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CHECKMATE

그 자신이 황족이라고 할지라도, 황궁 내에서의 무기 소지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황제와 귀족들이 오가는 황궁에서 그 금기에 구애받지 않고 무기를 지닐 수 있는 사람들은 넷 뿐이었다. 두 명의 황제와 그 황제의 옆을 지키는 두 명의 기사만이 황족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무기의 소지가 가능했다. 물론 황제는 정무를 보는 모든 순간마다 기사가 늘 곁에 있었기에 직접 검을 드는 일은 훈련 때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었다. 검을 들지 않는 것은 자신의 기사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고,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손에 쥔 검의 무게감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황제의 검은 실용성 보다는 장식품에 가깝다고는 하나 화려하게 세공된 검집의 표면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자신의 기사에게 직접 검술을 사사받는 여제와 달리, 정무나 황실 내의 행사를 핑계로 훈련을 미뤄왔던 탓이다. 배워두는게 좋았으려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 때문에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다.

황제는 자리에서 똑바로 일어나 섰다. 침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복正服 차림에 어깨에서 늘어진 망토가 바닥에 닿아 펼쳐져 있었다. 대관식에서나 썼던 왕관까지 갖춰서 쓴 상태였다. 은은하게 밝혀둔 빛에 왕관의 보석에서 반사된 빛들이 벽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발 소리는 조용하고,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뛴다. 황제는 양 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땅에 짚어 그 위에 손을 얹고 섰다. 여제에 비해 위엄이 부족하다 평가되고 있었지만 마지막 모습만큼은, 정말로 황제이고 싶었다.

소리는 문 앞에서 멈췄다. 방문자를 알리는 시종장의 목소리는 없었다.

"너답지 않게, 망설이는거야?"

가볍게 비웃는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렸다. 황제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가 놓았다. 대답 대신,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황제의 앞이었음에도 갈무리하지 않은 검 끝에서는 차마 떨어내지 못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가오는 걸음은 거침없었다. 망설이고 있다, 는 황제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황제는 자신의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나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그의 기사는 건방지게도 늘 황제의 앞에 저렇게 꼿꼿하게 서있고는 했다. 달라져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 마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황제는 애써 무덤덤한 얼굴을 했다.

검은 뽑지 않았다.

뽑기 전에 죽을 것이다.

"얼른 끝내."

황제가 되기 위해 어릴 적 부터 철저히 교육 받아온 여제와 달리, 그는 평범한 귀족 집안에서 나고 자라, 꼭두각시가 되기 위해 앉혀진 황제였다. 권력다툼에도 부를 쌓는 것에도 관심 없었다. 지긋지긋한 생활이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짓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다. 하지만 그 끝을, 자신의 기사이자 소꿉친구를 위해 기꺼이 출세를 포기하고 기사로서 곁에 남아준 모로모로가 해준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것이라고 황제는 스스로를 달랬다.

황제는 눈을 감았다. 애써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음에도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짚고 선 검의 손잡이 끝을 꽉 쥐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예민하게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씌워져 있던 왕관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

"기세가 좋던데, 왜 다시 멍해졌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눈을 크게 뜬 황제를 보며 모로모로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그, 너... 배신하고... 나, 죽이러..."

"죽여줬으면 좋겠어?"

무심하게 물은 모로모로가 손을 뻗었다. 괜한 소리를 한 건가, 이대로 목을 조르는걸까. 황제가 그 자리에 굳었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다정한 손길은 황제가 걸치고 있던 망토의 끈을 풀어내고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감이 사라진다. 몇 년 동안 간신히 내면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이 함께 무너져 내렸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듣고 있는 사람은, 드물게도 상냥하게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그의 기사 뿐이었다.

한참이나 울고 나서야, 황제는 그제야 모로모로에게 가지고 있던 원망을 생각해냈다. 그가 모로모로를 올려다보았다. 다 울었나보네.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가를 보고 있자니, 온갖 어리광과 떼가 목 끝에서 턱 막히는 기분이다. 황제가 다시 시선을 피했다. 분명 자신이 꼼짝 못할 것을 알고서 저렇게 웃는 것이겠지만, 알고 있음에도 따질 수 없었다.

"다 울었으면, 가자."

"...어딜?"

순진한 질문이었다. 타박 대신, 장난기 있는 미소가 되돌아온다.

"폐하. 납치범은 인질에게 많은걸 알려주지 않는답니다."

모로모로는 순식간에 황제의 허리를 낚아채 들어올린 뒤 그의 어깨 위에 얹었다. 내가 짐이냐! 황제가 모로모로의 귓가에 빽하니 소리 쳤지만, 막무가내인 그의 나이트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유쾌하게 웃으며 창틀에 길게 뻗은 다리 한 쪽을 걸쳤다. 설마... 아니지? 침전의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제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원하는대로 해주면, 납치가 아니잖아?"

