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Repositioning 3

유학이후프로 X 고졸 얼리프로

안내사항

*본 창작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의 2차 팬 창작으로 원작과는 무관합니다.

*본 창작물에서 나오는 프로 농구 및 구단 설정은 현실과 상이합니다. 단 참고 자료로 각 구단 채널 / KBL 채널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포스타입에 게재된 게시물을 재 업로드 한것입니다.

20xx년 5월 23일 서울역 → 부산역

 

 

누군가가 계획을 짜준다는 건 따라야 하는 처지에서는 편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그 계획자가 타인의 생활패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냥 좀, 죽을 맛이 되는 거지. 알람 소리가 울려온다. 침대에 누워있던 기상호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이고 있었다.

아, 이제 일어나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따라주질 않는다. 1분이 지난 시간. 여전히 몽롱한 정신만 지금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이번에는 핸드폰 알람이 아니라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옆 탁상에 있는 핸드폰을 향해 겨우 팔을 뻗어본다. 여전히 눈은 감긴 채로 적당히 아무 화면이나 꾹 눌러 옆으로 돌려 겨우 핸드폰을 귀 가까이에 대면 싸늘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단 한마디만 했음에도 그 말에 함축된 의미가 뭔지는 알 수 있었다. 일어났냐. 네 글자를 야 한 글자로 함축시키다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우리 J형인간(추론상) 최종수께서는 자신이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할까 봐 미리 전화로 생존 신고도 받는 배려까지 해주셨다. 황송하게도.

“...이제야 알람 듣고 깼어요.”

“그럼 30분 내로 집 밖으로 나와라.”

“네…”

30분 뒤에 너희 집 앞에 서 있을 테니까 없기만 해봐라. 경고성 말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기상호는 여전히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출근이었다면 그냥 5분만 하면서 뒤척이었을 텐데. 상대방이 30분 내로 튀어나오라 했으니 미적거릴 때가 아니었다. 눈을 겨우 떠 제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바라보자 5시라 적힌 시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해외 전지훈련 갈 때 아니면 이 시간에 일어날 일은 얼마 없는데. 기상호는 하품을 한번 한 후 얼른 화장실로 가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젯밤에 진땀을 빼가며 짐을 미리 싸둔 덕에 바로 가방을 챙겨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묵직한 가방이 어깨에 메이는 순간 어제 있던 일이 생각났다.

부산여행 D-1. 금요일. 퇴근하고 미적거리면서 짐을 싸고 있을 적 최종수가 메시지로 짐으로 무엇을 챙길지 하나하나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주었다. 뭐 세면도구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숙소는 우리 집이라 그냥 남는 세면도구 써도 되는데) 여벌 옷과 혹시 모를 지갑과 신분증. (요새는 모바일 신분증이라던가 핸드폰 카드결제도 잘 되는데) 휴대폰 보조 배터리와 충전기 플러그라던가.

친절히 하나하나 적어준 걸 보면 그만큼 자신이 못 미더운 것인지. 아니면 종수햄이 그만큼 철두철미한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적어둔 거 보고 알았어요. 챙겨둘게요. 답을 해두었더니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란다. 무슨 선생님께 알림장검사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확인을 받고 나서야 내일 5시에 일어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제가 생각해봤는데 종수햄이랑 국내 여행을 가도 해외여행을 가면 안 될 것 같아요.”

1박 2일뿐인 국내 여행도 이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챙기는데. 몇 박 하는 해외여행은 얼마나 더 할지. 어제 일을 생각하며 집 밖으로 나와 마중 나온 최종수에게 한마디 했더니 기찬 소리가 답으로 들려왔다.

“갈 생각은 있고?”

“뭐 언젠가 갈 날이 있지 않을까요.”

“얼씨구.”

핀잔을 뒤로하며 계속 나오는 하품과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 도착한 서울역.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라 그런지 어느 정도 사람들이 있는 역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차 플랫폼으로 가는 길, 비몽사몽 한 정신이라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최종수 옷깃 잡고 따라간 것만 기억났다.

“너 잡고 갈 거면 제대로 잡아라. 나중에 이상한 놈 따라갈라.”

“형이 저 챙겨줘야죠.”

어휴. 말은 잘하지. 한숨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6시 반쯤에 출발하는 기차 안까지 무사히 안착했다. 기상호는 겨우 눈을 떠 우등실 좌석에 앉아 도착시각을 확인해 보았다. 9시. 도착시각도 꽤 이른 편이라 이렇게까지 일찍 올 필요가 있나 싶어 제 옆에 앉아있는 최종수의 팔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근데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갈 필요 있어요? 저 진짜 졸린데.”

“어차피 잠은 기차에서도 잘 수 있잖아.”

부족한 잠 여기서 채우면 된다는 소리에 기가 찼다. 무슨 수면이 시간별로 나눠서 자면 알아서 채워지는 HP바 인줄 아나.

“와 이 햄 봐라. 기차에서 자는 거랑 집에서자는 게 같은 줄 아나 봐.”

솔직히 장시간 운행하는 교통편에서 자는 거 많이 해봤는데 몸만 찌뿌둥하고 피곤하기만 하기만 하던데요. 게다가 종수햄도 이번 시즌에 원정 다니면서 알지 않나요.

“나한테는 비슷했어.”

아 넵. 그러시군요. 멀끔한 얼굴로 목베개를 하며 가방에서 안대를 꺼내는 꼴이 얄미웠다. 자기만 잘 자면 되는 줄 아나. 비죽 나온 입을 들어가게 해준 건 최종수가 건넨 일회용 안대였다. 군말할 시간에 잠이나 잘 자라는 뜻이렷다. 기상호는 포장지를 뜯어 풍기는 유자 향을 맡았다. 최종수를 따라 목베개를 하며 안대를 쓰고 잠을 청하니 바로 옆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햄은 차에 타서 자도 숙면 3초 컷인가. 부러움의 감정이 무색하게 자신도 눈을 감은 채로 그냥 의자에 몸을 맡기니 잠이 오긴 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 역은 부산역입니다. 내리실 때 놓고 가는 짐이 없도록 확인 부탁드립니다.’ 유자 향과 온기가 은은히 남은 안대를 벗어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짐을 챙겨 나왔다. 쪽잠도 잠이라고. 부족한 잠을 자두니 좀 정신이 들 것 같았지만, 여전히 입에서는 하품이 자꾸만 나왔다. 팔을 쭉 올려 기지개를 한번 한 후 제대로 눈을 뜨니 익숙한 부산역의 풍경이 보였다. 주말 아침이라 한산한 거리. 그리고 역 근처에 늘어선 음식점들.

“아침은 맥모닝이죠….”

부산까지 와서 무슨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냐 하겠지만, 솔직히 부산에 원정 올 때마다 먹는 게 국밥이었다. 가끔 지겹다 싶으면 밀면이랑 수육 먹고. 그래서 다른 걸 먹어보자 알아보면 아침부터 일찍 문 연 곳이라곤 밥집과 프랜차이즈점밖에 없으니. 이렇게 된 거 그냥 무난하게 패스트푸드나 먹자 해서 바로 역 앞에 있는 즉석식음식점에 가게 되었다. 조금은 한산한 자리에 앉아 머핀을 베어 물고 커피를 한잔 마시니 잠이 확 깼다.

