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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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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by 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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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다. 불면은 그림자처럼 피부에 스민다.

침대에 정갈하게 누운 채 모노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빛과 어둠에 대해서. 불과 바람에 관해서. 상반된 주제들을 향한 의미 없는 탐구를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같은 결론이 난다. 통합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것들을 나란히 늘어트려 놓으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걷는 것들 위에 불면을 한 자락 떨구면. 그러면 그 모든 이야기는 삶과 죽음에 관한 고찰로 변모한다. 요는 옛적 열네 자리의 방이 되고 베개는 마하의 도서관이 되며 덮은 이불은 알라그의 첨탑과 진배없어진다. 지나고 스러진 것들에 눕고 덮은 채 모노는 죽음을 고찰한다.

잊은 것. 두고 온 것. 버린 것. 또는 외면한 것…….

그러나 얇고 희미한 독백은 오래가지 못한다. 제 곁자리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신음이 그의 상념을 방해한다. 메마른 시선은 반사적으로 돌아간다. 눈동자만 굴려 옆을 보면. 제 허리를 단단히 틀어쥔 채 얼굴을 기대어 누운 카엘이 있다. 내쉬는 숨이 유달리 뜨겁다. 모노는 천천히 손을 든다. 제 이마에 가장 먼저 가져다 댄다. 손날에 닿는 온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질척이는 냉기를 품었으며 그건 이상이 제게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손을 내린다. 예민한 카엘은 손짓과 숨 한 번에도 흠칫흠칫 잘도 깼다. 괜한 일로 그의 수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망설임 어린 손길은 허공을 한참 배회하다가 느리고 사뿐히 카엘의 목덜미에 닿는다. 제 손길에 따라 얕게 몸을 움츠리는 카엘을 내려다보며 모노는 생각한다. 뜨겁다. 이례적인 일이다.

한참 후에 동이 텄다. 모노는 그제야 카엘의 핏기 없는 낯이 붉게 물들었음을 깨닫는다. 열꽃이 핀 얼굴을 응시하다가 모노는 한숨을 삼킨다. 이마를 쓸어내리고 허리에 두른 손을 조심스레 벗어낸다. 그리고 침대 어귀에 걸터앉은 채 잠시 제 머리를 짚어 감싼다.

연례행사 같은 것이었다. 카엘은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곧잘 앓아누웠다. 평소엔 물을 맞든 비를 맞든 눈을 맞든 거뜬했으나 한두 번씩 유달리 지독한 열감기에 시달렸다. 그럴 때의 카엘은 평소보다 배는 과민하게 굴어댔으니 모노가 아닌 타인이 곁을 지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간호는 자연스레 모노의 몫이 되었다. 동거를 시작한 이후로는 집에 누군가를 들이는 것조차 내켜하지 않으니 말은 다 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모노는 한숨을 길게 뽑는다. 떨리는 호흡이 새벽의 공기를 타고 무겁게 가라앉다가 흩어졌다. 보지 않아도 피로할 낯짝을 문지르며 모노는 몸을 일으킨다. 카엘이 깨기 전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 카엘의 의식이 수면 위로 돋는 그 순간부터 그는 저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눕혀 놓아도, 금방 올 거라고 설득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운다면 위태위태하고도 성마른 걸음으로 온 집안을 헤집으며 자신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러다가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걱정과 감내는 항상 모노의 몫이다. 조금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나 겉으로 태를 내지는 않는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녀올 거라고, 정말이라고 성토하려다가도 카엘의 얼굴을 보면 말을 잃고 마는 것 또한 모노 자신이다. 늘어트린 머리를 높게 올려묶으며 모노는 가만히 뇌까린다. 그렇지만. 보호자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갈피 잃은 낯을 하는데.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어. 어떻게 질타할 수 있겠어.

준비는 신속하고도 정확하다. 고요한 집안은 이른 아침부터 곳곳에 인기척을 품는다. 가장 먼저 모노는 부엌으로 가 불 위에 냄비를 얹는다. 물을 끓이고 작은 냄비와 주전자에 나누어 담는다. 그것들을 다시 불 위에 각각 올린 후 찬장을 연다. 특제 수프 재료를 늘어놓으며 주전자 안엔 찻잎을 한 줌 넣어 끓인다. 어렸을 적부터 앓아누운 모노에게 양친이 곧잘 끓여주던 특제 수프는 살짝 칼칼한 맛이 일품이었다.

