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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오피셜

S by 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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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볕이 좋던 날. 영웅이 사라졌다.

새벽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한 줄로 요약한 이야기가 밀서, 암호, 급보의 탈을 쓰고 전 세계에 은밀히 퍼졌다. 각국 정상들은 빠르게 모였다. 첫 편지를 부치고 정확히 일주일 후. 각국의 정상들은 올드 샬레이안의 대회의장에 앉아 있었다.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이 긴급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안건을 비밀에 부치기로 입을 모았다. 에오르제아는 분명 평화를 되찾았으나 영웅이란 존재는 그들에게 여전한 무게를 가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돌연 영웅의 실종을 공표하는 건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뿐이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수색은 분명 느려질 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은 이해했다. 그들 또한 무의미한 혼란은 원치 않았다. 갑론을박이 오갔으나 이야기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적어도 한 사람을 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은 의견서를 써 내려갔으나 그 종이조각은 밀회에 함께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이 의견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모든 토론과 골머리 앓던 시간이 무의미해졌다. 어르고 달래고 타이르고 설득했으나 이만하면 되었다고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벽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느 지도부조차 단 한 사람의 의견을 외면하지 못해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어떻게든 밀회에 앉혀놓는 것으로 새벽은 모든 기력을 다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한 사람을 바라보며 제각기 주먹을 쥐거나 고개를 떨어트렸다.

단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의견을 들어야만 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그 또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회의실에 앉은 카엘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설득하는 얼굴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자리를 차지한 쿠루루는 카엘을 힐끔거리며 주먹을 연신 쥐었다가 폈다. 카엘은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온 이래 지금껏 딱 한 마디를 뱉었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침묵했다. 여태껏.

간단하게 말하자면. 쿠루루는 불안했다. 딱딱하고 허리가 배기는 의자에 앉아 있는 건 카엘이 아니라 그 탈을 쓴 덤터기 같았다. 완전히 탈력한 사람처럼 낯이 까맣게 죽은 채로, 저들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 이상의 반응이 없었다. 생기가 완전히 말라붙은 몰골이었으나 눈을 떼기 힘들었다. 저런 낯으로 어떤 돌발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쿠루루는 갑작스러운 카엘의 행동을 모두 통제할 힘도, 권리도, 여력마저도 없다.

기실 구속과 답답함을 극도로 기피하는 카엘이 이런 형식적인 자리에 앉아 있는 까닭을 쿠루루는 이해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카엘을 보챌 수 없었다. 카엘이 잃은 건 영웅 나부랭이가 아니라 반려이자 언약자인 모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카엘을 설득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새벽은 침묵을 고수했다. 카엘은 그 모든 말을 들었다. 동시에 아무 말도 듣고 있지 않았다. 쿠루루는 짙게 침체한 카엘의 눈을 살폈다. 이렇다 할 변화는커녕 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헤아리기 힘든 감정 덩어리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았다.

카엘은 이 모든 논의를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모노의 실종을 깨닫자마자 전국 각지를 들쑤시며 돌아다닌 탓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안 뒤진 곳이 없었다. 하늘 높이 날아다니다가 지하 깊숙한 곳까지 갈아엎어 가며 수색했다. 성과는 없었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새벽은 조심스럽게 회담을 입에 담았다. 그렇기에 카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쿠루루는 카엘의 마음을 조금, 아주 조금쯤 알 것 같았다. 저들을 향한 감정은 이 사안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되레 방해라면 방해일 것이다. 카엘은 독자적으로 수색에 전념했다. 그리고 좌절했다. 실마리는 없었고 갈피만을 잃었다. 영웅의 발자취는 돌연 끊겼고 언약 텔레포트마저 실패했다. 이제 기댈 곳은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저들의 힘이 꼭 필요하다.

카엘은 모노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물을 바가지로 퍼마신들 조금도 해소되지 않는 결핍이었다. 나무 인형을 몇 시간이고 쥐어패다가 탈진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제책일 성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모노가 돌아와야 했다. 카엘이 입을 달싹였다. 좌중이 순식간에 침묵했으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봐요. 카엘.” 카엘은 대답하는 대신 눈동자를 굴렸다. 곁자리에 앉아 있던 야슈톨라였다.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조금만 진정하고 숨 좀 골라요. 당신이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더 없다는 사실을 알잖아요. 게다가 저들도 당신과 비슷한 심정일 거예요.”

카엘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댐으로써 모든 대답을 대신한다. 그에게 야슈톨라는 항상 어려웠다.

갑론을박이 오가는 동안 카엘은 눈을 감았다. 짙은 탈력감이 몸 전체를 짓눌렀다. 간헐적으로 턱턱 막히는 숨이 불편했다. 이런저런 사실을 전부 차치하고서도. 카엘은 그냥 피곤했다. 야슈톨라와 쿠루루는 그런 카엘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어떤 지리멸렬한 좌절은 지독한 피로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곳엔 없었다.

카엘이 기억하는 모노의 마지막은 평소와 같았다. 근래 잠을 조금 설치는 것 같기에 잠자리에 유달리 신경 쓰던 날들이었다. 평소보다 다소 피곤한 낯이 마음에 걸렸으나 아직 개입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모노는 여상처럼 꾸벅꾸벅 졸며 아침을 먹었고, 씻다가 조는 바람에 샤워기에 머리를 박았다. 옷을 갈아입고서 마당이 보이는 의자에 한참이나 앉아 엘과 톤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나서야 느지막하게 집을 나섰다.

그날 모노는 올드 샬레이안의 현인이 개최하는 에테르학 학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열린 학회였고 모노 또한 주기적으로 참가했다. 이상할 건 없었다. 당연하지만 그날, 학회장에서 모노를 봤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너는 어디로 간 걸까. 모노는 거짓말을 못 했다. 자신을 상대로는 특히나 서툴렀다. 학회에 참석한다는 게 거짓이었다면 단박에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제게 무언가를 숨기려 들 리가 없었다. 이건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다. 피와 뒤섞여 엉겨 붙은 채 말라버린 맹신이었다. 그들은 수도 없는 전장을 함께 건너왔다. 등을 맞댈 전우를 의심하는 순간 그들은 죽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카엘과 모노는 서로에게 거리낌 없어야 했다.

다녀올게. 모노는 그렇게 말했다. 문이 열리자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기울어 현관에 들이쳤다. 눈이 부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노는 볕을 등진 채로 잠시 카엘을 바라보다가 말했더랬다. 오늘 좀 늦을지도 몰라.

데리러 갈게, 하고 대답했던가. 모노는 잠자코 카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던가. 그새 흐려진 기억이 불쾌했다. 카엘은 눈을 감고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뭐라고 했지. 모노는. 떠나기 전에. 없어지기 전에.

그럴 필요는 없는데.

불분명한 말들이 하나둘씩 역류한다. 카엘은 이것들이 정말로 모노가 한 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어졌다. 이 모든 게 제 망상이라면 어떡할까. 개의치 않는다. 상상에라도 의존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모노를 찾을 수 있다면야 카엘은 얼마든지 환상에 매달릴 것이다.

상상 속 모노는 마저 채비를 시작한다. 산발이 된 머리를 어떻게든 빗으려 애쓰다가 포기한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낫지 않아, 하고 묻는다. 그나마 격식 있게 차려입었으나 불편하다는 듯 목깃을 연신 만지작거린다. 답답하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카엘은 손을 뻗어 깃을 조금 느슨하게 당기고. 모노는 고마워, 나 이만 갈게, 하며 한 걸음 내딛고.

