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과 금>과 90년대 일본 정치계의 상황
캐릭터에게도 정해진 운명이란 것은 있는가?
<은과 금>은 당시 일본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은과 금>의 연재 시기는 92년~96년으로, 작중 배경이 되는 시간대와 얼추 비슷합니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진 직후, 아직은 그 광기가 전부 가시지 않은 90년대 초반… 이전부터 한 번 자세히 알아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은과 금> 7권의 세이쿄 마작 이후 정치편을 실제 일본의 정치 상황과 비교해서 써 보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일본 근현대사니 정치사니 하는 거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습니다.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감안해 주세요!
세이쿄 마작 이후, 긴지는 쿠라마에 회장의 손아귀에서부터 58명의 정치인을 얻어냅니다. 그가 그 정치인들의 차용증을 가지고 향한 것은 이자와 아츠시라는, 이전부터 인연이 있는 정치인인데… 이 사람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캐릭터입니다.
바로 오자와 이치로입니다. (현재 80대의 나이로도 일본 중의원을 지내고 있는 양반이지요.)
오자와 이치로와 이자와 아츠시
상당히 닮았음. 거의 보고 그린 거나 다름 없다(ㅋㅋ)
이자와 아츠시는 민정당 소속의, 다케모토 회의 No.2라고 등장합니다. 여기서 민정당이란 자민당, ‘다케모토 회’란 민정당의 파벌(다케시타 파)을 일컫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가 되면서 그가 이끌던 파벌을 민정당 부총재인 가네마루 신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 파벌을 ‘다케시타 파’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때 다케시타 파는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다나카 가쿠헤이(64~65대 총리를 역임한 정치인)의 수제자에, 상당히 어린 나이부터 일본 정치계의 거물이었으니… 당시에는 엄청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1993년 3월, (은과 금 작중 시점은 세이쿄 마작이 끝난 직후) 민정당(자민당)의 핵심 의원 중 하나였던 이자와는 자신이 따르던 카네미츠가 탈세로 인해 체포되는 희대의 사건을 겪습니다.
<은과 금> 7권 15쪽
카네미츠는 자민당 부총재였던 가네마루 신을 말하는 것 같은데, 가네마루 신은 1992년에 이미 정치 자금을 사재로 축적한 것이 밝혀져 자민당 부총재에서 사퇴한 상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반쯤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는데, 거액의 탈세가 밝혀져 조사를 받는 것도 아니고 체포를 당했으니… 당시 타케시타 파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겠군요.
당시 자민당 부총재인 가네마루 신
긴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자와의 구세주처럼 나타나 준 셈입니다. 이자와는 긴지가 붙여준 정치인들과 (아마 그 58명 중에 민정당-자민당 소속 정치인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 이자와가 본래 이끌고 있던 다케모토 회-타케시타 파 사람들이 합세하여) 내각 불신임 결의를 한 것입니다.
<은과 금> 7권 15쪽
내각 불신임안이란 간단히 말해서 총리 너 나와!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오자와가 내각 불신임안을 가결시킨 이유는 중의원 선거제도를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일명 정치개혁법안 때문입니다. (<은과 금> 정치 편에서는 이 법안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룹니다.) 이 안건은 자민당 안에서도 반발이 심한 법안이었습니다. 일단 이걸 이해하려면 중선거구제와 소선구제의 차이를 알아야 하는데… 소선구제란, 한 선거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한 사람만 뽑힌다는 것입니다. 가장 직관적이죠! 중선거구제는 소선구제와 달리 한 선거구 한에서 여러 사람을 뽑습니다. 즉, 중선거구제를 소선구제로 바꾸겠다는 말은 선거구의 크기를 좀 더 작은 단위로 쪼개서 한 지역에서 한 사람만 뽑겠다는 말입니다. (당시 일본 중의원 선거는 한 선거구에서 2~5명을 뽑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치개혁안이 나온 이유는 중선거구제가 계파 갈등이나 부패의 원인으로 지목 받아서인데… 근데 이후 소선구제로 바뀌었다고 뭐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고… 게다가 참의원은 또 선거제도가 다르잖아… (아니 일본 의원 뽑는 절차 왜이렇게 복잡함???)
아무튼 본래 현실에서는 선거구제 개편을 둘러싼 갈등 끝에 나온 오자와의 결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해산 위기에 몰린 ‘미야카와 내각’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그 내각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
그렇게 해서 내각이 해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총리를 다시 뽑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민정당(자민당)에서 나온 이자와는 새로운 당을 창당합니다. 바로 신성당(실제 역사에서는 신생당)입니다. 이때 긴지는 이자와가 승산이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청렴한 이미지인 ‘하가와’를 데리고 나왔다고 하는데 80대 총리였던 하타 쓰토무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자와의 목표는 당연히 여당이 되는 것이겠지요.
<은과 금> 7권 22쪽
여기서 이자와는 “호소야마”라는 사람을 잡으러 간다고 합니다. “연립정권”이라는 말도 나오는군요. fkmt 입장에선 당시 자국에서 떠들썩하던 현재 정치적 상황을 그리다보니 좀 불친절한 면이 있습니다. 현실 정치 상황과 연결지어 가며 차근차근 따라잡아 보면…
우선 “호소야마”는 79대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입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과거사 문제에도 상당히 깨어 있던 사람이었다. (우익에게 암살 시도도 당했었음) 아쉽게도 그의 임기는 매우 짧았는데…
지금도 자민당은 일본의 거대 정당입니다. 당시에는 몇 십년을 여당으로 해처먹은 정당이었다보니, 이제 막 창당된 신성당(신생당)으로는 이기기 힘든 당이었지요. 그래서 이자와는 다른 야당들과 힘을 합칩니다. 그 과정에서 (<은과 금> 설정에서는) 호소야마를 중심으로 야당 7당이 연합하여 여당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중간에 긴지 씨가 사로당을 언급하는데, 아마 사회당인 것 같습니다. 사회당은 이후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자와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합니다.
