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지키기 놀이

[ 이지 → 경조 ]

이지는 새벽 4시 34분에 503호 문 앞에 섰다.

똑똑, 천경조 님. 나와 주세요, 똑똑, 이렇게 부르면 경조가 돌아와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친구랑 하던 놀이가 생각났다. ‘집 지키기 놀이’라는 이름의 게임. 방 안에 있는 친구,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는 이지. 친구의 방문을 두드린다. 서로 번갈아가며 퀴즈를 낸다. 퀴즈의 내용은 각자의 세상에 대한 문답. □□이 생일 파티 초대장 맨 위에 그려져 있던 눈사람은 누가 그렸지요? 정답, 노이지. 블루스톤 왕가에서 내려오는 보물 중 제일 센 링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정답, 블루링.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놀러오는 사람은 누구지요? 정답, 김△△. 으레 촌 동네 사람들이 그렇듯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서, 언제나 놀이는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문을 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천경조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울고불고하며 이사 간 친구의 행방을 찾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503호를 노크한들 돌아오는 대답은 ‘어머, 이지구나? 경조는 이사 갔는데.’ 따위의 말들일 것이다. 경조, 어디로 이사 갔어요? 몰라. 방학 때 놀러는 와 줄까요? 모르지. 편지 보내 준대요? 글쎄. 어디 아프대요? 몰라. 길을 잃은 건 아니고요? 이사 간 게 맞긴 해요? 아 글쎄, 아가씨, 우리도 잘 모른다니까. 천경조는 자기 자신에 대해 쉽게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도 경조에 대해 몰랐고, 이지도 경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가끔 탕비실을 오가며 말을 섞은 것이 전부였다. 천상 서울 사람의 말은 어렵기만 해서, 이지의 작은 머리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알 수 없게 되어서…….

서로의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으면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

더 늦기 전에 어디로 이사 갔는지 행방이라도 알고 싶어.

경조 님, 경조 님은 어떤 세상에서 왔어? …알고 싶었어. 경조 님이 하는 말들은 어려워서 하나도 모르겠어. 응. 어디 적어놨다가 검색이라도 해 볼 걸 그랬다. 아니, 그냥 직접 물어볼걸. 물어보면 이지 님은 그것도 모르냐면서 놀림 받을까 봐 부끄러웠어.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좋아. 대신, 언제든 나의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도록, …내가 살던 곳 이야기를 해 줄게. 있잖아, 나는 산에서 왔어. 봄이면 청설모가 열매를 모으러 내려와. 여름이면 아이들이 백산 호수 공원으로 조명등을 구경하러 가고. 가을이면 키우는 고추가 벌레 먹지 않도록 농약을 꼼꼼히 살포해야 해.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머무는 땅이야. 태어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나이가 충분히 들면 흙으로 돌아가.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어떤 것도 안달하지 않지.

서울에 올라와서야 알았어. 나는 이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땅에서 살고 있구나. 맞지 않는 조각으로서 이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잠자코 있으라고들 해.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고. 나는 그러니까… 자라라고 명령한 적도 없는데 제멋대로 똬리를 틀고 피어난 분리수거장의 잡초 같은 거야.

탕비실에서 경조 님을 보고 내 멋대로 생각해버렸어. 저 사람도 나처럼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라고. 그것 뿐이야.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돌아오면 이상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싶어.

무사히 돌아올 수만 있다면, 우리 탕비실로 돌아가서 집 지키기 놀이를 하자.

― 똑똑, 경조야, 나랑 놀자.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