커피로 잠 깨는 거 그냥 더럽게 맛없어서 눈이 번쩍 뜨이는 효과 같은데. 여전히 이걸 포션으로 쓰는 사람들의 심정은 잘 모르겠다. 배가 채워져서 그런지 아니면 커피 때문인지. 어느 정도 정신이 드니까 이동할 기운이 났다.

그래서 그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한 최종수의 여행계획이 무언가 하면 사실 여행루트라기 보다는 근처에 갈만한 곳을 돌아보는 정도였다. 하긴 집에서 게임을 하거나 영상 보면서 쉬던 내향적 남자 둘이 밖에서 논다고 해도 그냥 바깥 공기 쐬는 게 전부지 뭔가 특별한 일은 없었으니까.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 도착한 공원. 리뉴얼 했다더니 전에 왔을 때랑은 다른 게 생겼었다. 그땐 뭐 있어 봐야 공원 조경이랑 꽃시계뿐이었는데. 전망대에 올라서 한눈에 들어오는 바다랑 시내 구경도 해보고. 뭐 미션 같은 게 있길래 도전도 해보다 둘러보니 게임기가 진열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종수햄 이거 한번 해봐요.”

그러니까 흔히 오락실에 있는 농구 게임기가 눈에 띄니 이왕 온 거 여기서도 게임 한판은 해보고 싶어졌다. 추억이네. 전에 이거 했을 때 태성햄이 제일 점수 높아서 준수햄이 너 슈팅도 제발 이만큼 하라고 잔소리했었는데

“뭘 이런 걸 해봐. 시시하게.”

“아, 이게 실제 농구랑은 또 다르다니까요?”

아니면 저랑 내기해서 점심 사주기 어때요. 하니깐 내기는 싫지 않았는지 최종수는 코웃음 치며 어디 한번 해보자 했다. 제한시간이 있다 보니 자유투 쏠 때처럼 이쁘게 골라 넣고 그런 건 없다. 기상호가 아무렇게나 막 던지며 반 토막 난 적중률을 기록하니 옆에서 보던 최종수가 코웃음 치며 한마디 덧붙였다.

“다음 시즌 니 야투율 볼만하겠네.”

“아, 이거 몸이 안 풀려서 그렇다고요”

종수햄이 한번 해봐야 아는 거지. 그리 말하며 자기 최종 점수를 체크한 후, 기상호는 다시 동전을 넣어 최종수에게 자리를 비켜줬다. 상대가 하는 걸 보면 뭐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막상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보면 그냥 막 쏠 수밖에 없다니까?

“거봐요 이게 또 다르다니까?”

“그래도 너보단 잘했다. 밥이나 사”

내기는 내기였으니까. 분하게도 기상호보다 높은 점수를 얻은 최종수였던지라 점심값은 기상호가 내는 거로 당첨이었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용두산에서 뒤쪽으로 내려와 점심은 최종수가 먹자고 한 완당 먹으러 가기로 했다. 영업 시작시각 30분 뒤에 왔기에 널찍하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식당에서 2명이 있으면 좋은 건 메뉴 여러개 먹어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암만 운동하는 사람이 많이 먹는다고 해도 2인 세트 다 먹는 건 무리라 맛있다고 들은 메밀면 하나 시키고. 완당 하나 시켜 서로 맛있게 잘 먹었다.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볼만한 장소 가보는 거.

“여긴 우리 부모님 오면 좋아하시겠다.”

옛날의 학창 물품 전시된 거 보면서 그냥 박물관 물품 구경하듯 했다. 솔직히 추억의 물건이라 해봐야 남들 추억의 물건들은 그냥 구경거리밖에 더 되지 않는다. 아 옛날에 어른들이 말한 라떼 is란 이런 거구나 공감할 구실이 생길 정도? 한번 훑어본 후 건물에서 나와 입구를 다시 보니 입구에 있는 배너가 교복 빌려서 입을 수 있는 이벤트를 안내하고 있었다.

“와, 이런 것도 하고 있었네. 근데 저희는 사이즈 맞는 게 없을 듯.”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네. 그래서 입을 생각은 있고?”

“아뇨. 근데 저 옛날 교복 체육대회 때 다은햄이 입었던 옷이랑 비슷하네.”

“체육대회 때 그걸 왜 입냐…?”

“뭐…. 그러게요? 코스튬 복장 입고 경연하는 거 있어서 복장 준비하라 했죠. 그때는 나름 재미있게 했었는데.”

“넌 뭐 했는데.”

“저요? 흡혈귀 복장 입었어요.”

최종수가 옆에서 뭘 그런 걸 하냐는 눈빛으로 봤는데, 준수햄은 여학생들이 메이드복 입혀줘서 그거 했다는 소리를 하니 더더욱 이해 못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나름 잘 어울리긴 했는데.

“근데 햄, 이런 거에 질색하면 나중에 올스타 때는 어쩌려고요?”

“뭐?”

“올스타 때 다들 분장 옷 입잖아요. 혹시 몰라요.”

형도 메이드 복을 입게 될지도. 귓가에 가까이 얼굴을 대어 속삭이자 바로 한 대 맞았다. 매를 번다는 소리는 덤이고. 그리 맞으면서 마저 길을 걸어가려고 할 즘, 누군가가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는 게 보였다. 사실 뭔 일이 있다기보다는 딱 봐도 최종수 알아보고 말 걸까 말까 하는 모양이라 기상호는 최종수의 옆구리를 툭툭 쳐가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종수햄, 저기 옆쪽에 햄 팬 아니에요?”

“? 그럴 리가. 여기 부산이잖아.”

연고지도 아니고 무슨 여기에 팬이 있겠냐. 근데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저쪽도 여행 올 수 있는 거지. 이럴 땐 먼저 나서줘야 하죠. 나름대로 연차 쌓여서 팬서비스가 뭔지 아는 기상호가 근처에 있던 여성 두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잘생긴 선수분에게 용건이 있나요.”

“어 기상호 선수분 아닌가요. 어떻게 둘이 같이 계셔요?”

“어, 저까지 알아봐 주시네. 종수햄이랑 같이 부산 놀러 왔어요. 사진 찍어드릴까요?”

“기상호 선수분도 같이 찍어주세요.”

“어 저도요?”

네,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며 기상호는 몇 걸음 뒤에 있는 최종수에게 손짓하였다. 최종수가 성큼 다가오고 여성분들이 셀카봉에 핸드폰을 끼워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짓 한번 했다. 타이머가 줄어들며 찰칵 소리가 들렸다.

“최종수 선수님, 실물이 더 잘생겼어요.”

“아, 감사합니다.”

이 햄 이런 거 익숙치 않나 보네. 기상호는 옆에서 서로 얼굴 붉히는 걸 보고 풋 웃었다. 감사합니다. 즐겁게 노세요. 그리 인사를 나눈 뒤 먼저 자리를 뜨는 팬분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종수햄도 이제 프로 1년 차인데 형 개인 팬분들 있지 않아요? 나서서 말 걸어줘야죠.”

“글쎄. 1년 차 루키가 팬은 무슨.”

“전번에 시상식 때 햄 선물도 받은 거 봤는데. 빼지 말아요.”

“그건 신인상 유력 후보라 그런 거 아니었나.”

