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리버티는 누구인가?
warning : 폭발, 화재, 상해, 사망
딛고 선 바닥이 기울어진다. 발 아래에서 낡은 고문서가 타오르며 열기를 전해 온다.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곳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자 거센 불길이 일어난다. 직전의 폭발로 모두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신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간절히 원하던 고요였다. 이윽고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이 들려온다. 그는 웃는다. 어느 때보다 환하게, 소리내어, 행복한 얼굴로. 고요 속에 모든 것이 묻힐 것이다.
타라는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그 감각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설탕을 신경질적으로 차에 전부 들이부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이상한데. 지금은 연한 금색으로 변한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비비 꼬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폴리 주스의 영향으로 그는 지금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메타모프마구스에게 받아낸 머리카락은 매법 새로운 사람의 머리를 채취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편리했다.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주변에서 나타날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이윽고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신문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몇달 전 자신이 일으킨 사건에 대한 짤막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네펠레 탑 테러 사건의 용의자 타라 리버티(19)가…’ 타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손끝으로 훑었다. 그저 이름일 뿐이다. 네펠레가 아닌 자신의 이름. 그것이 이상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기시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네펠레와의 지긋지긋한 인연은 이제 끝이 났다. 몇달 전 탑은 붕괴했고, 수백 년 동안 쌓아올려진 (그래 봤자 엉터리에 불과한) 점술학 자료는 모두 불타 사라졌으며, 핵심적인 인물은 무덤 속이나 성 뭉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운명의 부름>의 발간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모두가 노망난 시계에 대해서 관심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지긋지긋한 종말을 들먹이던 잡지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말하던 운명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었다. 타라 네펠레는 한 번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증거는 충분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은 승리감에 취해 유일한 리버티로서 살아갈 앞날에 대해 궁리를 펼쳐야 했다. 이럴 시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쫓아 오는 오러들에게 엿이나 먹일 방법을… 다시금 떠오르는 이질감에 그는 눈을 찌푸렸다. 기억을 더듬어 기묘한 감각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방금 전까지 자신은 분명…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그 문장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퍽 어이없게 느껴졌다. 유년의 대부분을 보낸 장소를 공중에서 터뜨리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그였다. 다른 사람의 걱정을 샀으면 모를까, 물론 그것 또한 타라 리버티의 관심 밖의 일임은 당연했다. 탑에서 제 발로 나온 이래 그는 항상 혼자였다. (물론 데스가 있었지만, 그 애는 어디까지나 개니까.) 동급생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을지언정 그에게 가족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아는 리버티는 나 뿐이야.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 리버티였지? 또한 해소되지 않는 질문이, 남아 있었다.
리버티라는 이름에 의문을 가진 적은 이제껏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의아함을 느낀단 말인가. 타라는 네펠레의 이름을 대체하기 위해서 새로운 성씨가 필요했다는 사실까지는 금방 추론해 내었지만, 왜 많고 많은 성씨 중 리버티였는지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게다가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이 탑을 나온 것과 이름을 바꾼 것 사이에는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 이름은 어디선가 근본 없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에 스친다.
타라는 신문을 내팽게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가로운 정오의 카페 테라스와 어울리지 않는 급작스러운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그를 힐끗거렸다. 과도한 설탕으로 넘칠 듯 했던 찻물이 결국 쏟아지듯 흘러내리는 것을 무시하고 그는 걸음을 옮겼다. 네펠레를 나온 후, 그는 떠도는 신세였다. 아니다, 그에게는 집이 있었다. 분명 숲과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누군가는 타라 네펠레에게 뒤뜰에서 약초를 구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아니, 아무도 없었다. 기억이 지저분하게 얽힌다. 이제는 달리듯 발을 내딛었다. 그럴 리 없어. 숨이 헐겁다. 얼마 달리지 않았음에도 옆구리에서 통증을 느낀다. 마치 유약했던 어린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어. 고요가 흩어지며 어릴 적 지겹도록 들은 운명이 다시 머리에 맴돈다. 타라, 네 찻잔에 죽음의 개가 있구나. 타라, 수정구슬이 말하길 오늘 밤에는 네가. 타라, 목성의 운행이, 타라, 네 꿈이 뜻하는 바는. 타라, 타라.
오래 전, 작은 보우트러클에게 어떤 벌레를 먹여보라고 조언해 준 사람이 있었다. 손에 예언이 아니라 직접 만든 마법약을 쥐어 주던 사람이, 그것이 자신을 살게 해주리라고 했던 사람이, 내일의 날씨가 오로지 죽음이라고 믿던 어린 그에게 삶을 속삭이던 사람이 있었다…
허나 케인 리버티의 존재는 지워졌으므로, 타라 리버티는 그것을 기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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