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오셨습니까, 단장님.”
따로 훈련이 있는 날은 아니었기에 할 일 없이 기사단 본부 근처를 서성이던 이들이 복귀한 단장을 알아채고는 일제히 경례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은 하디가 가볍게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달려온 마구간지기가 하디로부터 공손하게 말의 고삐를 받아 들었다. 흐트러진 제복 망토 자락을 정리하던 하디가 입구에 어지럽게 서있는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무슨 일이 생긴건지, 얼굴에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콧대 높은 황실의 기사를 불안에 떨게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가까이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재촉하지 않아도 답은 곧 나왔다.
“화, 황제 폐하께서…”
기사들의 주인이며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이지만, 곁에서 호위와 보좌를 맡고 있는 기사단장과 달리 공식적인 황궁 행사 외에 평기사들이 황제를 만날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디의 명령으로 자잘한 심부름을 하며 황제의 얼굴을 익혔다고는 해도 제국의 통치자 앞에서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기사단장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는 것을 하디도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짐을 떠맡기는 듯한 기사들을 나무라는 일 없이 건물 안으로 향했다.
따로 청소하는 사용인을 두지 않아 평소와 다름없이 너저분한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황제가 왔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해 본부를 두고 도망치는 단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가볍게 한숨을 쉰 하디가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황제가 방문했다는 사실 보다도, 그가 처리해야할 사안들에 대한 생각이 먼저였다.
외출을 마치고 온 기사단장의 집무실 앞에는 항상 보고를 기다리는 부관 몇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었으나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의 방문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기에 그는 말없이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황제가 기다리고 있을 장소지만, 번거로운 예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제관들이 보았다면 뒤로 넘어갈 만큼 거침없는 행동이었지만 이 곳에 그것을 지적할 이는 없었다.
“….”
집무실에 들어간 기사단장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환영하는 얼굴도, 무례함에 노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인사를 대신해 갑작스럽게 날아온 비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 사이에 끼워 받아낸 그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주군에게 허리를 굽혔다. 흠 잡을데 없는 우아한 몸짓이었다.
“기사단장을 경질하실 것이라는 명령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내 기사님은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는 거지. 이렇게 능력 있는 기사단장을 갈아치울 리가 없잖아.”
암살자들에 비해 힘이 약하다고는 하나 제 때 반응하지 못했다면 심장을 꿰뚫었을 비수를 던져 놓고도 동의 황제는 태연하게 웃었다. 꽤 ‘짓궂은’ 장난이었음에도 그의 기사는 일일이 반응하는 일 없이 자신이 받아낸 비수를 집무실의 책상 위에 내려 놓았다. 그것을 받아 가볍게 소매 안으로 감춘 밀비가 느슨한 자세로 의자에 기댔다. 남들에 비해 키가 큰 탓에 유난히 큰 의자에 몸이 묻혔지만 새 장난감을 받은 아이마냥 즐겁다는 얼굴을 한 주군을 보며 하디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행방은?”
“곧 있으면 국경에 도착합니다.”
“처리는?”
“일주일 내로 완료됩니다.”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짧은 질문들이었지만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지 인식하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귀찮은 설명은 필요 없었다.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밀비가 만족스럽게 웃었지만 하디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시종장도 없이 귀한 발걸음을 하셨군요.”
“그래 보여도 시종장은 꽤 섬세한 사람이야. 혈기 가득한 곳에 데려 오기는 조금 불쌍해서.”
“과연, 폐하다우신 마음 씀씀이로군요.”
별 말씀을. 가벼운 비꼼에도 황제는 여유롭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의 주인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하자, 하디는 예의상이라고 하는 사양의 말도 없이 자리로 가 앉았다. 기사단 업무 뿐 아니라 밀비와 동궁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늘 바쁜 그였지만 황제와 기사단장이 사라진 서궁의 기사단까지 그의 손으로 떨어졌기에 책상에는 하디의 승인을 기다리는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익숙하게 서류를 훑는 모습이 꽤 낯설어 집무실을 어슬렁거리던 밀비는 가만히 자신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도 지나치게 의식하는 기색은 없다. 내용을 확인하고 다음장을 넘기던 하디가 입을 열었다.
“시종장을 불러드릴까요.”
정중하게 위하는 듯 보이지만 나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돌아갈 생각은 없는데?”
“무료해 보이시길래.”
“어머, 그럴리가. 잠깐 옛 생각이 났을 뿐이야. 그 때도 하디 당신은 나의 방문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으니까.”