날이 좋다. 그렇지.

괜히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

그 순간 카엘은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회의장을 뛰쳐나갔다.

 

  *

 

얼굴 위로 쏟아지는 짙푸른 빛에 산크레드는 눈을 찡그렸다. 너울처럼 울렁이는 파랑이 마치 장막 같았다. 언제 와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실없이 중얼거리면서도 산크레드는 주위를 신중하게 훑었다.

카엘이 회의 도중 갑작스럽게 뛰쳐나갔다. 여기까지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카엘은 애당초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독자적으로 에오르제아를 뒤집어엎듯이 수색했거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좌절이 카엘을 그 자리에 앉게 했을 뿐이다. 사람에겐 호불호를 뛰어넘어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을 산크레드는 잘 알았다. 그래서 카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그는 카엘을 붙잡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뛰기 시작한 카엘을 정신없이 쫓았다. 그렇게 당도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아포리아 본부. 그 심연에 자리한, 아이티온 별 현미경. 별바다와 이보다 가까운 장소는 없다.

농도 짙은 에테르에 솜털이 삐쭉 솟았다. 카엘은 저 중심부에 우두커니 서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기도, 무언가에 열중한 것 같기도 했다. 느닷없이 별 현미경에 들이닥치고선 이후로는 계속 저 상태였다. 보다 못한 산크레드가 주위를 들쑤시고는 있었으나 이렇다 할 만한 건 찾지 못했다.

이쯤 되자 산크레드는 조금 궁금해졌다. 무엇이 카엘을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영웅의 마지막 자취는 샬레이안 대학 장서관에서 끊겼다. 책을 몇 권 대출한 후 도서관을 나섰다고 했다. 책들은 전부 에테르학을 다루는 논문들이었다. ‘진정한 죽음’. ‘그는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다 – 에테르학적 관점에서 살펴본 대사들’. ‘나는 죽었으나 죽어가는 중입니다’. 죽은 자의 에테르는 언제까지 유지되다가 언제 녹아 없어지기 시작하는지. 사멸하는 에테르는 어떤 형태로 흩어지는지. 별바다 관측 도중 간혹 발생하는, 죽은 자의 환청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지.

직후에 있을 학회에서 참고 자료로 쓰일 예정 아니었을까요? 이번 달의 주제가 별바다와 잔여물이라고 들었어요. 사서는 그렇게 말했다. 확인 결과 사서의 말이 맞았다. 학회장은 모노가 넌지시 던진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번 달의 주제를 별바다와 그 잡념들로 잡았고, 모노는 이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고…….

잠깐.

어렴풋한 깨달음에 산크레드는 눈을 찡그렸다. 앞뒤가 이상했다. 사건을 시간대로 나열하자면 첫째, 학회에서 주제를 정함, 둘째, 모노가 참여 의사를 밝힘, 셋째, 학회 날 사용할 책을 대출, 넷째, 실종이다. 하지만 학회장의 말이 유달리 걸렸다. 모노가 던진 말에서 착안한 주제라면 모노는 이전부터 비슷한 결의 주제들에 관심을 가져왔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시간대가 조금 달라졌다. 첫째. 모노가 별바다와 사념들에 관심을 가짐. 둘째. 학회에서 주제를 정함. 셋째. 모노가 참여 의사를 밝힘. 넷째. 책을 대출. 다섯째. 실종.

만일 모노가 이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거라면. 산크레드는 다시 고개를 들어 카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모노는 처음부터 학회에 참가할 생각이 없었는지 모른다. 대출한 책들은 학회에서 사료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동시에 학회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사유로 대출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다면…….

문득 산크레드는 낡은 책더미를 발견한다. 오래전 쌓아둔 것처럼 점차 마모되어 가는 책들이다.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차근히 제목들을 훑었다. 낡고 빛바랜 책들은 산크레드의 손에 제본이 뜯어지고 내지가 떨어졌다.

오래 뒤질 필요도 없었다. 책들의 무덤 속에서 산크레드는 찾아냈다. 관리가 잘 되어 반짝거리는 가죽 표지. 그 위에 적힌 선명한 제목. ‘진정한 죽음’. 실종 당일 모노가 대출한 책 중 하나였다.

“카엘. 이거…….”

 고개를 든다. 그리고 본다. 산크레드는 잠시 제 눈을 믿지 못했다.

거대한 사람이었다. 사람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거대했다. 좀 큰 정도가 아니었다. 로스갈이 열댓 명 있어도 저 사람 하나를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았다. 까만 로브가 에테르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퍼즐을 재조립하듯 몸이 그렇게 맞춰졌다. 무심히 맞잡은 손을 지나 얼굴이 빚어지기 시작했을 때 산크레드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얼굴에 가면을 쓴 채였다. 산크레드는 어쩌면 저것이 모노가 일전 말했던 고대인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어림해 봤다. 갑작스러운 등장은 당혹스러웠으나 또 동시에, 이 순간이 놀랍도록 당연하게 느껴졌다. 다시 한 걸음. ‘고대인’은 여전히 손을 맞잡고 누운 채였다. 그 몸은 이제 완전한 형상을 지녔다.

산크레드는 그 낯섦에서 익숙함을 찾았다. 에테르의 흐름에 따라 울렁이는 머리칼에서. 형태는 조금 달랐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제법 엇비슷했다. 또 몇 걸음 걸었다. 산크레드는 이제 카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카엘.”

산크레드는 대답하지 않는 카엘을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카엘의 시선을 좇았다.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얼굴. 그 너머를 상상한다. 사자 갈기처럼 북슬북슬한 머리. 한쪽은 까맣고 다른 쪽은 하얀 대비. 그 두 가지만으로도 산크레드는 아주 쉽게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심증은 물증을 등에 업어 점점 그 크기를 불렸다. 관심을 가지던 것. 영웅의 실종. 그가 아침에 대출했던 책.

추론을 끝낸 산크레드가 확신 없이 중얼거렸다.

“모노……인가?”

 

 *

 

그라하 티아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려 애썼다. 1세계에서의 경험까지 친다면 백 년은 우습게 살았으나 이런 류의 사건에는 여전히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랬다. 심장이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를 안 보였다. 그러나 그라하는 불온하게 맥동하는 심장을 내색하는 대신 힐끔 곁눈질했다. 의자에 카엘이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벽에 기댄 모습에서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이유는 명징하다. 갑작스럽게 회의실을 박차고 나섰던 카엘과 산크레드에게서 통신이 닿았을 때. 새벽은 그들이 그만 정신을 놓아버린 줄 알았으니까. 도움을 주러 별바다에 다다랐을 땐 이 모든 것이 에테르로 인한 환각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라하의 시선이 방안을 크게 훑었다. 물건들을 벽면에 밀어놓고 가운데에 큰 침대를 둔 공간이었다. 서둘러 마련한 거처인지라 난잡하게 보였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저런 크기를 감당할 만한 휴게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위를 헤매던 그라하의 눈길이 마침내 침대 위 형상에서 멈춘다. 압도적이다. 그게 제가 받는 인상이었다.

새벽이 추정하기를. 저건 고대인인 모노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대인일 적의 모노.

