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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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正殿은 소란스러웠다. 서궁의 황제가 사라진지 나흘 째였다. 자세한 내용은 쉬쉬하고 있었지만 어수선함은 금세 황궁 밖으로 퍼져 나갔다. 뜬금없는 시간에 조의朝議가 소집된 것도 그 탓이었다. 조의를 소집한 것은 제관을 통제하는 총재가 아닌 동궁의 황제였다. 황제는 아직이었다. 비워진 옥좌를 보며 제관은 불안하 눈빛을 교환했다. 여러가지로 전례가 없던 일들이었다.

없는 사람처럼 정전의 구석에 서 있던 시종이 조용히 옥좌의 근처로 다가가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발이 옥좌 앞에 내려지는 것과 동시에 시종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댔다.

묵직한 굽소리는, 황제가 아닌 그의 기사 것이었다. 검은 정복차림의 그는 옥좌 밑에 서서 꿇어앉은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얼굴이었지만 내려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서황제는 측근이었던 기사에게 납치당한 뒤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날카로워지는 것이 당연했다. 발 뒤로 작은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길게 끌리는 옷자락을 가볍게 정리한 황제가 자리에 앉자, 시종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시오. 모두 그의 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자신의 전언을 기다리던 시종을 손짓으로 물렸다. 조의에, 황제가 제관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일은 드물었기에 모두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그간 소란스러웠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두 황제의 옥좌가 비워진 채 이뤄졌던 조의는 엉망이었다. 서황제가 잡혀간 책임을 홀로 남게 된 기사단장에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동황제의 안전을 위해 처분을 미룰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맞섰다. 결정권자인 황제가 없는 자리였기에 의미 없는 다툼만이 이어졌다. 혼란스러운 와중, 모든 것은 여제의 사주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지만 수면 아래에서 떠드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기사단장의 처분에 관해서는 일주일 간 근신을 명한다.”

형식적인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였음에도 불만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예상할 만한 일이었다. 혹여 황제를 납치해간 ‘죄인’이 다시 황궁에 침입했을 때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동東기사단의 기사단장 뿐이었다. 기사단장이 쓰게 웃으며 발 너머의 주군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작은 웃음소리가 이어지다가 그쳤다.

“기사 서임식에 관한 안건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혹시 잊은 것이 아니라면 이유를 듣고 싶군.”

위엄 있는 목소리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숨겨진 노기怒氣를 눈치채지 못한 제관은 없었다. 모두 눈치를 볼 뿐, 섣불리 입을 열려는 이는 없었다. 심약했던 서궁의 황제와 달리, 동궁의 황제는 제관들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만한 기량을 가진 이였다. 모두의 시선이 가장 어린 관리에게 향했다. 거세게 등을 떠미는 눈빛들에, 어린 관리는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송구하오나 폐하, 서임식은 온전히 황위가 유지되고 있을…”

“흐음.”

감탄사 같은 작고 짧은 소리였지만, 관리의 말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그대는, 지금의 황위가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치 않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서임식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내일 조의에선 그 안건에 대해 이야기했음 좋겠군.”

옷깃이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 뒤에 작은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이 비쳤다. 그 움직임에 제관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작은 발소리가 멀어질 때 까지, 제관은 그렇게 있었다.


치즈펠이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내리는 빗소리가 시끄러워 깬 것은 아니었다. 몸은 여전히 잠을 원하고 있었지만 싸구려 침대에 배긴 등이 아팠다.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아보았지만, 그는 한 번 깨고 나면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거친 침구 위에서 다시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는 것을 포기한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공기가 습한 탓인지 평소보다 몸이 찌뿌드드한 느낌이다. 기지개를 켠 그가 창 밖을 바라보았지만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아마 새벽이겠지.

작은 마을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여유롭게 제도 근처의 별장에 머물던 모로모로는 그간 게으름 피운 것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서쪽을 향해 달렸다. 마차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달렸다. 혹독한 일정에 온 몸에 멍이 들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치즈펠은 내색하지 않았다. 부상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채 무리하고 있는 기사가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는 모로모로의 주군이었다. 여유롭고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주군만 멀쩡하다면, 자기도 그렇다고 믿는 족속들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충고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늘 여유롭던 주종의 모습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치즈펠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빗소리에 섞여 침실 옆 계단의 나무 판자가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치즈펠이 몸을 굳혔다. 새벽 중에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새로운 손님이 여관에 방문했을 리는 없었다. 모로모로는 옆 방에 있었다. 문을 걸었던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뒤꿈치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자물쇠를 걸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아.”

