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기+키켄후타] 여섯 번째 감각

아카카이 기반

이것저것 by 공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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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식스센스 같은 키켄후타 이야기를 써 보고 싶어서… 아카카이 기반의 아카기와 키켄후타의 이야기입니다. 딱히 식스센스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는 글은 아니긴 한데, 관련 모티브가 좀 있으므로… 혹시 식스센스를 잘 모르신다면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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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밤 거리에 비가 그칠 듯 말 듯 집요하게 내린다. 아카기는 흠뻑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어차피 옷 안쪽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가방에 넣어둔 옷가지들이 멀쩡하기만을 바란다. 워낙 낡은 가방이라 이대로 몇 시간이고 비를 맞다간 지퍼 틈새로 물이 스며들어 가진 물건을 전부 버리게 생겼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차에 몸뚱이를 실은 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 아무 무인역에나 내린 게 불과 한 두 시간 전이었다. 부쩍 해가 짧아진 가을, 금세 날이 어두워지더니 텅 빈 거리에 가을 비만 스산하게 내린다. 그럴싸한 여관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하룻밤 비만 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때 즈음……. 때마침 어느 건물 2층 마장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비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창문에 크게 ‘사와다 마장’이라고 쓰인,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마장이었다. 영업은 일찍 접은 모양인지 전등 빛이 희미하다. 어쩌면 손님도 없는 차에 직원 혼자 남아 마작패라도 닦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비에 쫄딱 젖은 사람을 곧바로 내쫓진 않으리라. 아카기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차락, 차락, 차락…….

2층으로 올라가는 좁고 어두운 시멘트 계단 너머, 주황색 불빛이 새어나오는 마장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마작패 섞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문고리를 잡은 아카기는 문득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은 기시감을 느낀다. 하지만 머뭇거릴 새도 없이, 비탈길을 굴러 떨어지는 돌처럼 미끄러지듯 마장 안으로 들어선다.

구석에 있는 탁자 하나를 제외하면 마장은 텅 비어 있었다. 고요한 마장을 지키고 있는 것은 작은 조명을 켜고 마주 앉아 마작패를 절그럭절그럭 정리하던 것은 이제 중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년 둘이었다. 워낙 아카기가 발소리도 없이 움직여서, 또 마작패를 뒤섞는 소음에 묻혀 아직 아카기가 마장에 들어선 것을 눈치채진 못한 모양이었다. 아카기는 소리 내어 소년들의 주의를 끄는 대신,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들에게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나무 덮개가 덮인 작탁들을 지나 두 소년이 앉은 작탁 근처까지 다가가자 소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든다.

“…….”

잠시 기이한 침묵이 흐른다. 두 소년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로 서로 눈짓만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아카기는 입을 열 타이밍을 놓쳤다. 이럴 때 무슨 말을 해도 좋을지 그는 모른다. 남의 신경줄을 긁는 말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할 수 있었건만, 중학생 소년들을 두고 ‘비 좀 피할 수 있을까?’ 따위의 말을 꺼내는 법은 모른다. 그는 이발을 할 때를 지나 삐죽삐죽하게 자란 머리를 이마에 얹고 빗물을 뚝뚝 흘리고 서서 입을 꾹 다문 채로 그저 애들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작 치실래요?”

다행히도 하얀 머리칼의 소년이 발랄한 말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속닥거리는 소리도 없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과 합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게…… 부족하거든요, 같이 칠 사람이. 마작은 둘이서는 못 하니까…….”

두 사람은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의자에 가방을 부려놓고 마른 옷을 꺼내고 있는 아카기를 빤히 들여다 본다. 마치 두 사람이 하나의 입으로 말하는 듯 기묘한 일체감까지 느껴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 시간에 마작을 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음침한 소년들이라니, 싸구려 괴담 소재로도 안 먹힐 것 같은 녀석들이었다.

“마지막 한 명은 귀신이라도 자리를 채워주는 건가?”

“…… 네?”

나름 농담이랍시고 던진 소리였는데, 두 소년의 표정이 떨떠름해 지는 것을 본 아카기는 짧게 혀를 찼다.

“내가 낀다고 해 봐야 세 명이니까.”

“셋이니까 칠 수 있어요.”

검은 머리의 소년은 아카기가 눈살을 찌푸려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말을 잇는다.

“3인 마작…….”

“해 본 적 없어.”

“그럼 가르쳐 드릴게요.”

