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바로그

종말

비탄이 찾아올지라도


"60초 뒤 방아쇠를 당기세요."

차분한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 특유의 나긋나긋한 어투. 평온한 듯 내려앉은 눈매. 어느 것 하나 흔들림이 없다. 매일 아침 곁에서 실행해야 할 스케쥴을 읊어주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정리해 보였다. 어째서 이렇게 담담히 굴어 보이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이가 무얼 두려워하고 힘겨워하는지 가슴 아플 정도로 꿰뚫고 있으니까. 일라이저 클레멘트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잘라내어 타인의 것인 양 흘러가게 둔다. 잘려나간 파편을 주워 들고 그의 형상에 맞게 그것을 돌려주는 건 내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도저히 그 조각을 들 수가 없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것을 도려냈는지 끊어내면서 얼마나 고통을 느꼈을지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프다. 전신이 잘게 다져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지나가는 이가 본다면 다 죽어가는 사람은 그가 아닌 그를 에워싸고 있는 나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폭주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일라이저 쪽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지고 있는 여분의 SN을 있는 대로 사용한 부작용도 동시에 올라오는 걸 보면 상황은 영 좋지 않다. 센티넬과 센티넬끼리의 싸움은 늘 이렇다. 언제나 그랬다. 그것이 인격과 모럴이 없는 단순한 괴물에 불과했을 때도, 의지와 사고를 하는 박해받던 테러리스트라 해도 싸우고자 하는 인간은 늘 무언가를 파괴하고 상처입힌다. 주변도 자신도 그것에 휘말릴 뿐이다.

이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거들먹거리는 자신도 포함되었다.

싸우는 자여 죽음을 항시 잊지 말아라. 어딘지 모르게 뇌리에 박힌 글귀다. 쟁취를 원하든 보전을 바라든 바람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집념은 쉽게 무시할 것이 못됐다. 애머디 레마앤은 숱한 이별을 겪어온 사람이고 따라서 관계를 청산하는 데 있어선 나름의 일가견이 있다. 제게 필요한 것만 간신히 받아들이고 고독하게 우뚝 서 있을 사람.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스스로 그러고 싶었고 가능하면 두 번 다시는 잃어야만 하는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만남은 곧 이별과 같았고 인연은 종식으로 향하는 첫 관문에 지나쳤다. 그러나 사랑이 통제되던가? 대뜸 머리를 내밀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감정을 다듬는 방법 따윈 모른다. 호흡하듯 곁에 있어주던 이에게 연정이 피어나는 일만큼 지긋하고 통상적인 일도 없겠지. 이제는 잊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평범한 삶을 사실은 줄곧 누군가가 지탱해줬음을 깨달았을 땐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느꼈던 절절한 감정을 지금 다시금 되새기고 있다. 품에 온전히 안겨있는 그를 억세게 쥔 손이 떨려온다. 에메랄드빛의 총명하던 눈동자엔 이전만큼의 생기가 없다. 부둥켜안긴 몸은 축 처져 간신히 밭은 숨을 내쉬었다. 중상이다. 구조를 기대할 상황도 아니거니와 손쉽게 지원을 부를 수도 없다. 절체절명. 진퇴양난. 그 밖의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빛줄기 한 점 들지 않는 상황임이 틀림없다. 싸우던 상대와 상성이 끔찍이 나빴다. 상대는 나와 일라이저의 관계도 약점도 사전에 파악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이쪽은 상대방의 능력이라는 최소한의 정보조차 정확히 모르는 채 싸웠다. 이 지대한 차이를 메꾸고 그나마 호각인 상태로 몰아붙일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서로의 전투경험과 센스였다. 예측불허의 장애물을 순식간에 삼키고 차단하는 능력과 잔해를 응용하고 인간을 지휘하는 것에 익숙한 조작능력. 우리는 서로의 이능력을 활용하는 데엔 최적인 파트너다. 따라서 어느 공간에 있더라도 서로가 있다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불리하지 않았다. 인질이 걸려있지만 않았어도 좀 더 수월한 싸움을 했을 것이다. 끈질기게 버티고, 버텨서 안전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게 지나간 지금은 이조차 궁상맞은 한탄이지만.

잘그락

일라이저의 손에 쥐여 있던 권총이 기어코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것을 캐치하듯 받아든다. 그리고 받을 것이라 예상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잔잔하다. 손으로 만지면 보드랍고 따끈한 것이 곧장 고개를 들어 키스해올 것만 같다. 그렇게 해줬으면 했다. 늘어진 뒷목이 미세하게 꿈틀댔던 것을 보면 정말 그리 하고 싶은걸 지도 모른다. 하면 그것을 이루어주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애머디는 한껏 웅크린 몸을 더욱 구겨가며 이마를 섬세히 맞댔다. 제멋대로 뻗쳐나간 머리가 정돈되지 못한 채 마구 흐트러진다. 간지럽히듯 뒤섞인 머리칼이 흰 피부 위를 타고 오르면 곧이어 각혈했던 입술을 굳게 깨문다. 치솟는 감정을 억지로 틀어막는다. 한차례 휘몰아친 격정을 오롯이 몸 안으로 받아내고서야 애머디는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입 맞춘다. 최대한의 경애와 순정을 바쳐 지긋이. 째깍,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 감았던 눈을 뜨고 포갰던 입술을 부드럽게 물린다. 머뭇거리는 몸짓으로 한동안 깊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천 마디 말보다도 많은 감정과 기억을 공유한 기분이 든다. 일라이저의 눈동자 위로도 같은 기분만을 건져 올려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생의 갈림길이어서가 아니다. 언제나 줄곧 보내오던 상냥하고 따스한 시선이다. 그것이 되려 심장에 꽂힌다. 아주 깊게 자리 잡아 평생의 축복이자 저주로 남을 것이다. 아아, 내 연인은 정말 극악무도하다. 이렇게나 사랑받게 해놓고 끝까지 내게 바라는 게 변하질 않다니.