올드 샬레이안에서 에테르학에 정평이 났다는 현인이 몇이나 다녀갔다. 그들은 고대인의 몸을 구성하는 밀도 넘치는 에테르에 놀라워하고, 그들의 크기는 에테르가 가지는 질량을 고려했을 때 이상하지 않다고 저들끼리 숙덕거리다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카엘의 눈초리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모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주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어찌나 깊은지 의식이 수면 밑, 별바다에까지 빠져버린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그라하는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꼬리를 통제하려 애쓰며 한숨을 삼켰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모노’의 흉통은 카엘뿐이 아닌 새벽 전체를 불안함에 적시고 있었다.

잠들었다고 믿고 싶었다. 새벽은 물론이거니와 이곳에 들른 현인 중 그 누구도 어째서 ‘모노’가 깨어나지 않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아주 조심스럽게, 어쩌면 그 몸만 의태 했을 뿐 의식은 여전히 별바다에 잠겨 있는 것 아니냐는 가설을 제시했을 뿐이었다. 설령 그 가설이 옳다고 한들 그렇다면 어떻게 깨울 것이냐는 질문엔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깨우는 게 옳냐는 물음이 선행된다면 입은 더더욱 무겁게 닫혔다. 유일한 실마리를 가진 듯한 카엘은 입을 꾹 다문 채 ‘모노’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 모든 일은 서서히 미궁 속으로 침체되어 갔다.

상반된 감정이 몸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영웅을 걱정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라하는 학자로서 품은 필연적인 호기심을 인정해야 했다. 고대인이라니. 아씨엔과의 오랜 싸움은 되짚는 것만으로도 넌더리가 났다. 그들이 만 년이 넘도록 꾸며온 계책을 타파하는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들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으나 효과적인 싸움을 위해선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선행할 필요가 있다. 그라하는 영웅들을 통해 아씨엔이 어째서 그러한 선택을 내렸는지 들었다. 그들의 계획을 듣고,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승리했다.

모든 일이 일단락된 후였다. 새로운 아씨엔이 태어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모노의 경우 아씨엔의 탄생이라기보단 몇 달 전 있었던 빙의 사태에 가까웠다. 그때도 별바다에서, 한 고대인이 열네 파편 중 하나에 자신을 깃들게 했던가. 그 또한 아주 오래된 계략이었지. 사건 개요를 다시 읽어봐야 할까. 그라하가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여태껏 모든 걸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고수하던 카엘이 몸을 일으켰다.

“카엘?”

“……피곤해.”

그건 제 부름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사적으로 흘러나온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라하는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눈그늘이 짙었다. 수려한 얼굴이 요 짧은 새 수척해졌다. 그라하는 영웅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았다. 잘 알기에 제1세계에서 그들을 그토록 내몰았다.

입안이 썼다. 기억은 불현듯 떠올라 마음을 괴롭혔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스러운 감상에 잠기기에 적기가 아니었다. 그라하는 카엘을 말리지 않았다. 잠자코 카엘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엘이 손을 뻗었다. ‘모노’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깨와 상반신 부근에서 방황하던 손은 이내 가면에 닿았다. 얼굴을 덮듯이 가린 새 부리 모양 가면이 침침한 조명에 희게 빛났다. 가면 위에서 손가락을 미끄러트린 카엘은 이윽고 망설임 없이 가면을 벗겼다.

매끈한 얼굴이 드러났다. 가면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나자 그라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노였다. 눈썹부터 감은 눈, 콧대와 얇은 입술까지. 유일한 다른 점이라면 흉터가 없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라하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고대인인 ‘모노’와 현재의 ‘모노’가 이토록 닮았다면. 그렇다면 현재의 ‘모노’만의 것은 제노스가 남긴 흠집밖에 없는 걸까. 비단 모노뿐이 아니라 모든 고대인이, 그들의 흔적이 그러할까. 동시에 더욱 궁금해졌다. 하이델린은 ‘모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

“일어나, 모노.”

카엘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방아쇠라도 당긴 듯 이제껏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손끝이 움찔했다. 그라하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모든 걸 지켜봤다. 카엘이 불렀고 ‘모노’가 반응했다. 어째서인지 끼어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잠깐 뜸을 들였다가 카엘은 다시 일어나라고 말했다. 그건 재촉이라기엔 느긋했고 권유라기엔 성말랐다.

카엘이 ‘모노’를 세 번 불렀을 때. 마침내 ‘모노’가 눈을 떴다.

색이 다른 눈동자마저 똑같았다. 초점을 잡지 못한 흐린 동공을 마주하는 순간. 그라하는 조금 슬퍼졌다.

 *

 

“흥미롭네요.”

그게 야슈톨라의 첫 마디였다. 잠시 입을 닫았던 그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에 잠시 어머, 하고 감탄했다. 사람들을 감싸는 에테르는 종종 감정에 따라 흥미로운 변화를 보였다. 야슈톨라는 그와 관련한 논문도 몇 권 썼다. 에테르로 세상을 보게 된 그에게 감정은 때로 물성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호기심과 관심. 본디 사람이란 낯설고 광막한 것을 상대로는 겁을 집어먹기 마련이다. 조금쯤 돌아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응당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유감스럽네. 야슈톨라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 걸음 다가갔다. 이곳엔 돌아있는 사람이 워낙 많았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질문 세례를 퍼붓고 싶어 입이 근질대고 있을 것이다. 샬레이안의 현인들은 대개 그런 부류였으니까.

미지의 광활함조차 현인들을 억누르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한 건 그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공포였다. 이를테면. 그래. 저 뒤에서 조용히 연발 권총을 조립하는 영웅의 존재라던가.

야슈톨라는 강당 구석에 앉은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가 실제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에이션트 텔레포트로 시력을 잃은 후부터 시각적인 정보는 전부 차단되었다. 다만 야슈톨라에게는 조금 다른 것이 보였다. 지금도 그렇다. 야슈톨라는 고요히 가라앉은 카엘의 에테르에서 들끓는 불안감을 읽었다. 에테르가 불온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른 들판에 불을 질러도 저보다는 정적일 성싶었다. 한 행성을 구한 영웅으로서 카엘이 저토록 겁에 질리는 일은 많지 않다. 그건 즉.

“야슈톨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모르는 게 어려울 정도니 재촉하지 않아도 돼요.”

“신기하네. 네 눈.”

“그런가요? 저는 당신의 존재가 더 신기한데요.”

야슈톨라는 뿌연 시야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어디가 얼굴인지 분간이 쉽지 않다. 야슈톨라에게 상대는 그저 커다란 덩어리로 보였다. 크고, 둔하고,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 자체의 에테르 덩어리.

그라하 티아는 저 덩어리가 모노를 닮았다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고대인일 적의 모노일 것 같다고. 인정해야 한다. 야슈톨라는 그 말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고대인들은 지금의 그들 같은, 하나의 일생을 꾸렸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저 ‘덩어리’ 같은 에테르의 집합체였을까? 만일 정말로 그러하다면 그들의 특기가 창조 마법인 것도 이상하지 않다. 종말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 또한.

덩어리가 무척 커서 행동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야슈톨라는 제 뺨에 닿는 에테르 덩어리가 손임을 깨닫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에테르를 보는 눈이라니.” 덩어리가 중얼거렸다. 신기한 울림이었다. “이건 우리 중에서도 희귀한 능력인데 말이야.”

“사고와 불운과 행운이 연이어 겹쳤더니 이렇게 되었어요. 당신들 쪽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나 보죠?”

“아니. 우리에겐 사고가 없어. 불운도, 행운도 마찬가지지.” 덩어리의 손가락이 눈가를 훑듯이 지나쳤다. “그래서 흥미로운 거야. 태생적으로 에테르에 민감한 몇몇이 에테르를 보는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후천적으로 얻었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어.”