모르는 소리. 기상호는 최종수가 드래프트 신청할 때부터 여러모로 화제가 된 걸 알고 있었다. 그야 유학파 유망주였으니 그런 것도 있었지만 동시대 드래프트 때 신청자가 성준수에 박병찬, 그리고 조신우까지 있었으니. 농담조로 그 드래프트 로터리 픽은 얼굴 픽 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었던 게 작년 9월이었다. 솔직히 얼굴만큼 화제 모으기 쉬운 소재도 없고. 그 이야길 하니 다른 분야여도 좋은 소리 듣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았는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럼 너는? 너도 팬 있던 거 같던데. 저번 리그 때 생일 광고 걸렸잖아.”

“뭐 저야. 아직 어리니까 귀여움 받는 정도죠.”

기상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야 만 나이 스물. 대학으로 치자면 새내기까지는 아니어도 아직 병아리 수준인 액면가. 프로들 사이에서 앳된 얼굴은 잘생겼다. 는 아니어도 귀엽다 소리 들을 수 있는 정도지 햄들 얼굴에 비빌 건 아니었다.

“니가 귀여워?”

“뭐 타인의 평가를 들었을 때?”

최종수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와 저 상처. 그래도 귀엽다고 인형 선물도 받았다고요? 기상호는 저번 시상식 때 여기저기서 꽃 대신에 인형 선물 받았던 걸 말해줬다. 구단 팬 중 한 명이 기상호 이거 닮지 않았냐며 어디 강아지 인형 이미지 올렸는데. 그게 좀 닮기는 닮아서 시상식 때 팬분들이 강아지 인형이랑 이런저런 선물을 줬었단 얘기다. 뭐 귀엽게 봐주는 거 좋았다. 이 얼굴 이렇게나마 팔릴 수 있을 때 팔아야지.

“요새는 팬 서비스도 중요하게 쳐준다고요.”

본업 잘해야 하는 건 맞지만. 팬서비스해줄 수 있을 때 해줘요. 옛날처럼 굴다 인성 논란 뜨면 안 되니까. 그리 말하니 나댄다며 또 한번 머리 쥐어박혔다.

 

기상호와 함께 남포동과 자갈치 시장 길거리 한번 구경하고 얼추 늦은 오후가 되었다. 딱 이때쯤 지하철 타고 기상호네 집 가면 저녁 가까울 시간이 되겠다 싶어서 이동을 시작한 게 약 한 시간 반 전. 지하철 쭉 타고 시내버스 한번 타고 가니 그 기상호의 본가 문 앞이었다. 이 주 전만 해도 남의 집 방문하는 거 가지고 뭘 그리 유난이라 생각했었는데 이거 막상 이 순간이 다가오니 좀 느낌이 다르다. 최종수는 저의 본가보다 조금 더 연식 있는 아파트,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기상호의 집 입구에 서서 입을 한번 달싹였다.

“아부지 내 왔다.”

“어 상호 왔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기상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니, 낯설지만 그래도 흔한 가정집의 모습과 함께 기상호의 부모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내랑 같이 놀러 온 종수햄.”

최종수가 꾸벅 인사 한번 하며 서울서 사 온 선물로 건강식품을 드렸다. 어휴 무슨 선물씩이야. 어머니가 선물을 받아들며 잘 왔다고 어깨를 도닥여주는 새, 무뚝뚝해 보이는 기상호의 아버지가 고개를 한번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 고등학교 때 상호랑 붙었던 아 아닌가?”

“와 아부지 그걸 다 기억하나.”

“니 경기 보러 간 게 얼마 없으니 그런 거지.”

쿵 최종수는 얼어붙은 채로 기상호의 아버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 무슨 말을 할지 읽기 어려웠지만, 과거의 그 얘기가 나오니 좀, 죄수가 된 심정이었다. 친구들이 저의 철 없을 때의 극점이나 다름없던 고3 시절을 말하는 거야 뭘 아직도 그걸 기억하냐고 핀잔주며 적당히 미안하다 사과하는 거로 끝낼 수 있었다. 근데 그 쌍용기의 이름을 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 불리는 건 좀 느낌이 달랐다. 게다가 결승전은 유독 날 수 있어서 기상호에게 못된 말을 하며 인성 질을 해댔으니까. 혹여 그때 기상호에게 굴었던 거 다 기억하면 어쩌지. 얼굴이 홧홧해졌다.

“가까이 보니 잘 생겼구마.”

쿵쿵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함께 무심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그것뿐? 최종수는 눈동자를 데구륵 돌려 기상호의 부모님을 보았는데 두 분은 딱 얼굴 얘기만 할 뿐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볼멘소리로 말하고 난 후 짐 놓으러 기상호의 방으로 가니 멀끔히 치워진 방이 보였다.

“짐은 여기다 넣고. 침대서 자면 되는데…. 근데 제 침대 옛날 거라 저한테도 좀 작았거든요? 형 한번 누워봐요.”

대충 짐 내려놓고 기상호의 침대에 누우니 딱 복숭아뼈 윗부분까지만 침대면에 닿았다. 고등학생 시절 숙소침대가 딱 요만했던 거 같은데.

“너 나랑 키 차이 별로 안 났잖아. 여기서 쭉 잔 거야?”

“중2 때 훅 컸던 거라 또 클까 봐 고등학교 가서 바꾸기로 했거든요. 근데 고등학교 가니 그때부터 숙소 생활 하는 데다 졸업하니까 또 얼리로 취직해버려서….”

작아도 괜찮아요? 침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 방 입구에서 키 큰 남정네 둘의 사정을 본 아버지가 기상호의 형네 방에서 자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형 침대는 그래도 새것이라 좀 큰 편이라고. 그래서 기상호 따라 가보니 확실히 침대가 전신에 닿았다.

“그럼 종수햄이 저희 형 방에서 잘래요? 저야 제 방 침대는 잤던 곳이라 괜찮은데”

“아니 그냥 니 방에서 잘게”

침대 작은 게 뭐가 대수라고. 남의 형 방에 자는 것보단 그냥 작은 침대서 자는 게 나았다. 게다가 180 후반이 되면 전신이 다 들어가지 못하는 게 고등학교 숙소 침대여서 익숙하기도 하고. 작으면 작은 대로 새우잠 자도 되는 거지. 어차피 하룻밤 자는 건데.

잠자리를 정하고 나면 어머니께서 밥 먹으라 해서 같이 식탁 의자에 앉았다. 회라던가 해산물이 한상차림 올려둔 걸 하나씩 집어먹으며 같이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는 많이 먹으라 딱 한 마디 하고 밥을 먹었고 어머니는 오랜만에 온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가족 얘기까지 꺼냈다.

“그러고 보니 상호, 니네 누나 여름쯤에 상견례를 한다는데 들었나?”

“아 상견례 하는 건 들었는데 날짜는 지금 첨 들었다. 내는 전지훈련 때라 못 오겠네.”

“그래서 그때 올라가믄 니네 집 갈라고.”

“방 치워야겠다…”

아 저번에 봤었던 누나. 만취 상태였던 기상호를 집으로 데리고 간 날 마주쳤던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기상호가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누나가 성숙해 보여서 그런지 나이 차이가 있어 보이던데 결혼하시는구나. 뭐 그 이후로는 누나의 결혼과 관련된 가족 이야기라 최종수는 묵묵히 밥을 먹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누나랑 각자 새집 알아본다는 건 어떻게 되었나.”