솔직한 마음으로는 내키지 않는다. 지역마다, 마장마다 조금씩 룰이 다른 것은 겪어봤어도 아예 셋이서 마작을 친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 잠시 세 명이 마작을 친다는 상상을 해 보았으나 시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밖은 비가 몰아치고 달리 갈 곳도 없다. 어린애들을 잠깐 놀아주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카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소년들이 눈을 반짝인다. 그 나잇대 애들치고는 얌전한 녀석들이었으나, 그래도 어린애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면역이 없다. 아카기는 살짝 질린 마음으로 “옷부터 갈아입고 올 테니까 준비해 둬.”라고 쏘아붙이고는 등을 돌렸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니 빗물에 차갑게 식었던 몸이 차근차근 데워진다. 아카기는 나른하게 앉아서 대충대충 패를 버렸다. 3인 마작이래도 크게 특이할 것은 없었다. 만수패를 쓰지 않는다는 것, 북을 도라로 취급할 수 있다는 것 등……. 덕분에 4인 마작에 비해 더 점수 나기가 좋고 역 만들기가 쉽다. 아카기는 어린애들 앞에서 담배를 꼬나문 채로 점봉을 주고받으며 몇 국을 하릴 없이 보냈다. 중학생과 마작을 치는 것은 처음이라 녀석들이 그 나잇대 녀석들 사이에서 잘 치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 천 수 억이 오고가는 마작을, 생과 사를 넘나드는 갬블을 했던 아카기에게는 시시할 뿐이었다. 소년들의 타법에서는 얼핏얼핏 날카로운 빛이 스치는 듯도 했지만, 어차피 전부 가짜. 무의미한 짓이다.

“쯔모. 리치 핑후 이페코 북 도라 2에 우라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서 우라도라를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흰 머리의 소년이 “에이, 우라가 붙는 안 붙든 전 들통이에요.” 하며 패를 뒤집고는 작탁 위로 벌렁 엎드린다.

“안 붙었군.”

작탁 위에 볼을 대고 엎드린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남은 점봉을 긁어다가 작탁 위에 내던진다. 검은 머리의 소년은 5천 점봉 하나를 꺼내려다가 나머지 두 사람의 표정이 팍 식어버린 것을 보고는 내버려두었다. 이녀석들과 더 마작을 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애들과 놀아주는 것도 이만하면 되었다. 아카기는 작패를 아무렇게나 휘저어놓고 작탁에서 일어났다.

“역시 이런 건 시시하다…… 그렇게 생각하죠, 아카기 씨?”

작탁에 볼을 대고 말하느라 흰 머리 소년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아카기는 천연덕스러운 말투 속에 섞인 위화감을 눈치채고 멈춰섰다.

“……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은 없을 텐데.”

“저도 아카기예요. 아카기 카이지.”

“이상한 이름이군.”

“얘 이름이 더 이상해요. 이토 시게루거든요.”

이번에야말로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싶었다. 그간 일면식도 없는 자들이 어디서 소문 몇 가지를 주워듣고 와서 제 이름을 지껄이는 일은 그간 몇 번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어느 조직의 끄나풀도 아니고 중학생이나 겨우 됐을 법한 소년들이라니. 흰소리 말라며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되어 돌아본 순간, 저를 빤히 들여다보는 소년들과 눈이 마주친다. 아카기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두 소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이름을 쪼개어 가진 두 소년은…… 그를 닮아 있었다. 특히 이토 시게루라는 녀석은 머리카락이 검다는 것과, 얼굴에 큰 흉터가 있다는 것만 빼면 아카기를 아주 빼다 박은 듯했다.

“내 이름은 누구에게 들었지?”

“궁금하시다면 승부해요.”

이런 걸 노렸던 건가? 꼭 어느 짜고 치는 판에 억지로 주저앉은 형편 없는 도박꾼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쉽게 응해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는 어린애들을 데리고 무슨 승부를 한단 말인가? 아카기는 코웃음을 치며 으레 그랬던 것처럼 “팔 한 쪽.” 운운하며 녀석들을 쫓아내려고 했다.

“팔 한 쪽…… 딱 좋네요.”

“뭐?”

그러나 두 소년은 겁 먹은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나 그의 소문을 듣고 실제로 지더라도 팔이 잘릴 걱정을 하지 않고 있는 건가 싶어 소년들의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진다면 팔이 잘려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둘이서 조잘조잘 팔을 자른다면 어느 쪽 팔이 좋을지, 얼마나 짧게 자를지 따위를 논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낸 아카기가 질린 표정이 되었다.

“아카기 씨가 이긴다면 저희 두 사람의 팔을 각각 하나씩, 받아가세요. 하지만 우리가 이긴다면…….”

두 사람이 나름의 협의를 마친 것인지 이토 시게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때 말할게요.”

“무슨 속셈이지? 난 성가신 일은 질색이야…….”

“절대 아카기 씨를 성가시게 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요. 무엇이 되었든 오늘 밤…… 이 비가 그치기 전에 전부 끝날 테니까요.”

아카기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저를 부담스럽게 올려다보는 아카기 카이지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간 어린애에게 무르게 굴었던 역사가 없는데. 아카기는 무심코 담배 한 까치를 꺼내 물었다가도 결국 불은 붙이지 못하고 끝만 잘근잘근 씹었다.

“……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돈을 원하나? 애석하지만 지금은 빈털털이야.”

“필요 없어요, 돈 같은 건…….”