몸을 나른하게 하는 약초차가 보글보글 끓는다. 주전자를 탁자 위에 올리고 기름을 두른 냄비에 각종 채소를 볶는다. 토마토 페이스트와 약간의 향신료로 밑간을 한 베이스에 볶은 채소를 옮겨 담고 불을 약하게 맞춘다. 뚜껑을 덮고 뭉근하게 끓이는 동안에도 걸음은 바쁘게 움직인다. 약초차로 텁텁한 입 안을 가볍게 헹구고 방으로 향한다.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뿐이지만 모노의 목적은 먼지 쌓인 시트 위에 있다.

보자기로 잘 감싼 짐을 가지고 방을 나섰을 때. 모노는 거실과 부엌 언저리에 우두커니 선 검은 인영을 본다.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또는 혼 없이 움직이는 알라그의 마도 기계처럼 그, 혹은 그것은 망연하게 서 있다. 들숨과 날숨에 따라 몸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흔들린다. 초점을 맞추지 않은 시야에 이는 잔상처럼 비틀비틀. 그러나 시계추처럼 제법 규칙적으로 흔들흔들. 돌아보지 않는 검은 등을 바라보며 모노는 입술을 살짝 깨문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서둔다.

“카엘.”

이름을 부르자 반응은 그제야 돌아온다. 평소보다도 한 발 느린 속도다. 비척비척 고개와 몸을 돌려 세운 카엘의 낯은 여상보다 붉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열감이 피부에 와닿는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마를 짚은 모노가 어색하게 웃는다. 아마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일 것이다. 어서 빨리 눕히는 게 상책이었다.

“들어가 있어. 수프 만들고 있거든. 금방 할 거야, 얼마 안 남았어! 자고 있으면 내가 깨울게.”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덧붙인다. 카엘은 대답 대신 느리게 몸을 수그린다.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몸을 구기고 제 품을 파고든다. 카엘, 하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이라도 하는 양 목덜미에 얼굴을 비벼대지만 막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기껏해야 낮게 앓는 신음만 있을 뿐이다. 모노는 손을 뻗는다. 카엘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는다. 창백한 열꽃이 눈에 밟힌다. 우습게도 모노는 그 순간 새벽의 향수를 되짚는다. 상반된 것들에 관한 고찰. 결국엔 삶과 죽음으로 귀결되었던 모든 허상들.

“그럼 기다려. 잠시만.”

카엘이 자신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한다. 대신 모노는 카엘의 손아귀를 능숙하게 튼다. 제 허리에 손을 단단히 고정하고 몸을 돌리면 뒤에서 안은 꼴이 된다. 등에 얼굴을 맞대고 또 낮게 앓는 카엘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모노는 조심스레 걸음을 뗀다. 부엌으로 향한다. 냄비에서 나오는 고소한 냄새가 카엘의 속을 뒤집을까 걱정하며 잽싸게 불을 끈다. 흘끔 바라본 수프는 제법 먹음직스러운 모습이다. 그릇 여러 개와 쟁반을 꺼낸다. 수프와 차를 각각 담고 보자기를 푼다. 작은 환 모양 약재까지 각기 담은 쟁반을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으론 제 배에 둘린 카엘의 손등을 꽉 잡으며 모노가 다시 말한다.

“가자.”

다행스럽게도 반발은 없다. 모노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아주 느리게 걷기 시작한다.

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모노는 침대 옆 탁상에 자리를 마련한다. 쟁반을 내려놓고 여전히 등에 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는 카엘을 살살 구슬린다. 그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단단히 덮은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카엘이 깨어난 이상 모든 건 속도의 문제다. 잰걸음으로 달려가 안방 창문을 열고 돌아온다. 반쯤 허리를 일으켰던 카엘을 부축하고 수프 그릇을 건넨다. 정돈되지 않은 숨을 색색 내뱉던 카엘이 나직이 앓는다. 그는 수프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자신을 지탱하는 모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빈다. 식은땀이 묻어나며 옷이 금세 축축해졌다.

“카엘. 조금만 먹자, 응? 이거 먹어야지 약도 먹지.”

“…….”

“내가 열심히 끓였어. 맛은, 음, 보장하기 어렵기는 한데. 그래도 이상한 건 안 들어갔어. 정말로.”

내리깔았던 눈동자가 느리게 자신에게 굴러온다. 자신을 지그시 올려다보던 카엘이 천천히 입을 연다. 열감기에 쉬어버린 목소리가 미적미적, 그러나 확실하게 대꾸했다.

“알아.”

모노는 잠시 멈칫한다. 안다는 그 한마디를 버릇처럼 곱씹는가 싶더니 곧 카엘에게로 관심을 돌린다. 지금은 관념적인 무언가에 잠길 때가 아니다. 모노의 할 일은 명확하다. 카엘에게 식사와 약과 차를 먹이고 재울 것. 그 이외의 것은 이후로 미뤄도 상관없는 일들이다.

