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황폐는 사람들로부터 활기를 앗아간다. 제도의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사라져갔다. 당연했다. 황제의 눈길이 닿지 않는 변방은 영지의 주인마저 팽개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주들은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해 제도에 있는 일이 잦았다. 주인이 부재하는 영지는 생기를 잃었고 치안 또한 나빴다. 도로 한복판에서 도적질을 하거나,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일상이었다. 평범한 옷을 구해다 입었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는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좋은 재질의 옷인 것을 숨기지 못하는 모로와 치즈펠 또한 시비가 걸리는 일이 잦았다. 제압은 쉬웠지만 모로는 자잘한 소요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간신히 머물 만한 숙소를 찾아낸 모로는 답지 않게 대낮부터 잠에 빠져든 참이었다.
몸살이라도 난 것일까. 치즈펠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잠든 모로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체온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으면 열을 내며 앓던 어린 시절과 다르게, 모로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냥 피곤한 것일지도. 안도의 한숨을 쉰 치즈펠이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 없는 짐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모로는 그들의 목적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국경을 넘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의문없이 묵묵히 그를 따르는 치즈펠에게 모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둘이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치즈펠은 어디서, 어떻게? 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서로의 부담을 떠안으려 했던 황궁의 생활과 달리, 그것은 그 자신도 함께 찾아야할 답이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따뜻한 곳이었음 좋겠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모로가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웃어 보이던 얼굴이 생생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본 것은 몇 년 만이었다.
의자 귀퉁이에 대충 걸어 둔 모로의 외투를 서툴게 개어 놓은 치즈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고프다. 낡은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시장이라 부를 만한 상점가는 없었지만 멀지 않은 거리에 노점 몇몇이 있던 것이 기억 났다.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짐가방 속에 있던 꼬깃꼬깃한 종이 뭉치와 펜을 꺼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치즈펠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방을 나섰다.
*
노점에 깔린 물건의 상태는 과히 좋지 않았지만 치즈펠은 이미 그런 것들 사이에서도 상품上品을 골라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써온 것들과 가까운 물건을 고르려는 것 뿐이었지만 상인들은 물건 볼 줄 아는 도련님이라 칭찬하고는 했다. 이 곳에는 골라낼 만한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치즈펠은 꼼꼼한 눈으로 과일들을 살폈다. 음험한 눈으로 그를 노리는 시선들을 무시하기 위해서였다.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은지는 한참이었지만 틈을 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이를 앙 다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노점을 뒤로했다. 겹쳐 입은 겉옷 안에는 몇 년 째 그가 가지고 다닌 단검이 숨겨져 있었다. 타인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노점에서 멀어져 거리를 빠져나가려는 기색이 보이자, 멀찍이 지켜보던 이들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위협하듯 대놓고 발소리를 내며 쫓아오는 그들의 모습에 치즈펠이 실소하며 품 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봐. 어렸을 적부터 작은 주인님 소리를 들으며 귀하게 자란 그가 들어본 적 없는, 몹시도 불량하고 듣기 거슬리는 어조였다.
하나 가르쳐줄까?
어째서인지 이런 상황에 뇌리를 스치는 목소리는 기사로서 자신의 곁을 지킨 오랜 친우가 아닌,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던 사람이다. 친밀감을 느낀 적은 없지만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동지애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상대도 그렇게 생각 했을지 모르겠지만.
상대는 신경 쓰지 말고, 내키는 대로 셋만 세고 행동해.
가벼운 충고를 떠올리며 치즈펠이 자연스레 발자국을 옮기며 숨을 골랐다.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판단한 모양인지 뒤따르는 소리가 바빠졌다. 욕설이 들린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단검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한 발자국만 더 떼면 그는 뒤를 돌아볼 것이었다. 급소를 노릴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 몸을 피할 시간 정도만 벌면…
“으윽.”
무언가 크게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뒤를 이은 고통스러운 신음에 치즈펠은 자세를 갖출 틈도 없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때늦게 자신의 페이스를 잃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지만,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를 따라오던 자들은 이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모로? 한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쓰러진 이의 멱살을 잡아 올려 살피고 있는 사람은 그의 기사가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건조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하디 경?”
정신을 잃은 이들의 면면을 살피던 하디는 흥미를 잃은 듯 멱살을 쥐고 있던 이를 바닥에 팽개쳤다. 기절한 이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치즈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가 하사한 검도, 제복도 입지 않은 채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가벼운 평상복 차림의 그는 낯설었지만 확실히 오랜만이기는 했다.