흥미. 야슈톨라는 덩어리가 선택한 단어를 속으로 차근히 곱씹었다. 모노는 흥미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제 호기심을 이끄는 것을 구태여 언급하는 편이 아니다. 다만 지그시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 행동에 옮길 뿐이지. 덩어리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일까. 야슈톨라는 덩어리와 모노가 닮았다는 그라하의 말이 조금 미더웠다. 이다지도 다른 것을.

“그렇군요.” 그렇기에 야슈톨라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당신과 대화하는 건 분명 몹시 즐거운 일일 거라고 감이 말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급한 일이 있어서요. 더 미뤘다가는 아주 곤란해질지도 모르는 일이 말이에요.”

“무슨 일?”

“당신과 관련되어 있어요.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묻고 싶은데.”

“무엇을?”

야슈톨라는 잠시 고개를 돌린다. 연발 권총은 이제 다시 완벽하게 조립이 끝났다. 빼곡하게 얽히고설킨 내부 구조가 그걸 반증한다. 카엘의 에테르는 조금쯤 가라앉았다. 대신 더욱 낯선 형체로 흔들리고 있었다. 저런 흐름은 본 적 없다.

눈을 가늘게 뜨며 야슈톨라가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죠?”

덩어리는 잠시 말이 없다. 덩어리가 말하지 않자 좌중은 침묵에 물든다. 야슈톨라는 그들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하는 사람. 불안해하는 사람. 안절부절못하는 사람. 초조해하는 사람. 그리고 그 무엇도 아닌 사람…….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난다. 덩어리는 그제야 느리게 말했다.

“역시 뭔가 이상해.”

“무엇이요?”

“기억나지 않아.” 덩어리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니. 기억나지 않는 게 아냐. 기억하고 있어. 전부 기억나. 하지만 이상해. 나는…….”

재촉하는 대신 야슈톨라는 기다린다. 덩어리를 구성하는 에테르가 불온하게 뒤흔들리고 있다. 구조상 흉통, 갈비뼈 안에 움튼 가장 밝은 부근이 위태롭게 맥동한다. 심장이 뛰고 있어. 씨앗 하나를 겹겹이 감싼 형태의 에테르가 엇나간 박자를 연주한다. 좋지 않은 신호다.

“나는,”

중얼거리던 덩어리가 점점 쪼그라든다. 실제로 크기가 작아진 건가. 아니. 어쩌면 바람이 빠져나가는 풍선처럼 그냥 작아지는 걸지도 모른다. 이전의 밀도는 부풀렸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실제로 고대인이 어떤 중량을 가지는지 야슈톨라는 본 적이 없다. 주위가 수런거린다. 큰 소란은 아니다.

“나는 미하엘을 찾고 있었어.”

덩어리가 말한다. 그리곤 서서히 움직였다. 높구나. 목을 부서져라 꺾어 올려다보며 야슈톨라는 그런 생각만 했다. 미하엘이 누구인지, 어째서 그를 찾고 있었는지, 찾고 있노라 말하는 그 기억이 당신이 가졌던 마지막 소원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아브리엘.” 잠잠한 목소리로 덩어리가 속삭였다. “내 이름은 아브리엘이야.”

 

 *

 

바람이 찼다. 커르다스의 맹렬한 한기가 살을 가르듯이 맹렬히 불어닥치면 사람들은 모두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카엘도 마찬가지였다. 빛의 전사이자 에오르제아를 구한 영웅이라는 칭호를 달았으나 그는 여전히 추위를 탔다. 얼음장 같은 손을 몇 번 쥐었다 편 카엘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내리는 눈 속으로 흩어 사라졌다.

눈송이가 곳곳에 닿을 때마다 화끈거렸다. 온몸이 얼어가고 있는데도 그랬다.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돌 위에 쌓인 눈을 슥 훑었다. 그제야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 제대로 보였다. 폭설에 쓰러진 방패를 바로잡으며 카엘은 흐리게 웃었다.

“여기에 자주 와?”

기척 없는 질문이 날아와 정적을 깨트렸다. 카엘은 대답하는 대신 비석 앞에 쭈그려 앉았다. 눈을 연신 털자 상대는 다시 말했다.

“그렇구나.”

“뭐가?”

“자주 온다는 것 말이야. 채 흩어지지 않은 덩어리들이 보여.” 거대한 몸을 이끌며 아브리엘이 다가왔다. 그리곤 몸을 숙여 비석 끝을 살짝 건드렸다. “특이하구나. 누군가의 잔재를 땅에 묻는다는 발상이. 지맥으로 흩어져 별바다에 닿기를 기원하는 건가?”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브리엘 또한 크게 신경 쓰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브리엘과의 불편한 동행을 시작한 지도 벌써 닷새째였다. 이틀쯤 방안에 처박혀 있던 아브리엘이 답답함을 호소한 것이다. 이대로 뒀다가는 답답함에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말 거라는, 신빙성 없는 중얼거림을 지나가던 현인이 주워들은 게 화근이었다. 그 현인은 영웅의 수색을 위해서라도 아브리엘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엘은 반대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제 논리를 열렬히 설파하던 현인의 뒤에서 아브리엘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아브리엘은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원하던 반쪽짜리 자유를 얻었다. 처음 강당 밖으로 나선 아브리엘이 택한 건 바로 카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텔레포트를 타도, 은신술을 써도, 어떻게든 자취를 쫓았다. 뒤를 밟는 실력이 발군이었다. 고대인이 아니라 닌자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니 말은 다 했다. 몇 번의 껄끄러움과 불쾌함과 약간의 불안함 속에서 카엘은 스스로 합의를 보았다. 아브리엘에게 목적지를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떨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르슈팡의 묘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지겹도록 눈이 내리는 땅에 발자국 두 개가 찍혔다. 짧은 닷새 동안 카엘은 아브리엘이 야슈톨라에게 말했던 에테르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모노 또한 에테르에 상당한 민감한 체질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어쩌면 모노의 체질은 아브리엘의 한 파편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엘은 입을 다물었다. 설령 아브리엘이 모노의 원형이라고 한들. 모노를 이루는 요소의 근원을 아브리엘에게서 찾고 싶지 않았다.

“네 얘기를 좀 해줘. 난 이제껏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아브리엘이 느릿느릿 다가와 앉았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카엘이 반응하지 않자 아브리엘은 조금 후 덧붙였다.

“너도 모험을 좋아해?”

카엘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브리엘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간혹 탄성을 뱉고, 또 어떨 때는 나직이 웃으며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 카엘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다지 춥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틀어 올려다보았다. 아브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이곳에서 그는 종종 가면을 벗었다. 지금도 그랬다. 모노를 닮은 눈동자가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아브리엘이 그렇게 물었을 때 카엘은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모노랑 닮았다고.” 짧게 뜸을 들이고선 덧붙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상하네. 닮는다는 건.” 아브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물이 대를 이어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다양성이 중요하지. 하지만 너희는 겉으로 독자성을 표벙하면서도 결국엔 어떠한 통일성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아. 그리고 그 공통점을 두고 닮았다고 말하지.”

게다가. 아브리엘은 눈을 한번 굴리고 말했다.

“그 애는 내 파편이나 다름없잖아. 하지만 네 표현은 상관관계가 반대로 뒤집혀 있는 느낌이야. 내가 그 애를 닮은 걸까, 그 애가 나를 닮은 걸까?”