“야, 필요 없진 않지! 그리고 엄마가 어른이 용돈 주면 감사히 받는 거랬어.”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광기가 얇은 종이 한 장을 대고 서로 맞대 있는 듯했다. 그때 아카기는 깨달았다. 이녀석들은…… 이 승부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아카기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마음. 바로 ‘무욕’.

“무의미한 쪽이…… 좋지 않나요.”

아카기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이토 시게루는 입을 연다.

“그것이 바로 겜블의 본질이자, 죽음의 본질. 아니, 어쩌면 삶의 본질일지도……. 태어나는 것에도 죽는 것에도 의미는 없다. 그러므로 무의미한 쪽이 낫다…… 어줍잖은 합리성따위를 갖다붙이는 것보다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 내 흉내라면 그만 둬. 기분 나쁘군.”

그 말에 두 소년은 서로를 돌아보며 작게 웃는다.

“흉내 같은 게 아니에요.”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 비바람, 영혼까지 그를 빼다 닮은 듯한 소년들……. 싸구려 괴담 속에라도 들어온 것 같다. 소년들은 아카기가 기분이 상해 입을 다물든 말든, 즐겁게 내기의 세부사항까지 일사천리로 정해 나갔다. 이기는 것은 톱에 한정한다. 즉 아카기가 톱이 되면 아카기의 승리, 두 소년 중 한 사람이 톱이 되면 소년들의 승리. 다만 이렇게 된다면 아카기에게는 퍽 불리한 룰이 되므로, 두 소년 중 한 사람이 들통이 난다면 그때는 누가 톱인지와는 상관없이 아카기의 승리인 것으로.

차락, 차락, 차락……. 세 사람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작패를 섞는다. 패산을 쌓고 주사위를 던진다. 몇 번 점봉을 주고 받는다…….

“좋아! 쯔모! 리치 탕야오 이페코 핑후 적 도라 하나, 북 도라까지 하네만!”

들통 직전까지 갔던 아카기 카이지가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로 기뻐하며 펄쩍펄쩍 날뛴다. 어린애들과 놀아주는 감각으로 시작한 마작이었지만 의외로 두 소년의 실력이 나쁘지 않다. 실력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감성이라고 해야 할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 아카기는 조용히 점봉을 준비하는 이토 시게루 쪽을 흘끗 보았다.

“이런 경우엔 점수를 어떻게 내는 거지? 6천 올? 아니면 9천 점씩?”

“6천 올이에요. 3인 마작은…… 3명뿐이니까. 물론 쯔모 손실이 없도록 점수 규칙을 좀 조정해도 되지만…….”

하지만 여전히…… 아카기는 점봉을 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따위 짓은…….”

소년들의 실력이 어떻다 한들 지루함은 가시지 않는다. 방금 아카기 카이지가 기적적인 생환을 이뤄내긴 했으나 이제 남3국. 아카기는 압도적 톱을 달리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의 이변은 없을 게 뻔했다.

“그만 두자……! 어린애들 팔 따위 받아봤자 기분만 나빠질 뿐이야……. 원하는 게 있다면 지금, 똑바로 말해.”

“팔이 싫어요? 그러면…… 손가락은 어때요?”

아카기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작탁 아래에서 시뻘건 녹이 뚝뚝 묻어나는 괴이한 작두를 꺼내온다. 손가락을 끼워 넣을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는 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르겠다. 한눈에 그것이 정말로 사람의 뼈와 살을 자르던 물건이라는 걸 눈치 챈 아카기가 심기불편한 표정을 짓자 소년들이 와르르 웃었다.

“그치만 아카기 씨는…… 이런 승부가 아니면 우리 말 따위는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맞아요, 승부가 아니면 안 돼. 승부로 걸지 않는다면 마음에 안 드는 어린애들의 요구 따위는 그냥 무시하고 도망가 버릴 거잖아요.”

“…….”

그러나 이미 흥은 식었다. 녀석들이 정말로 승부로 파멸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일반인과는 다른 감성으로 아카기를 조여와도 영 흥이 오르지 않는다. 결국 소년들은 아카기에게 승부로 원하는 것을 따낸다는 계획은 포기했는지, 나서서 판을 엎어버렸다.

“아카기 씨는 영혼에 대해 믿나요? 사후 세계라든가…….”

“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런 건…… 살아서는 모를 일이야.”

“그러면 어떤 쪽이 좋을 것 같아요? 사후 세계나 영혼이 있었으면 하세요?”

그다지 생각해 본 주제는 아닌데. 아카기는 대답 없이 담뱃불을 붙였다. 하지만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영혼이니 저승이니 하는 건 없는 쪽이 깔끔하다. 죽으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상쾌하고 기분 좋지 않겠는가? 삶이 끝난다면 그대로 끝나고 싶다. 지리멸렬한 원념 따위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있어요.”

“어린애들 괴담은 관심 없어.”

