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스프레소 더블 샷
흥미진진한 눈으로 훑듯이 살피던 이들의 시선이 걷히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보는 눈이 많아서야 마음대로 숨조차 내쉬기 힘들다. 치즈펠은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몸을 감추다시피 하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시종장이 보았다면 채신머리없다면서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었을 테지만 다행히 이곳에는 그가 탄 말과 그 고삐를 쥐고 있는 그의 기사뿐
황폐는 사람들로부터 활기를 앗아간다. 제도의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사라져갔다. 당연했다. 황제의 눈길이 닿지 않는 변방은 영지의 주인마저 팽개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주들은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해 제도에 있는 일이 잦았다. 주인이 부재하는 영지는 생기를 잃었고 치안 또한 나빴다. 도로 한복판에서 도적질을 하거나, 싸움
모여든 제관은 가벼운 인사도 없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 자리에 있는 황궁의 관리 중에, 며칠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것에 연관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그들은 동황제의 서슬 퍼런 노기怒氣에 몸을 사렸다. 황제는 잡은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단지, 말을 더듬거렸다는 이유로 그간의 공적을 의심받던 관리가 근신
“오셨습니까, 단장님.” 따로 훈련이 있는 날은 아니었기에 할 일 없이 기사단 본부 근처를 서성이던 이들이 복귀한 단장을 알아채고는 일제히 경례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은 하디가 가볍게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달려온 마구간지기가 하디로부터 공손하게 말의 고삐를 받아 들었다. 흐트러진 제복 망토 자락을 정리하던 하디가 입구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이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의미가 없다 느껴진 밀비가 눈을 감았다. 대신, 손에 쥔 회중시계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제국의 일류 기술자가 새겨넣은 가문의 문장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밀비는 무감정하게 그것을 훑고 지나가 회중시계의 버튼을 눌러 뚜껑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았던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
종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디지? 치즈펠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교회의 시계탑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이 천천히 울리고 있었다. 종소리를 듣는 것도, 제대로 된 교회 건물의 모습을 보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었기에 그는 내리쬐는 햇살에도 아랑곳 않고 미간을 찡그린 채 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해?”
수련 시간이 끝났음에도 바깥은 아직 소란스러웠다. 쓰고 있던 갑옷을 종자에게 건네던 모로가 소음이 들리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움직임에 분주하던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한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관심이었으나 이제는 꽤 익숙해져 있었기에 모로는 그것을 무시한 뒤 바깥을 살폈다. 모든 일정이 끝난 시각임이 분명한데, 다시금 수련장으로 향하는
요즘 이런 일이 잦으시군요. 코트를 받아 들며 말하는 집사장에게 그는 쓴웃음으로 대답하는 것을 대신했다. 근래 황궁에서 찾아온 이들이 그의 아침을 깨우고, 밤이 되면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다. 규율을 따르지 않고 내린 갑작스러운 소명召命이었지만 그것에 불만을 가진 귀족은 없었다. 목숨이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귀족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했고 황제는 그것
01. 새 황제들이 즉위하고 첫번째로 맞는 겨울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냉기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누가 잊어버리고 간 모양인지 잘 닦인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곤란한데. 내 팔이 닿기에는 턱없이 높은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잘 정돈된 책상과 그에 맞춘 의자 하나뿐 사다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있을 리가 없지. 사용인들은 늘 청결한
정전正殿은 소란스러웠다. 서궁의 황제가 사라진지 나흘 째였다. 자세한 내용은 쉬쉬하고 있었지만 어수선함은 금세 황궁 밖으로 퍼져 나갔다. 뜬금없는 시간에 조의朝議가 소집된 것도 그 탓이었다. 조의를 소집한 것은 제관을 통제하는 총재가 아닌 동궁의 황제였다. 황제는 아직이었다. 비워진 옥좌를 보며 제관은 불안하 눈빛을 교환했다. 여러가지로 전례가 없던 일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탓에 제국의 여름은 주변의 국가들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라지만, 남쪽에 맞닿은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찌는 듯한 더위는 심해져갔다. 더워. 들이마시는 공기의 온도가 제도帝都와는 확연히 달랐다. 위로는 형이 있어 따로 물려받을 영지가 없는 귀족 가의 차남, 관직에나 진출해 가문에 도움이 될만한 인맥을 쌓으라며 쫓기듯 상경한 제도였다. 짧은
맑은 날이었다. 황제로서 첫 공무를 하게 되는 날인만큼 맑은 날인 쪽이 기분이 좋았지만 그게 다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인 탓인지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다. 밀비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얼굴로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평소와 같은 가벼운 실내용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얼굴에는 엷게 화장이 되어 있었고 주변에 시
검술 말입니까? 당신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어.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의 나이트는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기사가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떠안게된 짐이 많을텐데 개인적인 검술 교습을 또 따로 해야하다니. 귀찮을만한 일이어서, 밀비는 그의 불경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업무 때문인지 눈 밑에 옅게 그늘까지 드리워져 있는
1. “이게 뭐야?” 늘 오는 곳인 것처럼 자연스레 거리를 휘젓던 밀비가 멈춰선 곳은 각종 꼬치를 파는 노점 앞이었다. 어느 시장에나 흔히 있는 노점이었지만, 태어날 적부터 넓은 장원莊園 내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저자에 나올 일이 없었던 아가씨에게는 신기할 만도 한 광경이라고, 하디는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곤충이나 작은 동물이 꿰어 있는 것
그 자신이 황족이라고 할지라도, 황궁 내에서의 무기 소지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황제와 귀족들이 오가는 황궁에서 그 금기에 구애받지 않고 무기를 지닐 수 있는 사람들은 넷 뿐이었다. 두 명의 황제와 그 황제의 옆을 지키는 두 명의 기사만이 황족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무기의 소지가 가능했다. 물론 황제는 정무를 보는 모든 순간마다 기사가 늘 곁에 있었
크게 휘둘러낸 검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검신을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깔끔한 움직임에 의해 바닥에 흩뿌려진다. 가벼운 움직임과는 달리 상당한 양이었다. 주변에 길게 선을 그린 혈흔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쉬던 이가 검을 고쳐쥐었다. 단신으로 황성의 경비를 뚫고 올라온 이였다. 쉽게 무력화 시켰다고는 하지만 방심할 생각은 없다. 상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