그리고 카엘이 대답하기도 전. 의뭉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무척 흥미로워. 너는 내가 그 애를 닮기를 바라는 걸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카엘은 생각했다. 차라리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말할 것을 그랬나.

아브리엘은 모노와 달랐다. 직전 닮았다고 말한 것치고는 빠른 태세 전환이었으나 카엘은 개의치 않는다. 맹렬히 부는 바람이 살갗을 베어내듯 파고들었다. 광폭한 소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카엘은 모노를 생각했다. 모노. 저보다 살짝 작은 흑마도사. 전투 때는 시종일관 눈을 가리고, 경계심이 많은 숙련된 모험가. 이제는 사람을 잘 믿지 않고 순순히 웃지도 않게 된. 그러나 여전히 희망을 품기를 멈추지 않는 그의 하나뿐인 반려.

어떤 맹목적인 믿음은 상대를 하여금 사람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카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뒤나미스의 세계에서 더더욱 체감했다. 마음이 곧 힘이 되는 세계는 사람이 때때로 경험하는 강렬한 감정을 물성으로 빚어낸다. 그렇기에 카엘은 경계하기로 한다. 아브리엘이 괜찮으니 모노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억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를 바라는 건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카엘은 아브리엘에겐 관심이 없었다. 만일 모노와 함께 엘피스에서 만났더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겠지만. 모노가 없어진 지금, 그를 대신하듯이 나타난 고대의 흔적에는 영 흥미가 가지 않는다. 카엘은 되레 아브리엘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모노가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아브리엘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여러 번 질문했으나 이렇다 할 대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카엘은 어쩐지 아브리엘이 진실을 함구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매 순간 모노를 지칭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냐고 반문하진 않는다. 호칭이란 때로 사람이 숨기고자 하는 불분명한 감정 덩어리를 의식하지 못한 채 뱉어내는 창구가 된다.

춥지는 않았으나 폭풍이 심했다. 돌아가야 할 때였다. 카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생각을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당장 모노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산크레드와 그라하 티아가 저들의 가설을 늘어놓았을 때 카엘은 놀랍게도 그들에게 동의했다. 모노는 이전부터 별바다에 관심이 있었으리라. 밤잠을 설치던 이유도 아마 일맥상통할 것이다. 만일 저 아브리엘이 모노가 고민한 산물이라면. 카엘에겐 수가 남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맥없이 결정 난다. 기다리는 것.

남겨지는 건 싫다. 끔찍할 정도로 혐오한다. 특히나 모노가 떠나는 일은 죽기보다 싫다. 비유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잠자코 있는 까닭은. 모노가 잠을 설치고, 밤을 새우고, 고민하고, 연구하고, 그리하여 사라지기까지 하며 뱉어낸 결과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브리엘이기 때문이다.

카엘은 걷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심했다. 몸이 자꾸만 휘청휘청 꺾였다. 따라 걷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카엘은 아브리엘이 제 뒤를 밟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탈것을 부르지 않았다. 애당초 이런 날씨에선 탈것을 제대로 운전하기도 힘들다.

한 발짝 뗄 때마다 피로가 몰려왔다. 칼날 같은 눈송이를 품은 역풍이 정면으로 맞서면 카엘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절벽을 조금만 내려가면 바람은 금세 온건해질 것임을 알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탈것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만 잦아들면 되었다. 날지 않더라도 초코보의 등에 얹혀 내려가는 것과 걸어 내려가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힘겹게 발을 떼고 있는데 문득 아브리엘이 발을 맞췄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아브리엘은 어느샌가 다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카엘은 그를 힐끔 곁눈질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었다간 추위에 성대가 갈라질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브리엘은 작은 허락을 눈치챘다. 그는 잠시 후 물었다.

 

*

 

부드러운 속삭임에 카엘은 눈을 뜬다. 얕은 스침으로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쓰다듬고 있었다.

게슴츠레 뜬 눈 너머 시야가 점차 또렷해졌다. 라벤더 안식처 특유의 꽃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기 시작하자 카엘은 깨달았다. 집이다. 자신과 모노의. 어젯밤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더랬다. 하지만 빈 곁자리가 신경 쓰여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지. 하는 수 없이 뒤척이다가 꼭두새벽에 몸을 일으켰다. 엘과 톤의 밥을 챙겨주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창밖을 구경했었다. 그러다가 깜빡 잠에 든 모양이었다.

낯설고도 친근한 접촉에 카엘은 조금 서러워졌다. 정수리에서부터 천천히,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넣어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이 꼭 모노를 닮아서. 하지만 지금 제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은 모노가 아니다.

한번 자각하자 잠은 빠르게 깼다. 몸을 비틀어 허리를 곧추세우자 상대의 손길이 주춤했다. 카엘은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았다. 상대가 빙그레 웃었다. 가면을 도로 얹은 탓에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엘과 톤은 배를 딱 붙이고 누워 있었다. 경계심이 많은 아이들인데도 아브리엘은 잘 따랐다.

“내가 깨웠어?” 아브리엘이 몽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다 깬 건 제가 아니라 아브리엘 같았다. “미안해. 다시 잘래?”

“아냐.”

카엘은 대답하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배가 고팠다. 그림자를 보아 정오가 막 지난 모양이었다. 오래도 잤군. 이렇다 할 일정은 없는 게 다행이었다. 부엌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뭐 묻고 싶은 거라도 있어?”

카엘이 그렇게 물은 건 식사를 다 마친 후였다. 배는 고프지만 입맛이 돌지 않은 탓에 식사 시간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브리엘은 여전히 의뭉 모를 낯이었다. 가면만 벗으면 어떻게든 파악할 수 있을 듯한데 벗기는커녕 손 하나 움찔거리지 않았다. 대답도 곧장 돌아오지 않자 카엘은 물을 떠 왔다. 다시 식탁에 앉았다. 머그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아브리엘을 봤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아브리엘이 돌연 물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모노도 종종 하는 짓이었다. 카엘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꾸했다.

“계속 봤잖아.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보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말꼬리를 잡는다는 듯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카엘은 참을성 있게 말을 마쳤다. “모노도 종종 그랬거든. 궁금하거나 할 말이 있을 때.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어.”

그러자 아브리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카엘은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턱을 괬다. 저 머리통 속에서 무슨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을지. 카엘이 아는 건 모노였다. 따지고 본다면 아브리엘은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비슷한 구석이 조금 있는. 가장 편리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혈육쯤 될까. 모노가 외동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 또한 온전한 의미는 아니겠지만.

아브리엘이 다시 물은 건 또 한참이 지난 후였다. 카엘은 그때 거실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바닥을 쓸고 닦는데 무엇인가가 등을 쿡 찔렀다. 아브리엘의 손이었다.

“눈은 또 어쩌다 그랬어?”

“눈?”

아브리엘은 카엘의 오른눈을 가리켰다. 희게 변색 된 쪽이었다. 아, 하고 중얼거린 카엘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사정이 있었어. 세계 구하려다가 그만.”

“세계를 왜 구해?”

“구해달라길래.” 대꾸한 카엘은 조금 후에 덧붙였다. “그리고 모노가 원했으니까.”

잠시 후 아브리엘이 말했다.

“내 눈을 줄까?”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당혹감보단 황당함이 더 컸다.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돌아보는데 아브리엘이 움직였다. 태산 같은 몸이 기울더니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그리고 카엘의 오른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잘 안 보이잖아. 지금이야 시야가 흐린 정도지, 나중엔 아예 시력을 잃을 테야.” 커다란 손이 얼굴을 덮었다. 눈꺼풀을 집요하게 문지르는 손가락이 있었다. 낯선 위압감에 카엘이 눈을 찌푸렸다. 아브리엘은 태연히 말을 마쳤다. “불편할 거야.”

