들른 것이니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다.
이불을 파헤치듯 끌어내린다. 열이 발갛게 번진 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덜 닦인 핏물이 그대로 배어버린 듯한 착각은 찰나에 불과하다. 모노는 손을 뻗었다. 닿은 뺨이 뜨거웠다. 문지르듯 힘주어 손가락을 굴리다 이내 천천히, 아주 느리게, 콧등과 대를 지나 감은 눈꺼풀을 스치면.
곤히 잠든 카엘의 얼굴을 시야에 한가득 담는 순간. 모노는 계시를 읊조리듯 중얼거린다. 너는 참 편안해 보인다.
카엘이 무료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근래 들어 한층 난폭해진 카엘의 전투 방식이 그 모든 심심함의 증거였다. 카엘은 시도 때도 없이 다쳤고, 여차할 땐 아군조차 공격의 범위에 집어넣었으며, 번거롭다는 근거를 대어 그들을 구하지 않곤 했다. 모노는 그 모든 말을 이해한다. 세간에선 자신을 카엘의 목줄을 쥔 통제책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글쎄. 모노는 장담한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카엘을 뼈저리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다. 누군가가 흉통을 꽉 쥔 듯한 갑갑함을 저런 폭력적인 방식으로나마 발산하고자 하는 욕구를 모노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카엘을 보며 모노는 종종 어림했다. 만일 내가 네 꼴이 되어 돌아오면. 너는 내 기분을 이해할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머리를 불구덩이에 처넣은 것 같은 이 맹렬한 분노와 불안을, 너는 내가 전장에서 이성을 놓은 채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춤추다 돌아와야만 마침내 알 수 있을까. 그런 걸까. 내 뱃속에서 똬리 튼 뱀은 피투성이가 된 너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내 속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데. 나는 아무 말도 뱉지 못하고 그냥 바보처럼 웃을 수밖에 없는데. 너는. 그 모든 원흉인 너는, 카엘.
너는 참 평온해 보인다.
모노는 이어진 행동을 알 수 없는 문장에 달린 각주처럼 받아들이기로 한다. 직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뻗었던 손을 내렸다. 눈가를 문지르다가 콧대와 콧등을 지나, 그렇게 뺨을 스치고. 이윽고 목에 닿는다. 손톱을 세워 목 언저리에 남은 흉터를 살살 긁는다. 살갗이 긁히며 붉은 자국이 옅게 올라왔다. 카엘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잘도 자는구나. 모노는 그 순간 속으로 중얼거린다. 너는 참 잘도 자. 그 태평함이 부럽다.
목을 쥔 손에 힘을 준 까닭엔 별것 없다. 카엘의 몰이해에 막히는 제 숨만큼의 힘을 주었을 뿐이다. 이러면 너도 내 심정을 조금은 알까 궁금했을 따름이다. 답답한 마음과 토해내지 못한 숨을 손끝에 몰아넣었더니 어느 순간 목을 조르는 꼴이 되었을 뿐이라고 모노는 생각한다.
차라리 네가 이 순간 깨어나서 나를 물어 뜯기라도 했으면 좋을 것을. 카엘은 여전히 잠들어 있고, 여전히 미동도 없으며, 여전히 편해 보인다.
불어넣은 숨이 꺼질 때 현실감은 부풀었다. 다음 순간 모노는 카엘의 목을 조르는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굳은 머리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손을 떼기까진 삼 초가 넘게 걸린다. 기겁하며 떨어져 나가다가 발이 꼬이고, 꼬인 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질 뻔하다가, 카엘이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아득한 공포에 애써 허리를 뒤틀어 균형을 잡는다. 추태를 면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카엘이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미약한 안심을 삼키다가, 이 상황에서 마음을 놓고야 마는 자신을 향한 지리멸렬한 혐오감에 그만 머리가 아득해지고야 마는 건 직후의 일이다. 밭은 숨을 연달아 집어삼키다가 고개를 든다. 침대 위 카엘을 본다. 카엘은 여전히 고요히 눈을 감고 있다.
몸이 떨리지 않는 구석이 없는 이 와중에도.
내가 너를 죽일 뻔한 상황에서도.
몸을 일으킨다. 제 손을 내려다본다. 짧게 숨을 참는다. 그리고 내쉰다. 산발이 된 머리칼이 땀투성이 뺨에 들러붙더니 눈가를 타고 떨어졌다.
시야가 차례로 점멸한다. 모노는 어느샌가 천막 밖에 있고, 날은 지고 있으며, 또 어느 순간엔 전장에서 정신을 차린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공격을 부러 허용한 카엘의 등을 향해 매서운 칼이 내리꽂히고 있다. 발중보법으로 단숨에 접근해 상대에게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눈이 마주친다. 시선을 내린다. 목을 완전히 감춘 옷이다.
질책도 원망도 분노도 실망도 없이 깨끗한 카엘의 눈을 보며 모노는 지난 모든 것을 망각한다. 존재하지 않음이 되었다가 그 존재마저 망라하여 얻어낸 평온함을 자각한 가장 최초의 순간. 모노는 어김없이 웃는다. 전장에서 너는 참 편안해 보인다는 생각은 그 이후 휘발된다. 흔적조차 없이. 마치 숨통을 틀어쥐었던, 손끝에 맺혔던, 카엘의 목을 졸랐던 제 몰이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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