“그런 이야기가 아니예요, 아카기 씨…….”

순간 등 뒤에서 강렬한 오한이 느껴진다. 아카기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장의 문 밖에…… 누군가 있다. 그림자도 열도 없이 무언가 서 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보여요.”

아카기 카이지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속삭이자, 마장의 문이 삐걱 열린다. 아카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곳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다가온다. 소리 없이……. 소년들은 자연스럽게 무언가에게 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4명인 편이 좋잖아요, 마작은.”

“무슨 장난질이지? 이따위 속임수…… 좋아하지 않아, 나는.”

“수작 같은 게 아니에요.”

아카기는 빈 자리를 흘끔 쳐다보았다.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거기에 앉은 남자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이런 존재감을 가진 인간은 그의 평생에서 단 하나뿐이었으므로……. 하지만 기묘한 일이지. 그가 죽어서, 귀신이 되어 자신과 승부를 재촉하러 지옥에서부터 올라왔다는 것은. 물론 그는…… 그럴 만한 인간이었다. ‘퐁’ 한 마디를 외치지 못해 너와의 승부를 지리멸렬하게 끝내게 되었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지옥에서 되돌아오는 것도, 그 남자라면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래…… 귀신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무슨 수로 귀신이 마작을 칠 수 있지?”

그의 의문은 곧이어 마작패가 저절로 움직이면서 해결되었다. 아카기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이 작탁을 내려다보았다. 그간 여러 도박판, 마장을 전전해왔으나 귀신과 마작을 치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이 진다면 돈을…… 주겠대요.”

아카기 카이지는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를 듣는 듯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전했다.

“돈?”

“이 마을 뒷산에…… 버려진 신사가 있는데, 거기에 돈 가방을 하나 묻어두었다고…… 위치를 알려주겠대요.”

“그다지. 끌리지 않는데.”

“으음, 근데 어차피 죽은 사람들끼리니까. 목숨을 걸고 마작을 칠 수는 없다는데요?”

“대신 이쪽이 진다면 목숨을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악령…… 같은 거라면. (이 대목에서 아카기는 뒷목이 서늘해지며 누군가 고압적인 호통을 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공평하지 않지. 이쪽은 목숨을 거는데 그쪽은 죽어서는 쓰지도 못하는 돈 쪼가리뿐이라면.”

“어…… 그럼 다른 방법도 있대요.”

아카기의 말을 이상한 표정으로 듣던 아카기 카이지가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귀신이래도 영영 존재하는 건 아니에요. 생전의 기억, 감정, 원념 따위가 남아 있는…… 일종의 찌꺼기 같은 거라서. 이승을 떠돌다보면 그런 것들은 점차 옅어지고 흩어져 사라지고 말아요. 그래서 이걸 걸면…… 되지 않겠냐는데요.”

사실 무엇을 걸든, 애초에 아카기는 그 남자와 재대결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미 그때 충분할 만큼 맛보지 않았던가? 그날 밤의 재현이라면……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그 강렬함을 굳이 반복해서 열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기는 잠시 비바람에 무섭게 흔들리는 마장의 창문을 내다보았다. 어쩌면 이곳에 비바람을 불러와 아카기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서는 도무지 잡지 못한 아카기 시게루라는 인간을 기어코 작탁에 다시 불러앉히고자 하는 그 집념으로 비바람을 불러온 것일지도. 아카기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이미 죽은 늙은이를 위해 마작 한 번 쳐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럼 우리도 똑같이 팔 한 쪽씩 걸게요.”

“…… 마음대로.”

차락, 차락, 차락, 차락……. 네 사람의 마작이 시작된다. 아카기는 마작패를 섞으면서 따뜻한 두 소년의 손가락 외에도 종종 차갑고 억센 손가락과 부딪혔다. 정말로 그는 귀신이 되어 돌아왔는가? 오래 전에 끝나버린 승부를 다시 재현하러…….

‘무의미한 짓이다.’

몇 번이고 다시 쳐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날과 같은 승부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날 밤의 강렬했던 기억을 퇴색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아카기는 일말의 책임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카기는 그 남자가 그날 죽지 않았다는 것을 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다. 신문 한 구석에 실린 어느 부고장을 통해서……. 세상을 쥐락펴락 하던 권력자의 최후라기엔 아주 초라하게도, 신문 한 구석에 단 한줄로만 남은 부고. 아카기는 그때 부고장에 적힌 주소와는 정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찾아가지 않았다. 그 당시 묵던 곳의 바로 옆집이었더래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무의미하니까…….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저를 찾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뒤였다. 몇 억엔인가 하는 돈을 전부 탕진하고 폐인이 된 야스오카를 어느 산골짜기의 요양 병원에서 찾아내었을 때, 그의 입에서 ‘와시즈 이와오’라는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 안개처럼 흐릿하게 돌아다니던 그 이름을 뇌 깊은 곳에서 다시 건져올렸을 때. 야스오카는 아카기가 어떤 감상에 잠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 날의 무용담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패잔병처럼, 아카기와 함께 그 광기의 저택을 헤쳐나왔던 일을 떠벌리며 와시즈 이와오의 죽음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이봐, 아카기……. 그녀석의 장례식에는 왜 가지 않은 거야. 난 널 거기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 작자는 죽기 직전까지 널 찾아다녔다는군. 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었다고……. 하지만 우습게도 죽음의 문턱에서 아카기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왕의 운을 타고 난 와시즈가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는 평범한 졸개에 불과했던 야스오카였다. 아카기는 초라한 늙은이가 된 야스오카를 앞에 두고 줄담배를 피우다가, 그대로 떠났다.