“남의 눈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 네 눈이라면 더더욱.”

“걱정이 되어서 그러니?”

그게 아니라, 하고 대답하려는 찰나. 아브리엘이 한발 빨랐다. 가면이 성큼 가까워졌다. 커다란 눈구멍으로 활짝 열린 동공이 보였다. 문득 카엘은 깨달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브리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난 괜찮아. 한쪽으로도 충분해. 오히려 세상이 양쪽으로 보이는 건 너무 어지러웠어.” 아브리엘이 중얼거렸다. 카엘은 주먹을 세게 쥐며 얼굴을 덮은 손을 잡았다. 손아귀가 억셌으나 못 떨칠 정도는 아니었다.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 흰색이 싫다면 검정도 괜찮아.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적당히 해!”

카엘이 거칠게 손아귀를 뿌리쳤다. 아브리엘의 몸에 기대어 있던 엘과 톤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들은 제 주인의 심기를 살피는 듯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 곧 자세를 바짝 낮췄다. 카엘은 눈짓으로 엘과 톤을 거실에서 내보내곤 다시 아브리엘을 바라봤다. 한숨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껄끄러운 말이 목구멍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아브리엘은 다시 앉은 채 산처럼 굳어 있었다.

“필요 없어. 남의 눈 같은 건.” 카엘이 말했다. 제가 듣기에도 다소 무뚝뚝한 말투였다. “달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야. 그러니까 너도 여기선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마.”

몸을 돌렸다. 이놈의 고대인들은 전부 어디 한구석이 전부 맛이 가 있는 게 분명했다. 몇 마디 나눌 뿐인데도 자꾸만 기력이 쭉쭉 빠졌다. 좀 쉬어야겠어. 빨래통에 걸레를 던져 넣은 카엘이 비척비척 걸음을 옮길 때였다. 아브리엘이 낮게 중얼거린 말이 카엘의 발을 잡아챘다.

“그런 게 아니야.”

강렬한 기시감이 카엘을 덮쳤다. 카엘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아브리엘이다. 고개를 숙인 아브리엘이 있었다. 가면에 가린 얼굴은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눈구멍 속에서 흐리멍덩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있다.

“네가 불편할까 걱정이 돼. 너는 이곳저곳 자주 돌아다니잖아.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 눈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짧은 간극. 이내 다정한 미소.

“네 눈으로 어디서든, 무엇이든, 찾아야 하잖아. 미하엘.”

이윽고 정체된 자는 침묵한다.

 

*

 

“간단해요. 현재를 인식하게 하며 그를 구성하던 에테르가 무너지고 있는 거죠.”

야슈톨라가 명징한 대답을 내놓았다. 당연한 일이라는 말이 뒤따랐다. 아브리엘에게 붙어 있는 에테르는 별바다에서 발생한 자연적인 에테르이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흩어지는 것이 실리라고. 알리제는 회의실 구석에서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은 주먹을 꽉 쥔 채였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벽은 아마 공통적인 한 가지를 상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다.

“그럼.”

단 한 사람을 제한다면.

“에테르가 전부 무너지면? 아브리엘은 어떻게 되는데?”

야슈톨라는 짧게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사라지겠죠. 얕은 잔재를 남기고서요. 모두가 그러하듯이 말이에요.”

질문할 권리를 가진 유일한 대상이, 그러니까, 영웅이 입을 다문다. 다음 질문까진 얇은 간극이 있다. 알리제는 그 틈에 무엇이 낄 수 있는지 안다.

“아브리엘이 사라지면, 모노는?”

천하의 야슈톨라마저 대답을 곧장 뱉지 못한다.

알리제는 짧은 여유를 타 영웅, 카엘을 바라본다. 표정이 거의 없었다. 무표정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빈 껍데기만 남은, 영혼이랄 것을 찾기가 힘든 낯이다. 생리적인 거부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일었다. 알리제는 모든 영웅을 진심으로 신뢰했다. 피와 목숨을 나누어 쌓은 믿음은 종종 사랑의 또 다른 형태로써 빚어진다. 알리제는 영웅들을 사랑했다. 새벽 모두가 그러하듯이.

알리제는 다시 바라본 야슈톨라의 얼굴에 엷은 근심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알리제는 또한 야슈톨라가 얼마나 망설이고 있을지 안다. 그렇기에 입을 단단히 사리물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어요.” 야슈톨라가 짧게 말했다. 이윽고 말은 신중히 이어졌다. “모노가 어떻게 아브리엘을 불러들였는지가 관건이겠죠. 단순한 의태라면, 겉을 감싸던 에테르가 붕괴하는 순간 핵인 모노가 돌아올 거예요. 하지만…….”

“다른 형태의 소환이라면, 장담할 수 없다는 거군요.”

위리앙제가 말을 끝맺는다. 특유의 어투에는 숨길 수 없는 탄식이 묻어났다. 야슈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좌중은 다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새벽은 무언가를 소환하는 다양한 방법을 안다. 그리고 개중엔 시전자의 혼조차 사르는 방향이 있다는 사실도. 새벽이 아는 것은 대부분 모노 또한 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안심할 수 없었다.

“방법은?” 영웅이 물었다. 짤막한 질문에 응축된 감정을 일일이 헤아릴 틈도 없이 다음 말이 이어졌다. “에테르를 보강이라도 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야슈톨라가 머뭇거렸다. 그때 알리제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차라리 직접 물어. 우리로선 그가 어떻게 아브리엘을 불러들였는지 알 길이 없잖아.”

“알리제.”

“여기에 모여 앉아 있으면 문제가 해결이라도 돼? 대책은 필요해, 하지만 난제를 맞닥뜨렸을 때 마냥 앉아 있는 건 현명한 해결책이 아니야!”

만류하는 몇과 동조하는 몇. 그리고 말이 없는 영웅. 알리제는 그 모두를 차근히 훑어본다. 앉아서 고민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다. 알리제의 방식 또한 아니다. 직접 맞부딪혀야만 알 수 있는 진실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제는 지난 모험들로 뼈저리게 배웠다. 무엇보다 그는 주저하기 싫었다. 모험가가, 하나 남은 영웅이, 그러니까, 카엘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까지 평정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카엘이 애태우지 못한다면 자신이라도 분출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직성이 풀렸다.

“나는 가겠어! 직접 물을 거야. 말리지 마!”

“알리제!”

문을 박차고 나선 알리제는 크게 심호흡한다. 고대인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영웅들의 거처에 있을 것이다.

라벤더 거처까지 다다르는 짧은 시간 동안 알리제는 고민한다. 통보하고 뛰쳐나오긴 했으나 알리제 또한 그들의 조심스러움을 이해했다. 상대는 고대인이다. 자신들과는 외관부터 사고방식까지 많은 것이 달랐다. 섣불리 대했다가 어떤 결과가 도래할지 예측하기도 쉽지 않다. 기회는 한 번뿐인 것과 다름없으며 알리제는 그걸 강탈하다시피 했다. 망쳐서는 안 돼. 스스로 뇌까리며 알리제는 주먹을 강하게 쥔다.

