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여담
將來慮談
유진은 안대를 쓰고 가라앉아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욕조물이 미량의 수증기를 내뿜는다. 약재를 달인 듯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물색은 보랏빛인 것이 어딘가 언밸런스하다. 약재란 본래 자연에서 채취하는 것인데, 자연계에서 보랏빛은 드문 색상이 아닌가. 분명 평범한 재료를 사용한 물은 아니리라.
유준은 반라의 유진을 내려다본다. 그를 따라 욕실로 들어온 고양이 두 마리가 연신 앵앵대며 욕조에 누운 주인을 살폈다. 이런 모습인데도 주인을 알아보는 게 신기하다고 느끼는 유준이다.
검은 털을 가진 녀석이 욕조에 뛰어들려 들기에 유준은 급히 짐승들을 욕실 밖으로 내쫓았다. 꼬리로 불만을 표출하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문을 닫는다. 욕조에 담긴 게 무슨 액체인지는 몰라도 일단 조심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보랏빛 욕조에 몸을 누인 유진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깊이 잠들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의식이 외우주로 날아가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되찾아오는 건 집주인의 일이지 유준의 일이 아니다.
"선배."
대답은 없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쇄골 밑으로 봉긋하게 올라온 가슴은 삼분의 이 이상이 욕조에 잠겨 있다.
"고양이 데려왔어요."
문 너머에서 그들이 애타게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일전의 장렬교 사건으로 정신에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다. 그의 이성이 실시간으로 해체되는 꼴을, 유준은 눈앞에서 목도했다. 아무래도 그가 당분간은 멀쩡하게 살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유진의 은사이자 민속학 교수인 석민은 (유준은 여전히 그를 민속학 교수라는 단순한 호칭으로 설명할 수 있나 고민한다) 그로기 상태에 빠진 제자를 자택에서 보살피게 된 듯했다.
유진은 대외적으로 웹소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간병 기간 동안의 원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본래 세이브 원고를 상당량 비축해두니까. 이러한 비상사태를 대비해 편집자에게 미리 원고를 보내놓기도 하는 것 같다.
문제는 그가 기르는 고양이 두 마리였다. 유준의 자취방은 유진의 자택에서 버스 세 정거장 거리다. 간병 후 첫 일주일 간은 유준이 그의 집 열쇠를 받아 고양이 밥을 주곤 했는데, 병세가 생각보다 심각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석민은 고양이 두 마리를 자신의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유준은 별 수 없이 유진의 집에서 고양이 이동장을 찾아 털뭉치 두 마리를 잡아넣었다. 밥 주는 인간이라는 인식이 있긴 한지 녀석들은 의외로 고분고분했다.
오후 네 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석민은 부재중이었다. 미리 받아둔 전자식 키로 잠금을 해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의 자택은 평범한 아파트였다. 이 외에 거처가 얼마나 더 있을지는 물론 미지수다.
겉으로 보이는 인테리어 또한 평범했다. 하지만 현관을 넘는 순간 공기가 달라지는 것이, 역시 보통의 거주지는 아니구나 싶었다. 이동장을 마루에 내려두고 문까지 열어주었건만 고양이들은 나올 생각을 않았다. 기이한 분위기에 압도된지도 모르겠다.
이왕 교수님 집까지 와 버린 거, 선배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은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측은지심이라기보단 단순 호기심에 가까운 충동이었다.
집안 전등은 온통 꺼져있었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직 환하여 구태여 스위치를 켤 필요는 없었다. 유준은 방문 근처를 어슬렁대며 집의 구조를 살핀다. 문은 대부분이 열려 있다. 문간에서 그 안을 엿보니 현관과 가까운 순서대로 서재, 창고, 침실. 겉보기엔 그렇게 보인다. 무슨 책이 있고 어떤 물건이 있는지까지는 확인하지 않았으니 각 방의 상세한 용도와 정체는 파악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문이 닫힌 방이 있었다. 문 옆에 달린 스위치는 명확하게도 켜져 있다.
이 안에 선배가 있는 건가, 싶어 유준은 문고리 앞으로 천천히 접근한다.
잠시 숨을 멈추고 동정을 살핀다. 문 너머에선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들리는 소리라고는, 거실의 이동장에서 발을 내밀고 야옹대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 뿐.
예의 상 노크를 해 보았다. 나무 문을 두들기는 건조한 소음이 텅 빈 집에 울려퍼진다. 고양이들은 쭈뼛대며 소음의 진원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준은 네 발로 기어오는 털동물 두 마리를 흘겨보다가, 방 안에서 반응이 없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저항은 없다. 잠겨 있지 않다는 의미다.
