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모리] HEARTBREAK ANNIVERSARY

이것저것 by 공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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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월 디페스타 fkmt 쁘띠존에서 무료 배포한 중철본 동인지입니다.

대강 모리타가 짝사랑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HEARTBREAK ANNIVERSARY 


 


 

끙, 모리타는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데구르르 굴러 일어났다. 넓은 침대 위에는 모리타뿐이었기 때문에 그가 맨몸에 시트를 두른 채로 바닥에 쿵 떨어지는 동안 핀잔 주는 사람도 없었다. 모리타는 멍하니 주저앉아 익숙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시는 그와 몸을 섞지 않으리라 생각한 게 고작 며칠 전이었다. 사내자식이 되어서 다른 남자에게 뒤를 대 주고 있는 꼴이 썩 유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와의 관계가 그저 고통과 인내뿐이었더라면 참 좋았으리라. 긴지를 따르겠다고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침대에 엎드려서 베개 속에 얼굴을 묻은 채로 그에게 모든 것을 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 며칠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모리타를 기어코 붙잡아 온 긴지는 그가 고통으로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모리타에게 한껏 쾌락을 부어 넣고, 그의 수치스러워하는 얼굴을 즐겨서…….

“윽…….”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밤새 들쑤셔진 배 속이 술렁거린다. 관장액이며 젤을 들이부은 속이 헛헛하다. 아니면 밤새도록 담고 있던 것이 빠져나간 탓일지도……. 모리타는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모리타는 혼자 제 머리를 마구 긁다가 벌떡 일어났다. 해가 중천인데 언제까지고 늦장을 부릴 수는 없다. 그리 생각하며 시트 한 장 두르지 않은 채로 침실을 나서자마자 고소한 커피 향이 그를 반긴다.

“늦었군, 자네.”

“예? 예에…….”

모리타는 눈을 끔뻑이며 블랙커피를 내리고 있는 긴지와, 식탁에 차려져 있는 단출한 아침 식사를 번갈아 보았다.

“아직…… 계실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그가 먼저 일을 보러 나갔으리라 생각했다. 모리타는 얼굴을 붉힌 채로 더듬거렸다. 긴지는 벌거벗은 채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모리타에게 가볍게 턱짓한다.

“우선 들게나. 시장할 텐데.”

“네…….”

모리타는 쭈뼛쭈뼛 식탁 앞에 앉았다. 긴지가 있을 것을 알았으면 침실에서 맨몸으로 덜렁덜렁 나오지 않았을 텐데. 멋쩍게 고개를 숙인 모리타의 앞으로 스크램블 에그니 토스트, 커피 따위가 놓이지만 식욕은 돋지 않는다. 모리타는 차가운 배를 문지르며 미적미적 포크를 들었다.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아침 식사보다는 샤워 생각이 간절한다. 그렇다고 긴지가 그를 위해 손수 준비한 식사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긴지는 주방에 기대서서 모리타가 와구와구 아침을 먹어 치우는 것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모리타는 미소를 띤 채로 저를 내려다보는 긴지의 얼굴을 연신 곁눈질했다. 이럴 때마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린다. 무심한 듯 닿는 다정한 손길, 잠자리를 함께하고 난 뒤 자신을 위해 차려지는 식탁 같은 것들…….

“먹으면서 듣게. 자네에게 맡길 일이 하나 있거든.”

그러나 긴지는 모리타가 설렘에 젖을 때마다 그것을 알아챈 듯 한 걸음 물러선다. 다정한 연인인 양 굴다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 말한다. 모리타는 짐짓 커피잔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쓰게 웃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했어.’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반해서 절절 매는 꼴이 우습다. 모리타는 부디 제 어리석은 마음이 그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며 억지로 긴지의 지시에 집중했다.