남의 가족 행사에 관한 이야기는 흘려듣는 도중, 밥을 먹던 기상호의 아버지가 연 말에 최종수는 낙지다리 하나 집어먹다 말고 제 옆에 앉은 기상호를 보았다.

“뭐 당장 갈 것도 아니라 내 전지훈련 끝나고 연휴 전쯤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서울보단 수원 쪽이 집값이 싸긴 한데. 뭐 집 구할 때 근처 사는 선배들한테 그 동네 어떤지 물어봐도 좋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사 이야기. 대화의 흐름을 따라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기상호가 이사를 하는 건 당연했다. 수원팀인 데다 누나랑 같이 살다 보니 서울에 거주지가 있던 거니까. 혼자 살게 된다면 새집 알아보는 게 맞지. 근데, 뭔가 기분이 아쉬웠다. 기상호가 당연히 갈 곳으로 가는 거라 생각했음에도.

이후로도 부모님이 수도권 집값이 비싸네. 요새 전세 구할 때 조심해야 한다. 아들의 새집에 대해 말을 얹어갔다.

“그러고 보니 종수햄은 집 구할 때 어떻게 구했어요?”

“그냥, 부모님이 아는 사람 통해서 알아봐 주고 내 돈 내서 구했지.”

“역시 아는 사람 통해서 구하는 게 맞겠죠.”

“지금 있는 집은? 그대로 써도 되지 않아?”

“그렇지만 저 혼자 쓰기에는 넓은 데다 집값도 저 혼자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준수햄이 이번에 자췻집 구했다는데 나중에 준수햄한테 물어볼까. 기상호가 덤덤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들으며 식사를 이어갔지만, 그 이후로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모른 채로 식사시간을 보냈다.

이후로 뭔가 더 먹었는데 뭘 먹었는지는 기억은 안 났다. 눈 뜨고 보면 양치질하고 씻고 있었고 그다음은 기상호 방 침대에 앉아 멍하니 방 구경하고 있었다. 어릴 적 받았던 과학 관련 상장이라던가 어릴 때 찍은 사진들 보면서 얜 이랬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켠에는 걔가 좀 있으면 떠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실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다. 따지고 보면 기상호 쟤랑 나랑 친해진 지 이제 한 달밖에 안 되었다. 동네 주민이라는 바운더리와 비빌 학연 없는 사람끼리 친해져서 이렇게 같이 여행 오고 부모님께 친한 형이라 소개받고. 그냥 그뿐인데 뭐 다음 시즌이면 동네 주민 아니게 된다는 사실이 뭐가 아쉬워서.

최종수는 저 혼자 속삭였다. 정신 차려 최종수. 지금 비시즌에 경기 없어서 같이 노닥거릴 수 있는 거지. 다음 시즌 되면 다른 팀으로 만나서 경기할 건데. 그때도 가까이 지내는 게 가능하긴 하겠냐.

그런데도 가까워진 만큼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아쉬워서. 그렇게 앉아 여러 생각에 빠질 즈음 기상호가 문을 두어 번 노크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종수햄. 뭐 하고 있었어요?”

“어? 그냥 네 방 구경 좀 하면서. 잘 준비라도 하려고 왜?”

“그냥 소화 좀 할 겸 걸을까 해서요.”

같이 나갈래요? 기상호가 엄지손가락으로 뒤에 있는 현관문을 가리키자, 최종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상호와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아파트 건물을 나서서 조금 걸어 다니자 적당한 산책로가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조금은 서늘한 밤의 기온 속을 걸어갔다. 사람이 얼마 없는 산책로. 둘의 발걸음 소리만이 거리를 울릴 때, 기상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응?”

“아, 방금 식사 이후로 좀 표정이 맹해 보여서. 혹시 부모님이 가족 이야기한 것 때문에 기 빨려서 그런 거 아인가 싶어서요.”

“아. 아니 괜찮아.”

“그래요?”

방금 어무니가 너무 우리 이야기만 한 거 아니였냐고 아차 하고 저한테 물어봤거든요. 기상호는 양손을 바지춤에 집어넣은 채로 최종수의 얼굴을 계속해서 살폈다. 남이 봐도 제 상태가 오해할 정도로 안 좋았나 보다. 사실 가족 이야기보단 그 뒷이야기가 신경 쓰여서 그랬던 건데. 그렇지만 그걸 원인인 당사자에게 말하기도 뭣하여서 최종수는 덤덤히 말하였다.

“그냥, 아침부터 돌아다녀서 그랬나 봐.”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너무 이른 거 아니냐 했잖아요.”

“그래도, 1박 2일 너무 짧잖아. 있는 시간 다 끌어내야지….”

“뭐, 그것도 그렇긴 한데.”

다음에는 고려해서 짜줘요. 다음? 최종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훗날을 말하는 기상호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았다. 이번 여행도 기상호가 충동적으로 말한 거로 시작되었고. 지금 말하는 단 두 글자의 한 단어도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말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괜히 그런 말에 기대해서 찔러 들어가면 또 좋다고 수락을 해줘서. 최종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볼멘소리로 물었다.

“넌, 이사해도 여전히 우리 집 와서 놀 거냐?”

“네? 아이 뭐…. 매일 출퇴근하는 거리잖아요. 주말에 놀러 갈 수도 있는 거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그만큼 오가는 빈도도 없어지고, 지금과 같은 사이가 아니라 그냥 아는 형 동생이지 않을까. 사실 원래 이런 사이였는데 지금이 일시적으로 친해진 특이 상황이지 않았을까. 그리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도 기상호는 흔쾌히 답해서. 최종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왜 안심할 수 있었는지 갈피도 못 잡는 마음에 물어봤자 답은 얻을 수 없었지만. 그냥 안심할 수 있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20xx년 5월 24일 부산역 → 서울역

 

 

기상호의 이사 가능성으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대화 때문인지 어느 정도 편해진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잠을 잘 수 있었다. 눈을 끔뻑 뜨며 시간을 확인하려는 찰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수햄, 아침 드실래요? 부모님이 잠 더 주무실 거면 그냥 자도 좋대요.”

“어, 잠시만.”

잠이냐 아침이냐. 모든 사회인의 양자택일. 최종수는 아침을 먹는 쪽에 속해있으므로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한 후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침상이 차려진 식탁 의자에 앉으니 기상호의 부모님이 이것저것 안부를 물었다.

“잠은 잘 잤어? 침대가 좁았을 텐데.”

“편하게 잘 잤어요.”

“그럼 다행이고. 잘 먹어. 운동하려면 잘 먹어야지.”

요즘 애들은 아침 잘 안 먹는데 우리 애들은 잘 먹어서 보기 좋다는 칭찬은 덤이고. 아침상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오늘 일정이라던가, 나가기 전에 반찬 챙겨준다는 얘기. 밥 잘 챙겨 먹고, 자꾸 이상한 거 사 먹지 말고. 나중에 집 가면 검사한다는 으름장까지.

얼마 안 걸리는 본가에 갈 때도 제 어머니가 하는 말과 비슷해서 어느 집이나 출가한 아들 챙겨주는 건 다 똑같구나 싶었다. 그렇게 든든히 아침밥을 먹고 나서 씻고, 옷 갈아입어 짐 싸면 얼추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으니 계획표 짠 대로 딱 맞는 시간에 기상호랑 같이 나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잘 놀다가 조심히 올라가라.”

“상호 잘 챙겨줘. 어릴 때 선수 되어서 좋긴 한데 걱정이 많아.”

