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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과 심장

오피셜

S by 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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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너는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01.

땅거미가 지면 온갖 소음은 그 몸집을 부풀린다. 밤에 깨어 있지 않은 날은 드문 터라 나는 새까맣고 커다란 소음들에 여간 익숙해지지 못한다. 반 뼘 정도 열린 창문 너머에선 날갯짓, 바람, 잎사귀, 풀벌레 따위의 온갖 소음이 작아졌다가 커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발끝이 닿지 않는 침대에 누워 그것들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커지고. 작아지고. 커지고. 작아지고. 포식자의 아귀에 붙들린 듯 부풀리고. 토끼 굴에 숨는 것처럼 쪼그라들고.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호흡이 그들과 같은 박자로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흉통과 그 속의 갈비뼈와 더더욱 안쪽에 주먹만 한 내 심장이 고름처럼 부풀었다가 사그라드는 상상이 이어지면. 그 시뻘겋고도 불분명한 착각이 눈앞을 까맣게 물들이다 보면. 그러면 불현듯 나는 라벤더 안식처의 중형 집에 있지 않다. 육체를 탈피한 혼은 작고 뻘겋고 줄어들고 커지는 심장만을 지닌 채 먼 곳으로, 아주 먼 곳으로, 이를테면 호흡조차 하기 어려운 우주 끝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그곳은 어찌나 먼지 우리의 커다랗고 푸르고 아름다운 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며 하다못해 기적조차 닿지 않는다.

아득히 먼 곳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반투명한 몸을 휩쓸며 이질감을 준 바람도 발목을 꿰뚫어 너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속삭일 풀잎조차 없고 하물며 뜨고 지는 채 시간은 금이거늘 너는 이곳에서 무엇 하느냐 잔소리할 태양조차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우주 끝자락 그 벼랑 끝에서 우뚝 선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하늘만, 그러니까 시커멓고 가끔 청보랏빛으로 빛나는 우주만을 멀거니 올려다본다. 그러다 간헐적으로 생각에 휩싸인다. 간결하고도 원론적인 의문이지만 명징한 정답은 내 작은 심장이 꺼질 때까지 도출해 낼 수 있을까 두려워지는 그런 종류의 물음 말이다.

예를 들자면. 여긴 기적마저 닿지 않을 만큼 외진 세계의 구석이거늘 나는 어떻게 살아 있는가. 기적이 다다르지 못한 장소에서 기적을 일으켰다면 그건 본래 이 별이 품고 있던 기적인가. 아무도 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에 기적이 끼어 있었다면 이 별의 주인은 기적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별의 주인을 싹싹 긁어모아 마음껏 취한 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 채 삶이 풍만한 크고 푸른 벼로 돌아갔다는 것인가.

작고 붉은 나의 심장의 팽창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수축을 기다린다. 아주 느린 억겁의 박자로 사그라드는 심장과 함께 나는 기적 없는 행성에서 기적을 일으키듯 크고 푸른 나의 별로, 신들의 사랑을 받는 땅으로, 그 구석진 라벤더 안식처의 중형 집으로 빨려든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뜬다. 대개 이른 새벽에 벌어지는 일이다.

뻐근한 몸을 일으키다 제 가슴팍을 더듬는 건 버릇과 같다. 직전까지 뻥 뚫린 무형의 육체는 시뻘건 심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그 주먹만 한 씨앗이 불투명한 몸의 갈비뼈 사이에 심겨 있다는 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두툼한 잠옷을 지나 맨살에 손바닥을 지그시 눌러보면 그 안에서 맥동하는 심장을 느낄 수 있다. 쿵쿵 박자를 맞춰 뛰는 심장은 여느 때보다도 힘차고 빠르며 팽창과 수축 한 번에 억겁이 걸렸던 방금의 일은 문득 거짓말 같아진다.

우두커니 앉아서 나는 의문을 품는다. 원래 이게 이런 박자였던가. 심장이 너무 빨리 뛰지는 않나. 두에 백 년, 근에 이백 년 걸리는 것이 아니던가. 자고로 심장이란 느긋한 맛이 중요하지 않은가. 나의 심장은 맥동이 과하게 빠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이상 현상이 나만의 것인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럼 나는 자연히 고개를 돌리고 내 곁에 누운, 그렇게 잠든 너를 본다.

