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CHECKMATE

수련 시간이 끝났음에도 바깥은 아직 소란스러웠다. 쓰고 있던 갑옷을 종자에게 건네던 모로가 소음이 들리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움직임에 분주하던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한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관심이었으나 이제는 꽤 익숙해져 있었기에 모로는 그것을 무시한 뒤 바깥을 살폈다. 모든 일정이 끝난 시각임이 분명한데, 다시금 수련장으로 향하는 무리가 있었다. 기특하게도 추가 수련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기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무리의 뒤를 따르는 이를 발견한 모로의 입에서 무심결에 아, 하는 작은 소리가 흘렀다. 누군가의 반응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를 살피던 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창가에 붙어 섰다.

“아, 결국.”

“저 평민 녀석이 지나치게 눈에 띈 탓이지.”

그렇게 말하던 이들이 옷을 정리하는 속도가 빨라지자, 옆에서 시중을 들던 종자들 또한 바빠졌다. 검은 물론이요, 거의 내던지다시피 갑옷을 벗어 종자들에게 건네는 행동에는 귀족다운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아한 척, 고상을 떨고 있지만 속내는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족속들이다. 눈에 띄는 ‘평민’ 녀석이 집단적으로 린치를 당하는 장면을 누구보다도 빨리 구경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에 모로가 쓰게 웃었다. 서로를 밀치며 밖으로 뛰어나가는 뒷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시정잡배들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품위 없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모로는 옅은 미소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었다.

노예 계급에 해당하는 신분만 아니라면, 제국에 사는 누구나가 황실의 기사가 될 수 있다. 몇 년 동안, 견습기사로서 수련을 쌓은 뒤에는 작위가 내려진다. 그 중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가 있다면 황제가 새로 즉위할 때, 황실 소속의 기사단 중 하나에 입회할 수 있었다. 이른바 신분 역전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으나, 먹고 살기 힘든 평민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기사가 되기 위해 갖춰야하는 소양은 커녕 검술 조차 제대로 가르치기 힘들었기에 기사나 견습 기사들은 귀족인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그 귀족들은 장자가 아니라 가문을 계승할 수 없고, 관리나 사제가 되기에는 그 교양이 부족한 이들이 많았다. 소위 집안의 골칫덩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에 충돌이 빈번했고, 혹여 있는 평민 계급 출신에 대한 배척도 상당했다.

자라온 환경과 전혀 맞지 않는 분위기의 장소였음에도, 황실에 가장 빨리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기사가 되는 것 뿐이어서 모로는 이 곳을 택했다. 제국의 학원에서 수학하던 이가 돌연 기사가 되겠다고 하는 일은 여지껏 없었다. 모로만큼 성적이 좋은 학생이라면 학원에 세력을 쌓고 미래를 도모했다. 게다가 모로의 집안은 고향 뿐 아니라, 제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래서 모로가 처음 견습기사로 이 곳에 발을 들였을 때 그의 주변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얼마 전, 차기 서황제가 모로의 측근으로 알려진 후에는 그간 그에게 관심도 없던 이들마저 다가왔다. 그저 출세영달을 노린 채 주변에 꼬이는 이들은 딱히 쓸모가 없었지만 모로는 그들을 그대로 두었다.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호의적인 사람은 주변에 많은 편이 좋았다. 특히, 상대가 동황제라면.

“…도련님?”

생각에 잠겨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탓일까. 종자가 조심스레 모로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 어디 편찮으신 것 아닙니까?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어오는 종자에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검을 건네 주었다. 기사단이 새로이 창설되는 것은 남아있는 병든 황제가 죽고 새 황제들이 즉위할 때. 그 때 까지만, 조금 더 많은 이들을…….

아아.

경악이 섞인 비명이 아스라이 들려온다. 평민이 상대라지만, 도가 지나친 모양이다. 셔츠 끝의 단추를 채우던 모로가 미간을 찡그렸다. 검을. 짧은 말에 종자는 들고 있던 검을 공손하게 그의 손에 올렸다.

“말리러 가십니까?”

