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phany - 7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식당 여기저기에서 후련한 인사가 울려퍼졌다. 초여름에 시작한 촬영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여름을 보여주는 영화였지만 시리도록 추운 겨울에 개봉하는 것이 좋겠다는 윤 감독의 판단 하에 돌아오는 겨울이 영화 ‘흐름’의 개봉일이 될 예정이었다.
“수애 소속사는 아직 거긴가? PAG?”
“감독님, 수애 씨 이번에 FA잖아요. 조만간 계약 만료 아니였나?”
“네. 근데 아직 고민 중이라서요…. 지금 소속사에는 배우 팀이 없긴 한데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라서….”
“그럼 우리 회사 오면 되겠네.”
“미디어랩 윤이요…?”
연예기획사 ‘미디어랩 윤’은 윤정우 감독이 설립한 회사였다. 여러 감독과 작가 뿐만 아니라 예능인, 가수, 배우까지 특정한 분야의 연예인을 주축으로 두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인물이 소속되있다는 점이 특이한 기획사였다.
“그래. 웨이랑도 친해졌잖아. 웨이 한국 소속사가 우리야.”
“그래도 웨이 씨는 금방 중국 돌아가지 않아요? 한국에 오래 머문 적 없었는데.”
“아닐걸. 내가보기엔 걔 한동안 여기서 살거다.”
“그걸 감독님이 어떻게 아세요?”
“그런 게 있어.”
키득거리는 감독과 조연출 사이에 낀 수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저야 너무 감사하죠…. 조만간 회사로 꼭 찾아뵐게요.”
“그래, 내가 회사에 말해둘테니까 연락만 해.”
“연락을 왜 해.”
“으악!”
머리 위로 얼굴을 들이댄 웨이 탓에 소스라치게 놀란 윤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렁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윤 감독을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수애의 옆자리를 차지한 웨이가 새 잔에 물을 따랐다.
“야, 너 왜 여기에 있어? 오늘 못온다며?”
“못 올 수도 있다고 했지, 안 온다고 안 했다.”
“아니, 분명 아까는…!”
“무슨 연락을 하는데.”
윤 감독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웨이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의 모습에 작게 웃음이 터진 수애가 손에 든 잔을 내려놓았다.
“소속사요. 감독님이 감사하게도 미디어랩 윤 어떠냐고 말씀해주셔서.”
“회사? 아…. 여기 좋다. 밥 맛있어. 많이 줘.”
"아…. 밥….“
수애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젓던 윤 감독이 이내 자리를 옮겨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한참을 영화 이야기와 흘러가는 연예계 이야기로 뜨겁던 테이블이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했다. 촉박한 편집 일정을 맞추기 위해 회사로 돌아간 제작팀부터, 눈치껏 사라져버린 젊은 배우들과 기력이 쇠했다며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까지. 어느새 얼마 남지 않은 인원은 2차를 가느냐, 마느냐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아, 됐고! 갈 사람들은 가고 안 갈 사람들은 우리집이나 가!”
“감독님 사모님 싫어하실텐데.”
머뭇거리는 사람들의 어깨를 붙잡고 먼저 걸음을 옮긴 윤 감독이 뒤에 남은 웨이에게 어설픈 눈짓을 보냈다. 우스운 얼굴이었지만 차마 무어라 말도 못한 채 터진 웃음을 겨우 참으며 손짓으로 사람들을 보냈다. 어두컴컴한 길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저, 선배님.”
“웨이.”
“…웨이.”
“응.”
“저 술 마셔서…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늦게 와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기도 했고….”
“그래서?”
“2, 2차… 안 가실래요…?”
술기운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것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눈을 질끈 감는 그녀의 모습에 속이 간질거렸다. 이 감정 뭔지 아는데.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키득이던 웨이가 짓궃은 얼굴로 물었다.
“아는 술집 있어?”
“…아, 아뇨….”