문을 여니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서, 유준은 흠칫하며 몸을 멈췄다. 고양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방 안으로 머리를 디밀고 들어가 연신 가르릉대는 목소리를 높이기나 했다.
유진이 널찍한 욕조에 안대를 쓰고 가라앉아 있었다.
안대는, 일전의 그 종교에서 나누어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와인색 벨벳에 노란 자수가 놓아진 안대는 척 보기에도 제법 고급스럽다. 안대 아래의 눈은 열린 채일까 닫힌 채일까. 유준은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유준은 한쪽 무릎을 꿇어앉는다. 시야가 욕조 근처로 하강했다. 유진은 고개를 젖힌 채 욕조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다. 숨은 아직 쉬고 있는 모양인지 쇄골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인다.
파문 하나 일지 않는 보랏빛 목욕물은 겔처럼 굳어있다.
어쩌면 정말로 겔이 된 것은 아닐까.
선배를 삼켜 천천히 응고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준은 비상하는 사고를 딱히 의식하지도 않고 안대에 손을 대었다.
손가락 끝에 가볍게 힘을 실어 밀어올린다. 힘없이 딸려올라가는 안대.
그 뒤의 눈꺼풀은 닫혀있었다.
열릴 생각도 않고 편안히 감긴 눈을, 유준은 잠시간 바라본다.
미온을 머금은 수증기가 그의 뺨을 간지럽혔다.
"팔자 좋긴......"
안대에서 손을 물렸다.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안대는 중력을 따라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유진은 여전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 생각했던 대로 그의 의식은 이미 외우주까지 날아갔고,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의식이 사라진 껍데기에 불과한 게 아닐까.
교수는 그의 혼을 되찾기 위해 무언가의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 사이 혼을 잃어버린 육체가 생명 활동을 멈추고 썩어들어가지 않도록 나신을 괴상한 액체에 보관해 두었다. 어쩌면 이런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짓뭉개졌던 이마는 깨끗하게 나아 있다. 항상 기르고 다니던 턱수염은 어째서인지 깎여 있다. 전자는 이상하지 않아도 후자는 약간의 위화감이 있다. 수염이란 살아있기만 한다면 계속 자라는 체모이니까.
유진은 의식을 잃은 지 이 주 째다. 그리고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교수님이 매일매일 선배의 수염을 손수 깎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다지 정감이 드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현실적이지도 않다. 교수님이라면 분명 수염이 자라지 않는 마술을 걸어두었겠지.
깎이고, 자라지도 않는 수염.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군침인지 마른침인지 모를 것을 은근슬쩍 삼키며 생각한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돌연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유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밤색 머리칼이 시야 가장자리에 들어왔다. 기다란 머리칼은 욕조 옆면을 훑었다가 금방 사라졌다. 몸을 숙여 유진의 상태를 살폈다가 도로 일어난 모양새다.
유준은 쭈뼛쭈뼛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다. 높은 확률로 석민일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생판 모르는 타인이라는 극악의 확률에 당첨되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석민은 여전히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유준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천천히 회복하고 있단다. 생긴 건 이렇지만 의외로 연약한 애라 말이지."
"아로마테라피라도 하는 건가요?"
"비슷하단다."
"제가 안대를 건드려서 오신 건가요?"
"유준이라면 분명 건드릴 거라 생각했단다. 범인이 특정되어 있으니 굳이 올 필요는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슬슬 목욕물을 빼야 할 때라서."
침입 감지 시스템 자체는 정말로 있는 듯하다. 유준은 뻘쭘하게 시선을 내리며 주춤주춤 일어선다. 보랏빛 수면에 제 그림자가 흐릿하게 비친다. 석민의 그림자 역시 바로 옆에 멀쩡하게 뻗어 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유진이한테 인사는 안 해도 되겠니?"
"일어날 생각을 안 하시는 거 같던데요."
"내가 왔으니 일어날 거란다."
"음, 그러면 고양이 밥은 한동안 제가 줬다고 전해주세요."
고양이 두 마리는 문 너머에서 연신 앵앵대고 있었다.
장렬교 사건 이후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유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올로스의 축복을 직접 체험해 미쳐버린 원혼이 몸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세상의 진리와 우주의 질서를 편린이나마 엿본 것이다. 육체는 강인할지 모르지만 정신은 섬약하다 못해 허약하여 석민에게 늘상 도움을 받고 있는 유진이 그 정도의 정신적 데미지를 버틸 리 만무했다.
석민은 그런 사실을 일찍이 꿰뚫어보았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건 또 아니므로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목 아래의 근육을 마비시켜 어떤 수단으로도 자신을 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재갈을 물려 혀를 깨물지 못하게 했다. 인간의 육체란 어째서 이렇게 연약한 것인지 고민했다.
