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모리] 기억의 장미

2024 은과 금 앤솔로지 <이기고 또 이긴다 재가 될 때까지> 참여 작품

이것저것 by 공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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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은과 금 앤솔로지 <이기고 또 이긴다 재가 될 때까지>에 투고했던 작품입니다!

멋진 앤솔로지에 참여할 수 있어 정말 기뻤습니다…!

모리타가 긴지 씨에게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모리타는 썩 개운치 못한 기분으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이 다다미 넉 장 반짜리 곁방을 비춘다. 짧은 밤으로는 긴 한낮 동안 달궈진 방 안의 열기를 식히기에 역부족이었다. 웃통을 벗어 던지고, 얇은 담요 하나 덮지 않고 잠을 청했는데도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여름이 다가온다. 그가 원치 않아도 계절은 하염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모리타는 가닥가닥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물때 낀 흐릿한 거울에 창백한 얼굴의 청년이 비친다. 모리타는 피곤에 푹 꺼진 제 눈을 노려보다가 수도꼭지를 열고 어푸어푸 물을 끼얹었다. 작은 화장실에서 세면대 하나를 놓고 씻는 데도 이제 이골이 난 참이었다. 간밤에 흘린 땀을 닦아내고, 면도까지 마치고 나니 음울한 빛이 얼굴에 서려 있긴 해도 꽤 봐 줄 만한 꼴이 되었다. 맨들맨들해진 턱을 매만지던 모리타의 손은 자연스레 헐벗은 가슴팍으로 향한다. 탄탄한 왼 가슴에는 물에 젖어 옅은 핏빛이 비치는 거즈 붕대가 나달거리는 의료용 테이프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모리타는 무신경하게 손톱 끝으로 갈작갈작 테이프를 긁어댔다. 손톱 아래에 핏물이 스미고 간신히 아물어 가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데도 긁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심장 속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간질거린다. 왼쪽 가슴 안에 있던 게 펄떡이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깃털 뭉치로 변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벌써 며칠 째……. 툭, 기어이 거즈가 세면대로 떨어지고 만다. 그제야 드러난 가슴팍엔 희미한 흉터로만 남았던 오랜 상처 위로 죽죽 그어진 상흔들이 간신히 아물어 가고 있었다. 상처는 제각각이었다. 손톱으로 살갗을 마구 긁어 놓은 얕은 생채기부터, 면도날로 죽죽 그은 날카로운 자상, 울퉁불퉁 거칠게 헤집어진 상처까지 앞다투어 입을 벌리고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울 너머로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모리타의 손가락이 마치 자유 의지라도 가진 것마냥 스물스물 상처로 기어간다.

“윽…….”

짧게 깎인 손톱이 상처를 헤집어 벌리자 불에 덴 듯한 고통이 뒤통수를 뻐근하게 당긴다. 한 손으로는 세면대를 부서져라 쥐고서, 온몸을 비틀면서 고통스러워하는데 상처를 헤집는 손가락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끅, 흐으…….”

손톱 아래로 살점이 짓이겨지고, 아물어 가던 상처가 기어코 터져 피를 줄줄 흘린다. 툭, 투둑, 나신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흰 타일 바닥을 점점이 물들일 때쯤 모리타는 상처에서 손가락을 뽑아냈다.

“허억!”

