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캐비닛 시츄에이션
다시 한번 차분히 상황을 돌아본다. 방 안 가득 퀴퀴한 먼지와 녹이 슨 것 같은 악취가 나는 것은 둘째치고 차분히 신경을 집중시켰다. 쿵, 쿵 하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린다. 심장 소리는 아니다. 갈수록 주변에서 발걸음 수가 늘어나기만 한다. 철컥, 첫 번째 문이 열렸다. 지금 있는 창고의 바로 옆 방이다. 이어 다수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곤두세웠던 촉이 신경을 날카롭게 찌른다. 왜 하필이면 지금! 애머디는 한탄하고 싶었으나 눈으로는 다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일부러 한적한 시간에 맞춰 숨어들어왔는데 일정이 틀어졌다. 예감이 좋지 않다. 들키지 않고 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저 방을 지나야만 한다. 곤란한데. 차질없이 깔끔하게 끝나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는걸. 다행히 자료 입수는 무사히 끝마쳤지만… 문제는 잡동사니만 쌓인 작은 창고라 공간이 매우 협소했다. 이쪽은 두 사람이나 있는데.
어두운 시야 사이로 눈빛을 교환한다. 상황이 꽤 불리했다. 고층 건물이기 때문에 들키기라도 한다면 에워싸이기 딱 좋은 포지션이다. 애초에 에스퍼가 민간인과 싸워봤자 좋은 꼴은 못 보니 조용히 해결해야 한다. 급박한 상황이 된다면 정면돌파도 마다치 않겠으나 그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여기에. 숨겠다.
애머디가 일라이저에게 손짓을 보내고 나면 한구석에 마찬가지로 오래 방치되어 보이는 캐비넷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삐걱대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열면 과연, 작게 탄식한다. 내부는 잊어버린 것이 분명한 케케묵은 셔츠와 허름한 종이봉투에 담긴 쓰레기가 다였다. 둘은 소리 없이 분주히 움직인다. 종이봉투는 빼내 구석에 숨기고 셔츠와 옷걸이 또한 적당히 캐비닛 위에 올려놓았다. 캄캄하니 배치가 조금 바뀌어도 보통은 신경 쓰지 않겠지. 크기는 나쁘지 않지만 역시 성인 둘은... 무리인가. 들킬 때 한쪽이 미끼가 되는 것도 고려해봐야겠단 생각이 든 순간 문고리가 찰칵 돌아갔다. 아, 제길. 망연한 표정을 짓던 애머디가 바로 빈자리에 몸을 돌려 넣으며 뒤에서 대기 중이던 일라이저를 다급히 끌어당겼다.
잠깐 무게를 줄인 덕분에 소음은 나지 않았다. 능력을 금방 거둔 애머디가 묵묵히 주먹을 쥐었다. 불시에 들어온 사람은 비품이라도 가져오려던 것이었는지 구석에 쌓인 상자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스럭대는 한 사람 분의 움직임만 방 안에 남았다. 애머디는 호흡을 최대한 가늘게 유지한다. 불길함이 묻어난 정적을 조심히 들이마신다. 가까이에 붙은 일라이저도 마찬가지로 숨을 죽였다. 설마 한 캐비넷에 성인 남성이 둘 다 들어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억지로 꾸겨 들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고개를 돌리는 건 고사하고 발끝을 1cm라도 움직였다간 문이 열리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자신이 마른 체형인 것에 애머디는 처음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눈을 조금 돌리면 후배의 긴장한 옆모습과 제 어깨 위로 어중간하게 뻗은 일라이저의 팔뚝이 보인다. 약간은 파묻힌 감도 있지만, 당연히 불평할 수 없다. 이렇게 있으니 마치 B급 첩보 영화에 출연한 기분이 든다. 어둑하고 비좁은 시야, 방심할 수 없는 소음, 불쾌할 정도로 많은 접촉면적. 아마도 당황했겠지. 나도 계산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캐비넷에 몸을 넣었을 때 묘한 한기가 들어 무심코 이 녀석을 붙들고 말았다.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그를 선반 뒤에 대기 시키는 게 현명하겠지. 그편이 들켰을 때 대응하기 좋다. 그래, 이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망했다.