 

 

 

모리타 테츠오가 히라이 긴지와 함께 하기로 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간 모리타는 자신만큼 긴지의 신뢰를 사고 있는 사람도 없으리라 감히 자신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랐다. 그래 봤자 고작 한두 해를 같이 지냈을 뿐인 모리타는 여전히 긴지 일당 중에서도 가장 막내였다. 가장 무모하고 혈기왕성한 데다, 여전히 배울 것은 산더미처럼 남았다는 뜻이다. 기자니 검사니 경찰이니 하는 쟁쟁한 출신을 가진 다른 일당들과는 다르게 애초부터 제대로 배운 것 하나 없는 맨주먹 젊은이인 모리타가 맡는 일이란……. 때로는 지루하고 번잡스러운 일이었다. 오늘도 긴지가 모리타에게 내린 지시는 간단했다. 모리타는 아직 내막을 이해하지 못한 일에 필요한 인물을 찾아내기 위해 법원에 방문할 것. 그곳에서 기다리다 보면 어느 변호사란 놈이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만나면 그 녀석에게서 받아낼 것을 받아내라. 기다려도 나타나지 못한다면 그대로 끝. 다시 돌아가면 된다. 후나다나 야스다도 제각기 그 녀석이 나타날 만한 곳에 매복을 하고 있을 것이라 들었다.

‘도쿄에서 변호사 하나 찾기라니. 긴지 씨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긴지가 명령하면 들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긴지는 내심 모리타의 강운을 믿고 있는 듯했다. 모리타라면 사건의 중요 실마리를 낚아채 올 거라고. 긴지 씨의 기대대로 제가 찾아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마는……. 그는 혀를 차며 법원 로비로 들어섰다. 천장 높이 달린 창으로부터 비쳐드는 햇빛 아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어떤 이는 서류를 잔뜩 안고 뛸 듯이 걸어 다니고, 어떤 이는 커다란 휴대전화에 대고 뭐라 쏘아붙이고 있다. 모리타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법원에 온 것이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낯설다. 그간 긴지를 수행하며 몇 번 방문한 지방 법원인데도…….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본래 모리타는 이런 인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법원이란 신문에 나오는 말이거나, 재수 없는 녀석들이 사건에 휘말린 끝에 끌려 들어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맞춤 정장을 입고 허리를 똑바로 펴고 서 있다. 돈 몇 푼에 휘둘리며 하루하루 어깨를 짓누르는 도시의 무게를 간신히 버텨내던 때와는 천양지차가 아닌가.

히라이 긴지가 아니었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긴지는 종종 모리타의 강운이나 그의 끈질김 같은 것을 상찬하곤 하지만 제게 그런 자질이 있음을 알아채고 이끌어 준 것은 긴지였다. 그에게 더 높은 곳을 보여주고 그에게 꿈을 꾸게 해 주었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구질구질한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히라이 긴지는 제게 새로운 삶을 준 것이나 다름없는 남자였다. 그런 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봐!”

상념에 빠져 있던 모리타를 깨운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좋아 보이는데, 안 그래?”

순간적으로 모리타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모리타를 향해 “어이! 지금 무시하는 거야!”라며 꽥꽥 소리를 질러대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지나칠 뻔했다. 모리타는 그 거친 낯으로부터 간신히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카와다……?”

“헤.”

둥글둥글하던 얼굴에 살이 쭉 빠져 퀭한 눈두덩이로 안광이 번들거리며 빛난다. 죄수복은 아직 살집이 있던 시절에 지급 받았던 듯 헐렁거리는 옷 사이로 사람이 흘러내릴 것 같이 보였다. 그와 갈라진 지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닌데 기억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 그래도 아직 깡은 남았는지 카와다는 저를 붙들고 걸음을 재촉하려는 간수들의 거친 손길에도 억지로 버티고 서서 모리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승승장구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그래도 모른 체는 하지 않는군.”

“너, 어쩌다…….”

“어쩌다? 그런 게 중요해?”

모리타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카와다와는 서로 가진 생각이 달라 갈라지게 되었더라도 한때의 동료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함정에 걸린 것은 츄조가 아니라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자신만만하던 카와다가 이렇게 몰락한 모습을 보는 게 썩 달갑잖게 느껴졌다. 그러나 카와다는 모리타의 착잡한 얼굴을 사뭇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모리타 테츠오!”

깡마른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우당탕! 순식간에 간수들을 뿌리친 카와다가 달려든다.

“내가 우습지? 어? 내가 병신 같잖아!”