무엇을, 이라고 되묻는 일 없이 하디는 질책과 성가심이 뒤섞인 눈으로 밀비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을 말할 생각도, 들어줄 생각도 없었기에 밀비는 바라보는 시선에 미소로 되받아 칠 뿐이었다.
*
외출 준비를 위해 번거로운 시중을 받고 있던 밀비가 소식을 전하러 온 집사를 거울 너머로 바라보았다. 치켜 뜬 눈꼬리와 되묻는 목소리의 끝이 날카로워서 시종들은 조용히 손을 거둔 채 밀비의 짜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집사는 밀비의 아버지가 어렸을 적부터 가문에 소속되어 그를 모셨던 이다. 이제는 ‘아가씨’가 아닌 차기 황제로 낙점된 밀비 앞에서 움츠러드는 일은 없었다. 저 자의 진정한 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가주다. 다시금 그것을 되새기자 짜증스럽던 속내가 가라앉는다. 밀비는 다시금 시종들을 향해 턱짓했다. 가져온 외투를 몸에 대보는 손들이 조금 떨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갑자기 부성애에 눈을 뜨신 건 아닐테고.”
나긋나긋 하지만 대놓고 비꼬는 목소리에 집사를 제외한 시종들이 움찔했다.
“주인어른께서는 단순한 외출을 말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밀비는 가주에 대한 짜증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요새 견습기사 수련원으로의 외출이 잦았던 밀비가 차기 서황제의 측근에게 접근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혹여라도 친분이 두터워져 세력의 균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하는 것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얄팍하고 뻔한 사고의 흐름이 우스워서 의식하지 않은 헛웃음이 터진다. 가주인 아버지가 가진 그릇의 크기는 알고 있었으나 새삼스레 확인 받을 때 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밀비가 손짓으로 붉은색의 외투를 고르자 시종들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소매에 팔을 끼워 옷을 입혀주었다. 매무새를 다듬어 주려는 손길을 가볍게 거절한 밀비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정리한 뒤 몸을 돌려 거울 속이 아닌 현실의 집사를 똑바로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 집사가 다시금 허리를 굽혔다. 밀비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전의 짜증과 한심함은 어디갔냐는 듯 산뜻한 얼굴이었다.
“네 주인어른께 가서 전해.”
동황제는 새로운 호위를 구하러 가는 거라고.
아카데미의 장학생이자, 남부 유력 가문의 차남이 차기 서황제의 결정 소식에 기사 수련을 받으러 견습기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제도 내에서도 유명한 일이었다. 밀비가 견습기사들의 수련원에 걸음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만 단순히 친분을 다지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저, 측근일 그를 통해 자신의 상대가 될 서황제의 역량을 가늠해보고 싶었던 것 뿐. 그 이상도, 이하의 생각도 없었다. 그는 꽤 쓸 만한 인재였지만 그게 다였다. 탐은 나지 않는다. 밀비는 아무런 기반을 갖추지 못한 황제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내던진 이에게 시간을 들여 제 쪽으로 끌어 들일만한 정성이 없었다.
오히려 흥미가 생긴 쪽은 황족들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소문이 돌고 있는 평민의 견습기사 쪽이었다. 드물게도 수련원에서 버텨내고 있는 그는 기사로서 갖춰야할 소양도, 검술 실력도 귀족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모양이었다. 돌아갈 영지도 없이 그저 작위만을 가진 기사를 온전히 자신의 가신으로 거둬들이는 일은 좀체 드물었기에 황족 뿐 아니라 많은 귀족들이 그를 탐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콧대 높은 견습기사는 서임 후의 제안에 대해서는 모두 거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혼인을 제안하는 자도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여전히 소속이 정해졌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가리지 않고 취했을 이들에게는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겠지만 드러내놓고 탓하는 이는 없었다. 대신 더 큰 자리를 바라는 것 아니냐며 뒤에서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그는 외부의 소문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밀비는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쟁취하는 것을 즐겼고 그것 만으로도 그 견습기사는 자신의 아래에 거둬들일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자신이 움직이기 전에 가문에서 손을 쓸 틈을 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외부에서 따로 사람을 고용해 소문의 기사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수준 낮은 추측은 짜증스러웠지만 관심을 둔 것을 감추는데엔 딱 좋았다.
아무렇게나 만들어 귀를 찌르는 종소리가 짧은 상념을 깼다. 턱을 괸 채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밀비가 자세를 바로 하자, 없는 사람처럼 구석에 서서 숨소리를 죽이고 있던 수련원장이 반색을 하며 눈을 빛냈다.