회의실을 나서기 직전. 알리제는 분명 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알리제는 카엘이 실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고리를 잡고 돌리자 달칵, 하는 소리가 알리제를 반긴다.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장소다. 알리제는 버릇처럼 주위를 살피며 들어선다. 모퉁이에서 살짝 꺾어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참 바로 뒤에 큼지막한 거실이 있다. 고대인은 보이지 않았다.

알리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하로 내려갔다. 탁 트인 지하실엔 두 사람 자리분의 빈백과 엘과 톤의 장난감 따위가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다. 구석진 자리에는 눈에 익은 겉옷이 벽에 걸려 흔들거렸다. 알리제는 조금 다가갔다. 모노가 자주 입던 알라미고 가운이었다.

고대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조금 성말라진 걸음은 이윽고 이층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없다면 고대인은 제멋대로 돌아다닌 셈이 된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조건만 지킨다면, 사실, 크게 상관은 없지만. 옅은 조급함이 뱃속에서 느글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외치고 뛰쳐나왔는데. 말 한번 섞어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

이층에 발을 딛자마자 알리제는 낯선 향기를 맡는다. 꽃과 연기와 탄내가 뒤섞인 아리송한 내음이다. 살짝 벌어진 침실의 문간에서 바람과 함께 풍기고 있었다.

침실 문을 앞에 둔 채. 알리제는 그 순간 직감한다. 고대인은 여기에 있다.

문을 연다. 그렇게 마주한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이 침실을 천천히 감돌았다. 카엘과 모노의 취향대로 꾸민 침실이었다. 과하지 않은, 모든 것이 적당한 공간. 큼직한 창문에 기대어 둔 커다란 침대. 그 멀지 않은 곳에서 고대인은 앉아 있었다. 오른쪽엔 엘을, 왼쪽엔 톤을 둔 채. 잠든 엘과 톤을 쓰다듬으며 반쪽짜리 풍경을 가만히 내다본다. 창문에서 바람이 강하게 들이칠 때마다, 그 바람이 고대인을 관통하듯 휘감고 알리제에게 불어올 때마다, 알리제는 깨닫는다. 꽃과 연기와 약간의 향신료 향은 고대인에게서 방 전체에 퍼지고 있음을.

“방금 잠든 아이들이야.” 고대인이 먼저 말한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는 퍽 다정하며 그건 알리제로 하여금 모노를 떠올리게 한다. “목소리는 낮추자. 깨우고 싶지 않아.”

“엘과 톤이를 말하는 거야?”

“어느 정도는.”

알리제는 의뭉스러운 대답에 눈을 찡그린다. 그러나 구태여 집요하게 파고드는 대신. 걸음을 옮긴다. 침대에 앉을까 하다 관둔다. 카엘과 모노는 모두 타인의 접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들이 가장 무방비해지는 장소의 가장 개인적인 가구에 섣불리 앉고 싶지 않다. 대신 밖에서 의자 하나를 끌고 왔다. 고대인이 잘 보이는 맞은편에 두고 앉았다.

고대인은 알리제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엘과 톤을 쓰다듬는 손짓은 거의 알라그의 마도 기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출력값이 있기에 그대로 행동할 뿐인. 알리제는 차고 딱딱하게 굳어가는 듯한 고대인을 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카엘은 오지 않았어. 내가 멋대로 들어온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야.”

“알고 있어. 들어올 때부터 기척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확신하네, 너.”

“미하엘의 에테르는 아주 특별해. 못 알아보기가 힘들지.”

알리제는 짧게 고민하다 말했다. “카엘은 미하엘이 아니야.”

고대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가면에 가린 얼굴은 그가 낯선 현실에서 유리되고 있음을 강조할 뿐 알리제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분다. 짙은 탄내가 알리제를 스치고 달아난다.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 알리제는 말한다.

“대답해 줘. 모노를 어떻게 한 거야?”

반응은 돌아오지 않는다. 알리제는 재차 묻는다.

“당신의 에테르가 점차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어. 모노는 아직 찾지 못했고. 당신의 등장과 모노의 실종이 밀접하게 엮여 있는 상태에서 당신이 사라진다면, 그런데 모노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지막 실마리를 잃어버리는 거나 다름없어.”

고대인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알리제는 그가 제 말을 듣고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우나 말을 계속한다.

“우리에겐 아직 모노가 필요해.”

문장을 끝맺음과 동시에 느낀 건 희미한 좌절이다. 고대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음에서 비롯한.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난다. 알리제는 입술을 짓씹는다. 관련한 분야에 알피노만큼의 지식을 가지지는 못했으나 지금, 알리제는 확언한다. 그들이 맞았다. 고대인은 무너지고 있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붕괴하고 있다. 겉에서부터 차츰 흩어지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보낼 수는 없다. 알리제는 간절했다. 세상이, 새벽이, 그리고, 카엘이, 아직은 모노를 필요한다. 모노 또한 그러할 것이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따끔거린다.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알리제는 다시금, 제 마음을 호소하고자 고개를 든다. 입을 연다. 목구멍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뱉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직후에 깨닫는다. 개의치 않는다. 무슨 말이라도, 의미 없는 흰소리라도 지껄여야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다. 당신이 모노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를 아느냐고 고함이라도 쳐야 할 것 같다. 그러한 방법 외엔 불온히 흔들리는 감정의 너울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다.

바로 그때 고대인이 움직였다.

숙였던 고개를 든다. 현재에 박제된 듯 미동 없던 몸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꿈틀거린다. 그렇게 알리제를 본다. 가면이 눈을 가렸으나 알리제는 확신한다. 고대인은 자신을 보고 있다.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어.” 고대인이 말한다.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매끄럽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질감이 든다. 알리제는 몸을 단단히 굳힌 채 귀를 기울였다. “이다지도 변했는데. 결국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맨다는 사실이.”

차갑게 멎는 중얼거림과 함께. 알리제는 그제야 깨닫는다. 고대인을 처음 봤을 적 느꼈던 압도감이 어디에도 없었다. 존재감은 희미하며 그렇기에 바람 한 점에도 사그라들고 있노라 생각했다. 방황과 갈피를 말하는 목소리에서 알리제는 오래 묵은 단념을 읽었다.

“너희는 잔재를 좇는 삶에 만족해?”

고대인, 아브리엘이 묻는다. 알리제는 대답하지 않는다. 고대인이 제 질문에 그러했듯이 침묵을 택한다. 목구멍에 걸린 말은 쓰라린 끝맛과 함께 가라앉는다.

제가 무슨 말을 뱉든 고대인은 같은 결론을 낼 것이다. 확신 내린 자가 건네는 물음은 껍데기나 다름없다. 표피뿐인 질문에 알리제가 대답할 필요는 없다.

한참 후 아브리엘이 말했다.

“카엘을 불러줘.”

짧은 날숨. 이어지는 마침표.

“그에게 할 말이 있어.”

 

*

 

바람이 차다. 그러나 외롭지는 않다.

아브리엘은 구릉에 앉아 차근히 호흡했다. 숨을 들이켜고, 내쉬고, 다시 들이켠다. 일련의 행위는 가쁘게 뛰는 심장과 아득한 정신을 다잡는 데에 도움을 줬다.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다. 아브리엘은 지금껏 많은 고난을 앞에 두고 신중하게 심호흡했다. 대개의 역경은 뛰어넘었으나 단 한 가지만을 이겨내지 못했다.

미하엘이 알려준 방법이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일지라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아브리엘은 침착해질 수 있었다.