“적당히, 를 모르는 놈들이니까.”

가볍게 셔츠 깃을 털어 정리한 모로가 걸음을 옮겼다.

*

불어오는 바람에 희미하게 피냄새가 실려 있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패거리를 생각해낸 모로가 혀를 찼다. 억지로나마 귀족의 품위를 운운하며 고상을 떠는 이들과 달리 그런 것은 개나 줘버렸다는 듯 막 나가는 이들인 만큼 행동력은 상당했다. 견습기사들의 생활을 감시하는 교관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 또한 귀족. 제대로 된 제재가 가해진 적은 없다. 구경을 나간 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모로의 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졌다.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비굴할 정도로 처절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예의 ‘평민’의 것이 아니다. 모습이 보이는 거리가 되자 모로는 걸음을 멈췄다. 모여 선 이들이 서로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지만 그들보다 훨씬 키가 큰 모로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중장갑을 입은 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놓친 것인지 주변에는 장인의 솜씨로 만들었다며 자랑하던 검이 떨어져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평민은 날도 제대로 서지 않은 연습용 검을 들고 있었다. 모로만큼은 아니었으나 상당한 장신이었다. 귀족들이 뒤에서 늘 비웃는 소박한 셔츠를 입은 그는 방금 전 까지 대련을 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게 서 있었다.

평민인 그는 출신 성분도, 고향도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악센트가 남부의 그것과 같기 때문에 고향이 그 근처가 아닐까 짐작하는 것이 다였다.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디’라는 이름 뿐이었다. 혈통과 소속된 가문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거슬리는 존재인데 그는 성적까지 지나치게 뛰어났다. 제도의 유력 귀족들 뿐 아니라 귀족들의 일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황족들에게까지 평민 출신의 견습기사에 대한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있을 정도였다.

모로는 쓰러진 이를 바라보았다. 저 자의 이름은 커녕, 가문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귀족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정도일 뿐이다. 여기서 하디가 귀족 하나를 아무나 잡아 죽인다 해도 빚을 지워서라도 그를 손에 넣기 위한 귀족들이 알아서 사건을 묻어둘 것이다. 평민이라고 무시하고 있는 저 남자야 말로, 이 곳에서는 발에 채일 정도로 굴러다니는 귀족 도련님 보다도 훨씬 더, 친해질 가치가 있는 존재다. 모로는 놀란 채 굳어 있는 이들 사이를 지났다. 이 정도라면 그의 손에서도 적당히 해결될 일이다.

“거기까지 해 둬.”

모로가 끼어들자 하디는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틈을 보인 탓일까. 쓰러져 있던 이가 바닥에 떨어뜨렸던 검을 집어 든다. 방금 전까지 무력하게 엎드려 자비를 바라던 사람답지 않은 날랜 움직임이었다. 그대로 하디의 무릎을 향하는 검에 모로가 반응했다. 늦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검을 휘둘렀다. 부딪힌 검으로부터 팔이 저릿할 정도의 충격이 타고 흘렀다.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두 개의 검을 한 번에 쳐낸 하디가 검을 역수로 고쳐 쥔 채 쓰러진 이의 다리 위를 그대로 찔렀다. 금속을 두드려 만든 중갑을 가볍게 뚫은 검은 허벅지 위에 박혀 들었다. 악! 끔찍한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비명이었지만 하디는 아랑곳 않고 박혀 든 검의 방향을 틀어내 상처를 벌렸다.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이어지다, 이내 잠잠해졌다.

상대가 기절한 것을 확인한 하디는 자신의 검을 그대로 두고는 주인을 잃은 검을 주워들어 날을 확인했다. 날을 상하게 만든 것은 본인이었지만 조무래기인 견습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당신도 한 패인 줄은 몰랐는데요.”

숨소리가 흐트러진 기색조차 없다. 평이하다 못해 나긋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모로는 웃으며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리가. 하디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마주해오는 시선에 모로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조무래기들에게 힘 빼지 말라는 충고를 하러 온거지.”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미소가 되돌아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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