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카이] 雨中
10대 아카기와 카이지의 첫 만남에 관한 글
그날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빗방울이 무수한 총격과 같이 굉음을 내며 지면을 때렸다. 세상을 부수기라도 할 것 같은 거친 소리에 사사로운 것들이 파묻히자 세상과 차단되는 기묘한 느낌마저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카이지는 이렇다 할 안주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무료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사념이 폭우 소리에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갔다. 그날은 나른하고 무기력했다. 그런 하루였었다.
이변이 들이닥친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누군가 찾아올 리 없는 현관 앞에 흠뻑 젖은 소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카이지의 어깨 언저리에 겨우 닿는 키와 하복 와이셔츠만큼 하얗게 질린 피부가 처량해 보였다. 작은 소년의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과 날렵한 턱선을 따라 닦을 새 없는 빗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예고 없이 눈앞에 나타난 미지와 같은 소년의 입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소년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빗물에 이리저리 늘어진 앞머리 사이 그늘진 눈으로 소리 없이 카이지를 불렀다.
도와줘. 한 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순간만큼은 세차게 고막을 때리던 빗소리도 멈추었다. 오로지 그 목소리만이 카이지의 머릿속을 빈틈없이 메웠다. 그래서 카이지는 생면부지 초면이었음에도 아무런 추궁 없이 소년을 집 안으로 들였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태풍의 눈처럼 불길하고 음산했음에도 내쫓을 순 없었다. 어딘지 궁지에 몰린 사람은, 내쫓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을 의심 없이 믿은 탓에 수없이 배신당했음에도 카이지는 소년을 믿기로 했다.
살림도구만 겨우 갖춘 단출한 방을 소년은 무심하게 한번 훑는 것이 전부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찝찝하게 젖은 몸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당연한 욕구조차 없는 것처럼 소년은 신발만 벗고서 우두커니 있었다.
“너, 먼저 씻어야 하지 않겠어?”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안 물어보고요?”
소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베고 카이지를 찌른다. 그것은 카이지가 애써 누르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먼저 입에 담기에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위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짚고 넘어가야 좋을 일이었다. 카이지가 망설였던 이유로는 먼저 소년이 어렸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유약한 몸에서 풍기는 불길한 기운 때문이었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얽혀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카이지는 직감으로 느꼈고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소년을 보내는 게 나을 거란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소년은 거리낌 없이 단번에 파고든다. 소년을 믿기로 결심했던 카이지를 비웃는 것처럼 단번에. 그 나이대 답지 않은 무게에 카이지는 일부러 당황하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물어보면 알려줄 건가? 일단 씻기나 해.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렇게 쫄딱 젖어선 감기 걸려. 아, 난 이토 카이지. 편한 대로 불러도 상관없어. 너, 이름은?”
씻고 나오면 이거라도 입고. 카이지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소년에게 애써 심드렁하게 연기하며 건넸다. 소년은 그것을 대답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카기라고 대답했다. 아카기, 좋은 이름이네라는 카이지의 말에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창백한 손을 느리게 움직여 옷가지를 받아들고선 욕실로 들어갔다.
아카기가 씻고 나왔단 사실을 깨달은 건 카이지가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다 문득 뒤돌아봤을 때였다. 분명 인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등 뒤에서 미동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과 눈을 마주치자 카이지는 하마터면 꼴사나운 소리라도 낼 뻔했다.
“아, 미안. 나온 줄 몰랐어, 정말로…. 끌게.”
“상관없는데.”
카이지는 재떨이에 급하게 담배를 비벼 끄고 괜히 매캐한 공기를 손으로 휘저었으나 그런 행동이 무색하도록 아카기의 답은 명료했다. 아카기의 얼굴엔 도통 감정이란 게 드러나질 않아 그를 파악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건장한 성인인 카이지의 옷은 아직 어린 아카기에게 컸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웃옷과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주먹을 쥐고 있는 아카기를 보자 그제야 새하얀 석상이 인간처럼 느껴져 카이지는 조금 웃었다.
“혼자 사느라 딱히 이렇다 할만한 건 없고… 일단 이거라도 마셔.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카이지는 소년이 씻는 사이 데워두었던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아, 집에 라면이 있던가, 라고 이어 중얼거리고 찬장을 뒤지며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는 것까지 카이지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입었던 교복이 얌전히 걸쳐진 의자를 바라보던 아카기가 그런 카이지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끊었다.
“라면 대신 아까 그거 피워보면 안 돼요?”
“뭐라고?”
아카기의 어투와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고 담담했기에 그 의도를 알 수 없었고 카이지는 얼이 빠져 어이없게도 웃고 말았다.