좀 있으면 기상호는 혼자 살 건데 자취 먼저 해본 형이 좀 도와줘. 처음 만난 사람한테도 거리를 두지 않는 건 집안 내력인건가. 하룻밤 자고 갈 뿐인데 같이 부산에 내려왔다는 이유로 갑자기 친한 형에서 기상호를 챙겨줄 수 있는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다. 챙겨준다고 해도 팀도 다르고, 쟤가 이사하고 나면 챙겨줄 거리가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 멀어질 텐데. 그래도 면전에서 부탁을 받으니 거절할 수 없어서 네, 알겠습니다. 멋쩍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날은 도시락을 챙겨서 양산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서 산책 좀 하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게 전부였다. 공원이라 이름 붙여진 장소는 서울이나 부산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풀과 함께 나무가 있는 공간과 조경물들 사이로 길을 만들어 놓은 공간과 그 공간을 누비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앉을 만한 공터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주말의 휴식을 취하는 가족들.

그래도 동네 주민이라고 기상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서 큰 호수를 따라 산책로를 같이 걸어갔다. 여름철에 오면 이쪽에 연꽃 많이 피던데 아쉽네. 저짝에는 분수 있는데 좀 있으면 물 나올 거에요. 날 좋으면 햇빛 때문에 무지개도 보이고 그래요. 옛날에 저기서 물놀이도 하고 그랬는데. 기상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어가며 걷다 보니 어느샌가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왔다. 좀 걷고 나니 배도 꺼지고 슬슬 점심시간이 되어서 적당히 호수를 볼 수 있는 곳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제 여름 온다고 덥긴 덥네요.”

날이 좋아서 그런지. 좀 걸어간 것도 나름 가벼운 운동이라고 둘은 등과 얼굴에 맺은 땀을 식힌 후, 그늘막에 있는 벤치에 앉아 호수를 보며 같이 사 온 도시락을 열었다.

“벚꽃 필 때, 누나네는 친구들이랑 도시락 직접 싼 다음에 공원에 놀러 가서 먹는대요.”

기상호는 도시락에 있는 밥을 먹다 말고 제 누나 얘기를 꺼냈다. 직접 튀김이라던가 음식을 해서 싸고 가는데 남거나 망한 요리를 처리해야 하는 몫은 기상호의 것이었다고. 매년 벚꽃 철의 주말마다 그렇게 놀러 가는 모습을 보면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고. 그냥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지만 그래도 혹하는 구석은 있어서 날짜를 생각해보니 영 안 맞았다.

“우린 그때 시즌 중이잖아.”

“그쵸. 경기 뛰느라 바쁜데 도시락은 사치죠. 해봐야 밤에 피는 벚꽃 보면서 치킨 먹을 수 있을 정도인가.”

그것도 경기 이긴 날에 가능할 듯. 기상호가 동그랑땡을 하나 집어먹으며 이미 지나갔고 다시 올봄에 대한 희망 사항을 말했다. 참 바라는 것도 많아. 시즌중에 그럴 정신은 있겠냐. 최종수는 그리 핀잔주며 도시락에 있는 미니돈까스를 하나 집어먹었다.

적당히 배를 채울 정도로 점심을 먹고 난 후, 쓰레기 정리까지 하고 나면 그 음악분수를 구경하러 갔다. 사실 분수라고 해도 한강 공원에 있는 것과 비슷했지만. 그래도 보는 풍경이 다르니까.

그렇게 공원 구경을 다 하고 난 다음 양산역으로 가는 길, 길바닥이 더워지는 시간이라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으며 걸어갔다. 도로를 주행하는 차 소리와 함께 길 반대쪽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시끌벅적하게 뛰노는 아이들, 공을 튕기는 소리. 퉁 하고 골대에서 빗나가는 공들. ‘양산 주말 농구 교실’ 이라 인쇄된 현수막이 걸러져 있는 공간.

“어, 요샌 저런 것도 하네요.”

“주말에 많이 하지 않아? ”

“그야 종수햄은 아빠 따라가니까 그런 거죠. 저 어릴 때 이 근처에 농구 골대 하나 없던 곳인데.”

“뭐?”

“어릴 땐 그냥 아빠가 갖고 온 뽈 가지고 노는 게 전부였거든요.”

농구 제대로 배워본 건 중학교 2학년 때쯤이었나. 그때도 키 확 커버리니까 들어갈 수 있어서 여까지 온 거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이야기. 최종수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제 옆에서 콘 아이스크림을 먹는 기상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눈을 두어 번 크게 깜빡였다.

“그랬어?”

네. 뭐 제가 얘기한 적 없으니까 다들 잘 모르긴 하는데…. 뭐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해도 들리는 이야기는 좀 충격적이다. 그러니까 어릴 때는 그냥 공 가지고 놀다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고?

“왜 그렇게 놀란 눈으로 봐요.”

저희 태성햄도 중학교 때 친구들끼리 농구 한 거로 시작했는걸요. 아 다은햄은 고등학교 와서 농구 처음 배웠고. 기상호는 제 주변의 경우를 말해주며 자신도 그리 놀랄만한 경우라는 걸 설명해주었는데 사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최종수는 그런 경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끔 중학교 때 두각 드러내서 스카우트 받다가 프로까지 정착한 선수도 몇 있고. 유명한 NBA 선수 중에서는 타 종목 운동을 하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운동을 관두고 농구를 한 경우도 있고. 하지만 그건 얼마 없는 경우였다.

“그냥 좀 신기해서 그랬어.”

어릴 때부터 쭉 농구를 하고 제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다 그런 사람들이었으니, 기상호가 말하는 그 경우가 낯설었다.

“신기할 것도 없죠. 어차피 프로 와서 코트 위에 서면 다 똑같이 공 잡을 선수인데.”

사실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넘어갈 이야기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녀석이 다른 세계 살다 온 것 같아서. 다른 세계이긴 했지. 명문 엘리트 로드를 쭉 가던 최종수와 지방 꼴찌팀 출신이었던 기상호. 지금이야 같은 프로리그를 뛰고 있으니 기상호의 말대로 같은 공을 잡을 선수인 건 맞는데. 그냥 다른 점이 있다는게 좀 석연치 않았나 보다. 최종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마저 길을 걸어갔다.

양산역에서 지하철을 타, 부산역으로. 그리고 부산역에서 KTX를 타 서울역으로 가는 길. 걸어간 시간과 이동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부산에 갈 때처럼 우등 실의 좌석에 앉자마자 잠이 올 것 같았다. 그건 기상호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등실에서 제공하는 목베개를 베며 바로 눈감았다. KTX를 타고 서울역으로, 그리고 서울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 근처의 정류장으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교통편을 타 이동을 하다 보니 깜깜한 밤 시간대였다.

1박 2일의 짧은 주말여행이 끝나고 월요일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 기상호의 집과 저의 집이 갈려지는 갈림길. 최종수 가만히 서 갈림길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가만히 있다 해도 당장 내일이 안 오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이 시간이 끝나는 게 아쉬워져서.

“종수햄, 다음 주에 또 봐요.”

“그래. 다음 주에 보자.”