“그럼 우리 집 가. 여기서 차 타면 금방이야.”
“아, 저 술을 마셔서 차는….”
“내가 안 마셨어.”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낸 웨이가 버튼을 누르자 길 건너편에 세워둔 검은색 차량에 불빛이 번쩍였다. 운전석 문을 연 웨이가 한참 떨어져서 따라오는 수애에게 말을 덧붙였다.
“싫으면 안 와도 돼.”
“아, 안 싫어요. 갈래요.”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순식간에 조수석을 차지한 수애의 모습에 결국 웨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안전벨트를 매며 왜 그가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영문모를 표정을 하던 수애가 시동을 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어두운 밤길을 달리던 차량이 금방 주차장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차에서 내려 연습실로 향하려던 수애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먼저 발길을 옮기는 웨이를 따라 걸었다. 그래도 몇 번 와 보았다고 신을 벗고 중문을 지난 수애가 얌전히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부엌에서 한참을 달그락거리던 그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위스키 마셔?”
“…못…마시진 않아요.”
“ok.”
어느새 쟁반 가득 술과 안주를 담아온 웨이가 소파 테이블에 들고 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의 온더락 잔에 담긴 호박빛 술과 제 잔에 담긴 까만 액체를 번갈아 보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 너 거는 잭콕.”
처음 왔을 때 커피도 그렇고 어쩐지 어린아이 취급하는 듯 한 모습에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테이블에 놓인 잭다니엘의 뚜껑을 딴 뒤 제 앞에 놓인 잭콕 잔에 위스키를 조금 더 부었다.
“저도 술 마실 줄 알아요.”
“너, 그거….”
이어진 한숨 소리에 수애가 바스푼으로 잭콕을 휘휘 저어 단숨에 들이켰다. 확실히 비율보다 위스키가 더 들어간 탓인지 식도를 자극시키는 위스키의 맛에 미간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절반을 비운 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자 제 숨에서 느껴지는 알코올 향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 거 맞아…?”
“괜찮, 괜찮아요…. 저 마실 줄 알아요….”
“너 술 못한다고 안 했다.”
수애의 입 안에 조각치즈를 넣어준 웨이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의식에 입에 들어온 치즈를 우물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귀여워보였다. 움직이는 뺨이며, 꽉 다물린 입술, 어딘가 멍한 얼굴까지. 어느순간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깨닫고는 겨우 힘을 풀고 위스키를 한모금 넘겼다.
“술 부족했어? 2차 가지.”
“웨이는 안 갔을거잖아요.”
“내가 가면 갔을거야?”
“그럼 지금이라도 혼자 갈까요…?”
“못 가게 할건데.”
“왜요…?”
“나 없는데에서 술 못 마시게 하려고 일찍 왔다.”
“왜 웨이 없는 곳에서 마시면 안 되는데요…?”
“이런 건 나만 보고 싶어서?”
어딘가 이해가 가지 않는 대화에 수애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보자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는 웨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얄미운 뺨을 죽 잡아당겼다. 어쩐지 배경이 기울어지는 느낌이 드는데…. 소파만큼 푹신하지만 어딘가 단단한 촉감에 뺨을 부비고 몸을 기댄 곳을 쓰다듬었다.
“웨이…. 소파가 너무 좋아요….”
“…그거 소파 아니다.”
“으음….”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듯 한 그녀의 대답에 팔로 눈가를 가리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밀어트리고 제 품 안에서 술주정을 하는 모습이라니. 아까의 회식 자리에서 취했다면 무슨 꼴이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수. 수애야.”
“으응…?”
“내가 좋아?”
“응…. 좋아….”
“왜 좋은데.”
“다정하고… 상냥하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웨이가 나 좋아하니까… 그래서 좋아요….”
점점 웨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보같이 순진한 여자라서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는데, 언제 제 마음을 들킨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제 품에 점점 파고드는 그녀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내일 술 깨고 다시 얘기해줘.”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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