손을 뻗는다. 나에게 그러했듯 손가락을 쫙 핀 채 너의 가슴께에 밀어 넣는다. 너는 나직이 칭얼거리듯 눈살을 찌푸리나 깨지 않고 나는 의아하게도 그 모습에 조금쯤 안도한다. 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으나 동시에 내게 이 박자는 아주 중요하다. 나의 심장이 유달리 빠른 속도로 쿵덕쿵덕 뛰고 있으면 그건 곧 크고 푸른 별에서 나의 삶은 유달리 빠른 속도로 쿵덕쿵덕 바스라질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고 기왕이면 같은 속도로 늙고 싶으며 한날한시에 죽으면 좋겠다는 불온하고도 불가능한 소망의 소유자이므로 네 박동을 확인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손바닥에 닿은 살결이 부드럽다. 어둠은 나와 타인을 유리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벼락처럼 깨닫는 건 바로 그 순간이다. 나의 손바닥 너머에서 조금 뜨거운 네 살갗을 지나 갈비뼈 깊은 안쪽에서부터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과 함께 나는 손을 거둔다. 손바닥에 짙게 남는 열감에 코를 파묻듯 얼굴을 기대었다가 길고 얇은 숨을 한번 뽑아낸다. 의지 없고 형체도 없는 날숨이 뱀처럼 꼬불꼬불 올라가며 지붕을 타고 넘어 우주로, 저 먼 끝으로, 우리가 기적을 박박 긁어모아 탈취한 벼랑 끝 행성으로, 이윽고 절벽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무릎을 세워 끌어안는다.

너의 심장은 내 것보다 배의 속도로 뛴다. 그 말인즉슨 너의 삶은 내 것보다 배의 속도로 빠르게 흐를 것이고 그건 결국 네가 나보다 배는 빠르게 죽을 것이고 땅에 묻혀 백골마저 배의 속도로 부스러지고 별바다로 돌아간 후에도 배의 속도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네가 내 온전한 세계는 아닐지언정 그 토대를 마련하고 있으므로 네가 그렇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 전부가 그렇다는 말과 진배없으니 이건 가히 경탄할 만한 일이다. 나는 배가 느린 속도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나에게 맞는 속도는 아득히 먼 우주 끝 투명한 육체와 투명한 영혼과 그 안에 폭탄처럼 심긴 심장뿐이라고 속삭이는 듯한 절망이 입술 끝을 핥고 사라진다.

혼자는 싫어. 그건 너무 외로워.

짙푸른 새벽이 가고 희끄무레한 여명이 뜨기 시작할 무렵 나는 잘근잘근 씹어먹던 입술 표피를 놓고 고개를 튼다. 몸을 숙여 네 심장께에 귀를 대고 널 덮듯이 눕는다. 질끈 물었던 입술을 네 가슴에 묻고 잠시 눈을 감으면 희미한 너털웃음과 가라앉은 목소리로 뭐하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네가 깨어나자 심장은 더더욱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날갯짓, 바람, 잎사귀, 풀벌레 따위의 소리와도 어긋난다.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 너의 붉고 뜨거운 손길에 엷은 숨을 내쉬며 나는 말한다.

“심장 소리를 들어.”

너는 짧은 침묵 후 내게 묻는다. 무슨 일 있어?

나는 대답하는 대신 숙인 귀를 네 가슴팍에 더더욱 밀착한다. 쿵쿵 뛰는 심장은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며 그렇기에 나는 조금 안타까워진다. 네가 죽음에서 깨어나자 배의 속도에서 다시 배의 속도로 빨라진 네 심박수와 삶이 나를 까마득히 초월해 달려 나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눈꺼풀을 짓누르고 안구를 쏜다. 맞닿은 가슴과 육체는 뜨겁고 나는 벼랑 끝의 행성을 떠올린다.

괜찮아?

결심이 서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눈을 내리깔고 이내 감으면 상상은 어렵지 않다. 깔끔히 소독한 은색 날로 나의 심장을 도려내는 착각. 뜨겁고 뻘겋고 주먹만 한 심장이 억겁에 한 번씩 쿵 소리를 내며 박동하면 나는 그에 맞추어 고개를 든다. 기적이라는 주인을 잃은 별이 내 등 뒤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누군가의 장송곡처럼 또는 환대곡처럼 울리는 순간 내가 말할 것이다.

내 심장을 줄게.

눈을 뜬다. 고개를 튼다. 반 뼘쯤 열린 창문 너머 희뿌연 싸라기가 날린다. 모노, 하고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억겁처럼 느리다.

마지막 깨달음은 그렇게 온다. 겨울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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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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