“윽! 카와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수갑을 찬 채로도 모리타 위에 올라타서는 몇 대 먹여 주었다. 뒤늦게 간수들이 카와다를 떼어냈을 땐 이미 모리타는 입술 위로 줄줄 흐르는 코피를 닦고 있어야 했다. 모리타는 피 묻은 손등을 아무렇게나 옷에 문질러 닦았다. 이대로 맞고만 넘어가는 것도 그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모리타는 뒤늦게 간수들이 끌고 나가던 카와다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퍽! 도움닫기까지 해서 날린 주먹이었다. 모리타는 볼품없이 날아가 쓰러진 카와다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는 몇 대 더 먹였다. 간수들이 싸움을 말리는 데 소극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대강 카와다를 붙들고, 모리타에게 “그만 하시죠. 알 만한 분이…….”라며 어깨를 두들길 뿐이었다. 속이 시원해질 만큼 그를 패주지는 못했으나 그만하면 됐다 싶은 모리타도 씩씩거리는 숨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일 즈음이었다.

“남창 새끼…….”

“뭐?”

그는 모리타가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는 게 꽤 마음에 들었는지 입안이 다 터져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낄낄 웃었다.

“너 유명해, 모리타……. 늙은이한테 뒤 대 주고…….”

순간 모리타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머리로 지나치게 피가 몰려서…….

“커헉!”

“야, 야, 말려!”

제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지는 카와다의 모습이 낯설 정도였다. 더불어 그를 깔아뭉개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자신이, 제 주먹 아래 짓뭉개지고 있는 카와다의 얼굴이.

카와다는 핏물을 뱉어내면서도 웃었다. 코뼈가 부러지고 단단한 주먹 아래 얼굴이 뭉개지면서도 웃었다. 오히려 비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모리타 쪽이었다.

 

 

 

텅 빈 구치소 안은 바깥의 여름 날씨에 비해 1, 2도는 더 낮은 듯 서늘하다. 몇 시간을 철창 속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주 잠깐인 듯도 했고, 혹은 아주 오래인 듯도 했다. 누군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 모리타는 마치 눈 뜬 채로 기절한 사람처럼 멀거니 앉아 있었다.

“잘하는 짓이군.”

철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빈정거림이 들렸을 때 모리타는 불가항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히라이 긴지는 드물게 경멸이 서린 눈으로 모리타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침에 발라 넘긴 왁스와 함께 뭉쳐 헝클어진 머리칼, 엉망진창이 된 정장과 피가 튀긴 흰 셔츠에 차례로 닿았다. 모리타는 마치 그 시선이 저를 발가벗기는 듯해서 어깨를 움츠러뜨리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잘하는 짓이야. 그래, 옛 동료와의 해후는 즐거웠나?”

카와다와의 일이 벌써 그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나 보다. 하기야 그의 눈과 귀를 피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모리타는 부끄러움 반, 반항심 반 해서 아무 말도 않았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긴지의 언짢은 얼굴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포 라이터의 맑은 소리와 함께 담뱃불 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몇 번 깊게 담배 연기를 뱉어내고는, “일어나게.”라며 더 묻지 않겠다는 듯 모리타를 재촉했다.

“여기서 허비할 시간 없네. 뭐하는 겐가, 일어나지 않고.”

그 무신경한 말이 어째서 제 마음을 건드렸는지, 모리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을 들을 순간 안에서 치미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긴지 씨.”

갑자기 얌전하던 모리타가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긴지의 낯에 의아한 빛이 비쳤던 듯도 하다. 아니면 그는 히라이 긴지이므로 모리타가 내뱉을 다음 말이 무엇일지 예상하고 있었을까? 이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

“나, 긴지 씨를…….”

“모리타.”

“당신이……. 좋아요.”

엉망진창인 고백이었다. 모리타는 온몸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애당초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남자가 되어 치욕스럽게 뒤를 대 주었겠는가? 히라이 긴지에게는 남자에게 좆질하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사랑한다고요, 제 말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짓씹어 뱉어내는 모리타의 얼굴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렘 따위도 없었다. 모리타는 거의 비참함이나 수치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서 히라이 긴지를 똑바로 쳐다봤다. 홉뜬 흰자위에는 핏발이 선다. 반대로 긴지는 인형에 녹음된 ‘사랑해요.’라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무신경하게 모리타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실없는 소리 말아.”

“긴지 씨!”

그러나 먼저 눈을 돌린 것은 긴지였다. 그는 모리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사랑인지 분노인지 증오인지 모를 것을 온몸으로 토해내자 먼저 유치장에서 나갔다.

“장난치는 게 아닙니다!”

