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크게 휘둘러낸 검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검신을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깔끔한 움직임에 의해 바닥에 흩뿌려진다. 가벼운 움직임과는 달리 상당한 양이었다. 주변에 길게 선을 그린 혈흔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쉬던 이가 검을 고쳐쥐었다. 단신으로 황성의 경비를 뚫고 올라온 이였다. 쉽게 무력화 시켰다고는 하지만 방심할 생각은 없다. 상대는 '왕의 검'이었던 자다.
'검'은 하디와 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황실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던 제복은 이미 마魔에 삼켜져,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망토 자락에는 황실의 문양이 은빛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칠흑의 망토 위에서 더욱 빛나는 문양을 보며 하디는 그 모순에 쓰게 웃었다.
"여기까지, 라는 말은 통하지 않겠지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검, 모로모로는 수 많은 싸움으로 날이 엉망이 된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아직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숨에 어깨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물론, 숨을 돌릴 시간은 없을 터다. 깊게 베인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복 갑주 위에는 마법적인 방어조치가 있었지만 이미 황실에 등을 돌린 나이트에게, 그런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다. 아니, 있다고 해도 달라질 점은 없었다. 눈 앞의 남자는 모로모로와 함께 황실 기사단의 한 축을 담당하던 이 중 하나다.
'여왕의 날개'는 곤란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기사, 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싸움을 싫어하는 성정이던 그에게 오랜 벗과 검을 맞대는 것은 분명 괴로울 일일 터였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아직, 왕의 검이었다.
결연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하는 모로모로를 보며 하디 또한 완갑을 고쳐맸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났다. 힘과 힘이 충돌하며 맞댄 검에 자세가 흐트러진 쪽은 당연하게도 모로모로였다. 집중력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슬슬 체력도 한계다. 자세를 바로할 틈도 주지 않고 품을 향해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이미 둔해진 움직임이 완전히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검은 놓치지 않고 왼쪽 어깨를 깊게 파고 들었다. 출혈과 동시에 내달리는 통증에 눈 앞이 아찔해졌지만 그는 간신히 정신을 잃지 않고 버텼다. 물론, 몸이 쓰러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내동댕이 쳐진 모로모로의 몸은 검과 함께 땅에 깊이 고정되었다. 결국 참지 못한 짧은 신음이 모로모로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그에 하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죄책감은 아니었다. 누구의 승리로 결착이 나던 간에 그가 바라던 바는 아니기 때문일테다. 나름대로 고민하는 것은 좋은 태도지만... 모로모로는 너덜해진 완갑을 들어 제 어깨에 박힌 검신을 쥐었다.
"어지간히도 얕보인 모양인데."
"그런 적 없습니다."
무의미한 싸움을 싫어하는 성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로모로는 일부러 하디를 도발했다. 그렇지만 속내가 훤히 보이는 도발에 넘어가기에는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표정을 갈무리한 하디는 여전히 검을 쥔 모로모로의 손목을 가볍게 밟고는 그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완벽한 무장해제였다. 오른손에 쥔 검을 더욱 지그시 내리눌러 깊게 모로모로의 어깨에 박아넣은 하디가 왼손에 쥔 검을 모로모로의 목에 겨누었다. 피부로 닿는 서늘한 금속질의 느낌은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수족처럼 다룬 검에 목숨을 위협받는 것은 조금 색다른 것이었다.
옅은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가 가만히 모로모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로모로 또한 그의 눈을 마주했다. 흔들림 없는 눈에는 오랜 벗의 목을 직접 날려야하는 이의 고뇌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결심한 일인 이상, 하디는 누구보다도 손속에 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로모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 예상한 최악의 상황일 뿐이었다. 그저, 여기까지인 것이다.
"오히려 얕보인 쪽은 저 아닙니까?"
짧은 한숨 소리는 평소와 다를게 없어서 모로모로는 드물게 놀란 얼굴을 하며 눈을 떴다. 검은 여전히 목에 겨누어져 있었다. 하디다웠다.
"승자로서,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인지?"
부디 마음껏 물어보시길, 날개의 기사님. 모로모로가 가볍게 빈정거렸지만 하디는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모로모로를 내려다보았다.
"괜히, 멍청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걸 압니다."
"후한 칭찬이군."
"당신의 황제입니까?"
목적이 생략되어 있는 애매모호한 질문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황실의 깃발 아래, 대외적으로 두 사람은 두 명의 주군을 섬기는 기사들이었지만 각자 충성을 맹세한 이는 달랐다. 모로모로는 황제에게, 하디는 여제에게 그 검을 바친 이였다. 국혼이 아닌 두 가문의 맹약으로 이루어진 황실이다. 힘의 균형은 서로의 기사단을 휘하에 거느림으로써 유지되고 있었다. 그 균형을 유지하던 왕의 검이 무너진 이상, 황제의 세력은 더 이상 여제의 세력으로 이루어진 파벌에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권력 싸움에는 관심 없다는 듯 늘 강직하고 청렴한 태도를 유지하는 주제에, 빠르게도 계산해낸 하디를 보며 모로모로는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 사귐으로 알고 있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이런 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긴 주군에 대한 충성심 밖에 모르는 우직한 나이트였다면 여제가 뒤를 맡기지 않았을테지.
"물론."
"그렇군요."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었지만, 하디는 순순히 모로모로의 목에 겨누고 있던 검을 거두었다. 거짓일 리는 없다. 제 주군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주군 옆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두 사람은 황궁 내에 떠도는 불온한 기운을 누구보다도 빨리 읽어낼 수 있었다. 늘 여유있던 사람이 필사적으로 변한 모습을 구경한 것도 제법 볼만한 일이었기에 하디는 말없이 깊게 꽂아두었던 검을 빼내들었다. 배려없는 거친 손길에 모로모로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지만 하디는 망토자락을 갈무리해 갑주에 튀는 피를 막아냈다.
몸을 일으킨 모로모로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흐르는 피가 멎어간다. 지혈 정도의 응급조치일 뿐이지만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중요했다.
"이렇게 보내줘도 되는거야?"
"웃기는 모습을 본 값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그거 꽤 비쌀텐데."
여제의 나이트, 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일단은 '황실'을 수호하는 기사다. 이대로 모로모로의 황궁 침입을 허락한다면 그를 막아내지 못한 하디에게 질책이 쏟아질 터였다. 물론 모로모로의 목적이 황제라는 것을 안다면 질책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고, 검을 잃은 황제 측의 세력은 여제에게, 하디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런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하디는 모로모로를 놓아주는 것이었다.
"내가 여제에게 가겠다고 했으면?"
물론, 이런 가정을 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예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망토의 끝을 잡고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하디가 눈동자만 굴려 모로모로를 바라보았다. 지나치다고 할 수 있는 농담이었음에도 반짝이는 검신을 확인하는 얼굴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새삼 궁금해서."
"가정교사를 들일 나이는 아닐텐데요."
과연. 얕볼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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