그대로 몸을 날리는 모로모로의 옷자락을 꾹 잡으며 황제, 치즈펠은 눈을 꽉 감았다. 분명히 높은 곳은 싫어했음에도 떨어지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손님이 올 거야.

떠지지 않는 눈을 뜨게 만들었던 것은 어젯밤에 넌지시 흘리듯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그를 찾아올 손님은 아니었지만, 본인의 공간에 찾아오는 손님을 모른 척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치즈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밤 피곤함에 쓰러지듯 잠들었던 탓에 침대 옆에는 슬리퍼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그의 잠자리를 정리해 줄 사람은 이제 없었다. 발을 뻗어 떨어진 슬리퍼에 발을 꿰어 신은 치즈펠이 차갑게 닿는 공기에 팔을 한 번 쓸었다. 급하게 준비된 장소이기 때문인지 난방이 되지 않는 탓에 조금 춥다. 익숙하지 않은 서늘함이었다.

침실을 나서자, 모로모로는 아직인 모양인지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손님이 오기 전에 깨울까, 생각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성하지 않은 몸으로 황궁의 경비를 뚫고 나온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이다. 치료는 받았다고 했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친 모습이었다. …차라도 마실까. 부엌을 뒤적이는 사이 그 소리에 깬 모양인지 맞은편 방의 문이 열렸다.

정말로 지금 막 일어난 모양인지, 가벼운 실내복 차림의 모로모로는 잠이 가득한 눈을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뭐야, 더 자고 있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그가 부엌으로 다가왔다. 가볍게 걷어 올린 나이트 셔츠의 소매라던가,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어색해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모로모로는 아랑곳 않고 능숙하게 찬장을 뒤져 포트와 찻잎이 든 캔을 찾아냈다. 치즈펠만큼은 아니지만, 평생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아온 귀족 치고는 자연스러운 몸놀림이었다. 치즈펠을 따라 황실에 들어와 그의 기사가 되기 전까지는 자주 별장에서 휴가를 보냈기 때문인지 별장에서 하는 소일거리에는 익숙한 모양이었다.

“...몸은 괜찮아?”

“걱정할 정도는 아냐.”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었다. 모로모로가 기지개를 켰다. 나른한 맹수 같은 몸놀림이다. 황궁을 뒤집어 놓았던 그 순간부터 여제 측의 사람들 뿐 아니라, 황제를 따르던 이들도 분명 치즈펠을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을 것임을 알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그는 느긋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변두리라고는 하나 제국의 수도에 있는 별장에 몸을 숨길 리가 없었을 테다. 그저 짐작하는 것이 다인 탓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치즈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따라가는 것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것이 조금 불만이었지만 묻지 않아도 납득하게 될 날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치즈펠은 모로모로가 직접 내온 차와 함께 자신의 불만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손님이 오기 때문인지 웨건은 그대로 둔 채 두 사람은 가볍게 몸 단장을 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멈춰서는 소리가 났다. 이런 곳에 별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기 때문에 마차가 멈춰 설 곳은 정해져 있었다. 누구지? 허둥대며 셔츠 소매에 커프스를 달던 치즈펠이 창가로 다가갔다. 검은색 마차가 별장지에 들어서 있었다. 아무런 장식이 되어있지 않아서 어느 가문의 것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마부가 내려 마차의 문을 열자, 치즈펠은 황급히 창가에서 떨어졌다. 어차피 만나게 될 손님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들킬 필요는 없었다.

“피곤하면 안 나와도 돼.”

“아니, 준비 다 했어.”

배려해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시기에 찾아올 손님이라면, 모로모로가 데리고 있는 것이 황제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현을 달가워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황제였던 이다. 치즈펠은 밖으로 나섰다.

러프했던 모로모로의 모습은 없었다. 그가 자주 보아오던 평소의 모습을 한 모로모로가 가볍게 자신의 옷깃을 털어 정리하고 있었다. 별장이기 때문인지, 재킷은 갖춰 입지 않고 있었지만 검붉은 색의 베스트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맞지 않는 커다란 셔츠와 바지 차림인 자신과는 대조적이었다. 치즈펠이 입술을 삐죽였다. 모로모로의 별장에, 그에게 맞는 옷이 있을 리가 없다고 납득하고 있었어도 조금 볼품없어 보이는 제 모습에 불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님은 현관에 도착한 모양인지, 가볍게 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잔뜩 부은 치즈펠의 볼을 손가락으로 스치듯 툭 건드린 모로모로가 현관을 향해 다가갔다.