<은과 금> 7권 17~18쪽
55년 체제의 붕괴!
<은과 금> 7권 19쪽
모리타가 엄청나게 놀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당시 일본 정치사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55년 체제란, 1955년 자민당 창당을 기점으로 거대 여당인 자유민주당과 제1야당인 일본사회당의 양대 정당 구도가 형성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 호소카와 총리가 취임하여 이 55년 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 민정당은 무려 38년 동안 여당을 해처먹은 겁니다. (이때 민정당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민정당에게 염증을 느낄 법도 합니다…)
이후 <은과 금>에서는 이자와가 정치개혁법안(선거구제 변경)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데 성공해서 주식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묘사하는데요, 실제로 그랬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아니겠죠…ㅋ
<은과 금> 7권 93쪽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이자와는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긴 합니다. (중간중간 언급하는 여러 정치인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 맞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립여당이 잘 나갔다면 참으로 좋았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여기서부턴 <은과 금> 원작에서 다루지 않은 현실 정치의 이야기입니다)
<은과 금> 7권 106쪽
일본 대장성이 사기업의 재정 상태를 파악하고, 그 융자를 제한하는 융자제한법…
긴지는 그것이 몇 번의 경제 위기를 거치면 가능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라…? 이거 설마 서브 프라임 모기지…?
호소카와 내각은 94년 4월, 정치 자금 문제와 더불어 소비세를 건드리려고 했다가 여론의 강한 반대를 맞고 1년도 안 되어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연립여당도 심각한 분열을 겪으며, 당시 연립여당에서 가장 몸집이 크던 사회당까지 이 연합에서 탈출해서 사회당 출신 의원(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는 조건을 걸고 자민당과 손을 잡게 됩니다. (여기서 긴지 씨 개빡쳐서 이자와 죽여버리려고 했다가 한 번 참으셨을 듯ㅎㅎ)
그런데 이 부분이 모리타의 은퇴 시직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마치 모리타가 사라지자마자 긴지에게서 행운이 떠나가는 듯이…
<은과 금> 10권 28쪽
<은과 금> 경마편은 모리타가 은퇴한 이후 1년 이상이 지났다고 하고, 료헤이가 반 바지를 입고 다니는 걸 보면 대강 95년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듯합니다. 95년이면 이자와의 신생당은 해체되었으나, 그래도 어찌저찌 신진당을 창당하여 95년 7월 선거에서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세우고 있었을 즈음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긴지 씨의 예감대로 파멸의 때는 멀지 않았으니…
<은과 금> 11권 224쪽
96년도 중의원 선거에서 참패를 겪은 뒤, 신진당도 해체의 길을 겪게 됩니다. 오자와는 1998년에 자유당을 창당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자유당도 의회 내 의석 수를 많이 확보하지 못하고 2003년, 민주당에 흡수되고 맙니다. 이렇게 시대는 민주당 트로이카 체제(간 나오토, 하토야마 유키오, 오자와 이치로)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후 오자와는 민주당 여당 시절에 총리의 섭정, 민주당의 실세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상당히 승승장구 했으나… (2000년대 중후반) 여러 악재(정치 자금 스캔들 등)가 겹치면서 민주당을 탈당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현실의 오자와는 중요한 국면마다 꼭 미끄러져서, 결국 총리를 역임한 적은 한 번도 없군요. 그렇게 거물 정치인이었던 사람이…ㅋㅋㅋ
<은과 금>의 결말 이후 이자와의 행보가 실제 오자와 이치로의 행보와 비슷했다면 긴지 씨의 꿈도 물거품행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개빡친 긴지 씨가 최후의 최후에 와서 이자와를 담궈버리고 본인도 죽든지 도망치든지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96년도 즈음이 긴지 씨의 파멸의 해가 아니었을까…)
<은과 금> 11권 마지막 장면
이자와는 총리가 되는 데 실패했고, 긴지 씨의 꿈도 깨져버리고 말았다.
사실 <은과 금>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전부터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우다다다 쓰게 된 계기는 은과 금 드라마판(2017년 작)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ㅋㅋㅋ 여기는 시간적 배경이 2017년도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초반에 “도쿄 올림픽”이 꽤 큰 떡밥으로 나오더라구요? 긴지 씨는 아예 “도쿄 올림픽… 전 세계의 시선이 일본에 쏠린 그때, 나라를 바꿀 돈을 얻는다!”라고 발언하기까지 해서… 아니 긴지 씨는 원작에서도 이자와라는 썩은 동앗줄을 잡더니 드라마판에서는 코비드19로 좟망하게 되는 도쿄 올림픽 떡밥을 무나 싶어서… (드라마판에서는 2017년으로 시대적 배경을 바꾼 만큼 이때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어떻게 녹여낼지 참 기대가 되었었는데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은과 금> 연재 시기가 92년~96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fkmt 씨는 어디까지 계산에 넣었을까요? (나무위키에는 몇 월까지 연재되었는지까지 안 나와서…) 96년도 오자와의 중의원 선거 참패를 알고 <은과 금>의 결말을 이렇게 쓴 건가? 그런데 드라마판에서 긴지 씨가 도쿄 올림픽이라는 떡밥을 문 것은 정말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니까… 작가도 모르는, 캐릭터의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요?
<은과 금> 5권 93쪽
아니 진짜 모리타는 긴지의 운이고 날개였다는 걸 이렇게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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