좁은 화장실이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저릿한 고통이 조금 가시고 나서야, 그는 수도꼭지를 열어 그 모든 흔적을 몰아내었다. 흰 세면대, 타일, 몸에 남은 핏자국이 물에 섞여 수챗구멍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사라진다. 모리타는 익숙하게 화장실 찬장을 더듬어 거즈 붕대와 의료용 테이프를 꺼냈다. 저 밝은 바깥세상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모리타는 백주대낮에 길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병원 앞에 서 있었다. 이마며 옷깃 새로 보이는 살갗이며 붕대를 채 다 풀지 못한 채로 실밥 몇 개를 몸에 남기고 병원에서 쫓겨나듯 나왔을 때, 모리타는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도시는 넓고 훤한 만큼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길을 잃고 병원 정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모리타를 붙잡은 것은 사오리였다. 카무이의 밤, 그 광기의 밤에 휘말리고 난 뒤 사오리는 도쿄에 더는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제 그는 도쿄의 맨 얼굴을 보았다.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은 금세 삼켜져 버릴 것만 같은 비정한 도시……. 그것은 모리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오리는 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 왔다. 한 때 도쿄를 집어삼키겠다, 금이 되겠다 공언하던 자신만만한 청년은 온 데 간 데 없이 모리타는 도쿄라는 도시에 짓눌릴 듯 어깨를 움츠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사오리와 함께 이 마을에 정착한 지 1년 남짓 흘렀다. 청년 대부분이 떠난 쇠락한 어촌 마을, 고향이었대도 사오리도 공부를 하겠다 대학을 가겠다 떠나 온 지 10년은 족히 된 곳이었다. 간호사 자격증이 있는 사오리는 금세 어느 요양원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대도 부부도 남매도 아닌 두 괴이쩍은 남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 그래도 성실하고 싹싹한 사오리와 덩치 좋고 멀끔하게 생긴 모리타가 폐쇄적인 마을의 비좁은 틈에 끼어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모리타는, 도쿄에선 배운 것 없고 빽도 없는 빈 두 주먹뿐인 청년이래도 이런 작은 마을에선 귀한 몸이었다. 특히 요양원 일엔 힘 좋은 남자가 필요할 때가 많은 것이다. 사오리 덕에 모리타 또한 어영부영 요양원 일을 돕게 되어 요양원 곁방까지 공짜로 얻어 살게 되었다.

“모리타! 모리타 군!”

오늘도 마을회관 앞을 지나니 마당에서 삼삼오오 모여 그물을 정리하고 있던 마을 주민들이 그를 불러 세운다. 요양원에서 주문한 쌀 포대를 자전거에 이고 가느라 적당히 손만 내젓고 지나치려는데 앉아서 물이라도 한잔하고 가라는 둥, 날도 더운데 쉬었다 가라는 둥 성화였다. 결국 모리타는 못 이기는 척하고 마을회관으로 들어섰다.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됐어!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지?”

“네? 아…… 아, 그럼요…….”

“쯔쯔쯔, 일 좀 쉬엄쉬엄해. 그거 조금 늦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려고.”

모리타는 근처에 앉아서 어색하게 웃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른들 사이에 껴서 눈요깃거리 노릇이나 하고 있자니 손이 근질근질하다. 하지만 그가 낚시 그물을 정리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일어설라치면 호들갑을 떨면서 다시 앉힌다. 모리타도 근 1년간 이 마을에서 지내면서 이럴 때 대처할 방법 정도는 몸에 익혔다. 그것은 그들이 만족할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다. 모리타는 어색한 표정을 애써 펴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를 둘러싼 마을 어른들은 모리타를 세치 혀 도마 위에 올리고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다나카 댁도 너무하네, 그렇게 안 봤는데. 그래도 예비 사위인데 방 한 칸 내 주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바깥 생활을 시켜?”

“하하하…….”

모리타는 공연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사오리와 모리타의 묘한 동지애를 사랑으로 해석하기로 정한 듯했다. 마을회관에 모인 이들이 저마다 “맞네, 맞어.”라느니, “다나카가 너무했지.”라며 맞장구를 친다. 사오리 네 부모님을 연인의 고향까지 따라 내려온 남자를 1년이 넘도록 여즉 사위로 인정하지 않는 냉혈한이라 여기는 듯 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두 사람이 언제 결혼할지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은 사오리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모리타는 종종 저녁 식사에 초대받거나 마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은근히, 혹은 드러내 놓고 언제까지 요양원 곁방에서 지낼 거냐고 묻는 그들의 질문에 얼버무리느라고 진땀을 빼곤 했다. 처음엔 귀한 딸내미를 꼬여 낸 놈팡이 취급을 하더니 언제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젠 언제 식을 올릴 거냐고 성화다. 그럴 때마다 사오리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는 걸 종종 목격한 모리타로서는 매번 슬그머니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늘었어…….’

그동안은 사오리 네 부모님과 할머님께만 들으면 됐던 말들이 어느새 마을 전체로 퍼지고 만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마을에 잘 녹아들었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하건만, 한편으로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했다.

멀리 바닷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에 짠 내음이 실려 오는 평화로운 마을……. 잠시 고개를 들면 흐린 하늘에 바닷새 하나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사오리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니 차치해 두고서라도, 다른 누군가와 결혼해서 오손도손 가정을 꾸려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결마다 소금기가 자글자글 배어든 오래된 집에 묵묵한 아내와 생때같은 자식들을 두엇쯤 두고 느릿느릿 늙어 가는 삶…….