*

손님이 올 것이라는 것도, 그 사람이 모로모로와 꽤 가까운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방문한 손님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냥 안에 있겠다고 할 걸. 치즈펠은 쉽게 어리광을 받아주는 사람이 아닌 모로모로가 두 번이나 자신의 의향을 확인한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치즈펠과 달리, 모로모로와 그 손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우아한 자세로 마주 앉아 있었다. 불편하면 들어가. 나직한 목소리가 세 번째의 배려를 했지만 치즈펠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마주한 손님을 두고 가버린다는 것은 실례라는 것 정도는 어린 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이미 체면 같은 것은 차릴 필요 없는 입장이 되었다고는 하나,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시간동안 유지해온 태도를 바꾸기는 어려워서 치즈펠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의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왕의 날개 라는 별명을 가진 기사였다. 가지고 있는 옷이라고는 갑주나 기사단 제복 뿐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금욕적이고 딱딱한 모습만을 봐 온 치즈펠로서는, 당장 무도회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말쑥한 모습의 남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낯선 모습에 그 ‘하디’가 맞나 치즈펠이 갸우뚱 하는 사이에도 손님은 방문한 목적을 착실하게 수행하려는 듯 옆에 두었던 짐 같은 것을 모로모로에게 건넸다.

“쓸 만한 것들은 대충 챙겨 왔습니다.”

“너무 작은거 아냐?”

건넨 짐은 겨우 옷가지가 몇 개 들어갈 정도의 작은 가죽 가방이었다. 몸을 빼 가방을 구경하던 치즈펠이 무의식 중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가방은 두 사람이 추적자들을 피해 몸을 피하기 위한 것이 들어있다고 하기엔 작았다. 투정인지 불만인지 모를 모로모로의 말에 하디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친절함이 과했나 봅니다.”

“우리 가문 갈라 먹을 사람한테, 이 정도 요구는 해도 되는 것 아냐?”

“안타깝게도, 아직입니다만.”

날씨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리는 것처럼, 가벼운 대화였다. 이유도 묻지 않고, 모로모로를 따라 황궁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는 단순한 황족이 아니었다. 황제의 생사가 어떻게 알려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모로모로의 가문에 미치는 화는 상당할 것이다. 정말 괜찮은 거야? 차마 소리 내어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아서 치즈펠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모로모로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슬쩍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눈이 가볍게 웃어주었기에 치즈펠은 말없이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그 뒤로는 기사단의 누군가가 결혼을 한다던가, 신입이 길들인 말이 마구간을 탈출했다거나 하는 소소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대접받은 찻잔이 비워져 갈 무렵이 되자 손님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안온한 분위기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것은 마지막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짧게 인사를 전한 하디가 감청색 재킷의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종이로 감싸인 얇은 봉투는 가방만큼이나 안에 든 내용물을 알아채기가 어려웠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인 모양인지 받아 든 모로모로도 의아한 얼굴을 하고는 하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친우로서의 호의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빚이라도 지워 두려는 셈이야?”

“받아내지 못할 빚은 지워 두는 타입이 아니라서.”

“혹시 알아? 돌아오기라도 할지.”

“돌아올 생각이었어?”

자신이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치즈펠이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치즈펠의 질문에 모로모로가 짧게 한숨을 쉬었지만 하디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또 처음보는 얼굴이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가도, 떠도는 공기에 묘한 긴장감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치즈펠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손목의 소맷깃을 정리하던 하디가 태도를 바로했다.

“언제든, 성대하게 맞이해 드릴테니까요.”

“기대되네.”

도발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모로모로는 일부러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하디와 달리 오히려 조마조마해진 쪽은 치즈펠이어서, 그는 책망하듯 모로모로를 올려다보았다. 모로모로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성하지 않은 몸으로 하디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모로모로를 성하지 않게 만든 것이 하디 본인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걱정을 하느라, 치즈펠은 하디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태도를 하고 있지만, 늘 무감정한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것은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치즈펠은 무의식 중에 손을 뻗어 모로모로의 소매를 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디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부디, 무사히 빠져나가시길.”