빗물에 푹 젖은 후드를 뒤집어쓴 이의 모습에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여제의, 동황제의 세력은 그를 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 질문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메아리 쳤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인다. 치즈펠이 뒤로 물러났다. 아무렇게나 벗어 놓았던 신발에 걸린 모양인지 몸이 휘청거렸다.

“안 자고 뭐하고 있었어.”

넘어지기 전에 단단한 손이 뻗어와 치즈펠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익숙한 목소리에 치즈펠이 간신히 숨을 삼켰다. 모로? 쉿. 성가시다는 듯 구는 걸로 보아 대답은 듣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나갔다가 왔었어? 소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대답 대신 모로모로는 방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었다. 입고 있는 로브에서는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잠깐 비를 맞은 것이 아닌 모양인지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잠깐. 볼일 좀 보러.”

“…이 시간에, 말이지.”

“꽤 중요한 일이었어서.”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치즈펠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모로모로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진득하게 퍼지는 물비린내에 치즈펠이 미간을 찌푸렸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세워 놓고 안에 입고 있던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가볍게 푼다. 성큼성큼 소파로 다가가가 눕기까지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멍하니 바라보던 치즈펠이 모로모로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 가?”

“피곤해.”

“거기서 자게?”

“응. 잔다.”

대답하는 목소리의 끝이 나른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더 말을 걸었다가는 분명 잠투정, 이라는 귀여운 말에게 미안해질 짜증을 낼 것이다. 입술을 앙 다문 치즈펠이 누운 모로모로의 위로 자신이 가져온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 답지 않은 지나치게 가벼운 옷차림과 검의 손잡이에 묻어 있는 핏자국에 관한 것은 묻지 않기로 했다.

*

“폐하. 기사단장의 방문입니다.”

물이 담긴 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밀비가 시종장의 보고에 눈을 치켜 떴다. 지나치게 이른 시각인 탓이었다. 그의 기사는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늦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찍 오는 일 또한 없었다. 그런 이가 급하게 움직일 만한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종장이 아직 전채를 들지도 못한 황제에게 방문을 알리는 일은 없었을 터다.

조금 늦게 듣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밀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기사단장의 방문을 허락했다. 그는 호기심에 약한 사람이었다. 기사단장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사양 않고 이런 시간에 알현을 요청한 것이다. 밀비의 몸짓에 공손히 허리를 굽힌 시종장이 홀의 입구 근처에 사열해 있던 이들에게 턱짓했다.

평소에 비해 빠른 입궁이었음에도 기사단장은 흐트러짐 없이 정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흐트러진 편이 재미있는데. 밀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을 마셨다. 식사 시중을 들던 몇몇이 홀을 가로지르는 하디의 모습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시종장의 헛기침 소리에 아닌 체하는 이들을 보며 작은 웃음을 흘린 밀비가 잔을 내려놓았다.

“이른 시각부터, 면목 없습니다.”

“내 기사님이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던가?”

앉지 그래? 밀비가 주변의 자리를 권했다. 준비해드릴까요. 시종장이 물었지만 하디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아쉽다는 듯 떨어지는 어깨들에 밀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아연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지만 밀비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유일하게 말릴 수 있을 그의 나이트는 참을성 있게 주군의 웃음이 멈추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중에도 식사 시중은 계속되고 있어서 샐러드를 나르고 있는 참이었다. 접시를 받아 든 시종장이 밀비의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어젯밤 내내 비가 온 탓인지, 잎사귀들이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포크로 두어 번 찔러 접은 잎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바라보던 하디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새벽에 남서의 클라크가 죽었습니다.”

두번째로 찌르는 손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탓인지 포크 끝에 걸린 과일은 반쯤 으깨져 있었다. 밀비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것을 신호삼아, 분주하게 움직이던 이들의 움직임이 멈춘다. 밀비는 시종장이 건네는 냅킨을 받아 입가를 정리하고는 드물게도 한숨을 쉬어 보였다. 남서의 클라크는 여제에게 열렬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던 자였기에 한숨의 이유는 묻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식사를 할 때가 아니었네.”

“옷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부탁해. 그리고, 하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하디는 동요없이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혔다. 소식만 전하려고 이 시간에 입궁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한 밀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홀 옆에 마련되어 있는 티 살롱으로 향했다. 홀을 나서기 전 밀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할 일은 알고 있다고 말하는 눈을 마주하며 황제는 눈을 휘어 웃어보였다.

“당신이 얼마나 수고했는지, 기대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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