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이

고죠게토 / 왕자인어AU


게토는 사람이 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걷는다는 것에는 익숙해졌다. 다만 호흡하는 것이 게토는 아직 조금은 낯설었다.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제 가슴팍을 바라보다 흥미를 잃고 다시 고급스러운 침구로 시선을 돌렸다. 부들부들해. 바다에서 이것과 비슷한 걸 꼽아보자면 해초가 있었다. 바닷속 아주 깊이 자리 잡은 크기가 큰 해초는 이불과도 같은 역할이었다. 그 해초를 누비고 헤엄치던 건 어디에 사는 누구였는가.

본디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어라는 종족이었다. 그가 이렇게 지느러미를, 바다를 유유히 헤엄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뭍으로 올라와 다리를 선택하게 한 장본인은 곁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하얀색의 옅은 머리색과 백옥같은 하얀 피부. 빽빽이 나 있는 속눈썹은 두말 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분명 인간들이 상상하는 인어의 형태는 이 남자일 것이라고 게토는 생각했다. 그런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쓸자 깨어있었던 듯 남자는 게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잘 잤어?"


게토는 그의 나른하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것을 좋아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남자의 품으로 안겼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봐. 남자는 게토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더욱 품 안에 끌어안았다.


"씻으러 가자."

"……."

"왜? 불편한 곳 있어?"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친 남자는 게토의 두 손을 따뜻하게 맞잡고는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몸 곳곳에 붉게 흔적이 남아있고 다리는 사람이 된 첫 날처럼 후들거렸다. 그것은 어제 일에 대한 여파였다. 살짝 발개진 볼로 남자의 손을 의지해 일어난 게토는 남자를 향해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남자는 아무런 말 없이 그런 게토를 공주님 안기로 거뜬하게 안아 올려 널찍한 샤워실로 향했다. 얌전히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던 게토는 고맙다는 표시로 남자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하하, 스구루. 귀여워."


어린 아이처럼 웃는 남자의 미소가 역시 아름답다, 고 게토는 생각했다.




*

남자의 이름은 고죠 사토루.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왕자님. 별다른 일없이 순탄하게 한 왕국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20살. 성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획은 조금 틀어졌다. 이웃 나라 방문을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바닷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고죠와 만난 어떤 무언가가 그를 홀렸다고 왕궁 모두가 생각했다. 그 일이 있고 고죠는 달라졌으니까. 비록 고죠는 친우 라고 표현했으나, 그들은 세이렌. 그렇게 불렀다. 바다로 나가는 일이 잦아지고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지고. 모두 걱정을 했다. 저러다 바다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바다에 먹혀버리면 어쩌나, 라는 그런 걱정.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그 남자는 먹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일부를 떼어 가져왔다. 참으로 고죠다운 이야기였다.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고죠의 겉옷만을 걸친 채 맨발로 궁 안에 들어와 처음 만났을 때. 오랫동안 왕자님을 보필하던 이지치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새까만 머리칼과 호박색의 눈동자. 잘 보이려 방긋 웃고는 있지만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도저히 의문을 모르겠는 그런 웃음. 또 목소리는 얼마나 작은지. 무어라 말은 하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았다. 방으로 안내할 때까지 이지치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인사 중 마주친 인어와의 시선이 포식자와 피식자의 사이처럼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안내를 마친 뒤 복도에서 벗어나 몰래 깊게 쉰 한숨은 그 인어의 귀에 들어갔다.



*

게토는 알고 있었다. 고죠와 함께 하는 생활이 즐거우리 만은 아닐 것이라고. 고죠가 업무를 보는 사이 게토는 바닷바람을 쐬며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물 속에서 빼꼼 바라봤을 때 맞던 바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 차갑고 서늘한 바람은 마치 제 선택을 후회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후회는 없어.'


입으로 벙긋거린 말은 바람에게 전해졌을까. 흘러내린 가디건을 다시 끌어올린 채 턱을 괴고 눈을 감은 게토는 그저 지금을 만끽하기로 했다. 일주일. 이제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다. 내리 깐 게토의 눈에서 빛나지만 탁한 색의 보석이 떨어졌다.



*

뭍으로 올라와서 게토는 더 야위고 있었다. 바닷물로 수영장을 만들고 게토를 수영하도록 도와주어도 이미 인어가 아니기 때문인지 소용이 없었다. 고죠는 애가 탔다. 자신 때문에 지느러미를 버린 연인을 이대로 말라 죽게 할 수 없었다. 게토와 모래사장을 거닐다 바다로 돌아가고 싶진 않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바스라질 것만 같은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아. 그때 나는 후회했다. 너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다의 일부가 되었어야했다. 침대에 기대 앉아있는 게토의 양손을 붙잡고 흘리는 후회의 눈물. 하지만 후회를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식사는 비슷하게 했지만 게토의 기력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포크를 쥐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 되었을 때, 게토는 바다로 잠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바다로…?"

'요양이야. 아직 뭍이 익숙하지 않은가 봐.'


