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의 몰락
No sweet dream but I'm a hell of night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치켜뜬 눈초리가 거만하다고, 노려보는 눈빛이 오만하다고. 지헌은 코웃음을 쳤다. 교만의 오류는 당신들이 범하고 있는 것을 알까. 태초부터 죽은 것 위에 선 그들은 발밑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生의 몰락
종종 불온한 상상을 한다. 생과 죽음에 관련된 그런 것들. 포기와 연장에 관한 것들. 하지만 결국 사치였으므로 생각은 곧 순간의 파편이 되어 흩어지기 일수였다. 한 번 조각난 것은 모아봤자 제 가치를 갖질 못한다. 지헌은 곁에 있는 한 명으로 충분했고 그거면 괜찮았다. 버려진 우리는 살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에 목적은 없다. 숨을 이어가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본능에 의한 것일 게 틀림없으니까. 이유라 하기에도 거창한 이유였다. 그런 별 볼 일 없는 이유에 또다시 갖가지 미사여구를 붙여내는 게 우스웠다. 삶에 숭고함과 거룩함 따위가 어디 있어. 세상에 갓 던져지는 삶의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무자비하게 난무하는 폭력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생, 혹은 발버둥 치며 버티다가 죽어버리는 生. 그러므로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보란 듯이 살아 남는 것. 우리에겐 삶을 선택할 권리는 없었지만 최후를 선택할 기회는 남아있으므로.
생존에 유리한 것들은 모두 이용해 먹어야 한다. 사람들은 숫자를 좋아하고 수치를 좋아했다. 지헌은 이 연극의 장단을 맞춰 주어야만 유리한 위치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삶을 담보로 한 게임은 유치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끔찍하게 지독했다. 물러서면 끝이다. 약점을 보이는 것은 곧 죽음이다. 안타깝게도 지헌은 이 게임에서 져 줄 생각이 없었다. 1과 2로 환산되는 수치들은 지겹게도 단조로웠다. 지헌은 펜을 들었다. 단순하지만 가장 쉽고 확실했다.
사람을 믿는 법을 잊었다. 지헌은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믿음은 제 취약한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큰 결점이 될 뿐이었다. 경험을 통해 깨우친 진실햇다. 지금보다도 덜 단단했던 시절에 겪은 한 번의 경험이 그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 넣었다. 뇌리에 기록되고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까지 각인된 불신의 경험은 여전히 불편한 감각이었으나, 동시에 더욱 예리하게 자신을 벼려내는 재료였다. 그때도 제 구원은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 더 이상 누군가 의지할 사람을 찾을 필요는 없다.
감정은 사치고 믿음은 불필요하다. 관계에 수반되는 믿음과 감정의 소모는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이다. 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고 그 가운데서 무엇을 버리고 끊어내야 할 지는 온전히 본인이 지녀야 할 결정의 무게였다. 허투른 선택은 치명적인 실수로 다가온다. 그는 무엇보다 냉철해야 했고 최대한의 결과를 추구해야만 했다. 설령 무언가 어긋나더라도 후회보다는 이미 지나간 손실을 막을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이득이다.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발목이 아리다. 지헌은 어깨를 털고 일어났다. 입안이 쓰라렸다. 멍청한 것들.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몸 이곳저곳이 욱신거렸다. 꽤 저항했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체격차는 무시할 게 못되었다. 누군가를 짓밟고 멸시하는데 도가 튼 부류의 사람들은 어딜 가든 존재했다. 학교라는 작은 공간에서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지헌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공부만 하는 샌님. 주제에 성격은 글러 먹었으니 저들의 심기를 툭툭 건드는 꼴이 신경 쓰였을 것이다.