가슴 속이 참을 수 없이 가려워졌다.

 

 

 

알 수 없는 곳을 헤맨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빌딩 숲 사이, 마천루의 꼭대기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세상을 밝힌다. 도시 위로 내리쬐는 태양은 강렬하다. 그 아래, 하찮은 얼룩 같은 모리타 정도는 금세 태워죽일 듯이 강렬하다. 그 햇빛 아래서 모리타는 제 몸이 온통 피투성이인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옷 소매로 문질러 닦아도 끈덕진 핏자국은 더욱 크게 번질 뿐. 모리타는 건물 그늘로 도망치듯 숨어들었다. 그러나 태양은 마치 낱낱이 그의 죄를 밝히려 드는 듯 하늘 저 높은 곳의 길을 따라 내려오며 빌딩의 그늘을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모리타는 혼비백산하여 그늘이 들쑥날쑥 짧아지고 길어질 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오래 몸을 숨기기 위해 그늘을 건너다녔다. 영영 도망칠 순 없으리라,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는 두려움에, 부끄러움에 도저히 밝은 태양 빛 아래에 설 수 없었다. 모리타는 도시의 곳곳으로 죄악을 실어 나르는 가느다란 정맥과 같은 뒷골목을 두서없이 뛰어다녔다.

나는 금이라고 불리고 싶다…….

막막한 골목 골목마다 익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그것은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 하늘에서 벼락처럼 내리치는 듯 모리타가 아무리 도망쳐도 그를 쫓아와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은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만.”

숨이 턱 끝까지 차서 비틀비틀 어느 골목의 벽을 짚고 멈춰 선 모리타는 창백하게 질려서 제 두 귀를 틀어막았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듯 익숙한 듯 멀게만 느껴지던 도시가 어느새 아는 골목의 모양이 되었다. 모리타는 이 도시를 안다. 도시의 이름은 도쿄, 사람을 업신여기고 짓누르는 도시. 도시의 핏줄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고 돈이고 욕망이다.

내가 발톱…….

그가 보아 왔던 도시가 욕망으로 맥동했듯이, 지금 그를 몰아세운 도시의 벽은 그의 잃어버린 욕망들을 속삭인다.

“긴지 씨.”

창백하게 질린 모리타는 등을 둥글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목소리는 그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이어진다.

자네의 강한 운이 날개!

저를 추어올리는 그의 말이 달콤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간 모리타 테츠오란 이를 그토록 필요로 해 준 사람도 없었고, 그의 가능성을 펼쳐 준 사람도 없었다. 제가 날개였다면 그가 날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와 그의 젖은 깃을 골라 주고 비상하는 법을 알려 준 히라이 긴지, 그의 공이다.

둘이서 이 나라의 아성을 치는 거야……!

아, 그때 모리타는 진실로 긴지의 곁에서 꿈을 꾸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두 사람의 왕국을 다스리고 싶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 모리타라는 날개를 높이 날아오르게 하는 상승기류였다. 높이, 너무도 높이……. 그래서 지상에서는 멀어지고 감히 닿아서는 안 될 태양에 닿고 말았을 때…….

어차피 인간은 모두 악……!

밤의 광기가 가시고 태양 아래 모든 것은 낱낱이 드러난다. 그가 동경하던 남자의 말이 더는 그를 현혹하지 못한다. 도취의 열기는 순식간에 식었다. 더는 ‘악’이라는 말을 전처럼 선선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 모리타는 악을 안다. 그것의 잔혹함을, 지리멸렬함을, 추악함을 안다. 마치 빌딩에 비친 하늘이 진짜 하늘인 줄만 알고 날개를 휘저어 날아가다 단단한 빌딩 벽에 부딪힌 작은 새처럼, 모리타는 힘 없이 추락한다.

꿈은 산산이 부서진다.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튕겨 나오듯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온몸이 축축하다. 그러나 홧홧한 가슴의 통증으로 제 몸과 이부자리를 적신 것이 오로지 땀뿐이 아닌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자는 사이에 상처 위에 댄 거즈 위를 얼마나 긁어댔는지, 피에 젖은 거즈는 이미 떨어져서 이불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두 손은 피로 흥건했다. 새 살이 차오르기도 전에 매일 긁어댄 상처…….