전면적인 내 실수다. 일라이저가 이런 일로 따질 사람은 아니다만 이번 실책은 나중에 따로 사과 해야 한다. 여러 의미로 갑갑해 죽겠군. 그를 처음 끌어당겼을 땐 다소 놀랐던 것 같은데 그것도 금세 가라앉았다. 볼수록 대단한 녀석이다. 예상외의 사태였음에도 일라이저는 이 상황에 빨리 적응한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도 심란함을 가라앉히지 못한 자신이 모자라 보인다. 애머디의 미간이 좁혀졌다. 얼마 안 가 시선이 느껴진다. 눈동자를 돌리면 자신에게 의문을 표하는 녹안의 눈망울과 부딪힌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지. 애초에 아무래도 좋을 기분 문제였다. 별거 아니라는 듯 애머디는 표정을 풀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았다. 이 정도 거리 다 보니 서로의 세세한 움직임도 전부 그대로 느껴진다. 같은 센티넬인 일라이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은 신호에 일라이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대충 알아들었단 뜻이겠지.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보다 심각한 건 이 말도 안 되는 공간의 면적이다. 고개를 트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정말로 비좁다. 그의 얕은 숨이 귓가를 간지럽힐 정도로. 솔직하게 거슬린다. 하나 눈치를 주기엔 상황이 각박했다. 일라이저가 어디 가서 떠벌리는 녀석은 아니라 그나마 뒤탈은 없는 것이 다행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사연을 술자리에 올려 사내에 소문이 퍼지게 하면 분노를 이길 자신이 없다. 이래저래 애머디가 깊어진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부연 먼지가 눈앞에서 순간 일렁거렸다. 어쩐지 눈에 초점이 잘 안 맞는데. 패널티 때문에 컨디션이 나빠졌나 보군. 이번 임무에선 쓸 일이 많지 않았어야 했는데.
잡념이 다시금 차오를 즈음 때마침 창고 문이 열리고 게으른 동료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여기서 뭐하냐는 물음에 사내는 여전히 너스레를 떨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농땡이도 피우고 팔자가 좋군. 어차피 곧 망할 곳이지만.
달칵, 다시 문이 닫히면 칠흑 같은 고요함이 먼지와 함께 내려앉았다. 당분간은 아마도 안전할 것이지만 쉽게 나갈 순 없다. 아까처럼 타이밍 맞춰 숨을만한 곳이 아니다. 어정쩡하게 캐비넷이 하나만 있을 건 또 뭐람. 가능하면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진 이대로 대기해야 한다. 텁텁한 공기가 벌써 목안에 가득 들어찼다. 답답해. 아까부터 신경이 뾰족하다. 상황이 좋지 않아서 초조한 건가? 애머디의 안색이 묘하게 나빠진 것을 일라이저가 빠르게 알아챘는지 시선을 마주하며 그가 속삭인다.
"선배, 괜찮으세요?"
분명 목소리를 들었으나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 고개를 약간 숙인 게 아픈 것처럼 보였나. 후배를 불안하게 만들기나 하고 오늘 체면은 다 구겼군.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눈만 깜박인다. 안 그래도 일이 틀어져 기분이 안 좋은 것도 사실이라 결국 이번엔 얼굴을 가로 젓는다. 그러자 일라이저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괜한 오지랖은 여기서도 똑같군. 누구라도 이렇게 비좁은 곳에 가둬두면 기분이 나빠질 거다. 녀석들도 마냥 한가하진 않을 테니 언젠간 방을 뜨겠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애머디는 나름대로 의연한 표정을 지었으나 일라이저를 안심시킬 순 없었다. 에너미를 상대하느라 숱하게 좁은 공간에서 싸워봤다. 어두운 곳은 파견 임무 중에 질리도록 다녀봤다. 이제 와서 이런 상황이 두려울 리가 없다. ...없어야만 한다. 그때 문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시기가 중요해. 늬들도 알지?"
곧 망할 줄도 모르고 태연하게 자신들의 불법 사업 얘기를 떠벌거린다. 그걸 가만 듣고 있자니 속에서 화가 들끓는다. 이런 녀석들의 밥줄은 진작 끊어놨어야 했는데. 애머디의 속이 타들어 가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인정사정 봐주지 마. 특히 어린애는 보이면 절대 놓치지 말고 잡아와! 쓸모가 많거든."
사람들을 한데 세우고 한다는 말이 고작 저런 거라니. 킬킬대는 웃음소리마저 천박하다. 저질의 연설을 듣고 참는 것도 고역이구나.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동시에 손발에 힘이 들어간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 저런 녀석들 때문에... 점점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이젠 식은땀마저 삐져나올 지경이다.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 자료를 본부에 무사히 전달해야만 처벌할 수 있다. 알고 있다. 지금은 숨을 죽이는 것만이 답이다. 그것이 자꾸 과거 최선이자 최악의 선택으로 겹쳐 보인다.
틀렸다 이건.