“전하, 수련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 쪽으로 불러올까요? 명령만 하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사냥개 같은 모양새에 밀비는 서두르지 말라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제대로 본 그 견습기사는 예상 외로 곱상했고 검 보다는 책이 더 어울릴 인상이었다. 눈에 띄기 쉬운 외형적 특징 보다도 밀비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차분한 눈빛 속에서도 날이 선 예리함이었다. 그저 작위를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수련을 받는 망나니들과 다른 진짜 기사였다. 밀비는 그를 거두기 위해 황족들까지 각축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일에는 익숙한 모양인지 견습기사, 하디는 갑작스런 부름에도 당황하는 일 없이 밀비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그저 형식만 맞춰준다는 듯 뻣뻣한 움직임이었다.
응접실이 없어 대신 수련원장의 집무실을 제공 받았지만, 하디 외엔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기사는 밀비에게 무언가 묻는 일 없이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디에 대해 알고 싶다거나, 알아야할 것은 없었다. 밀비가 해야 할 말은 간단했다.
“내 기사가 되겠나?”
“사양하겠습니다.”
처음 나눈 대화는 빠르게 끝이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냉정하게 떨어지는 거절에 밀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저 생각이었을 뿐 받아들이는 것에는 시간이 걸렸다. 밀비가 제안한 자리는 단순한 호위역이 아니다. 동궁의 기사단을 총괄하는 기사단장의 자리다. 황실 소속의 수련원에서 서임을 받을 기사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챙기기 위한 술책인가?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귀찮은 듯 다른 곳을 바라보는 눈을 보며 밀비는 단번에 상황을 납득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하는 거절은 아니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황녀 전하.”
차기 황제는, 현 황제의 혈육이 아니었음에도 후계를 잇는다는 의미로 황녀, 혹은 황자로 불린다. 밀비의 위치를 인지하지 못하고 하는 거절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거절을 당했다는 사실이 분하기 보다는 흥미가 생긴다. 하디에게 있어서 썩 반길 만한 소식은 아니겠지만 밀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나. 황제는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 부군夫君의 자리는 줄 수 없는데.”
“더더욱 사양하겠습니다.”
눈으로만 조금씩 새어 나오던 감정이 얼굴 전체에 드러나자, 단정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흐트러진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디가 허리를 굽혔다.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고 해도 문 밖에서 대기 중인 수련원장에게 명령하면 얼마든지 다시 불러올 수 있겠지만, 밀비에게는 둘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샤젤 경.”
안온하던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바뀐다. 검을 뽑아 들이댄 것도, 다른 신체적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었지만 밀비는 변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표정을 지운 이가 서늘한 눈으로 밀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어나 한 번도, 남과 눈을 마주보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음에도 손이 떨린다. 무의식 중에 주먹을 말아 쥐자, 먼저 눈을 피한 것은 하디였다. 정적 속에 커다란 한숨 소리가 흘렀다.
“오늘의 제 무례는, 전하를 돌려보내는 것으로 갚겠습니다.”
*
“단장님, 동궁의 시종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짧은 허가가 떨어지자 거침없이 문이 열렸다. 하디는 그제야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려는 하디에게 시종장은 그런 것은 됐다는 듯 손사레를 치며 집무실을 두리번거렸다. 동궁에서 좀체 나오는 일이 없는 그가 무엇을 위해 방문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에 하디는 그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고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하디 경. 폐하께서 이 곳에 오시지 않았나?”
“방금 전에 돌아가신다고 하셔서, 단원 둘과 함께 보냈습니다만. 마주치지 못하셨는지.”
“아아, 이런. 엇갈린 모양이군. 고맙네.”
들이닥친 것 만큼이나 빠르게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맞춰 등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잉크병에 담가 두었던 펜을 빼낸 하디가 필요한 사항들을 적어 내려갔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웃음이 잦아들자 그는 그제야 입을 뗐다.
“또 시종장은 온 황궁을 뛰어다니겠군요.”
“적당히 운동도 되고 좋은 일이지.”
“함께 돌아가셨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오늘의 남은 시간은 내 뜻대로 할거라서.”
“분부하시는 대로.”
적당히 대꾸해주고 있지만 서류 작업이 끝난다면, 하디는 밀비를 어깨에 들쳐 메고서라도 동궁으로 보낼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서류는 가득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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