실망하여 스스로 떠나온 것은 자신이었다. 히라이 긴지를 떠나고 얼마 간은 꽤 잘 지내기까지 했다. 상처는 이미 오래전에 아문 것이었고, 단 한 번도 그를 거슬리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모리타가 더는 그리움을 그저 마음 깊숙한 곳에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제야 모리타는 매일 밤 악몽을 꾸게 되었다. 그제야 도쿄가 제게 남긴 유일한 흔적, 그가 한 때 히라이 긴지와 함께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가 떠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꿈이 덧없이 부서져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상처 또한 희미해져 가는 흉터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게 더는…… 사라지게 둘 수 없었다. 모리타는 홀린 듯이 방을 뒤진다. 겨우 사람 하나 살 수 있도록 구색을 갖춰둔 방이래도 식칼 하나 정도는 있었다. 희미한 새벽빛에 치켜든 날이 번쩍 빛난다. 역수로 쥐고 힘 있게 가슴 위로 내지르던 손길은 살갗 하나를 베지 못하고 멈추었다.

“헉, 흐윽…….”

처음 그의 가슴에 상처를 냈을 때와는 다르게, 날을 뉘여 심장 위를 겨누는 칼끝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때에는 확신이 있었다. 히라이 긴지의 말이라면 어디든지, 지옥이든 천국이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의 말을 따라 죽기로 결심했을 때에도 손은 떨리지 않았다. 아니면 그때에는 죽으리라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얕은 상처만을 남기기로 생각하고 더 깊이 찔러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임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은 왜 이다지도 몸이 떨리는 것인가? 어쩌면 이번에는 단지 얕은 상처만 내고 멈추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부들부들 떨리는 칼끝이 쿡, 시뻘건 상처 위로 빨려들듯 찔러 들어간다. 모리타는 차가운 날이 뜨거운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느낌에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그의 몸을 계속 떨리게 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리타도 알 수 없었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두려움인지 흥분일지 모를 감각이 혈관을 달린다. 간지러워 참을 수 없어 참을 수가 없다. 마치 그의 가슴을 모판 삼아 무언가 피어나려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는 가슴 속에 뿌리내린 씨앗이 제대로 꽃을 틔울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일이리라.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눈동자가 스르르 풀리고, 더욱 깊이 날이 그의 안으로 파고들려던 순간…….

“모리타!”

가느다란 팔에서 그런 힘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통굽 슬리퍼를 마구 벗어 던지고 달려온 사오리가 그의 손목을 잡아챈다. 식칼은 낡은 다다미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너 지금 이게 무슨……!”

모리타를 돌려세운 사오리는 희미한 빛으로도 금세 그의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읽어낸 듯했다. 짝! 왼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씩씩거리던 사오리는 몇 번 더 모리타의 따귀를 내리쳤다. 속에 든 것 하나 없는 허수아비마냥 모리타의 몸이 휘청거린다. 분풀이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선서를 한 의료인이었다. 양심 넘치는 자는 아니었더라도 광기의 밤을 헤쳐 나온 동지가 실혈로 가늘게 떨기 시작하는 것을 그저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사오리는 허튼짓하지 말라며 단단히 윽박지르고는 피 묻은 식칼을 들고 나갔다가 응급처치 도구와 함께 돌아왔다.

상처를 닦아내고 소독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사오리는 일부러 거칠게 모리타의 상처를 다루었으나, 모리타는 그정도로 신음을 흘릴 만큼 나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결국 사오리는 깊은 한숨과 함께 먼저 고집을 꺾었다.

“언제부터야?”

“…….”

사오리가 도끼눈을 떴지만 모리타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악몽에 시달리며 자해를 시작한 것은 어느 때라고 딱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그간 모리타는 낮에는 간신히 멀쩡한 사람인 척 행세할 수 있었지만 홀로 남을 때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곤 했다. 가슴의 상처도 한동안 눈치를 채지 못하다가 옷 위로 핏물이 흥건히 배어 나오고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드레싱을 마칠 때까지 사오리도 다시 입을 다물었다.

모리타의 엉성한 처치가 아닌 사오리의 깔끔한 드레싱이 상처 위에 덮인다. 모리타는 내키지는 않지만 짧게 감사 인사를 할 작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 날아들기 전까지는.

“차라리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뭐?”

“도쿄에…….”