자신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전해오는 게토에 알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네가 나아진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나는 상관없어. 밤공기가 서늘했다. 혹여나 제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볼까 게토는 밤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도착한 바다에 잡은 손을 조금씩 놓아주고 게토를 배웅했다. 바닷물이 고죠의 발을 간지럽혔다.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발가락 사이사이 들어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닷물은 고죠를 환영하지 않았다. 게토는 바닷속으로 돌아가면서도 고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루면 될 거야. 고죠는 그 말을 굳게 믿었다. 그래, 하루다. 고작 하루. 그 시간만 떨어져 있으면 전처럼 스구루가 활기차질 거야. 이윽고 자신을 바라보던 노란색의 눈동자마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지느러미는 다시 났을까. 다리와 맞바꾼 네 목소리는? 윤기를 뽐내던 네 머리카락은? 모든 게 궁금했지만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옷이 젖든 말든 물이 허리께까지 오는 곳에서 나는 하염없이 너만을 기억했다.



***

인어의 사랑은 평생 한 사람만을 향한다. 게토에게 사랑이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십 년이고 지내왔는데 우연히 바닷속에서 보게 된 그 남자에 잠을 못 이루고, 보고 싶고, 배를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분명 사랑일 것이다. 형태는 잘 모르겠지만 이름 모를 남자를 향한 마음은 평생이 되어도 모자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기 내 얼굴을 보이고 대화하고 지느러미까지 모두 보여줬을 때. 사토루는 나를 아름답다고 했다. 그때였을까, 내 마지막이 정해진 것이. 우리는 간간히 만나 대화를 했다. 안 맞는 것도 있었지만 함께 있으면 시시한 대화여도 몇 날 며칠 떠들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토루는 바다로 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바다는 네가 살아가기에 좋은 곳이 아니야.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를 따라가는 선택을 했다. 물거품이 된다는 그런 신화 같은 이야기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다리와 목소리를 바꿔 가져가는 것은 맞더라, 사토루. 그래도. 그깟 말 못하면 어때? 사토루의 모든 것이 좋았던 나는 상관없었다. 다리를 갖게 되고 뭍으로 올라가려 할 때 바다가 말했다.


'2주. 2주 안에 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너는 물거품이 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게토는 항의했다. 나는 더 이상 인어도 아니고 사람인데 어째서 바다의 말을 들어야 하지? 그 말을 무시하고 나온 며칠은 행복했다. 5일이 지나고 다시 발을 담근 채 바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린 여기서 행복할 거야. 물거품이고 뭐고 그런 거 될 생각 없어.'

'네가 물거품이 되지 않는다면. 그 남자가 될 것인데도?'


게토는 흠칫했다. 그건 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치부한 채. 그 말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박힌 사랑의 대가는 게토를 괴롭혔다. 주제도 모르고 사랑을 했구나. 점점 야위고 사라지는 힘에 실감했다. 하지만 고죠를 죽일 수는 없었다. 게토는 결국 고죠에게 진실을 전하지 못했다. 2주가 되는 날 밤. 게토는 바다로 돌아가면서도 고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 내 사랑스러운 사람... 울상인 얼굴을 다시 한번 안아주고 싶다. 다시 한번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 게토는 달싹이는 입술을 굳게 닫으며 조용히 자신의 몸을 바다로 밀어 넣었다. 행복해야 해. 사토루. 나는 잊어. 한 달도 안 만난 상대를 잊는 것 따위. 인간들은 쉽게 하잖아? 겨울의 한복판에 너를 만나 조금은 따뜻했어. 보글보글. 게토가 사라진 자리에는 물거품들이 생겼다. 그 물거품들은 무거운 사랑의 대가를 끌어안은 채 하나씩 톡톡 터져갔다.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났을 때가 되어서야 고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계속 그곳에서 기다리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 했다. 가만히 그곳에서 게토를 기다리기 이틀째. 고죠를 걱정하던 사용인들이 다가와 싫다는 고죠를 끌고 들어갔다. 감기로 아픈 몸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스구루가 걱정이었다. 파도에 휩쓸렸나. 내가 약속을 못 지켜서 삐진 건가. 뜨거운 머리 속에선 그저 게토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화가 났을지도 몰라. 생각보다 뭍이 별로였을지도. 그러면... 그러면.

고죠는 다 잠든 사이 몰래 다시 바닷가를 찾았다. 적막이 깔린 뭍과 달리 바다는 연신 파도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 걸음씩 바다로 들어갔다. 차갑다는 느낌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저 지금은 자신을 허락하는 듯한 파도에 휩싸였다. 무릎께까지 들어갔을 때,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게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토루! 그리운 목소리였다. 초점을 잃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스구루!"


스구루. 스구루. 연신 그의 이름을 부르며 게토에게로 다가갔다. 물살을 가르고 더 빨리 가고 싶어서 넓어지는 보폭에 파도들은 그저 고죠가 편히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리와, 사토루. 게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은 방울방울 떨어졌다. 발걸음을 서두르다 손안에 꼭 쥐고 있던 게토의 보석을 놓칠 뻔했다. 스구루. 너 이런 보석은 왜 두고 간 거, 다시금 주먹을 꼭 쥐고 앞을 바라봤을 땐 게토가 사라져있었다. 어디야? 스구루. 어디야, 어디에 있어? 아무리 곁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치지 마. 응? 애원하는 목소리가 게토를 몇번이나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아. 고죠는 절망했다. 그렇게 게토를 부르는 소리가 계속되다 어느샌가 멎었다. 가만히 바다를 들여다보던, 달빛의 그림자 하나가 사라졌다.


"ㅡ나도 데리고 가줘."


주인을 잃은 말이 바다 위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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