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phany

Epiphany - 8

TOHELL by TO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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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포근한 이불이 맨 살갗을 따뜻하게 간지럽혔다. 작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다가 느껴지는 이질감에 느리게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인테리어였다. 깔끔한 하얀색 벽지에 모던한 디자인의 스탠딩 조명, 그리고 심플한 미니 테이블까지. 뭐지…? 의아한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제 몸을 덮은 이불이 떨어지자 속옷만 입은 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려던 입을 겨우 틀어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미간을 찌푸리는 웨이의 모습이 옆에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선배님이랑 내가 한 침대에 누워있었던건가…? 그것도 속옷만 입고…? 충격적인 광경에 바들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겨우 내렸다. 바닥에 곱게 개어져있는 제 옷을 황급히 주워 팔과 다리를 급하게 끼워넣었다. 바지의 한 쪽에 두 다리를 모두 넣을 뻔 하다가 비틀거리며 다시 다리를 집어넣고 버클을 잠구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그의 모습에 황급히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한가득 놓인 양주와 음식들…. 뭔진 몰라도 사고를 제대로 친 것만은 분명했다. 소파에 덩그러니 놓인 제 핸드폰과 지갑을 급하게 챙기고는 신속하게 집을 빠져나왔다.

“미쳤어…. 미쳤어, 김수애….”

중얼거리며 누가 볼새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제 집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고 나서야 몸에서 풍겨오는 향기가 느껴졌다. 스웨터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자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섬유유연제. 그제서야 그의 옷에서 평소 느끼던 향과 같다는 것을 눈치챘다.

뭐지…? 빨래를 한 건가…?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보아도 간밤의 일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제 제안에 그와 같이 집에 들어간 것 까지는 기억하는데…. 분명 원래는 고백을 하려고 간 건데… 고백은 했나? 차였나? 차였으면 자지도 않았겠지? 그럼 고백을 못했나…? 설마 내가 덮쳤나?

빠르게 이어지는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소파에 얼굴을 박았다. 죽어…. 그냥 죽어, 수애야…. 그 때,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화면을 확인했다. ‘웨이 선배’ 네 글자에 핸드폰을 저 멀리 내던지고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니 이내 전화가 끊기고 핸드폰 화면이 꺼졌다. 배터리가 간당간당 하더니 결국 꺼진 모양이다. 머리를 감싸며 생각에 빠진다. 영화 촬영은 끝났다. 개봉 직전 시사회나 홍보일정을 제외하고는 그와 마주칠 일도 없다. 회사로 가기로 한 건 어떡하지?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지. 지금은 무조건 그와의 만남을 피해야했다. 왜…? 왜인지는 모르겠다…. 혹시라도 고백을 했으면 어떡하지. 거절당했으면? 고백을 하지 않았더라도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잠부터 자는 되바라진 후배는 최악일텐데….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챙겨 제 침대에 몸을 던진다. 충전기를 꽂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더니 이내 기절하듯 다시 잠에 빠져든다.


“네, 오늘은 영화 ‘흐름’의 주연들을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해볼텐데요. 아시아의 스타! 류가량 역의 리웨이 씨와 아름다운 신인배우, 한새영 역의 김수애 씨입니다!”

“리웨이입니다.”

“배우 김수애입니다.”

“김수애 씨, 정말 오랜만에 뵙는 얼굴인 것 같아요. 옛날에 아이돌 활동하실 때 한번 뵈었는데. 기억하시죠?”

“그럼요. 데뷔 쇼케이스 때 사회 맡아주셨잖아요.”

“저도 수애 씨도 많이 성장해서 이렇게 다시 만나뵙네요. 그보다 영화 ‘흐름’,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영화 ‘흐름’은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살인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내용인데요. 한새영의 경우에는 남편의 죽음을, 류가량의 경우에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서로의 목표를 도와주다 가까워지는 그런 로맨스가 섞인 영화예요.”

차분한 수애의 설명에 웨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보던 사회자가 짓궃게 웃으며 웨이에게 물었다.

“리웨이 씨는 여태까지 만나본 상대 여자배우 중, 김수애 씨가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배우라고 알고 있는데요. 상대 역이 나이가 너무 어려서 힘들었던 점은 없으셨을까요?”

“음…. 나이 어린 건 별로 신경 안 쓰였어요. 그녀는 제 몫의 연기를 다 했고 나는 거기서 새영을 봤으니까.”

“대단한 극찬이네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김수애 씨의 연기에 대해 걱정이 많던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메소드 연기를 하는 것 처럼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다고요.”

“선배님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과분한 기회를 얻은 건 사실이여서…. 제가 여태까지 한 건 연기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덕분에 한새영이라는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미담이 정말 넘치는 촬영장이었겠네요. 자, 그럼 이제 우리 시청자께 드릴 수 있는 이벤트가….”

이어지는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대기실로 몸을 숨겼다.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보자 거울 속에서는 잔뜩 긴장하고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낮에 인사도 못드렸는데…. 인사는 해야할 것 같은데…. 그러자니 그 날 이후로 연락도, 만남도 일방적으로 피한 상태였다. 홍보 스케쥴 때문에 내일도 얼굴을 뵈어야하는데…. 고민하던 도중 벌컥이며 대기실 문이 열렸다. 굳은 얼굴의 웨이가 큰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단숨에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서, 선배님….”

“…? 다시 멀어져?”

“그게….”

“너 나 버려?”

“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근데 왜 연락 안 받아. 나 보이면 피해. 나 싫어…?”

굳은 얼굴이 마지막 물음에 실망한 것 처럼 축 쳐진다. 처음 보는 그의 표정에 수애가 당황하며 그의 팔을 쓸어내렸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저는, 그냥….”

“내가 싫어졌어?”

“안 싫어요. 안 싫어해요. 그냥, 그 날… 기억도 안 나고 너무 죄송해서….”

“너 우리집에서 자고 간 날?”

“그날…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수애의 물음에 웨이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정확히 고백을 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먼저 날 왜 좋아햐나고 물었을 뿐이었지.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에 그가 장난스럽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참아냈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다. 너 그날 술 먹고 술 쏟아서 내가 빨래하고 씻긴 거 말고는 아무 일 없었다."

“……!”

그의 말을 듣던 수애의 표정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간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단단히 오해를 한 것이 분명했다. 수애가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조금씩 그에게서 물러났다.

“죄…죄송해요…. 전 그것도 모르고….”

“그럼 뭐… 나랑 잔 줄 알았어?”

수애가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진 웨이가 수애의 뺨을 잡아 죽 늘렸다.

“이봐. 아가씨. 내 집에서 옷 벗고 나랑 아무것도 안 하고 나간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알아?”

그의 꽤나 적나라한 생활에 대한 말에 얼굴이 터질 것 처럼 더욱 달아올랐다. 웨이가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린 핸드폰을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붙여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전화 받아. 피할 이유 없지? 전화 안 받으면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는 웃는 낯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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