멀뚱히 서 있는 채로 기상호를 바라보자, 기상호는 또 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어찌 되었든 비시즌 동안 기상호는 이곳에 있을 테니까. 있는 동안 주말에 별일 없으면 만나서 놀기로 했고. 이사를 해도 주말에 보러 온다고 했으니까. 또 오늘처럼 여행을 갈 수도 있고. 언젠가의 막연한 일과 당장 가까이에 있는 시간을 생각하면 아쉬울 것 없는 헤어짐이다. 최종수는 손을 흔들며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로 갔다.

 

 

봄에서 초여름으로 지나가는 시기. 비시즌 중 휴식을 마친 선수들이 돌아오면, FA 선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트레이드에 대한 소문도 있고. 함께했던 가족이 떠나거나 새 가족이 오거나. 등 그런 상황들. 솔직히 묶여있는 선수들은 그냥 자기 구단이 누굴 새 가족으로 맞이하고 누굴 떠나보낼지 그거에 관여하기는 힘드니 그저 입맛 다시면서 구단이 하는 일 보는 수밖에 없고. 하던 일이나 잘 해야 했다.

“아,종수 왔구나. 오늘 유튜브 촬영이래.”

그래 하던 일 말이지. 구단에는 선수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경기에 관련된 사람들 외에 대외적으로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수들의 이모저모를 알려주면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며 성적표 외에 다른 것도 드러내는 것도 일이었다. 최종수는 그 일을 위해 촬영하러 온 편집자에게 꾸벅 인사하곤 몸이나 풀었다.

사실 촬영이라고 해봐야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연습하는 모습 찍으면서 앞으로 우리 잘하겠습니다. 해주고. 이번 시즌의 각오라던가 목표를 각자 말하는 것뿐.

“그래서 최종수 선수님, 첫 시즌 어떠셨나요?”

신입에게 신입 나름의 관문이 있었으니. 첫 시즌에 대한 간단한 인터뷰였다. 사실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기대받은 만큼 열심히 뛰려고 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오지 못해 아쉽습니다. 이번 시즌 동안 알게 된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서 다음 시즌에는 더 좋은 성적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니 주변에서 손뼉을 쳐줬다. 역시 인터뷰도 많이 해본 놈은 다르다고.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니 잠깐 쉬는 시간 가진다면서 촬영이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최종수 선수님. 부산 가서 팬분들이랑 사진 찍었다면서요?”

“네? 아. 우연히 만나서.”

촬영이 멈춘다고 해도 말이 멈추는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안건지 편집자는 최종수가 찍힌 사진이 게시된 SNS 계정을 보여주었다. 다들 최종수 선수님 근황 좀 알려달라고 성화에요. 내심 구단 홍보 겸 SNS 하는 거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역시 내키지 않는다.

“그냥 구단 계정에만 근황 올리는 정도로 괜찮아요.”

아버지는 개인 유튜브 계정을 운영하고 예능 프로에 나가면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아버지처럼 그러기는 힘들었다. 이전에 인터넷 반응 계속보다가 근 2년간 몸도 정신도 피폐해진 일이 있어서. 최근에는 SNS를 통해서 교류하는 사람들도 많고 소통에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최종수는 이미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을 거라는 부류임을 알고 있었으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전시하고 싶지도 않다. 편집자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실 적, 어느새 다가온 선배 김성윤이 최종수에게 어깨동무하며 편집자의 핸드폰을 보았다.

“뭐야, 종수 언제 부산 갔다 온 거야?”

“그냥 뭐 어디 다녀온 건 아니고 남포 쪽 구경 좀 하고 양산에서 공원 간 게 전부였어요.”

“누구랑?”

“기상호랑요.”

걔랑 친해? 그냥 어쩌다 보니 친해졌어요. 같은 동네 살다 보니까 자주 마주치게 되더라고요. 걔 수원인데 서울에서 출퇴근해? 누나 집에서 살고 있대요. 아무래도 지금 나이로는 대학생이니까 가족이랑 있는 게 낫겠지. 어느샌가 화제는 최종수의 부산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상호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버리고 옆에서 데드리프트를 하던 이민호가 바벨을 내려놓고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도 의외네.”

“네?”

“종수, 저번에 수원 ST랑 붙었을 때는 걔 완전히 죽일 듯이 노려봤잖아.”

“아. 그건….”

야야, 경기 때랑 경기 밖이랑 같냐. 종수가 경기 때랑 경기 아닐 때가 완전 사람이 다른데. 그렇지? 성윤은 괜히 어깨에 두른 팔을 흔들며 동의를 구했다. 사실 경기 뛸 때랑 경기장 밖에서 성격 다른 건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고, 옛날에 수원 ST에 있던 기상호를 죽일 듯이 노려본 이유를 설명해봐야 구질구질해지는 셈이라 최종수는 그냥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뭐 이제 사이좋아졌다고 해도 경기는 경기고 주말에 나와서 노는 건 노는 거니까. 나중에 연습게임이든 정규리그든 기상호 걔가 같은 팀에 있지 않는다면 승리욕 때문에 기상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 확정 사실이라. 그냥 경기장 밖이라 대하는 게 다르다고 하는 게 낫긴 했다.

그리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전의 일과를 보낸 후 오후 훈련시간이 되었다. 간략하게 전술 설명을 하면서 전술 훈련을 하는 게 오후 훈련이었는데 촬영 때문인지 감독님은 앞으로 잘하자는 내용을 굳이 풀어서 파이팅 기합 넣어주고 본 훈련을 시작했다.

오늘은 패스 연습 주고받는 연습 좀 해보자. 알지? 이제 다음 시즌 되면 다들 종수랑 제인 쪽으로 마킹을 가는 게 많단 말이야. 여기서 턴 오버 나오면 안돼. 여러 가지 상황에서 어떻게 공을 빼고 공 받은 사람은 슛을 어떻게 넣을지 가정해보는 시뮬레이션. 감독님의 지시는 완벽했다.

“미안, 방금 내가 잘 못 보고 놓쳤네.”

“아뇨. 저도 보고 던졌어야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계획상은 그랬다. 최종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굴러떨어지는 공을 주웠다. 당연히 이 정도면 알아서 잘해주겠지 하고 공 넘기면 그걸 못 받아서 문제였다. 이건 서로의 사인미스. 정규리그 초반 때도이랬다. 결국, 쭉 합 맞춰가면서 해야 하는 게 맞는데. 패싱센스도 센스인건지 공 넘기는 게 정말로 힘들었다. 아니, 공 넘기는 거야 상황에 맞게 패스를 어떻게 할지 정하는 거고, 그건 결국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합이 맞춰지는 결과물. 그러니까 그 합 맞춰간다는 게 힘들었다.

“다시 한번 해보자.”

“네.”

같이 합 맞추는 연습 상대인 민호 선배가 다시 패스받을 위치인 코너 반대편으로 갔다. 그렇게 몇 번 반복 하다가 겨우 한번 성공. 한번 성공하고 나니 다시 연습했을 때는 수월하게 잘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첫 성공까지 가는 시간이 길었다는 점일까.

"시간 걸리더라도 이대로 쭉 해보자. 다들 자기가 공을 받으면 득점을 어떻게 하지 그 루트도 연습해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공을 했다는 것에 만족했는지, 감독은 별말 없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몸을 푸는 시간 30분, 연습시간 2시간이 좀 넘는 시간은 목표했던 전술을 소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사실 기술 하나 습득하고 장착하는 것도 시즌에 가져가면 성공인 상황인데. 몇 번 성공했다고 완전히 체득한 게 아니니까. 오후 훈련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후 훈련이 끝난 후, 밥 먹고 나서 야간 훈련을 했다. 그렇게 종일 운동을 하고 퇴근해서 집에서 자고. 아침에는 출근하고. 그런 일상의 반복. 그리고 가끔은 특별히 경기하는 날도 있었고.