지헌이 고립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부차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지 않았다. 감정도 관계도 제게는 필요 없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타인의 행동을 아니꼬워하는 경향이 있다. 지헌의 행동은 작은 눈엣가시로 시작되어 별의별 것이 전부 이유가 되었다. 치켜뜨는 눈매가 재수 없다. 표정이 싹수가 없다. 비실거리게 생긴 꼴이 거슬린다. 눈에 보이는 것 만으로도 짜증이 난다. 지헌은 귀를 닫았다. 제가 알 바는 아니었으므로. 다만 어디를 가나 머리가 빈 것들이 있는 법이었다. 본인의 덜떨어진 면모를 사방팔방 드러내지 못 해 안달 난 것들은 어딜가나 문제였다. 시간이 남아돌면 능률적인 일에나 쓰지 친히 제게 할애해 주는 놈들을 보고 있자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헌은 괜찮았다. 넘어지면 일어나면 되었고, 귀는 닫으면 되었다.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었고, 망가지면 고치면 되고, 사라지면 찾으면 된다. 다만 한가지가 맘에 들지 않았다. 인간은 남을 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한 번 멋대로 찍힌 인식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그들이 제가 열등하다고, 그들 아래로 깔보듯 보는 태도가 불쾌했다. 언제나 그들이 우위에 있음을 확신하는 태도가 우습다.
그러니 지헌은 참는 법을 몰랐다. 부러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왜냐하면 침묵은 상대가 오만의 착각에 빠지도록 했고 그는 그 꼴이 죽기보다 역겨웠다. 그들의 눈에 담긴 인간 이하의 것을 보는 듯한 멸시가 같잖았다. 지헌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을 마주한다. 시선을 피하는 일은 없다. 그렇게 나온다면 똑같이 받아줘야지.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이 얼마나 독하고 끈질긴지 알려주어야지. 인생에 그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려줄 것이다. 잘 봐, 내 존재를 똑똑히 기억해. 난 살아남을 것이다.
멍청한 것들은 학습 수준도 거기서 거기였으니 수준 이하의 것들에게 딱히 개선점을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멍청할 수가 있을까? 지헌은 제 상처와 녀석들의 미래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등가교환이 될 수 있을지 가늠했다. 물론 저도 순순히 맞고 있지만은 않았다. 조금 불리할지도 모르겠네. 녀석이 씩씩대며 멱살을 쥐어 잡았다. 이봐요, 머리가 딸리니까 남은 게 주먹밖에 없나 보죠? 거기서부터 이미 수준 차이가 난다는 거에요. 꼴사납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그락붉으락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이 보였다. 이내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니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다. 희미한 감각으로도 뜨뜻한 것이 턱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셔츠에 묻으면 잘 안 지워지는데.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고개를 돌려 녀석을 응시하려는 찰나 누군가의 형상이 눈에 띄었다. 아, 이런. 돌아가던 고개가 그대로 굳었다. 터진 입술이 따끔거렸다.
멎었던 호흡이 돌아오기 전에 그가 빠르게 다가왔다.
누나!
지헌이 지수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두 눈을 꼭 감았다. 지헌은 지수가 저지른 폭력이나 행위의 정당성을 염려한 것이 아니었다. 충동. 지헌은 그가 항상 마음 한켠에 충동을 품고 사는 것을 안다. 어떤 도덕적 가치나 윤리적 기준에 잣대어 그녀를 제재했다기 보다는 이대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도록 내버려 둔다면, 정말로 그대로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사건 이후 한동안은 잠잠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지헌은 제 혈육이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항상 어딘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어긋났음을 어렴풋이 느낌에도 애써 무시했다.
발목이 아리다. 그럼에도 지헌은 다시 일어섰다. 지지 않아. 동정받고 멸시받지 않을 거라고. 놀림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바닥 저 끝까지 밀쳐내어 져도 다시 기어 오를 거다. 누군가는 말한다. 지옥에 떨어져도 살아나올 놈. 하지만 나는 지옥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사람 같은 게 아니다. 그럴 바에는 나는 지옥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차라리 살아있는 지옥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부르는 어떤 지옥보다 더 지독한 것이 될 것이다. 삶은 이미 충분히 지옥 이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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