*

녹림이 우거진 별장지에서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마차에 난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하디는 천을 내려 창을 가렸다. 곧 수도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디에서 아는 얼굴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햇빛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려 놓는 편이 좋았다. 얇은 천이라 해도 안에 누가 있는지 가리기엔 충분했다. 이미 바깥 풍경은 차단되어 있음에도 눈은 창 너머를 향해 있었다. 밀비는 꼬고 있는 다리 위에 팔을 세워 턱을 괴고는 자신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날이 선 황궁에서 친밀하게 지내던 몇 안되는 이에게 경고나 다름없는 작별 인사를 하고 왔음에도 그의 옆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물 밑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과 달리,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치밀한 계산을 해내는 이다. 견습 기사 시절부터, 눈에 띄게 군 주제에 바라는 점이 터무니없이 작았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발칙하게 황궁에서 발을 빼려던 것을 강제로 붙들어 둔 것은 밀비였다. 그 때 재미있었지. 밀비가 체통에 맞지 않게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하디가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의심하듯 가늘게 뜬 눈이, 주군을 바라보는 눈이라기엔 상당히 불손했지만 밀비는 그런 작은 것에 신경쓰는 이가 아니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웃지 말고 말로 해라. 퍽 공손한 말투였지만 그 속내를 읽어내지 못할 밀비가 아니어서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기사가 참 잘나서.”

이런 말에는 보통, 겸양을 떠는 대답이 뒤따르기 마련임에도 하디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쉴 뿐이었다. 직접 ‘날개’라는 칭호를 하사한 자신의 기사를 놀리는 것은 밀비의 몇 없는 취미 중 하나였다. 물론, 그 기사 또한 얌전히 당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폐하의 덕이십니다.”

“너무 믿음직스러워서 옆에서 못 떼놓겠어.”

“사적인 방문에도 동행해 주시다니, 송구스럽습니다만.”

오늘의 만남은 철저히 하디 개인적인 일로, 갑주나 정복正服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밀비가 황궁에서 나올 만한 핑계는 되지 않았지만 황제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밀비 본인보다도, 기사인 하디의 의견이 먼저였다. 총명한 그녀의 기사는 더 묻지 않고 여제의 동행을 허락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그의 신경이 꽤 곤두서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밀비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자세를 고쳐 앉아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어 앉은 밀비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말은 어디까지 퍼졌어?”

“그 쪽 귀족 몇몇만 아는 것 같더군요. 숨기려 들 테니 조금 걸리겠지만.”

“필사적이겠네. 재미있겠는걸.”

밀비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다짜고짜, 황제가 사라졌다. 그것도 최측근이었던 기사의 손에.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후에 발표하기만 한다면 여론은 알아서 가엾은 황제를 추모할 것이다. 멀쩡히 살아있을 사람을 죽은 걸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황궁에서 나간 황제는 제국 내에서 절대로 조용히 살아갈 수 없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던 그에게는 외려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본인 좋을대로의 생각을 하며 밀비는 창을 가린 천을 조금 걷었다가 다시 닫았다. 마차는 착실히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사랑의 도피 정도면 될까.”

“또 그런 헛소문을 흘리십니까?”

“옛날 생각에 그리워졌어?”

“네. 그립습니다, 아주.”

하디가 가볍게 빈정거렸다.

“하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뜬금없는 밀비의 질문에 하디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눈동자가 천천히 밀비의 표정을 훑는다.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기에 하디 또한 그에 답했다.

“주군께서 뜻하시는 대로 했겠지요.”

“데리고 도망쳐 달라고 해도?”

“도망치실 겁니까?”

명백한 도발이었다. 제국의 황제에게 던질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가문에서 준비한 명문가 출신의 기사들을 걷어내고 제 손으로 직접 뽑은 보람이 있는 기개였다. 밀비의 웃음소리가 마차를 채우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인지 마차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예상한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하디가 의아하다는 듯 창을 가리던 천을 걷었다.

언제 몰래 마부에게 명령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차는 황궁이 아닌 제국 수도 한복판의 거리에 멈춰 있었다. 귀족들의 마차가 오고 가는 일은 흔했기에 별 장식도 없이 멈춰 있는 마차에 눈길을 주는 이는 없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거리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입술 새로 깊은 한숨이 흐른다.

“드물게 억지를 부리셨나 했더니.”

“드물게도 넋이 나가 있길래.”

밀비가 옆에 두었던 모자를 쓰며 물었다. 얼굴을 가릴 베일이 말아 올라간 모자였다. 저걸 봤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심란했던 탓에 꼼꼼히 살피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본인의 부주의함에 짧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린 하디가 밀비의 모자 위에 씌워진 베일을 내렸다.

수수한 마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멀끔한 청년의 등장에 주변의 시선이 쏠린다. 여기서도 눈에 띄네. 놀리듯 키득거리는 밀비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하디는 마차의 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밀비가 장갑을 낀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얹으며 미소지었다.

“오늘의 호위는 부탁해도 되겠지?”

“주군께서 뜻하시는 대로.”

다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속으로 밀어 넣으며 하디는 얹어진 작은 손을 가볍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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