"종수, 요새 연락이 없다?"

"용건 있는 사람이 먼저 연락하는 거지."

전지훈련 전에 연습경기 한번은 하고 가자며 잡은 경기. 수도권 팀끼리 해도 될 것을 어쩌다 보니 대구 전력공사와 맞붙게 되었다. 최종수는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임승대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예전처럼 사이가 안 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친한 것도 아니어서 그냥 가볍게 대꾸하고 경기 잘하자고 인사말을 건네는 것으로 끝냈다. 그렇게 끝내면 되었을 텐데 임승대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뭐 반가운지 괜히 한마디 더 붙여보았다.

"그나저나 너 대학경기는 안보러 가냐?"

"대학경기는 왜?"

"재석이가 보러오라면서 자기네 경기 있는 날 알려주잖아."

"그랬나."

"너 또 단톡방 카톡 안 읽지."

"읽을 게 뭐 있어. 중요한 공지도 안 할 대화방인데."

“어휴, 그래도 우리 중 주말에 제일 한가한 놈이. 한 번쯤은 보러 가.”

누굴 뭐로 보고. 최종수는 코웃음을 치며 이젠 주말에 일 있다고 대꾸해줬다. 그 소릴 들은 임승대는 뭐 못 들을걸 들은 것처럼 눈 크게 뜨며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냐 물었는 데 있으면 어쩌려고? 비록 기간제이지만 주기적으로 있는 주말 약속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숨긴 채로 대충 답하니까. 임승대는 여전히 놀란 눈치를 보이다가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럴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대학경기는 보러 갈 거니까. 몸이나 풀러 가."

그래, 나중에 경기 때 보자. 임승대는 그리 말하며 자기네 팀이 있는 쪽으로 갔다. 연습경기. 정규리그는 아니지만 각자 팀에서 계획한 바가 있어서 그걸 확인하는 용도로 잡은 경기. 이번에는 새로 바뀐 전술도 시험해보고 새로 계약한 FA 선수라던가 혹은 트레이드한 선수들과의 합도 맞춰보고. 감독이 잡았던 이 연습경기에 대한 여러 계획은 있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계획은 완벽할지라도 모든 경기운영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었지만.

"종수는 3쿼터에 잠깐 쉬어보자."

2쿼터까지의 스코어 41:35 서울 LC가 6점차 리드를 하는 상황. 감독은 체력분배를 이유로 주 득점을 했던 최종수를 쉬게 해줬다. 연습경기이기 때문에 훈련했던 걸 실전에 적용해보자. 감독은 게임 시작하기 전에도 했던 당부를 다시 말하며 3쿼터가 시작되었다. 최종수는 거칠게 뛰어오르는 호흡을 가다듬어가며 경기를 보았다. 매번 큰 득점차로 앞서나가거나, 혹은 경기가 잘 안 풀려서 뒤지고 있었을 때만 벤치에 앉았는데. 가만히 경기를 보는 와중에도, 마음은 조급해져서. 이 점수 차를 얼른 벌리고 싶어졌다. 아니 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졌다.

3쿼터 종료. 스코어는 53 : 59 , 이젠 대구 전력공사가 6점차 리드를 하는 상황. 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 감독은 남은 4쿼터도 따라가기 충분한 점수 차니까 잘 해보자는 말과 함께 벤치에 앉은 최종수에게 딱 한 가지 당부의 말을 했다.

"방금 2쿼터 때, 팀원이 안 풀린다 싶으면 네가 터프샷으로 넣었지?"

"네."

"판단은 좋아. 하지만 그걸 반복하지 말고 다른 팀원에게 득점할 기회를 만들어봐."

어시스트도 너한테 들어오는 기록이잖아. 연습경기에도 이기려고 악물고 응하는 거 좋아. 져도 괜찮을 경기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다음 경기 잘하려면 여기서 연습해야 할 게 있잖아. 감독은 이어서 이 경기에서 자신이 목표했던 바를 말하였다. 3쿼터에서 쉬게 해준 건 체력 때문이 아니라 얼른 점수 차를 벌려서 확실한 승리를 원하는 제 성질을 알고 있으므로 빼둔 것이리라. 최종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행된 4쿼터. 경기는 이겼다. 그것도 딱 3점 차로 아슬아슬하게.

"다들 고생 많았다. 고쳐야 할 점이 뭔지 알고 있지?"

"네."

"다음 주 월요일에 비디오미팅 가질 거니까 오전에는 구단 사무실로 출근하고."

전에는 점수 차 적게 이기면 점수 차 적다고 욕먹었는데. 이번에는 이긴 것보단 경기 내용에서 욕먹었다. 사실 앞으로 상대방이 자길 집중적으로 마킹할 상황에 대비해서 실전연습하려고 경기를 잡은 거나 다름없는데. 거기서 어떻게든 득점 쑤셔 넣었으니 감독으로서는 이겨도 만족스럽지 못했겠지.

그렇지만 이것이 저 자신의 잘못만 있나?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4쿼터 초반에는 감독이 지시한 대로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는 상황에 대비해서 패스 돌리고, 최대한 오픈 기회 만들어봤는데. 아무리 찬스 만들어봐야 슛이 안 들어가고 리바운드 잡는 거 실패하니. 패턴 잘 써봐야 뭐하나 싶었다. 그래서 후반에 점수가 역전당하니 터프샷 넣어가며 점수를 넣었다. 며칠간 그렇게 합 맞추어가며 패스하고 공 돌리는 연습 했는데. 그 연습한 거 써먹을 틈도 없이 그냥 오늘도 득점비율만 늘었다.

"수고했어. 다음 주에 보자."

"네. 선배들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먼저 경기장을 벗어나는 감독 뒤로 선배들이 괜히 최종수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 한마디 더 건네줬다. 너 아니면 못 이겼어. 다들 슛 감 안 좋았는데 어쩔 수 없지. 비디오 미팅 때 보자. 단순한 말 한마디의 격려라던가 위로가 담겨 있는데, 그 말 한마디 들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최종수는 먼저 들어간 감독들을 따라 경기장 밖을 나서는 선배와 동료 선수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달라지고 싶었는데 예전과 비슷해진 그런 기분. 아니 비슷해진 게 맞지. 마무리 총평 때 지적받은 사항 그대로 게임을 했는데. 하지만 그것 말고도, 그냥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 주 주말, 최종수의 주말을 차지한 건 기상호였다. 여느때와 같이 최종수의 집에서 게임을 하기로 했으니, 기상호는 그날도 닌텐도를 가지고 왔다.

"근디, 저도 훈련 기간이라 집 오면 게임 할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냥 햄네 집에 두는 게 나을 것 같단 말이죠."

"내가 약속 있으면 어쩌려고."

"그건 평일에 형네 집 가서 가져오면 되는 거죠. 10분거리인데."

게다가 형 약속 얼마 없잖아요. 대체 주변인에 있어서 자신의 이미지는 뭔지. 임승대는 만나는 사람 없으면 시간 여유 있는 놈으로 알고 있고, 기상호는 아예 자기랑 보내는걸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맞긴 맞는데.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라 입을 비죽 내밀며 니 좋을 대로 하라 했다.