모리타는 헐레벌떡 그를 따라 나갔다. 구치소를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을 붙잡는 이는 없었다. 몇 시간 만에 쨍한 여름 뙤약볕에 내던져진 모리타는 현기증마저 느꼈다.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야외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히라이 긴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여상한 표정으로 뒷좌석 문을 연 채로 모리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리타가 당연히 그를 따라 나와 뒷좌석에 앉으리라 생각하는 듯한 그 몸짓이, 제가 한 고백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듯해서 모리타는 이를 한 번 악물고는 긴지를 지나쳐 조수석에 앉았다. 안전 벨트를 매는 척을 하며 애써 차창 너머의 긴지를 무시하고 있으니 바깥에서 작은 한숨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쿵, 뒷좌석 문이 닫히고 곧 긴지가 운전석에 올라탄다.

세단에 시동이 걸리고 부드럽게 나아갈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 가지 않았다. 모리타는 모리타대로 억지로 차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창문에 비친 긴지의 옆얼굴을 염탐하느라 바빴고, 긴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걸 원하고 있었나?”

“네? 그게, 저는…….”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긴지였다. 그가 ‘커피 한잔할 텐가?’ 하는 식의 가벼운 어투로 대화의 물꼬를 텄기 때문에 모리타는 잠시 이리저리 눈을 굴리면서 헤맸다. 게다가 그의 조수석에 앉는 것은 꽤 간만이었다. 긴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모리타는 속이 울렁거려 고개를 숙이느라 긴지가 얼핏 미소 짓는 것을 미처 볼 수 없었다.

“그런 건 거짓말이네, 모리타…… 사랑이니 하는 것들이란.”

“……제 마음은 거짓이 아닙니다.”

긴지는 점잖은 사람이었으므로 모리타의 말에 드러내놓고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확신할 수 있나? 그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고?”

“그렇게 가벼운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입에 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말에 긴지는 가볍게 웃었다. 이미 모리타는 충동에 떠밀려서 홧김에 고백을 하지 않았던가. 그게 그리 진중해 보일 만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모리타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무시한 채로 고집스레 긴지를 노려봤다.

“나는 지금껏 자네에게…… 사랑 따위보다 더 나은 것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따위라고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감정으로 자신을 속이고, 상대방을 속이던가? 아무리 절절한 마음이어도 상황이 변하면 감정 또한 쉽게 변한다. 그런 것을 원하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을?”

“그런 건 궤변입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왜 저와…….”

끼이익! 시종 부드러웠던 긴지의 운전에 불협화음이 끼어든다. 거칠게 차를 세우고 모리타를 돌아보는 긴지의 표정에 모리타는 순간 움츠러들었다. 단 한 번도 그의 눈에서 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이……. 아주 잠깐 깃들었다 사라진다. 모리타는 고양이 앞에 생쥐라도 된 듯이 뻣뻣하게 굳어서 히라이 긴지가 다시 차가운 낯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나라, 우리가 지배할 세상, 나의 야망과 꿈. 그 모든 것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모리타의 가슴은 전혀 뛰지 않았다. 그동안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자네에게 주려고 했어.”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두 사람이 탄 차체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나아간다.

“……그렇지만 저를 사랑하진 않으시는군요.”

모리타는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삼키며 속삭였다. 낮잠에 얼핏 들었다가 깬 기분이었다. 달콤한 꿈을 꾸다 차가운 현실로 내던져진 것만 같은……. 정수리 위로 룸미러에 비친 긴지의 눈빛이 쏟아지다 거두어진다.

“……그래.”

조용한 차 안에 모리타의 낮은 웃음 소리가 흐른다. 긴지가 애써 그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운전에 집중한 척하는 사이, 모리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군요. 그래요…….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긴지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리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곧 두 사람의 대화는 비즈니스로 흘러갔다. 누구도 이렇게 하자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주제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았다. 야망과 꿈, 권력에 대한 이야기로도 바빴으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하리라. 모리타는 이제 제가 영영 목마를 것임을 짐작했다.

 

긴지 씨, 당신은 제게 가장 귀한 것들을, 힘과 권력과 돈과 야망과 꿈을 주겠다고 했지만…… 하지만 제가 원하던 것이 그런 게 아니라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런 것들로는 부족하다면, 당신이 주지 못할 것을 욕심내고 만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 곁에 더는 서고 싶지 않다면.