"망설이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올곧게 나아가세요. 그 앞길은 당신만이 걸어갈 수 있어요."

눈동자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가 말해온다. 필시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탓이겠지. 그러니 나도 쭉 웃어야만 한다. 도저히 펴지질 않는 미간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입꼬리에 겨우 걸친 미소만큼은 놓지 않는다. 간절하다. 그를 잃게 두고 싶지 않다. 도망치고 싶다. 그리고 그만큼 지키고 싶다. 이겨내고 싶다. 그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 눈망울이 일렁거린다. 안 되는데. 이 순간을 놓쳤다간 평생을 후회한다. 이를 악물고 눈가에 힘을 준다. 필시 벌게졌을 것이다. 이젠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애원하고 갈구할 뿐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더 그를 사랑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을 다해 감정을 전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조각으로 있어줘서 고맙다고. 무심코 입 밖으로 새나왔을지 아니면 그저 웅얼거림에 그쳤을지 모르는 채 일라이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런 내 모습을 한결같은 미소로 바라보던 반려자는 기어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머디, 세상 그 누구보다 당신을 가장 사랑해요. 사랑해서 행복했어요."

곧 약속한 시간이 다가온다. 잔혹한 운명이 예정될지라도 이것이 순리에 맞는 결말이라면 애머디 레마앤은 거스를 수 없다. 그런 뻔한 사람이다. 연인의 죽음에 슬퍼하는 일조차 일이 마무리 되지 않는 한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이 감정을 확실히 끝맺으려면 아마 평생이 걸려도 불가능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어떤 직급과 대의를 가졌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는 애머디 레마앤이다. 이번 작별도 아주 오랜 시간을 떠올리며 되새기다 임종을 맞을 즘에야 놓아줄 것이다. 이별이 익숙하다 하여 아프지 않을 순 없다. 그를 기릴 시간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애머디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자리를 뜬다. 건물을 박차고 나와 어슬렁 거리고 있는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방금까지 합을 겨뤘고 따라서 힘이 어느 정도 소모된 상대는 처리했다 생각한 인물이 튀어나오자 당황한다.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끓어올랐지만 결국 마지막에 떠올린 것은 그의 마지막 당부다. 방아쇠를 당기세요.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쏴야 할지는 내가 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믿고 있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그리하여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 모를 수가 없겠지. 문득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아 비식 헛웃음을 짓는다. 손끝이 원하는 곳을 조준하자마자 가감 없이 힘을 주었다.

탕ㅡ!

왼팔을 맞은 상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런 그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몸으로 짓누르고 특제수갑을 채운다. 연구팀에서 특별히 제작한 세상에 몇 없는 에스퍼 구속구이다. 더 날뛰려고 하는 것을 기절시키고 곧장 무전을 연결했다. 교전 중이던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을 제압, 곧 차례대로 전원을 체포할 것이며 혹시라도 먼저 투항하는 이가 있다면 인도적으로 처리할 것을 당부한다. 인근에 가이드가 있다면 속히 와주길 바란다는 것을 끝으로 손을 뗀다. 연락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몸을 붕 띄웠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으로 날쌔게 접근해 근처에 대기해 있던 다른 한 명의 머리를 걷어찬다. 상황을 보고 도망치려던 무리다.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접근전으로 밀어붙인다. 필요하면 바닥을 뜯어내고 천장을 끌어내려 퇴로를 차단했다. 인질에 대한 건은 시간을 끌어 해결했으니 이제 망설일 것이 없다. 그 어느 때보다 고요히 가라앉은 붉은빛이 바짝 따라붙는다. 이어 최대한의 집중력을 끌어내 단숨에 급소를 피해 총알을 쏴댔다. 각각 종아리, 어깨, 옆구리 등을 맞고 나가떨어진 이들의 몸이 흐트러진다. 꽤 이능력을 써서 그런지 감각이 둔해진다. 시야도 흐릿하고 몸체를 가누기 힘겨워졌다. 이런 몸으로 용케 싸웠네. 그런 대견함을 느끼기도 잠시 느적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해 그를 두고 온 곳으로 돌아간다. 

해결해야 할 일은 아직 산더미고 따라서 애머디에겐 작별을 기릴 시간이 아직도 모자라다. 그럼에도 단 몇 초라도 다시 일라이저를 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돌아왔을 때 그는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동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이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의 곁으로 겨우겨우 몸을 이끌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애머디는 힘겹게 그를 안아 든다. 품에 안긴 이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따듯해 소리 없이 오열했다. 사랑한다고, 죽지 말아 달라고 꼴사납게 비는 말은 진작에 했다. 네가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시기가 이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무슨 말을 하고 빌어도 다가오는 결말이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그를 얼싸안고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애처롭게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몇 번을 외쳤을까. 그대로 조금만 더 비참함을 곱씹었다면 아마 이성을 잃고 하염없이 울부짖었을지도 모른다. 일라이저가 차분하게 유언을 전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나의 이성이란 고작 이런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입을 빌려서야 겨우 유지되는 얄팍한 이성. 그러나 이상은 어느 때가 되더라도 결코 잊거나 놓아버릴 수 없다. 그를 애도하고 다음 생에라도 떳떳하게 만나기 위해. 일라이저와 함께 이룩하고자 했던 이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져야 이 삶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테니 앞으론 간단히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네가 사랑했던 이가 남은 생을 비탄에 젖어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테니. 나는 그저 너를 평생 품고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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