"그래서 오늘 뭐 할래요? 지금 이벤트 하는 게임이 있는데."

"뭔데?"

"스플래툰3이요. 이거 저번에 같이 하다가 햄 빡겜모드 되었잖아요."

근데 종수햄 빡겜 모드 흔치 않은 거라 햄이 괜찮으면 해도 되고? 은근슬쩍 권유하면서 기상호는 이번에 업데이트된 이벤트에 대한 설명을 줄줄이 읊었다. 아, 이게 이벤트 매치라고 그냥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특수한 기믹이 있는데요 오늘은 높게 뛰어서 물감 뿌리는 거 하거든요.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내심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은 게 다 티가 났다.

"그럼 그거 하지 뭐."

저번에 했을 때는 이거 깊게 파고들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다시 하진 않겠다고 했는데, 어제 연습경기 때문에 잠깐 머리를 돌릴 구석이 필요했으니 저번의 다짐은 저 멀리 사라졌다. 최종수는 나름 게임에 몰두하며 컨트롤러의 조작 버튼을 눌러보았다. 그래도 두 번째라 나름 익숙하다고 기상호가 조언해줄 것도 없이 무난하게 할 수 있었다.

게임에 몰두하면서 머리를 좀 비우려고 했는데 오판이었다. 최종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잠깐 컨트롤러를 내려놓았다. 이것도 4:4 팀전이다 보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지 그런 생각부터 시작해서, 남은 잘하는지. 뭐 그런 비교들. 같은 게임 하고 있는데 같은 조건과 선상에서 시작하는 건 맞나.

"어? 그만하게요?"

"잠깐 쉬려고. 너 하던가."

"그럼 선수 교체합니다."

최종수는 소파에 앉아 기상호가 게임을 하는 걸 바라보았다. 여전히 느끼는 거지만 기상호가 게임을 하는 걸 보면 뭐 휘몰아쳐서 점수를 벌어 승기를 확실히 잡는다던가 그런 게 없었다. 적당히 근처에서 깔짝대면서 상대가 승기를 잡으려고 하면 바로 추월해서 역전을 한다. 이게 본심인지 봐주면서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에 후자면 정말 게임 상대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최종수는 혀를 내두르며 기상호가 게임을 하는 걸 바라보았다.

"넌 진짜 사람 약 올리면서 하네."

"원래 게임은 상대방 빡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 아시는지."

"성질 더러운 거 봐라."

"종수햄도 비슷하면서."

"뭐?"

마침 게임 한판이 끝난 시점이라, 기상호는 컨트롤러를 잠깐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있는 최종수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제가 포스트업 보고 비겁하다고 반 농담으로 말하니까 포스트업 안 해주겠다고 했잖아요."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 그리고 그 고3 얘기는 꺼내지 말라니까? 미간 찌푸려가며 손사래 쳐도 기상호는 쭉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그거, 포스트업 안 하고도 이길 자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 아니었어요? 완전히 승리할 수 있는 상대한테 괜히 기만질 하는 건 햄이나 나나 비슷하지. 코웃음 치며 중얼거리는 말. 최종수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게임 컨트롤러를 잡아 TV 화면에 집중하는 기상호의 정수리를 보았다. 그야 그땐 그런 마음이긴 했는데 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노답 같잖아.

"뭐 우리 성깔이 어떻든 재미있게 하면 되는 거죠. 자기 더러운 성질 드러내지 말고."

굳이 제 다리 위로 넘어간 누구 씨처럼 말이죠? 또 한마디 더 넣어서 기분 상하게 하네. 최종수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렇지만 굳이 기상호가 '우리'라 말해가며 좀 의외의 면에서 공통점을 집어주니 분명 안 좋은 얘기였어도 동질감이 든다. 그러니 괜히 또 저 혼자 기대하게 되어서. 최종수는 침을 꼴깍 삼키곤 태연한 척 자신이 가진 고민을 질문 해보려 했다.

"야 기상호."

"네?"

"넌, 이런 거 하면 같이 게임하는 사람한테 별생각 없어?"

"무슨 생각이요?"

"쟤는 잘하네, 내가 잘하네 그런거."

"이 햄은 무슨 겜을 프로게이머 급 마인드로 하네. 진짜 승부욕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서 넌?"

"승부욕 있다면 당연히 그런 생각 하긴 하죠."

솔직히 어느 게임이든 타인이랑 자신 비교하면서 승부욕 발휘할 사람은 발휘할 텐데요. 기상호는 여전히 게임화면에 집중한 채로 담백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뭐 저 사람 피지컬은 이렇네, 쟨 딱 봐도 이거 안되네. 그런 생각하는 거 좀 진지하게 한다면 그럴걸요? 근데 랜덤으로 매칭된 사람 평가질 하는 건 오래갈 필요 없어서 참고만 하는 거죠. 반대로 절 평가할 때도 그냥 한판 하고 끝나는 거 신경 쓰지 말자. 하면서 내버려 두는 거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잠깐 쉰 거에요?"

"응?"

"아니 형 아까 게임 할 때 완전 빡 게임을 하다가 뭔가 속으로 앓는 게 보여서 안 하겠다고 한 거 같거든요."

"비슷하긴 해"

얘는 뭐 이런 걸 어떻게 안대. 다시 게임 한 판을 이겨 먹은 기상호가 소파에 앉은 최종수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곤 픽 웃어줬다.

"무슨 걱정인지는 몰라도 혼자 삽질하지 마요."

얘는 찍어 맞추는 것인지. 아니면 딱 봐도 그런 티가 나서 알 수 있는 건지. 어느 쪽이든 걱정거리 안고 있던 건 맞는 거라. 최종수는 그냥 너 잘났다고 한마디 하면서 나름 2년 선배인 기상호가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또 떠보았다.

"너 여기서는 랜덤 매칭이니까 크게 신경 안 쓴다고 했잖아."

"그쵸? 그거 일일이 다 신경 쓰면 자기만 스트레스인데."

"그럼 꾸준히 함께할 사람들은?"

"팀원 같은 거요?"

굳이 답하기에는 좀 그래서 최종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화면은 기상호의 캐릭터가 파란색 물감으로 필드를 덮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노코멘트 할래요."

"왜?"

"그야 형네 팀 사정 듣거나 짐작하게 될 거 같은 데다 저도 저 나름대로 팀 얘기할 거 같아서…."

그런 고민은 각자 알아서 잘 해결해봐요. 기상호는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적이는데. 꼭 말하는 게, 나도 비슷하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그리 표현하는 것 같았다. 게임 화면은 여전히 물감들이 튀고 있었고 기상호는 그 게임화면에 집중을 하다 흘금 뒤를 돌아 최종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기분 안 좋은 사람을 냅둘 정도로 무심한 건 아니죠.”

그리 표정이 안 좋았던가? 기상호는 쥐었던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소파 아래 바닥이 아닌 소파에 앉았다. 최종수는 옆에 딱 붙어 앉은 기상호의 체온을 느꼈다. 평소라면 남사스럽게 무슨 짓이냐 퉁명스레 말하겠지만 지금은 썩 나쁘진 않아서 그냥 옆에 가만히 앉아 기상호가 옆에 있어 주는 그 거리를 느꼈다.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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