하지만 조치는 허사가 되었다. 깨어난 유진의 눈에는 이성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지만, 짐승 특유의 폭력적인 기색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새까맣게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진아, 하며 세 번을 불렀지만 제자는 석민의 쪽을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조차 굴리지 않았다. 어딜 그리 빤히 보는 건지 허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석민은 대화를 관두고 그의 의식을 잠재웠다. 우선은 치료가 먼저라고 생각했다.
유진의 체력과 이성이 일반인의 3할 수준으로 회복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그 쯤 하여 석민은 그가 기르는 고양이 두 마리가 염려되었고, 유준에게 그 아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두 마리의 고양이는 제 주인을 보고 끊임없이 몸을 비벼댔다.
욕조에서 나온 유진은 변함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가 두려운 눈을 하곤 몸을 웅크렸다.
"기분은 좀 어떻니?"
작게 오그라든 동공은 바닥을 향해 있다.
석민은 제자의 머리를 털던 수건을 내려두고, 이내 그의 바로 옆에 걸터앉는다. 매트리스가 소리 없이 두 사람의 하중을 버텨낸다.
"네가 받아내기엔 과한 영혼이긴 했지."
아직 물기를 전부 날리지 못한 피부가 석민의 손에 닿는다.
유진은 몸이 찬 편이다. 허나 지금은 석민에게도 온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이젠 정신 차려야지. 많이 쉬었지 않니?"
섬약한 신경의 제자는 천천히 턱을 당기기 시작한다.
텅 빈 시선은 허공을 미끄러져 겨우 석민에게 닿았다.
은사의 턱을 타고, 입술을 지나, 콧대를 거슬러 오르는 새카만 눈동자.
당신이 정말 제 앞에 실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두 눈.
석민은 그제야 제자의 상태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가여운 제자의 영혼을 있는 대로 들쑤시고 간 다올로스의 편린. 잘 갈아엎힌 정신에 우연찮게 심긴 미래의 부스러기. 이성을 좀먹으며 아름답게 피어난 훗날의 심상.
아, 너는 이미 그 때를 보고 말았구나, 하고.
석민은 납득했다.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작 유진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석민은 느리게 고개를 젓는다.
유진이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제자의 피부는 빠르게도 열을 잃었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석민은 그를 품에 안았다.
"그래서?"
파란 머리의 마법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수없이 펼쳐진 하늘빛의 공간. 언뜻 망망대해처럼도 보이지만, 이곳에는 수평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애초에 그런 구분은 무의미한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곳에 두 사람은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표면상으로는 나이 든 인간인 석민을 배려한 건지 최소한의 테이블과 의자는 구비되어 있다. 어딘가의 앤틱 숍에서나 팔 법한 고풍스러운 장식의 원형 테이블 세트다.
"기억 자체를 소거시켰습니다."
"아까운 짓을 했군."
마법사는 다리를 꼬아올렸다. 검은 바지는 밑단이 조금 짧다. 인간형 몸체로 폴리모프할 때 무언가의 계산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양말로 덮여있어야 할 발등이 뻥 뚫려있는 것을 보면.
발이 들어있지 않은 구두가 허공에서 까딱거리는 걸 보는 건 나름 재밌는 일이었다.
"이계신에게서 전수된 현생 우주의 데이터가 그 아이의 머릿속에 분명 잔존해 있었을 테지. 너라면 그걸 추출해 낼 수 있었다. 그런 기회를 날려버리다니 너 답지 않아."
"아뇨, 축복을 받은 인간은 하나 더 확보했습니다. 지금은 그에게서 추출을 시도하고 있지요."
"괜찮게 될 것 같아?"
"글쎄요. 인간의 뇌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정보가 스며든 거니 말입니다. 분명 많은 양이 소실되고 절하되어 있겠지요. 애초에 축복을 받은 지 좀 된 인간이니 그 안에 쓸만한 정보가 잔존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만."
"그러면 백업용으로 그 아이의 기억도 놔두는 편이 나았잖아?"
"그 아이에게는 시킬 일이 많습니다. 당장은 목숨을 붙여두려고 합니다."
마법사는 꼰 다리를 풀어낸다. 허공에서 움직이던 구두가 바닥에 닿는다. 잔디가 가볍게 밟히는 소리.
"네가 날 불러낸 이유가 그쪽에 있는가 보구나."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석민을 향했다.
새삼스럽게도, 자신은 그에게 영속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석민은 이제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런 성장이, 언젠가 그의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아니...... 성장이라는 확신은 없다.
공포를 느끼는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장이 아닌 퇴화.
"소원에 조건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마법사는 말없이 앵커를 노려본다.