식은땀으로 젖은 카엘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들을 떼며 모노가 말한다.

“세 입만 먹자, 응? 빈속에 약 먹으면 속 쓰리다고 했잖아.”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살살 구슬리자 마침내 카엘이 입을 연다. 어느새 식어 적당히 따끈해진 수프는 굳이 입으로 불 필요도 없다. 수프를 떠서 카엘에게 먹이고, 그가 씹어 삼키는 것을 지켜보고, 입이 완전히 비었을 때쯤 다시 먹인다. 일련의 과정을 능숙하게 반복하면서도 모노는 문득 상념에 잠긴다. 언젠가. 아주 옛날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에. 전쟁터에서 앓아누운 카엘을 보며 모노는…….

“모노. 나 목말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모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아, 그렇지, 물, 하고 부산을 떨며 빈 그릇을 내려놓는다. 머그잔에 담은 차에서는 향긋하다기보단 쌉싸름한 냄새가 풍긴다. 물 대신 내민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카엘의 미간이 슬쩍 우그러지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불만은 없다. 모노는 카엘이 머그잔을 비우는 것을 지켜본다. 한 입 삼킬 때마다 조금씩 기우는 각도라던가. 올라가는 고개나. 울렁울렁 움직이는 목울대나. 그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 같은 것들.

뜨거운 것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살아 있다는 흔적들.

빈 머그잔을 받아 든다. 직후에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다. 작은 환 형태로 뭉친 감기약은 물 없이 삼키기엔 조금 크다. 낯을 찡그리며 미안, 하고 사과하자 숨을 몰아쉬던 카엘이 고개를 기울인다. 뭐가, 하고 되묻는 카엘에게 짐짓 미소하며 대답했다.

“물 가져올게. 약 먹어야 하니까!” 성마른 손길로 쟁반을 바투 쥐며 모노가 덧붙인다. “정말 금방이야.”

전력으로 뛰어갔다 올 생각이었다. 집안에서 뛰면 큰소리가 날 테니 카엘의 신경에 좋을 리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아픈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발을 끌며 걸어 나오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그러나 모노의 다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도 직전.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느리게 숨을 뱉은 카엘이 중얼거린다.

“가지 마.”

집요하게 자신을 찾는 시선을 바라보며 모노는 잠시 눈을 감는다. 카엘. 너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런 표정을 하고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널 거절하는 능력 따위는 내게 없어. 유감스럽게도.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하는 수 없이 모노는 쟁반을 도로 내려놓는다. 침대 어귀에 걸터앉는다. 한숨을 참고 카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손길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던 카엘은 곧 느리게 손을 뻗는다. 약을 들고 그대로 입에 넣는다. 그러더니 천천히 우물거리고는 이윽고 삼킨다. 예의 무뚝뚝한 낯으로 다시금 자신을 올려다본다.

담담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모노는 조금 울고 싶어진다. 식은땀과 열꽃으로 엉망이 된 표정엔 티끌 하나 없다. 조금 멍하고 흐리다. 잠기운이 몰려오는지 느리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뜨거운 날숨과 뜨거운 들숨을 뱉고. 뜨거운 체온을 모노의 어깨와 품에 비비고. 그렇게 뜨겁게. 한도 끝도 없이 뜨겁게 달아오르다가.

“졸려…….”

중얼거림과 함께 눈을 내리감으면.

네가 낯설어.

모노는 뇌까린다. 정말이지 낯설어. 가장 유약한 너를 가장 가까이서 몇 번이고 보아왔음에도. 너는 여전히 이다지도 낯설다.

해무 같지 않은 네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 희뿌옇지 않은 너. 의뭉스럽지 않은 너. 명확한 너는 조금 당혹스러울 지경이야. 의문 없는 너, 명징한 카엘은 언제나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고…….

빛과 어둠. 불과 바람. 확신과 카엘. 통합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것들. 결국엔 삶과 죽음이 될 이야기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모노가 천천히 움직인다. 제게 기댄 카엘을 눕힌다. 이불을 정돈하고 그 곁에 자리를 펴고 앉는다. 카엘이 손을 뻗는다. 제 허리를 붙든다. 그리고 느리게 품을 파고든다. 뜨겁다. 불덩이 같은 이마를 제 손으로 쓸어내리며 모노가 말한다.

“잘자. 계속 있을게.”

“가지 마.” 잠결처럼 희끄무레한 목소리로 카엘이 되풀이한다. “가지 마, 모노…….”

이윽고 잦아드는 숨소리.

모노는 크게 숨을 들이켠다. 날숨은 아주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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