“안 돼! 당연히 안 돼! 되겠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카이지는 맹랑한 녀석에게 뭐라 잔소리라도 더 얹어주려다 고개를 젓고서 아카기가 있는 쪽으로 컵라면을 밀어 넘겼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녀석인지 생각보다 골 때리는 녀석일지도 모르겠다며 난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던 차에 카이지는 아카기의 눈동자가 제 손가락에서 머무르고 있단 것을 알아차렸다. 아카기의 시선이 무겁게 내리 앉은 곳은 카이지의 다섯 손가락에 거칠게 남은 흉터였다. 뜻하지 않게 상황이 난감하게 흘러갔다. 만약 아카기가 그 흉터에 관해 물어 온다면 카이지는 변명거리가 궁색했다. 카이지는 머리를 머쓱하게 긁적이며 거짓말로 대충 둘러댈지, 아예 다른 주제로 대화를 넘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편 아카기는 카이지의 손이 머리로 움직이는 것을 눈짓으로 쫓다 귀에도 그와 비슷한 흉터가 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시 풀을 감은 것처럼 손가락과 귀에 남아 있는 흔적, 아카기의 눈이 아래로 도르륵 굴렀다. 좁은 방 속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이유로 말이 없었다. 그 사이로 순식간에 스며들어 오는 정적을 폭우 소리가 죽였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카이지였다. 아카기, 하고.
“카이지 씨 절 그렇게 볼 필요 없어요.”
예고 없이 아카기가 말을 자르며 성큼 다가왔다. 아카기의 창백하고 다듬어진 것 같은 손가락이 카이지의 손가락에 닿는다. 아카기의 손끝은 차가웠다. 카이지는 손끝이 맞는 정도만으로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그런 감각은 비단 비를 잔뜩 맞은 아카기의 낮은 체온 때문만이 아니었다. 카이지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아카기의 기세에 눌렸다. 아니, 잡아먹힌다.
“우린 꽤 비슷한 사람이거든요.”
생명이 들었나 싶었던 아카기의 눈이 이 순간 살아서 빛났다. 그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아카기의 깊이가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심해의 무구한 깊이를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카이지는 캄캄하고 육중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 속으로 손쓸 새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어떻게 고작 십 대의 소년이 그런 눈을 가질 수 있는지, 그 심해의 너머에 있는 건,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이질감에 카이지는 압도되었다. 비가 퍼부어 눅눅한 공기에도 카이지는 솜털까지 오소소 일어나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넘어 세상을 원망했다. 그런 감정이 카이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생겨났다. 무엇이 아직 제 옷이 한참 크기만 한 소년을 이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생각하자면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아무래도 카이지는 아카기에 압도되면서도 작은 소년이 가진 비정상적인 기류를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만둬.”
카이지는 낮게 깔은 목소리를 아카기를 향해 진중하게 쏘았다. 카이지는 열기로 부릅뜬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아카기 너머에 있는 것을 노려보았다.
“그 말을 카이지 씨가 하니까 전혀 와 닿지 않는 충고고.”
애초에 위험하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아카기는 말을 끝맺으며 컵라면 뚜껑을 뜯어냈다. 안쪽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카기는 나무젓가락으로 면을 대충 휘젓더니 이내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열심히 젓가락을 움직여 면을 제 입으로 가져가는 아카기를 보고 있자니 카이지는 그만 맥이 풀려 한숨을 쉬었다. 지금 카이지 앞에 있는 아카기는 영락없이 비를 쫄딱 맞고 갈 곳 없이 처량하게 서 있던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침이 되면 알아서 나갈게요. 그리고 아무나 믿지 말아요. 언젠가 그게 카이지 씨를 잡아. 그러면… 아마 또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아카기는 라면을 몇 젓가락 더 들고 깨작거리더니 깔아 놓은 이부자리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카이지는 그래서 내가 안 들여 보내줬으면 너는 어쨌을 건데,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그 아무나의 집에서 다리 뻗고 누운 아카기를 바라보았다. 아마라는 말은 사실 거짓말에 가까웠다. 아카기는 믿고 있었다. 확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이 사내와 다시 한번 만나게 될 거라고, 그날은 지금처럼 세상이 빗소리에 잠길 때였으면 좋겠다고.
지금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에…. 아카기가 눈을 감자 세상은 캄캄한 비에 잠겼다.
다음 날 아침은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서 아카기가 카이지에게 말없이 우산을 빚지지 않아도 됐다. 전날 미친 듯이 비가 퍼부었을 거라곤 믿기지가 않는 날씨였다. 길 곳곳에 고인 웅덩이만이 어제가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아카기는 채 마르지 않은 교복을 다시 걸쳤고 그건 아주 눅눅했다. 걷고 있자면 살에 자꾸만 달라붙어 불편했고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짤랑거리는 소리. 이질적인 소리에 아카기는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배고프면 뭐라도 사 먹어 굶지 말고-
아무렇게나 찢은 종이에 볼펜으로 또박또박 적혀진 쪽지와 500엔짜리 동전, 그 외에 짜잘한 값어치의 동전들, 그것이 아카기가 카이지의 집에서 멀어지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카기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는 대신 손에 쥐고서 걸음을 계속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아 카이지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도 이것이 영영 거리를 벌리는 일이 아님을 아카기는 알고 있었다. 이 길은 앞으로만 뻗은 길이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다시 돌아 원지점을 향하게 되어있다. 그리하여 아카기는 나아갔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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