앵커는 푸른 화염 같은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당신은 아직 제 소원을 실행하지 않았지요."
"그건 네가 바란 일이다."
"그렇죠. 제가 숨이 끊어졌을 때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유예했었으니."
공간의 채도가 한층 밝아졌다.
청백색의 공허.
화염은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자신의 색을 청백색으로 물들인다.
"저도 이젠 제법 쓸만한 마술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부려먹을 가치가 있지요?"
마법사는 세계를 고쳐쓰는 자. 그러므로 세계는 늘 마법사를 미워하고 방해하려 든다. 그런 마법사를 세계에 묶어두는 인연의 닻을, 그들은 앵커Anchor라고 부른다───
마법사들은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 앵커의 소원을 들어줄 의무를 가지고 있다.
석민은 과거 청색의 마법사와 계약했다.
마법사는 미소지으며 네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다.
석민은, 제가 가장 사랑해 마지 않는 것을 지켜달라고 했다.
그 소원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마법사는 우선 소원의 발동을 유예했다. 석민은 최대한 나은 길을 고민했다.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난 후에야 소원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삼 년 간은 언제든 부르셔도 됩니다. 간단한 조사 정도야 가감없이 받아들이지요."
"원하는 걸 말해라. 협상은 그 뒤야."
"별 거 없습니다."
마법사의 로우테일이 천천히 흔들렸다.
"제가 숨이 끊어졌을 때, 만일 그 아이의 숨이 붙어 있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모독적이고 신화적인 존재에 오염된 인간은 말로가 좋을 수 없다.
젊었을 적의 석민이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건 아니다. 실제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이런 짓을 평생 하다간 멀쩡하게 살진 못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이란 극독이다. 호기심을 해소한 후에 밀려오는 달성감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의 진리에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간질거림이 그의 이성을 천천히 도려냈다. 이성의 공허에는 피안의 지식이 똬리를 틀고 앉았다. 트로피처럼 늘어세워진 지식들은 이내 빠른 속도로 남은 이성을 먹어치웠다.
석민은 가끔 고민했다. 피안의 지식에게 이성을 뺏긴 지금의 자신과, 신화적인 존재라곤 한톨도 알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은 과연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에 와서는 그런 고민따위는 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꽉 들어찬 온갖 모독적인 지식이 그런 류의 고민을 의도적으로 틀어막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에 하지 않는 고민이다.
그러니까, 통 속의 뇌 같은 것이다.
피안의 지식이 가득 찬 양철 캔에 자신의 뇌가 담겨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보는 현실은 피안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허구인 것이다.
현실의 자신은 이미 미쳐서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석민은 그 점을 염려했다. 자신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동생이 살아가는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박살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제동 장치를 설계했다. 언젠가 한줄기 남은 이성을 잃고 세상을 찢어발길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제동 장치를.
그 장치에 알맞은 인재가 유진이었다.
유진은 자신의 심장에 칼날을 꽂아넣을 수 있다.
분명 그럴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런 핏줄을 타고났으니까, 분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석민의 믿음은 유진의 흐느낌으로 확정되었다.
제가 왜 당신을 죽여야 하냐며 품 안에서 무너져내렸다.
다올로스는 그에게 예지의 축복을 안겼다.
그 분은 모든 걸 알고 계신다.
확실히 모든 걸 알고 계신 것 같다.
석민은 남몰래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눈 깜짝할 새 차갑게 식어버린 제자의 몸이 안타까웠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제자의 시선이 애처로웠다.
작아진 동공은 제 얼굴에 박혀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핏줄 선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른다.
"알았다...... 알았어."
기억을 죄다 지워주마.
축복을 받은 후의 기억을, 밀려들어온 우주의 정보들을, 예상치 못하게 싹튼 미래의 장면을 모두 삭제시켜주마.
내가 죽을 때까지 이런 상태면 내가 죽을 수 없게 되니까 말이다.
얽혔던 혀가 떨어져나갔다. 뒤통수를 받치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거칠었던 숨이 다소 안정을 찾는다. 입술에 닿는 익숙한 감촉에 눈앞의 현실이 허상이 아님을 겨우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조금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내렸다가, 이내 눈동자를 굴려 상대의 얼굴을 살핀다. 평소의 유진과 닮은 행동이다.
"가만히 있으렴. 잘못 닿으면 네 소중한 기억이 대신 지워질지도 모르니까."
제자는 저항 없이 침대에 눕는다. 현실과 허상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몽롱한 눈동자가 의아하다는 모양으로 움직인다. 눈가에 아직 물기가 서려있음을 석민은 알아챈다.
"항상 하던 거란다. 힘 풀고...... 심호흡하렴."
유진은 눈가를 바르르 떨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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