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오괴리배려

그냥 그렇게 살아 지더라

몽롱한 정신을 쫓으면 발 딛고 있는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종종 중력이 사라지는 꿈을 꾼다. 

과오괴리배려 過誤乖離背戾

지구 위 존재에게는 중력이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붕 뜨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를 갖고도 여전히 지구에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그것 말고 있을 리가. 이지수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 최소의 최소의 최소의 욕구만으로 삶을 연명해가는 사람,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굴복하고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는 사람, 지구 위 중력에 의지해 호흡해 나가는 사람. 인생에 남은 마지막 미련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삶은 익숙해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보다는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세상은 무심하게 굴러가고 어딘가 어긋난 것 같아도 돌아간다. 경험에서 기인한 진실이었다. 지수는 삶에서 무언가를 느껴 본 적이 손에 꼽았다. 목적이 결핍된 존재는 아득해진다. 종종 새벽잠을 설치고 일어나면 낮게 깔린 어스름은 허상과 실재 사이의 무엇도 아니었으나, 다만 달빛이 드리운 지헌의 윤곽을 볼 때만큼은 선명하게 다가오는 현실을 실감했다.

지수의 삶은 부과된 짐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감의 연장이었다. 죽은 부모가 남기고 간 것은 너무 어린 자신과 동생뿐이었으므로 지수는 자신을 지켜야 했고, 제 동생을 지켜야만 했다. 지수는 우선순위에서 자신을 포기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잃기엔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알게 된 상실의 감각은 너무도 무거웠지만, 그것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그녀는 지킨다는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감정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법보다, 상황을 수긍하고 감정을 배제하는 법을 먼저 깨우쳤다. 따라서 그녀는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감정이란 불규칙적이고 변수가 많았으며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불안하다.

지수는 참는 법밖에 몰랐다.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건 무의미했다. 결코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지수는 어쩌면 자신이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 멸시를 떠올린다. 새파랗게 어린 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한다고 손찌껌을 맞은 적이 있다. 부모가 없어 행동거지가 글러 먹었다는 얘기도 들어 봤다. 혹은 그저, 그저 마주친 눈빛이 재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웃어주지 않았단 이유만으로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만 했던 날들이 있었다. 모든 사건의 원흉은 나였다. 모두가 내 탓을 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았다. 참아야만 했다. 참고 버텨내야만 했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깔았다. 아무리 짓밟히고, 욕을 먹고,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아도 나는 그래야만 한다. 상황이 정리되고, 깨진 소주병을 쓸어 담고, 엉망이 된 테이블을 닦고 나서야 왼쪽 뺨에서 얼얼함이 느껴졌다. 입안에선 피 맛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어떤 충동은 가끔 파도처럼 지수를 휩쓸곤 했다. 길들이지 못한 날것의 감정들은 생각보다 더욱 난폭하다. 피부와 폐를 찢고 나오는 충동의 감각들은 절대 홀려서는 안 될 부류의 것들이었음에도 지수는 그것을 동경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치명적인 것들은 모두 매혹적이니 불가항력이었으리라.

충동은 엇갈린 방향으로 나아갔다. 차마 제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매캐한 연기가 만들어내는 뭉게구름과 조잡한 소음들 사이에서도 지수는 여전히 희미했다. 의아했지만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기에는 이곳은 너무나 가벼웠다.

"야, 이지수. 듣고 있어?"

허공을 응시하며 눈만 깜박이다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 얘. 누구더라. 진한 주황빛으로 염색한 단발이 낯설었다. 우리 지수는 맨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항상 멍때리고 있더라! 꺄르르 웃음을 내뱉은 머리통이 지수의 팔짱을 끌어안으며 달라붙었다. 그래서 지수 너도 갈 거지? 말없이 응시하고 있으니 봐 쟤 안 들었다니까 하며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황머리는 어휴 참, 귀 뚫으러 가자고! 하며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쟤랑 친한 오빠가 있는데 그 오빠가 싸게 뚫어 준대. 지수는 예쁘니까 피어싱도 잘 어울릴 거야! 아 맞다 지수는 돈 안 내도 돼. 내가 내줄 거니까 걱정 마! 조잘대는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바가 없는 날이었다.

"안 아파? 난 막상 와 보니까 별로다~ 안 할래!"

그래도 돈은 내 줄 테니까 걱정 마! 방금 막 뚫린 귓바퀴를 만져보았다. 검은색의 큐빅이 박힌 피어싱이 만져졌다. 주황머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 정말? 근데 너 피어싱 진짜 잘 어울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양쪽 다 뚫을까? 그 애는 제 손목을 끌고 가더니 얘 반대쪽도 해주세요! 하고 외쳤다. 결국 양쪽 귀를 전부 뚫었다. 가게를 나오며 이질감이 느껴지는 귓불을 문질렀다.