‘와시즈…….’

그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던가? 그래서 귀신으로 남아 구천을 떠도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에게서 그날의 기억과 감정, 원념을 빼앗아 잠들게 해 주어야 하는 책임은 아카기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쉬운 상대가 아니다. 책임감이니 뭐니 하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그 엄청난 강운으로 화료패를 쯔모해 온다. 귀신은 이제 입도 목소리도 없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가타부타 말 없이 점봉을 내놓는다. 아카기 또한 점수를 치르고자 점봉을 한 움큼 쥐었다.

“…….?”

쥐는 순간…… 무엇인가 흔들린다. 마치 정교하게 쌓은 성냥개비 탑에서 성냥을 한 움큼 쥔 것처럼, 이대로 손을 놓으면 무엇인가 무너질 것만 같다. 아카기는 점봉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제 주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온한 표정과 달리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심지가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본능은 외친다. 이것을 놓으면 안 된다. 이것을 놓으면…….

‘상관없어.’

억지로 떨리는 손가락을 하나 하나 펴 나간다.

‘죽는 게 좋은 거야.’

잘그락, 땀이 찬 손 안에서 점봉들이 부대끼다가 조금씩 밀려 나온다.

‘어차피 나는…….’

식은땀에 흠뻑 젖고 나서야 간신히 점봉들이 남김없이 작탁에 후두두 떨어진다. 아카기는 의자에 깊게 기대 앉아 소년들이 와시즈 쪽으로 점봉을 몰아주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동시에 제 상태를 돌아보았다. 내려놓을 때는 마치 본능을 거스르는 것마냥 괴로웠던 것이, 빠져나가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다. 아니…… 공허해진다. 치사량까지 피를 채혈당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면서, 조금 달랐다. 무언가 존재의 심지가 되는 것을 빼앗기는 듯한 감각.

그 순간 아카기는 깨닫는다. 점봉에 기억과 감정을 거는 것은 오로지 상대만이 아니었다. 아카기 또한…… 점봉을 내놓는 것으로 감정이, 기억이, 추억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들, 오사무의 라멘 가게의 위치나, 낚시를 하면 자주 낚곤 하는 바닷고기들의 이름들이 먼저 사라져간다. 더 많은 점수를 내어줄 때마다 더 많은 기억이 사라진다. 둑에 구멍이 난 듯 우루루 쏟아져 나간다.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 목소리, 사선을 넘나들고 목숨이 졸아붙을 듯 절절 끓던 승부의 열기, 살갗을 저미는 칼날의 고통……. 그토록 강렬했던 기억들이 무심하게 바스라진다. 바스라져서 어디에 난지 모를 구멍으로 끝없이 줄줄 흘러내린다.

자아란 어찌도 이리 연약한지.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래로 된 집일지도 모르겠다. 뜨겁게 끈적이던 감정들도 어느 순간에 와서는 말라버리고, 자잘자잘한 알갱이 따위로 가득 차게 되는 것. 그래서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것. 지나버린 기억들은 붙잡으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무정히 쓸려내려갈 뿐이라는 것.

한 타 한 타 나아갈 때마다 와시즈 이와오는 아카기 시게루의 존재를 뭉텅뭉텅 깎아 간다. 그러는 동안 아카기의 마작은 점점 형편 없어졌다. 기억 중에는 마작에 대한 것도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작이란 손패를 조합해서 네 개의 몸통과 하나의 머리를 만드는 게임인데…….’ 그 룰을 설명해 주던 이의 목소리가 희미해져 간다. 습기 찬 눅눅한 공기, 매캐한 담배 연기 따위가 멀어져 간다. ‘핑후가 뭔지는 알지?’ 무심코, 손가락이 작패 하나를 멋대로 내버리고 말았다.

“아카기 씨…….”

