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이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의미가 없다 느껴진 밀비가 눈을 감았다. 대신, 손에 쥔 회중시계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제국의 일류 기술자가 새겨넣은 가문의 문장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밀비는 무감정하게 그것을 훑고 지나가 회중시계의 버튼을 눌러 뚜껑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았던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보이지도 않는 지금에서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빛 한 점 들지않는 어둠 속에서 밀비는 초침 소리에 집중했다.
이러한 상황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냉정하게 사고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우스워져서 밀비가 웃음을 흘렸다. 작은 웃음소리가 초침과 함께 울린다. 자신을 잡아넣은 이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 또한 차기 황제가 되기 위해서 먼 친척형제를 죽이고 정치에 손을 뻗을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배제했다. 가문의 수 많은 아이들 중 옥좌에 올라 황제가 될 사람은 단 하나. 자격이 있는 황족이라면 응당 그 자리를 원했다. 이미 차기 동황제가 밀비로 내정되어 있다고는 해도 서황제는 살아있었다. 황위는 양쪽 가문에서 동시에 계승하는 것이 원칙. 그랬기에 황제 둘 모두가 죽기 전에는 황족 누구에게나 기회는 남아 있었다. 다음 대의 동황제가 자신으로 정해지지 않았더라면 여기에 차기 동황제를 가둔 것은 밀비 본인이었을 것이다. 그 사고의 흐름은 힘들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해할 수 있었기에 화가 나기는 커녕 이상한 동질감이 들었다.
게다가 밀비가 옥좌 뿐 아니라 새로이 손에 넣은 것 또한 남이 탐을 낼 만한 것이다. 뭐 그의 기사야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다른 이를 따를만한 그릇은 아니었지만 순순히 넘겨 줄 생각은 없었다. 손아귀에 모든 것을 쥐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밀비가 속으로 300번째의 초침을 헤아리는 것과 동시에 미동도 없이 닫혀 있던 문이 썩은 판자처럼 가볍게 뜯기며 열렸다. 가볍게 내던져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감고 있는 눈꺼풀 아래로도 쏟아지는 빛이 느껴져 밀비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렇게 거친 방법으로 문을 열고 들어 올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로 앞에 멈춰선 발걸음에도 굳게 눈을 감고 있던 밀비는 빛에 익숙해질 무렵에야 눈을 떴다. 그는 빛을 등지고 있었다. ‘평민’답게 예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러프한 차림새였지만 그런 것 보다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옅은 푸른색의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 표정과 달리 공손하게 한 쪽 무릎을 꿇는 자세는 평범하게 충성스러운 기사의 그것이었다.
“정식으로 기사 서임도 받지 않았습니다만 이렇게 바쁠 줄은 몰랐군요.”
바람같이 주군을 구하러 온 기사가 낸 것 치고는 상당히 불경스러운 말이었다. 웃지 않을 수 없어서 밀비가 손 안에 있던 회중시계의 뚜껑을 덮으며 웃었다. 시험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그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첫 테스트치고는 썩 괜찮았어.”
“의도했던 것 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들켰나? 애교가 있는 장난스러운 미소에도 하디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밀비의 손목을 죄고 있던 수갑을 가볍게 풀었다. 강철로 되어 어지간한 검으로도 쉽게 잘라낼 수 없는 것을, 실이라도 되는 것 처럼 쉽게 끊어낸다. 그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던 밀비가 하디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직접 빼들었다. 그의 키와 무게에 맞춰져 있어 밀비가 한 손으로 들기에는 상당히 버거웠기에 살짝 비틀거리자 하디가 꿇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서서 자신의 검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밀비는 간신히 그 검을 들고 섰다. 혹여라도 검을 놓치지는 않을까 바라보는 하디를 보며 밀비는 힘든 내색을 않고 싱긋 미소지었다.
“그게 불만이었다면, 여기서 서임을 하도록 하지.”
기가 차다는 듯 밀비를 내려다보던 하디가 다시금 밀비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기사는 상당히 키가 큰 사람이었으므로 시선의 높이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만 기사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밀비가 검을 치켜 들었다. 후들거리며 떨리는 팔과 자세가 흐트러져 움직이는 발걸음에 큭 하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지만, 밀비는 아랑곳 않고 갑자기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천천히 하디의 양쪽 어깨 위에 검을 얹었다. 검을 배워야겠군. 웃음기를 감출 생각이 없는 얼굴로 일어서는 자신의 나이트를 보며 밀비는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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