모로가 눈을 떴다. 지난 피로가 쌓였기 때문인지 몸은 물론 눈꺼풀마저 무거웠다. 추격자들의 기색이 옅어진 틈을 타 제법 깊게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 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피곤한 몸이 긴장을 유지하게 했기에 이 정도로 충분했다. 모로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 뿐이었다. 낡은 여관방에는 화장실이 딸려 있지 않았기에 잠깐 나간걸지도 몰랐다. 모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름한 테이블 위에 못 보던 종이가 있었다. 익숙한 필체에 자연스레 입가가 허물어지다가 이내 굳는다. 이곳은 치안이 좋지 않았다. 밖으로 나갔다면 얼른 데리고 돌아와야 했다. 그가 외투를 집어들 때였다.
문은 노크도 없이 열렸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들어올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기에 모로는 외투를 내려놓았다. 요령 있게 잘 다녀온 모양이다. 빨리 왔네? 가벼운 인사 뒤, 무심결에 짓궂은 농담을 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찻주전자와 접시가 올려진 쟁반을 든 채 치즈펠의 뒤를 따르는 이가 있었다. 그 또한 아는 얼굴이어서 모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면전에 대고 할 행동은 아니었으나 상대는 그런 예의에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불만스러워 보이는 모로의 태도에 치즈펠이 황급히 뒤따른 자를 변호했다.
“오는 길에! 하디 경이 구해줘서! 그래서 같이 왔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모로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치즈펠에게서는 이전과 같은 경계심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 머무는지 미리 알고 직접 찾아올 수 있는 주제에 일부러 ‘마중’을 나간 하디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치즈펠에게 도움이 된 것은 솔직한 사실이었기에 모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의 자택인양 손님의 방문을 허락해준다는 태도에 하디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치즈펠과 함께 안으로 걸음한 그는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럴 듯한 식사가 차려진 쟁반에 모로가 눈을 치켜 떴다. 설명을 요구하는 태도에 반응한 것은 역시나 치즈펠이었다.
“아, 이거. 내가 장 봐온 걸로 하디 경이 만들어 줬어. 대단하지.”
“요리도 할 줄 알았어?”
“별 것 아닙니다.”
가볍게 대답한 하디가 모로 옆의 의자를 빼 치즈펠에게 권했다. …나? 멍하니 되묻는 치즈펠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에스코트한 그는 태연스러운 얼굴로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기 한 조각 없이 건더기라고는 채소만 조금 들어간 간단한 수프와 마르기 직전의 빵, 형편없는 싸구려 차가 다인 식사였으나 깔끔한 솜씨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어서 치즈펠은 기대에 찬 얼굴로 스푼을 집어 들었다. 막 떠먹으려는 치즈펠의 손을 제지한 것은 모로였다. 그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자리의 세 사람 모두 알고 있는 것이어서 식사로 살짝 들뜬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조리하는 내내 구경하던 치즈펠이 맞은편의 하디를 흘긋거렸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친다. 시선은 이내 모로를 향했다. 하디가 먼저 수프를 떠 입에 가져가며 담담하게 말했다.
“더 쉬운 방법이 있었다는 건 당신도 알 텐데요.”
“…그렇군.”
치즈펠의 팔목을 내리누르고 있던 모로의 손이 그제야 떨어진다. 분명, 따뜻한 손이었음에도 모로가 느꼈을 서늘함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치즈펠은 가볍게 자신의 손목을 쓸어보았다. 경계가 풀린 것인지 편하게 의자에 기댄 자세로 고쳐 앉은 모로가 빵을 찢으며 물었다.
“명령으로 온 건가?”
“개인적인 방문입니다.”
“빨리도 정리하셨군.”
“그럼요. 옥좌의 한 쪽이 비워져 있던 일은 흔하니까.”
여상스러운 대답에 수프를 삼키던 모로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 오른다. 기나긴 제국의 역사, 병환으로 상대보다 먼저 세상을 뜬 황제들은 많았지만 자신의 기사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황궁을 떠난 황제는 없었다.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은 실종 상태의 황제. 전래가 없는 일에 신하들이 혼란해진 틈을 타 차근차근 자신이 하려던 일을 진행하고 있을 동궁의 황제를 떠올리며 모로가 고개를 내저었다. 좋은 자질을 갖춘 상대임을 아는 만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평소, 모로는 치즈펠의 앞에서 황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그는 집중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여러가지가 생략되어 있는 대화였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푼을 움직이는 소리에, 이 자리에 치즈펠이 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한 모로가 흠, 하고 짧게 해야 할 말을 골랐다. 답지 않은 배려에 맞은편의 기사가 미소를 지었다. 모로는 그것을 모른척하며 되물었다.
“그 쪽의 황제는 어쩔 생각이래?”
“글쎄요.”
“눈치는 챘나?”
“아직입니다.”
“여제도 심술 맞은 기사 때문에 고생 좀 하겠군.”
“저를 기사로 들였을 때 그 정도 각오는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치즈펠은 서로의 약점이 되지 않은 주종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한숨을 쉬며 무어라 말하는 모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접시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야기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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