파라라락, 보이지 않는 손이 손패를 넘어뜨린다. 아카기는 낮게 웃으면서 점봉 수납칸을 더듬거렸다. 그 남자에게 직격을 맞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보아라, 와시즈 이와오. 재현할 수 없을 거라고, 형편 없어질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벌써 점봉 수납칸의 바닥이 만져진다. 그러나 도저히 이게 몇 점인지 계산할 수 없어진 아카기에게, 이토 시게루는 머뭇거리다가 그가 직격 당한 점수를 읊어주었다. 들통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아카기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내던지듯 점봉을 내어주고 작탁 위에 쓰러졌다. 고통스럽지는 않다. 파도가 질금질금 몰려와 모래성을 천천히 허물어뜨리듯이, 그렇게 무너져간다. 그런 기분이었다. 아카기는 문득, 여기가 제 죽을 자리인가 했다. 수많은 돈이 걸린 것도, 뒷세계의 명성이 걸린 것도 아닌…… 어느 작은 도시의 허름한 마작장에서 악령 하나와 귀신이 보인다는 이상한 두 소년들이 지켜보는 이곳이.

‘…… 나쁘지 않아.’

거창하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다. 종종 사람들은 그를 천재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은 형편 없는 인간이었다. 매일 도박판이나 기웃거리며 변변찮은 양아치들과 드잡이질이나 하는……. 그러니 오히려 달갑다. 이 아무 가치도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 그를 아무 의미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차가운 칼질이 좋았다. 인간의 최후가 이런 것이라면, 살아오면서 쌓은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좋다. 아카기 시게루라는 것을 조각조각 갈라 부수어 버리고 그를 그가 아니게 만드는 것이 죽음이라면.

하지만 그것을 자포자기하듯 맞이할 생각은 없다. 점봉이 남아 있다. 그는 아직 아카기 시게루로서 존재하고 있다. 아카기는 떨리는 손으로 작탁을 짚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두 소년과 눈이 마주친다.

그들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 왜? 그러한 의문을 입밖으로 뱉었던 것인지, 소년들은 고개를 젓는다.

‘그렇군.’

아카기는 가물거리는 시야를 고정하려 애써 눈가에 힘을 준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이기고 알아낸다. 그게 저 두 소년과의 승부였지 않았던가. 어차피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카기는 짐짓 미소 지었다.

잘그락 잘그락 잘그락 잘그락……. 네 사람은 말 대신 작패를 섞는 것으로 승부의 재개를 알렸다.

귀신이 척척 패산을 쌓고, 아카기 또한 떨리는 손으로도 잘도 척척 패산을 쌓았다. 문제가 생긴 쪽은 소년들, 아카기 카이지였다. 아직 덜 여문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패산을 쌓다가 숫제 와르르 무너뜨리는 게 아닌가.

“윽……. 죄송, 죄송해요.”

“…… 다시 섞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악령이 화를 내든 말든, 아카기는 애써 쌓은 패산을 무너뜨리면서 무심코 소년들을 살폈다. 이토 시게루가 아카기 카이지의 등을 도닥이고, 식은땀을 훔친 소년이 간신히 패산을 쌓아올린다. 이토 시게루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 그들의 창백한 얼굴이 어두운 작탁 위에 동동 떠 있었다.

악령과의 마작은 어린애들에겐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아카기는 무신경하게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툭툭 패를 버려댔다. 귀신 같은 감각으로 어떻게든 게임을 이어나가고는 있지만 전처럼 ‘제대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느낌이 오는 대로 뽑은 패를 손에 넣고, 버리고를 반복했다.

그런데 와시즈는 귀신인 채로 어떻게 팔을 받아갈 생각일까, 악령은 악령만의 방식이 있는 것인가……. 아카기는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생각을 그저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저 상태에서 팔이 잘린다면…….

죽겠지, 녀석들은.

와시즈의 리치, 아카기는 안전패를 골라 버리려다 우뚝 멈춰섰다. 실은 이제 다른 사람의 점봉을 계산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대강이나마 와시즈가 압도적인 점수 차로 톱을 달리고 있고, 두 번째는 이토 시게루, 세 번째는 자신, 라스는 아카기 카이지라는 점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꽤 큰 차이로 자신이 2등이었겠으나 직전에 와시즈에게 직격 당해 잃은 점수가 꽤 컸다. 아마 이대로라면…… 와시즈의 쯔모만으로 아카기 카이지는 들통이 난다. 그대로 승부는 끝이 나고, 자신과 소년들은 패배한다. 아마 와시즈 같은 강운의 남자는 몇 바퀴 돌리게 하면 제 화료패를 떠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뭐가 어떻단 말인가? 그것으로 이 소년들이 팔이 잘려 죽는다면…… 그것대로 녀석들의 운명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기가 두 소년과 눈을 맞추었을 때.

잠시 그는 그 맑은 두 쌍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 큭, 하하, 하하하하!”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주 잊었으니까. 살아 생전에도 자주 잊어버려서 주변 사람들을 꽤나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그때 죽기로 했던 것이었는데.

자신은 그날…… 1999년 9월 26일에 죽기로 했고, 죽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더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그것을 깨달은 아카기는 슬픔인지 기쁨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몸을 떨며 웃었다. 그대로 깨끗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무엇인가를 세상에 남겨 버린 것인지…… 어째서 미련을 갖고 악령이 되어 떠돌았는지.