 

 

 

 

밤거리에 젊음이 흘러넘친다. 클럽 따위가 모여 있는 번화가는 눈도 귀도 번잡스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그 속에, 정장을 입고 느긋하게 기대 서 있는 늙은이는 눈에 띄는 법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한번씩 그를 힐끔거리는데도 히라이 긴지는 클럽 뒷문이 시계탑 아래라도 되는 듯이 여유롭게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클럽 뒷문이 벌컥 열리더니 인사불성인 청년이 여자 하나를 끼고 나오다 긴지와 눈이 마주친다.

“긴…… 긴지 씨.”

“흐음.”

얼큰하게 취해 있던 청년은 술이 확 깬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옆에 끼고 있던 여자의 나른한 얼굴에 불쾌감이 스친다. 긴지는 청년이 여자를 이리저리 달래 보려다가 결국 따귀를 맞는 것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기다림에 걸맞은 나쁘지 않은 유흥이었다.

“크크크…… 좋아 보이는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이런 델 좋아하실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요.”

청년, 료헤이는 머리에 얹고 있던 야구 모자를 대강 뒤로 눌러 쓰며 불퉁하게 답했다. 긴지는 종종 이 불손한 청년이 퍽 재미있었다. 과거의 그라면 이딴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의 투정을 받아 줄 이유도 없었겠으나……. 그러나 이젠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여유라도 생긴 모양이다. 긴지는 빙긋 웃으며 료헤이의 자켓을 가리켰다. 료헤이는 눈만 끔뻑거리다 “아!” 그제야 생각난 듯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클럽의 시끌벅적한 음악에 몸을 한창 흔들고 있었을 게 뻔하다. 가냘프게 전화벨 소리를 울려대었던 휴대전화는 가엾게도 방전되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됐네.”

료헤이를 찾아 클럽 거리까지 찾아온 것이 무색하게도 긴지는 휙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난다. 오히려 료헤이가 허둥지둥 그를 따라가야 했다. 제가 필요해서 여기까지 온 것은 긴지, 본인이면서 꼭 이렇게 료헤이를 쩔쩔매게 만든다. 늙은이가 이렇게 구는 것도 재주라며 속으로 꿍얼거리는 사이, 긴지는 도로변에 주차된 세단에 가뿐히 오른다. 이걸 따라가는 게 맞는 건지, 어물어물하던 료헤이는 에라 모르겠다 조수석에 슬쩍 몸을 실었다. 긴지가 직접 운전을 하는 것은 처음 본다. 그만큼 급하게 제가 필요한 일이 있었던 걸까? 휴대전화까지 쥐여줘 놨더니 계집질한다고 몇 시간이나 연락을 안 받았으니, 료헤이는 느긋하게 시동을 거는 긴지의 옆얼굴을 연신 힐끔거렸다. 화가 났을까? 그러나 긴지의 잔잔한 얼굴에서는 어떤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도망이라도 가야 하나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세단이 부드럽게 출발한다. 이제 어디 도망갈 데도 없다. 료헤이가 자포자기하며 시트에 몸을 묻었을 때였다.

“그래서 그 여자완 재미 좀 봤나?”

“그냥…… 별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서로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요.”

긴지에게서 연애 사정에 대한 질문을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료헤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괜히 좀 노는 남자인 척, 객기를 부리며 대답했다.

“그런 것치곤 퍽 다정해 보이던데.”

“에이, 꼬실 땐 뭐든 못하겠어요? 그런 것 가지고 사랑이니 뭐니…… 믿는 놈이 바보죠.”

“크크크…… 하하하!”

그의 말이 어디가 그리 웃겼던 건지, 료헤이는 긴지가 그렇게까지 폭소하는 것은 맹세코 처음 봤다. 누가 봐도 어수룩해 보이는 놈이 여자에 통달한 척 구는 꼴이 우스웠던 건가? 아무리 긴지 씨래도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료헤이가 한 마디쯤 쏘아붙여야 하나 입술을 씰룩댈 때쯤 긴지의 웃음이 멈추었다.

“아아, 아니……. 자네 말이 맞아.”

저를 놀리는 재미가 퍽 좋은 모양이지, 료헤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돈이든 뭐든 다 재미없다는 듯이 굴던 양반이 채신머리없이 웃어 재끼는 꼴 하고는……. 아마 료헤이가 불손한 생각을 하는 것쯤은 그의 표정만 봐도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긴지는 여전히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도 손쉽지, 안 그런가?”

“예에, 뭐어…….”

이 늙은이는 즐거워하는 것조차 꺼림칙하다. 료헤이는 찝찝한 얼굴로 대강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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