일라이저가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걸 신경 쓸 기운도 없을 만큼 마음이 어지럽다. 손끝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은 초조함에서 오는 긴장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전해야 하는데… 아무리 불쾌한 기억이 마음을 뒤흔들어도 현재는 들키지 않는 게 최우선이다. 특히나 임무 중이라면 더욱. 그러니 애머디는 조용히 시선을 무시하고 이를 악무는 것을 택했다.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그러던 차 부스럭, 하는 소음에 고개를 슬쩍 들자 바로 일라이저가 머리를 감싸 안았다. 놀랄 틈도 없이 뒷목이 부드럽게 뒤덮였다. 가죽 장갑의 매끈한 질감도 느껴진다. 캐비넷 밖의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들렸다. 볼륨을 낮추듯 차차 흐려지던 소리는 웅얼거리다 사라진다. 어둡고 조용하다. 시야의 절반이 상대의 어깨에 빼앗긴 탓이다. 키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라이저가 약간 더 컸다. 바짝 붙들어 맨 팔뚝에선 일라이저의 향이 강하게 배어났다. 일부러 귀를 막은 게 틀림없다. 그렇게나 티가 났던가? 제 얼굴이 어떤지 거울이 있다면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
차라리 쳐다봐지는 편이 나았는데.
얼굴이 파묻혀버렸는데도 손에 쥐듯 그의 표정이 보인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평온한 눈매가 내 뒤통수와 벽을 묵묵히 바라볼 것이다. 한없이 무뚝뚝하고 붙임성 없는 표정으로. 실로 귀엽지 않은 후배다. 이젠 아무래도 좋나. 한번 자존심이 구겨지자 두 번 구기는 일은 쉬웠다. 먼저 끌어안았던 허리에도 힘을 준다. 구태여 참았던 떨림과 불안정한 호흡도 그대로 내보낸다. 원통하다. 어이없을 만큼 무른 내 정신력에 실망했다. 애머디가 한껏 자괴감에 빠져 있음에도 일라이저는 그 신호에 따로 답하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흔들림 없는 따스함 뿐이다. 언젠가 마셨던 찻잔 온도와 닮았다고 문득 생각했다. 적절한 온도의 잔을 가까이 대면 특유의 향긋함이 부드럽게 넘어왔다. 그런 차 한잔은 여운이 길게 남았다. 지금도 그렇다. 떨림이 점차 멎어갈 즈음 일라이저가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엇에 대한 것인지 물을 수 없다. 뜬금없는 위로에 돌려줄 말이 없었다. 심리적으로, 또 물리적으로도 도망칠 구석이 없다니. 한심함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호흡은 차분해져 갔다. 주변은 온통 낯선 어둠으로 가득했으나 품에 있는 이는 꽤 다정했다. 별개의 세계에 있는 것만 같다. 이 순간만이 잘려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안정적인 기분이 든다. 언제, 어느 순간이 돼서도 일라이저 클레멘트는 변함없을 것이다. 그 전제를 떠올리면 경계가 느슨해지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 둘만이 남겨졌단 착각이 채 들기 전에 애머디는 고갤 치켜들었다.
"이제 됐어."
불편한 기색이 줄어든 애머디가 그의 등을 조심히 두드린다. 그러면 잠시간 머뭇거리던 일라이저의 어깨가 풀어졌다. 다시 캐비넷 벽에 팔꿈치를 붙인 덕에 얼굴을 마주한다. 애머디의 미간은 힘없이 풀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눈빛을 주고받으면 미련없이 시선을 돌렸다. 바깥의 동향에 집중하며 본래의 임무를 따른다. 방금의 일이 아주 특수한 상황이었다는걸 인지하고 있다. 일이 꼬이게 되는 상황은 서로에게 좋지 않겠지. 마지막으로 들렸던 발소리가 멀어지자 옆방이 고요해졌다. 여전히 근처에 인기척은 있으나 이 정도 숫자면 괜찮다. 상황이 정리되면 수신호를 보내고 숨 막히는 장소를 소리 없이 빠져나왔다. 어깨가 좀 뻐근하다. 돌아가서도 할 일이 많은데 착잡하군.
그렇게 혼란스러웠는데 지금은 무엇이 그렇게 초조했고 자신을 안달 나게 했는진 잘 모르겠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태연한 일라이저다. 아직도 그가 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호흡이 불안정해진 걸 보고 얼추 유연한 대처를 취했나 싶을 뿐이다. 몰래 들어왔던 루트를 그대로 되짚어 돌아가면서도 찜찜함은 유지됐다. 그래도 애머디는 직접 묻지 않을 것이다. 수치심을 고려하더라도 이 일에 대해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다. 애머디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이건 추태에 가까웠기에. 더 먼 미래가 된다면 언젠가 가볍게 털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땐 물어볼 수 있겠지. 너는 무엇을 생각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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