“크크크…… 아, 미안하게 됐군. 미안하게 됐어…….”

빨리 승부를 재개하라며 채근하는 와시즈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아카기는 맑은 눈동자를 한 두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못 보는 건가…… 귀신끼리도?”

“으음, 그렇더라구요.”

“그래……. 그런데 너희들에게는 보인다고.”

소년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토 시게루는 잠잠히 제 패를 만지작거릴 뿐이었지만, 아카기 카이지는 아카기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안타깝지만 비밀로 하기로 한다. 아카기는 한첨 전부터 위험한 기운을 풍기며 고요히 웅크려 있던 이토 시게루를 보았다. 역시, 그들의 눈에는 자신이 비치지 않는다. 그들의 망막에 맺히는 상은 오로지 서로와 마장의 풍경뿐. 망막에도 맺히지 않는 상을 대체 어떤 기관으로 어떻게 본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지만 녀석들은 자신을 볼 수 있고, 아카기 또한 그들을 볼 수 있다. 원리가 무엇인지 어떤 우연과 계획과 기적이 겹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카기는 매만지던 안전패를 다시 손패 안으로 넣고, 안커로 들고 있었던 생패인 서를 쥐었다.

“역시…… 몇 번이고 생각해도 이상한 이름이야……!”

탕, 아카기가 서를 내려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토 시게루가 손패를 엎는다. 안커인 백, 발, 중, 8통. 마지막으로 단 한 개 갖고 있었던 서. 아카기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파안대소를 하며 의자에 깊에 몸을 기댔다. 이 몇 국의 반장전만에…… 그간 잊었던 세월만큼 늙은 듯이 몸이 무겁다. 아니, 어차피 자신 또한 유령이므로 착각인 것일지도. 아카기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마구 화를 내는 것 같은 와시즈의 기척을 느끼며 씩 미소 지었다.

“미안하게 됐군, 와시즈…… 하지만 애초부터…… 시시한 남자였어, 나는.”

그래도 그토록 원하던 재승부에, 결국은 어울려주지 않았던가. 이것 또한 이 두 소년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못했을 일이리라. 그것을 이해해 준 것인지, 아니면 흥이 식은 것인지. 아카기는 어쩐지 와시즈가 혀를 몇 번 차고는 사라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이제 제 차례이리라. 소년들은 그다지 슬픈 기색도 없이 부스러져 가는 아카기를 지켜 보고 있었다. 물론…… 어린애들의 눈물 따위는, 딱히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아카기는 두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아카기는 픽 웃고서 마지막까지 물고 있던 담배 꽁초를 튕겨 버렸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다면 승부에서 이기고 나서’ 묻기로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아카기 시게루는 패배했다. 패배자는 이대로 깨끗하게 사라져 주어야겠지.

그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웃었다. 한 번도 그리워해 본 적 없었던 것처럼,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었던 것처럼.

“젠장맞을…… 치우는 사람의 입장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라고!”

카이지는 신경질을 내며 빗물에 푹 젖어 못 쓰게 된 담배며 마권이며 하는 것을 쓰레기봉투에 마구 쏠아 넣었다. 어젯밤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쏟아붓더니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카이지는 엉망이 된 묘비를 닦아내며 푹 한숨을 쉬었다. 어찌 보면 꽤나 단촐한 비석, ‘아카기 시게루’라는 이름 하나 박혀 있을 뿐인 이 비석엔 어찌나 참배객이 많은지. 게다가 땡중 놈이 긁어다가 비석을 떼어가질 않나, 공물이라도 바치겠다는 건지 담배, 빠칭코 구슬, 에너지 드링크 따위를 잔뜩 올려놓고 가 도쿄의 여느 주택가에 흔히 있을 법한 작은 공동묘지에 썩 어울리지 않는 몰꼴이 되었다. 심지어 그게 비에 젖고 상하면 전부 쓰레기가 되니 치우는 것은 전부 그의 몫이다.

“비석 조각이니 뭐니, 어차피 다 돌덩어리일 뿐이라고. 애초에 그딴 거에 기대는 멍청이들이 대박이 날 리가 없잖냐……!”

한참 성질을 내며 박박 치우다보니 꽤 멀끔해졌다. 아마 일주일도 안 있어 금세 쓰레기들로 가득 차겠지만……. 카이지는 내내 굽히고 있던 등을 펴며 이름이나 겨우 남은 앙상한 묘비를 쓰다듬었다.

“이대로라면 새로 묘비를 세워야 할 판이잖아…… 참내, 그 땡중 자식. 남의 묘비를 깎아갈 가면 돈이라도 내라고…….”