그리고 히라이 긴지라는 남자에게. 모리타는 사오리의 꾹 다문 입술로도 그가 하려던 말을 읽는다.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그리고 난 손 씻었어. 그런 일에는…….”

모리타는 순간의 떨림을 삼키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더 사오리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강경히 표현하는 딱딱한 얼굴이었으나 사오리는 인내심을 갖고 재차 모리타에게 말을 걸었다.

“내 말은 다시 뒷세계 일을 하라는 게 아니야.”

“그럼?”

“넌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과 끝맺음을 지어야 해.”

사오리의 말에는 기이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순간 모리타는 사오리에게 네가 뭘 아느냐고, 저와 긴지 선생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뭐 잘났다고 떠드냐며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끝맺음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이미 다 끝난 일이야.”

그 말이 거짓임을 모리타도 사오리도 알았다. 긴지가 모리타와의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모리타에게만은 긴지와의 일이 제대로 매듭 지어 지지 않았다. 더는 긴지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아 떠나왔을 뿐, 모리타의 가슴에는 여전히 긴지의 흔적이 새겨져 있지 않던가. 모리타 스스로 덧새긴 흔적이…….

“도쿄에 가, 모리타.”

도쿄, 그 두 글자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청년 모리타 테츠오를 받아 주었던 도시, 그가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던 도시, 끝내는 도망쳐 온 도시……. 증오와 그리움과 무력감이 한데 소용돌이쳐서 모리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사오리의 목소리를 고분고분 들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도쿄라고 그럼 제가 속할 곳이란 말인가? 속에서 울컥 분기가 치미는 듯도 했으나 모리타는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화만 삭였다. 결국 그는 사오리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는 평화롭고, 정답지만……. 자신이 있을 곳은 아니었다.

“그동안…….”

오래 갈등하던 모리타는 그만 굴복하고 만다.

“그동안 고마웠어, 사오리.”

침통한 작별 인사였다. 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사오리의 눈가가 사르르 풀린다. 모리타는 사오리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며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리라고 예감한다. 두 사람은 광기의 밤을 함께 헤쳐 나오기 위해 잠시 동료가 되었을 뿐이니, 그 밤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만 헤어지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모리타도 사오리도 선뜻 영영 작별하자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날이 새도록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거대한 도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욕망을 빨아들이고, 욕망이 빨려 껍데기가 빈 인간들을 제 속으로 구석구석 채워 넣는다. 모두가 어딘가 행선지가 있는 듯 분주히 흩어지는 도쿄역에서,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로 붙박여 서 있는 모리타는 꽤 눈에 띄었다. 그는 제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일부러 어깨를 치고 지나가도 미동도 않고 손차양 너머로 태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쏟아지는 태양 빛이 빌딩 숲에 산란하여 도시 곳곳을 훤히 밝힌다. 모리타는 태양에 맞서듯 반사적으로 움츠러들려는 등을 꼿꼿이 폈다.

긴지 씨.

모리타는 인파 가득한 역에 서서 제 배를 지그시 눌러 보았다. 셔츠 너머로 복대처럼 둘둘 감은 붕대 아래,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이 느껴진다. 일 년을 지낸 그 마을에서 온전히 가지고 온 것은 이것뿐이었다. 나머지 가방 안에 든 짐은 도쿄를 떠나던 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모리타는 사오리에게서 어째서 선선히 도쿄로 가라는 말이 나왔는지 깨달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도쿄를 떠나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히라이 긴지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매일 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악몽이 그 증거였음에도, 모리타는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다.

긴지 씨, 긴지 선생님.

입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한때는 닳도록 부르던 이름을, 오랫동안 혀 위에 올리지 않았던 이름을.

당신도 가끔 제 꿈을 꾸십니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제 떠남이 그를 뒤흔들어 놓았으면 하면서도, 그처럼 단단하고 거대한 사람이 저 하나로 무너지진 않을 거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히라이 긴지를 직접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리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대도시는 그 법칙을 따르는 이라면 누구든지 타인의 시선 아래에도 놓이지 않으리라는 약속, 익명성을 선사해 준다. 모리타는 한 때 지긋지긋했던 도시의 베일을 선선히 뒤집어쓴다.

그렇게 다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간다. 그에게로 돌아간다. 배 위로는 시퍼렇게 날이 든 칼을 품고, 가슴에는 기억으로 틔운 핏빛 장미를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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