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카드 놀이

이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

TW : 아동 방임, 체벌, 괴롭힘 등

“어머님, 이런 사고가 계속 일어나면 저희 센터도 선생님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지요. 부디 가정 내 지도 부탁드리고…….”

한쪽 어깨를 들어 올려 귀에 밀착시킨 수화기가 조금씩 얼굴의 유분기에 밀려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화선 너머로 전해져오는 문장을 종결하는 어휘가 한숨을 나타나는 감탄사든 뭐든, 여자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수화기에 파운데이션이 묻어나고 있다는 게 짜증이 날 뿐이었고, 가방을 다 헤집어봤는데도 인포에 접수해야 할 건강보험증이 나오지 않아 곤란했을 뿐이었다. 네네,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단단히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라고 건성건성 대답을 마치고서야 가방의 안쪽 주머니 깊은 곳에서 건강보험증이 만져졌다. 인포 직원의 채근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서 마음이 급하다.

얘 주민등록번호가 뭐였더라? 9-3-0-4-2-9-2-5-2-6-7-2-3… 아, 더럽게 안 외워지네, 에헤헤. 여자는 곤란하다는 듯이 관자놀이 부근을 검지 손가락으로 긁으며 공연히 데스크 직원을 향해 보란 듯이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또 치료 중에 언어치료사 선생님을 물어뜯었다고 한다.

뱃속에서 고작 석 달을 덜 품었을 뿐인데 짐승이 태어날 수도 있구나,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떠오른 첫 감상이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병원 로비의 소파 쪽을 바라보니 그것이 벽에 기대어 천사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치료실에서는 그렇게 악을 쓰고 기어이 피를 봤다더니, 뻔뻔하게도…….

인포 직원이 건강보험증 수첩 위로 잔돈을 얹어서 돌려주었다. 수첩 안에는 그것의 키와 몸무게 측정 기록이 적혀 있을 것이다. 1996년, 85.5cm - 13.5kg. 1997년, 87cm - 14kg. 1998년, 90.2cm - 15.5kg……. 또래에 비해 너무 작다. 통 자라질 않는다. 차주에 또 맞히러 오세요, 호르몬 주사는 시기 놓치면 효과 뚝 떨어지는 거 아시죠. 당부하듯 뒤통수에 꽂히는 간호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뒤로하며 여자는 그것을 툭툭 쳐 깨웠다. 그것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칭얼댄다.

아, 얘는 언제 다 크냐. 더뎌도 너무 더디다.

짐승을 낳은 것이 쪽팔렸다. 8개월이면 다 한다던 엄마, 아빠 소리도 돌이 한참을 지나서야 겨우 했다. 그것의 손을 잡고 동네를 돌아다닐 때마다 정자에 죽치고 앉아 있는 노친네들이 애가 말이 늦어도 너무 늦는거 아니냐고 한 마디씩 얹는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 그럴 때마다 무슨 반응을 해야 적당할지 여자는 알지 못했다.

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것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다 애 아빠가 끌고 온 승용차의 뒷좌석에 앉혔다. 차량 탈취제랍시고 천장에 달아놓은 커피콩 냄새가 차멀미를 가중하고 있기에, 여자는 레버를 돌려 창문을 열고 질끈 눈을 감았다. 한 시간, 장장 한 시간을 더 가야 읍내를 벗어나 집으로 갈 수 있다.

“이지야, 곰돌이 친구 만지니까 어때?”

언어 치료 수업에 참관한 여자는 푸흐,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조절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음계를 과장되게 올려 연극 톤으로 발성하는 아동 접대용 말투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선생의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 아, 어, 라는 짧은 탄성만 내지르며 꺼낼 말을 고르고 있었다.

“아이, 부드럽다. 아이 부드러워. 이지야, 인형 부드럽지?”

부드럽다고 말하면 돼.

…….

이지야,

말하라고.

그것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린아이는 작물보다도 손이 많이 간다. 매 순간 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차라리 숨 막힐 것처럼 습하고 더운 비닐하우스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다. 이곳은 지루하고, 성가시고, 들인 노력만큼의 결실이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고, 뭣 하나 확실한 것도 없이 시간만 버리는…….

그것이 치료실이 떠나가라 악을 지르는 바람에 여자는 간신히 졸음에서 깨어났다. 선생이 그것의 앞니 안쪽 끝을 건드려가며 발음을 교정해 주고 있었다. 일회용 라텍스 장갑의 역한 냄새가 상상으로나마 전달되어 괴롭다. 눈물범벅이 되어 퉁퉁 불어 터진 그것의 얼굴을 뒤로 한 채,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애 아빠 저녁 거리 좀 보고 올게요.”

……사람을 죽일 듯이 작열하는 8월의 햇살이 오히려 반갑게만 느껴진다.

텃밭의 고추가 빨갛게 영글어가고 있다. 무엇이 또 불만인지, 그것이 방 안에서 괴성을 지르며 사지를 버둥거리고 떼를 쓰고 있었다. 이준이가 불안한 듯이 제 누나와 엄마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다. 사내아이는 여자애들보다 발달 속도가 느리다더니, 순 거짓말이다. 그것 옆에 있어서인지 이준이는 꽤 빨리 자랐다. 그것은 이준이 옆에만 붙어있으려 했고, 이준이 귀에만 무어라 웅얼거렸다. 물론 그것도 사람의 언어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만의 언어가 있었고 이준이는 종종 그것의 말을 번역해서 엄마 아빠에게 전해주곤 했다.