발이 닳도록 들락거리는 도박꾼들에게 아카기 시게루의 묘비석으로 만들어진 부적이라고 개당 천 엔씩만 받아서 팔았어도 카이지는 돈방석에 올랐을 것이다. 물론 아카기 묘비석 부적에 효능이 있을 리가 없다. 있었다면 제일 큰 조각을 떼어 가서 당장 빠칭코를 돌렸던 카이지부터가 대박을 맞았어야 했을 것이다. 카나미츠 스님의 말로는 49재도 지나지 않아 고인의 묘비를 떼서 빠칭코를 돌린 카이지에게 부처님이 벌을 내린 거라던데, 부처님이 지옥에 떨어졌을 게 분명한 아카기를 위해 화를 내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귀신이라는 게 있어서 아카기가 정말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 그런 요행에 기대지 말라고 심술이나 부린 거겠지.”

하지만 죽어버리면서 유산 한 푼 안 남기고 쌍둥이 애나 덜컥 안겨준 주제에,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어디 덧난단 말인가? 카이지는 비석에 손을 얹고 서서 공연히 고개만 처들고 하늘을 봤다. 살아 있을 때도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영감쟁이. 쉰 셋에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었길래 그렇게 겉늙어 보였는지 모르겠다. 이게 다 담배만 뻑뻑 피워서 그런 것이다……. 내심 마구 욕을 해도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크윽, 젠장…….”

“카이지.”

“어, 으응?!”

앳된 소년의 목소리에 황급히 눈가를 비비고는 돌아보자, 두 소년이 저를 빤히 올려다 보고 있다.

“너희들! 대체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걱정했잖아!”

간밤에 비가 그렇게 오는데 대체 어디를 갔다 온 거냐, 집에는 들어와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하지 않았느냐 잔소리를 쏟아내며 두 소년을 살피는데 어딜 쏘다닌 건지 몰꼴이 엉망이었다. 열심히 빨아준 운동화는 진흙 투성이에, 산비탈에서 구르기라도 한 건지 흰 셔츠에는 나뭇잎도 잔뜩 묻어있다. 두 소년은 카이지의 잔소리에는 딴청을 피우다가, 그가 두 소년이 낡은 검은색 수트 케이스 두 개를 하나씩 나눠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짠, 하고 들어 보인다.

“카이지, 카이지, 이거 봐봐.”

“빨리 열어 봐.”

“뭐? 이게 뭔…… ?!”

소년들은 카이지를 재촉하다가도 그의 행동이 영 굼뜨자 저들이 참지 못하고 먼저 진흙이 낀 수트 케이스의 걸쇠를 열어버렸다. 덜컹, 벌어진 수트 케이스 안에서 지폐 다발이 쏟아진다. 카이지는 잠시 그 현실감 없는 양에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가, 가짜지, 이거……?” 하며 몇 다발을 두 손 가득 쥐었다. 지폐 특유의 냄새, 질감……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이것은…… 전부 진짜 돈이다……! 카이지는 잠시 멍청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돈다발과 두 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너, 너희들 대체 이걸 어디서……. 후, 훔친 거야? 설마?”

“그런 거 아냐.”

“승부해서 딴 건데, 마작으로.”

“헛소리 하지 마……!”

카이지는 허둥지둥 주워담던 지폐 다발도 내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너희 텐 아저씨랑, 히, 히로한테 마작 배운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 중학생이 이런 돈 딸 수 있을리가 없다고……!!”

“진짜인데…….”

“카이지는…… 걱정이 너무 많아, 항상. 어차피 이 돈 주인, 죽은 지 수십 년은 됐을 거라고……!”

“아카기! 이토! 똑바로 안 말해? 너희들 진짜 혼나고 싶어……?!”

빽 소리를 지르며 쌍둥이들을 붙잡을래도 이미 천문학적인 돈을 보고 놀란 가슴은 제대로 팔다리를 움직여 주지 않는다. 카이지가 우스꽝스럽게 팔다리를 허공에 휘젓는 동안 소년들은 바닥에 떨어진 돈을 알뜰하게도 주워 모으고, 얄밉게도 쏙쏙 빠져나간다.

“자식을 성으로 부르는 부모는 카이지뿐일 거야.”

“그야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니까…… 카이지는 바보네.”

“너, 너희들!! 부모를 우습게 보지 마……!”

“어차피 전부 엔도 아저씨랑 긴지 씨한테 진 빚이지? 다녀올게, 카이지.”

“거, 거기 안 멈…… 끄악!”

턱, 무언가가 다급하게 쫓아가려던 카이지의 발목을 붙잡는다. 하필 아카기 시게루의 묘석에 걸려 넘어질 것은 또 무언가. 카이지가 정강이를 부여잡고 일어났을 땐 몸이 가벼운 소년들은 이미 한참 멀리 달아난 후였다.

“이, 이자식들이 누굴 닮아서…….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아카기 시게루……!!”

결국 남은 것은 말 없는 묘비와, 공동묘지를 시끄럽게 깨우는 카이지뿐. 카이지는 분을 참지 못하고 아카기 시게루의 묘비에 발길질을 했다가, 이 남자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은 이 남자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다지 제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 몸으로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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