종종 겪는 일이었다. 일반적인 무리에 속하지 않게 된 이후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곤 했다. 입안에 고인 비릿한 침을 뱉어내었다. 늘 걷던 경로에서 살짝 벗어난 이후로 지수는 가끔 그랬다. 유일한 순간이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분했다. 손등위로 살짝 튄 자국이 보였다. 손마디가 욱신거렸다. 턱도 좀 얼얼한 것 같고. 손등으로 코를 닦아내니 붉은 것이 손등위로 넓게 펴졌다. 나 코피도 나나 봐. 대충 셔츠에 문질러 닦았다. 붉은 색은 존재를 증명한다. 어느 때보다 명확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가벼워진다. 세탁기 자주 돌리면 안 되는데. 수도세 아까워. 와, 지수야. 화려하게 해놨네? 멍하니 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쨍한 노란색의 짧은 단발이 그 애의 귀 옆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신발 코로 툭 치우며 다가오더니 말했다. 뭘 그렇게 봐? 내가 너무 귀여워? 막 눈을 뗄 수가 없어? 누구더라. 지수야. 눈을 한번 천천히 감았다 떴다. 너 더 뚫으러 가자. 내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 너는 피어싱이 진짜 잘 어울려. 한번 웃더니 덥석 제 손목을 잡고 발걸음을 돌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귀를 뚫고 작은 금속을 끼워 넣으면 최소한 그만큼의 무게로는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딱 그만큼의 무게가 더해지는 걸까.

지헌이 중학생이 되었다. 근처의 학교는 우리 학교뿐이라 당연하게도 지헌은 지수네 학교의 신입생이 되었다. 학교는 어때? 그럭저럭. 그렇구나. 누나는 별일 없고? 나야 벌써 2년을 거기서 지냈는걸, 이제 와서 무슨 별일이 생기겠어. 그래도 누나랑 같은 학교라 좋다. 나도야. 이거 맛있다, 누나가 했어? 아니, 알바하는 가게 사장님이 많이 만드셨다고 나눠 주시더라.

같은 학교였지만 지헌과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었다. 반도 끝과 끝이라 우연히 만나는 일도 없었다. 급식소에서 마주쳐도 서로 웃음만 나누고 헤어졌다. 괜히 지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지헌에게 볼 일이 있어 잠깐 1학년 교실로 내려가니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역시 종종 있는 일이었다.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만 상황이 달랐다. 지헌의 반으로 다가갈 수록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져갔고 사람이 몰렸다. 이미 사건이 한참 진행 중인 것 같았다. 지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인산을 이룬 무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지헌의 교실 뒤편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1학년 주제에 존나 따박따박 나대는 게 전부터 재수 없었어. 바닥에 던져지는 사람은 지헌이었고, 그 위에 주먹을 내리꽂는 녀석은 익숙하지만 모르는 놈이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두사람이 뒤엉키다가 다른 누군가가 지헌의 뒤에서 손을 넣어 잡아 당겼고, 결국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맞는 것은 지헌이었다. 버둥거리던 지헌이 저와 눈이 마주치고 발버둥을 멈췄다. 누나? 까득, 이빨이 맞물렸고,

씨발 너네 지금 뭐 하는 건데

성큼 걸어가 녀석이 뒤를 돌아보자마자 온 힘을 다해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야, 이지수! 너 뭐해, 미쳤냐? 정통으로 얼굴을 맞고 비틀거리는 녀석의 무릎을 가격해서 바닥에 넘어트렸다. 넘어진 녀석을 밟고 올라타 멱살을 잡고 몇번을 너 내리쳤다. 야 씨발 얘 말려! 어깨를 끌어내려던 녀석의 얼굴을 머리로 박았다. 아악!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더니 코를 붙잡고 물러섰다. 그러다 밑에서 버둥거리던 녀석이 제멋대로 뻗은 주먹에 머리채가 잡혔다. 놈은 그대로 사물함 쪽으로 머리를 찍어눌렀다.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멈칫한 틈을 타서 녀석이 빠져나가 사물함을 짚고 일어섰다. 야 이 미친...! 너 뭐야 이지수! 뭐긴 뭐야. 아프잖아 개새끼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말이없으니 녀석이 성을 내며 발로 제 허리를 가격했다. 아프다고. 한 번 더 발을 올리는 녀석의 반대편 다리를 휙 잡아 당겼더니 넘어지면서 사물함에 머리를 박았다. 쿵 하는 소리와 짧은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다시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쳤다. 한 번, 주먹에 뼈가 부딪히는 감각은 명백하고, 두 번, 터져 나오는 붉은 색은 존재의 반증이자 존재의 소멸이었으며,

"누나!"

지헌이 제 허리를 붙잡고 잡아 끌었다. 폐에 숨이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멎었다. 꿈뻑, 꿈뻑. 눈앞이 투명했다. 투명하다 못해 가벼웠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안 돼, 아직은. 아직은 안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실을 벗어났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같은 건 들리지도 않았다. 가방을 챙겨 들고 학교를 벗어났다. 저기요,

"왼쪽에, 이 돈으로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전부 해주세요."

카운터 테이블 위에 지갑에 있는 돈을 전부 꺼내 올렸다. 숨도 고르지 못하고 도착한 곳은 그때의 그 가게였다. 내가 어떻게 널 두고 떠나. 더 이상 가벼워질 수는 없었다. 아직은 사라지면 안 돼. 금속의 조각들은 제 구속구였다.

족쇄를 채워. 숨을 멈추고. 하나 둘을 세면 현실로 돌아오는 거야. 그래야만 해. 도망갈 생각 말아.

 

그 이후로 이지수는 제 안의 폭력적인 충동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생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으니 곪아썩는 냄새를 무시해야 했다. 나는 쌓여가는 우울을 성숙하게 배출해내는 방법을 몰랐고 손에 쥔 것만이 소중하여 그 밖의 것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나를 가만히 둬 줘... 우리를 내버려 둬... 지수는 지헌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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