“누나 화났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어어, 그래. 이준이가 누나 잘 봐줘.”

해가 저물기 전에 약을 다 쳐야 한다. 여자는 선캡과 분사 스프레이, 약병, 보안경을 에코백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도망치듯 집 밖을 나섰다. 약을 칠 땐 아이를 업을 수 없어 성가시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것이 기어코 피를 봤다.

이준이의 팔에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명료하다 못해 또렷할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그것과 이준이는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제 어미를 보고는 마치 시위하듯 앞다퉈 울고 있었는데, TV의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신기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시를 내리듯, 여자는 지금 이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다.

여자는 그것의 팔을 세게 쥐고는 성큼성큼 집 밖으로 나섰다. 그것은 끌려가지 않으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는 미친 듯이 여자의 팔을 내리치고 있었지만,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아이 둘 낳은 성인 여성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여자는 뒷마당에 있는 닭장 문을 열고 망설임 없이 그것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이 풀썩 힘없이 흙바닥에 쓰러져 굴렀다. 작은 침입자의 등장에 놀란 닭들의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으레 짐승들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서로의 서열을 재는 법이다. 성난 씨암탉이 새끼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맹렬하게 쪼아대기 시작했다. 아, 아, 아, 그것이 팔을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생존 본능은 있는지 그것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닭장 문 쪽으로 비틀대며 뛰어갔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울먹울먹한 눈으로 그것은 창살을 미친 듯이 흔들며 여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여자는 닭장 밖에서 그 꼴을 가만 지켜보기로 했다. ‘이지야,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할까?’라고, 치료사 선생의 우스꽝스러운 말투를 속으로 따라 해보았다. ‘도와줘’, ‘살려줘’, ‘엄마’, 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러나 그것은 끝끝내 문장 단위로 발화하지 못했다.

아하하, 너 진짜 웃기다.

등신, 머저리 새끼.

누가 낳았길래 저런 꼬락서니를 ―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이제는 막을 수가 없다. 명치가 당긴다. 이렇게 실컷 웃어본 게 얼마 만이던가. 그래, 실은 불쌍하다. 애처롭다. 겨우 다섯 살짜리 아기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저 짐승을 아무렇게나 다룰 수 있는 힘과 권력이 있다. 내가 조금만 이렇게 문을 닫아도 그것은 자기만의 작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자지러진다. 하지만 여자가 이 집 마당을 한 발짝이라도 나서게 되면, 작은 세상 안의 권력은 허망하게 녹아 없어진다. 마당 밖에서는 그 어떤 것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데. 마당 안의 세상에서는 오로지 나만 원하고, 갈망하고, 요구하고, 증오하고,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작은 짐승이 있다. 그리고 그 짐승은 여자가 통제할 수 있는 좁은 닭장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이 너무나도 짜릿해서…….

재미없다. 관두자, 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닭장 문을 열어주었다. 그것이 뚜벅뚜벅 걸어 나와 만신창이인 몸으로 여자의 품에 풀썩 안겼다. 그것은 숨이 넘어갈 듯이 울고 있었다. 닭장 안에서 겪은 부당한 일에 대해서 말하려는 듯 하나, 마땅한 언어가 없어 답답해하는 듯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주먹 쥐어 가슴을 탕 탕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 감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려주기로 했다.

“아가, 그럴 땐 아프다고 말하면 돼.”

아, 파.

그것은 여자의 입 모양을 유심히 관찰하다 드디어 입을 떼었다.

“아파. ……. 아파, 아파, 아파. 나 아파, 엄마. 아파.”

그것은 여자가 가르쳐준 말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자리에서 중얼거렸다.

“아파, 엄마.”

그것은 그렇게 말하고는 응어리진 것이 풀렸다는 듯이 헤, 하고 웃어버렸다.

응, 그래. 답답했겠구나.

말할 줄 몰라서 온몸으로 우는 아이. 나처럼 표현이 서툰 존재. 아무 힘도 없는 무고한 천사 같은 이 아이를 꼬옥 안아주니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뜨끈뜨끈해서 신기했다.

일곱 달을 품어 낳은 나의 아이야. 백일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한 불쌍한 짐승아. 자신을 설명할 언어조차 알지 못해서 감정을 지독하게 삼키고 또 삼키다 괴물이 되어버렸나. 민망한 듯 헤헤 웃어버리는 생존 전략마저 닮아있는, 너는 나의 끔찍한 면을 남김없이 물려받은 적법한 상속인이다.

그래, 이 아이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어야겠다. 여자는 생각했다. 노이지는 그럴 자격이 있다. 이지야, 이 세상 밖에는 너를 아프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어. 내가 반드시 너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어줘서, 내가 겪은 무섭고 끔찍한 일들을 너도 겪을 수 있도록, 그래서 나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자라날 수 있도록, 반드시 책임지고 잘 길러줄게.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왜 항상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자기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삽입의 순간은 여자에게 쾌락이 아닌 수치와 절망만을 가져다주었지만, 노이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여자의 온전한 선택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아가, 나를 이해해 줘, 나도 너를 남김없이 사랑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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