너른 비탈 아래서 빛들이 점멸했다. 아주 작았다. 아브리엘은 여태껏 제가 유달리 크다고 생각한 적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 작고 희미한 빛들을 어림하며 차츰 인정했다. 아브리엘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엔 너무 크다. 저들이 부르는 현실과 철저히 유리되어 있으며 그 사실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든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저 빛들이 꺼지지 않듯 이 깨달음 또한 불변한다.

최초의 수긍과 함께 아브리엘은 느낀다. 미약한 슬픔과 그를 덮는 해방감과 마침내 도래한 안온함이 차차 그를 감쌌다.

“눈에 띄지 않을 거야. 밤이니까. 사람들은 날 그저 유달리 까만 하늘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브리엘이 중얼거렸다. 제 뒤에서 머뭇거리던 인기척은 그제야 움직인다. 곁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작은 인영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브리엘은 느리게 가면을 벗었다. 오래된 아집을 내려놓을 시간이 왔다.

“애당초 오래 머물고자 한 게 아니었어. 시작은 무의식적인 충동이었어. 자각하고 난 후에도 서둘러 떠나려고 했어.”

아브리엘이 단조롭게 말했다. 곁에 앉은 작은 인영은 잠깐의 침묵 후 그러냐, 하고 대꾸했다.

“그랬지.”

아브리엘은 나직이 웃는다. 정말로 그랬다.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아브리엘을 종일 쫓아다녔다. 아브리엘은 작은 인영들이 스스로 인간이라 칭하는 것이 낯설었다. 미약한 에테르가 점점이 모여 저들끼리 숙덕거리는 것이 불쾌했다. 제가 알던 사람, 장소, 하다못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아브리엘은 자신이 이러한 급류에 익숙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항상 안정과 정체를 추구했다. 발 빠르게 나아갈 바엔 익숙한 곳에 앉아 모든 걸 관망하는 게 좋았다.

기실 아브리엘의 호기심은 미지의 개척보단 익히 알던 것의 색다른 면모를 캐내는 것에 가까웠다. 엘피스에서도 종일 그러한 역할을 맡았다. 눈을 떴을 때 아브리엘이 느낀 건 아득한 불온함이었다.

그런데도 떠나지 못한 까닭은 간단하다. 사랑해 마지않는 별의 파편이 그를 깨웠기 때문에. 찾고자 했던 별이, 다만 궤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던 항성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막한 밤하늘을 목전에 둔 채 아브리엘은 나직이 웃는다. 별은 쪼개진들 빛을 잃는 법이 없다. 갈라지고 부서졌으나 마찬가지로 깨진 이들은 여전히 그를 별이라 불렀다.

별의 폭발은 지금까지도 또 다른 탄생이 된다. 그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너는 역시 이정표가 어울렸다.

그렇기에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나는 미하엘을 찾고 있었어.”

첫 마디를 뗐다. 바람이 불었다. 흩어져 가는 에테르 덕인지 설움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어째서 그랬는진 몰라. 조디아크를 만드는 데에 자원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흥미에 차 있었지.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미하엘이 보고 싶었어. 그래서 그 몸을 비집고 나왔지. 그렇게 너를 찾아 떠났어.”

좌절과 절망 또한 아득히 멀다. 체념과 부정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단념은 저 자신을 향한 용서와 많이 닮아있다고 아브리엘은 그 순간 생각한다.

“한도 끝도 없이 외로웠어. 자취를 찾지 못하고 한참을 떠돌았어. 네 궤적을 따라 걷는 게 이다지도 괴로운 일인지 처음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조디아크의 일부가 되는 게 훨씬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강렬한 후회는 처음이었지.”

“…….”

“지금에 와서는 조금 궁금해졌어. 내가 널 찾는 줄 알았다면 너는 내게 돌아왔을까.”

아브리엘은 낮게 웃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조금, 짧은 찰나이며 미세한 떨림이나, 아주 약간 울고 싶어졌다. 기대하지 않은 대답이 돌아온 탓이다.

“나는 미하엘이 아니고, 모노는 네가 아니야.” 카엘이다. 별의 파편이자 새로운 이정표가 말한다. 담담하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서 아브리엘은 제가 그리던 다정함을 찾았다. “상황도 다르겠지. 그러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짧은 간극. 이윽고 들리는 목소리는 기분 좋은 확신에 차 있다.

“모노는 결국 나를 찾았어.”

그리고 너는, 모노와 조금 닮았지. 말을 마치며 카엘이 작게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아브리엘은 눈보라 속의 대화를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너는 다정하구나.”

그거면 충분하다. 아브리엘은 미련처럼 눌어붙어 있던 마지막 딱지가 떨어져 나갔음을 직감한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내려다보며 아브리엘은 말한다.

“모노는 괜찮을 거야. 나는 모노의 육체 위에 씌운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따지고 보자면 환상에 가깝지. 날 구성하는 에테르가 흐려지면 결국 돌아올 테야.”

이제껏 침착하던 카엘이 곧장 반응했다. 익숙한 에테르가 다시 흔들렸다. 기분이 나쁘진 않다. 아브리엘은 안다. 모노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젠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다. 약간의 귀여움과 부러움이 진탕 뒤섞이지만 그 둘을 구태여 분리하고자 하지 않았다. 대신 아브리엘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노는 잔재에 불과한 것들을 어떻게 그리워해야 좋을지 고민했어. 때마침 내 혼의 일부가 별바다로 돌아왔지. 조금씩 녹아가며 가장 원초적인 바람만이 남은 상태였어. 내 혼은 모노를 감각했고, 그를 불렀고, 모노는 응했지.”

“이 바보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가깝다. 아브리엘은 즐겁게 웃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에테르가 빠르게 가라앉고 있다. 불만을 가진 듯 들리나 마음 깊이 안도한 것이다. 점점 침체한다. 그러다가 파동조차 일지 않게 된다. 나직한 한숨 소리에 아브리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노는 원하던 답을 찾았을까.”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맥동했다.

아득히 펼쳐진 지평선. 까마득한 그 너머. 불면의 밤과 그를 가뒀던 강박. 그를 움직이게 했던 모든 간절함이 점점이 번졌다. 그렇게 빛이 되고 별이 된다.

아브리엘은 자신이 사라질 것임을 알았다.

미하엘의 자취는 영영 찾지 못할 것임을 또한 알았다.

별바다로 돌아가면, 그래서 다시 녹기 시작하면, 모든 걸 망라한 채, 그러다 이 순간마저 망각한 채, 낯선 곳에 떨어져 버릴 것을 알았다. 언젠가 또다시 미하엘을 찾고자 의지 없는 미로를 더듬게 될지 모른다.

그 또한 새로운 궤적일 것이다. 도래하는 끝에서 지금. 이 순간을 다시 떠올리리라는 확신이 있다.

그러니 괜찮았다.

 

그날 새벽. 아브리엘은 천천히 트는 동을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그렇게 완전히 흩어져 무가 된다. 에테르가 흩어진 자리는 흔적 없이 깨끗했다.

 

*

 

따뜻하다. 포근한 볕이 제 위에 드리우는 감각이다. 카엘은 느리게 뒤척였다. 푹신한 침대와 익숙한 온기는 카엘을 깊은 잠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실금 같은 햇살에 눈꺼풀 너머가 오렌지빛으로 번졌으나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자 느껴지는 손길이 있다. 머리를 깊숙이 헤집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다정한 손이. 기분 좋다. 중얼거리며 카엘은 느리게 눈을 뜬다. 그리고 너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과 시선을 마주친다.

“잘 잤어?”

여상 같은 질문과 함께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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