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몽담
來使夢談
눈을 뜨니 코앞에 은사의 얼굴이 있었다.
유진은 한순간 이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고민하다가, 제가 아직 교수님이랑 침소를 같이 하고 있던가 반추했다. 물론 그런 사실은 없다. 교수님과의 동침은 한 달 전에 끝났다. 지금 유진이 편안하게 몸을 누이고 있는 곳은 그의 자택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석민은 두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살기 어린 무표정으로 유진을 내려본다. 창 너머로 어슴푸레 비쳐드는 새벽놀이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비춰내리고 있다. 현실로 인식하기 어려운 광경에, 유진은, 역시 이건 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야 만다.
"유진아."
여느 때보다 힘이 실린 목소리.
유진은 오한이 이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허둥지둥 침대에 앉아서, 그 옆에 선 은사를 올려다 본다.
"날이 밝으면, 희태에게 전화를 한 통 해 주지 않으련."
"저, 전화요?"
석민은 품에서 은색 회중시계를 꺼내는가 싶더니, 시곗바늘의 양상을 한 번 훑고는 도로 집어넣는다. 평범한 시계라면 이 방의 벽에도 매달려 있다. 분명 다른 세계의 시간을 확인하는 행위이리라.
"네가 다녀온 아공간에 희태가 끌려간 것 같더구나."
"아공간이요...?"
막 잠에서 깨어난 머리로는 원활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부옇게 뜬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단박에 이해되지 않는 단어를 그에게 되묻는 것 뿐.
돌연 석민의 억센 손이 얼굴을 향해왔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다가, 등에 침대의 프레임이 닿는 걸 느낀 후에야 도망을 단념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길게 기른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환하게 개인 시야에는, 석민 외의 것이라곤 그 무엇도 담기질 않았다.
"꿈에서 소설을 한 편 쓰지 않았니."
머리카락이 당겨졌다. 석민의 얼굴이 한껏 크게 보인다. 빛을 잃은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압도적이고 본능적인 공포를 최대한으로 억누른다.
유진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그, 그 분은, 작가가 아니시지 않나요."
아공간에서의 일을 애써 떠올린다. 다양한 창작자들이 모여 꿈 속에서 마감을 해야만 했다. 그곳에 있던 건, 수많은 작가, 작가, 작가. 그런 곳에 순수한 과학자가 끌려들어갈 이유가,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머리카락을 당기던 장력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왼눈을 가리는 모습으로 떨어지는 머리칼을, 석민은 부드러운 손길로 걷어낸다.
"이번에는 컨셉이 다른 것 같더구나."
"커, 컨셉이요."
뺨을 어루만지는 손의 열기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다.
"내가 한 마디 하고 나오긴 했다만, 혹시 모르니 말이다. 아침에 안부 전화 한 통만 해 주렴. 나는 잠시 다른 차원에 다녀와야 해서, 꼭 좀 부탁한다."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차마 예상도 되지 않는다. 꿈 속의 아공간을 억지로 찢고 들어가는 석민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유진은 겨우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접니다, 독고유진."
아침, 여덟 시 반. 희태가 어떤 사이클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는 눈을 뜨고 있을 것이었다. 통화 연결음이 세 번도 반복되지 않아 끊겼다. 예상이 맞았다. 다행인 일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수신자 이름을 확인했으니까, 라는 뒷말을 생략한 것이리라.
"저...... 요즘 별 일 없으세요?"
전파 너머의 적막. 당신이 왜 그런 걸 나에게 묻느냐는 질문이 침묵 사이로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유진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머쓱하게 웃다가,
"아니, 저희 교수님이 워낙 선생님을 아끼시지 않습니까..."
결국엔 양 교수를 내세우고야 만다. 그를 내세우는 게 희태와의 대화에서 진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유진은 지난 몇 번의 통화로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희태는 빠르게도 답변을 내놓았다.
"별 일 없습니다."
사무적이고 무감정한 어투.
"아하하... 날이 추워졌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당신은 형 밑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적당히 통화를 끊으려고 한 말이었건만, 맥락을 무시한 질문이 훅 치고 들어온다. 이것 역시 희태의 한 패턴이다. 대화의 패턴을 무시하는 게 패턴이라니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아...... 답사 조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연줄이 있어서 답사를 자주 도와드립니다."
대체 무슨 연줄이 있어야 온갖 곳을 돌아다니는 답사를 도와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유진이었다.
아무래도 그 여름의 사건을 겪은 뒤로 총기가 푹 꺾인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여전히 회복 상태인 걸까. 그런 자조를 해 보아도 당장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희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감기 조심하십시오."
라는 말을 툭 내뱉곤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른 점심을 대충 챙겨먹고 시내로 나왔다. 어느덧 12월에 접어들었다. 연말 분위기가 거리에 한가득이다. 일 년을 마무리한다는 설렘에 빠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모양이었다. 유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 년을 마무리한다는 설렘보다는 일 년을 더 살 수 있었다는 안도감이 우세하다. 적어도 기이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그런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차를 끌고 나갈까 하다가, 날씨가 좋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대학 안까지 들어가는 시내버스는 언제나 젊음의 열기로 가득하다. 사이드미러에 매달린 고양이 귀신은 구천九天을 올려다보며 구천九泉으로 돌아갈 날만을 어림하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달려 대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하차하며 흘긋 혼령을 살폈다. 녀석은 고민 하나 없는 얼굴로 사이드미러에 사뿐히 앉아 팔꿈치 아래가 잘린 팔을 핥고 있었다. 유진은 못 본 체 하며 인문관을 향해 걸어나간다.
도서관 근처 흡연장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상대도 유진을 알아차렸는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는 그를 향해 다가온다.
"오늘 양 교수님은 출장이시던데."
유준은 그리 말하며 새카만 코트에 두 손을 찔러넣었다. 적당히 생긴 얼굴에 어딘가 핼쑥한 분위기가 감돈다.
"아, 아직 안 오셨어?"
"뭐, 그렇죠. 동아리 보고 드릴 일이 있어서. 오전 수업 끝나고 잠깐 연구실에 들렀는데 안 계시더라고. 아무나 잡고 물어봤더니 출장이시라데."
"그래...... 점심은?"
"조만간 여자친구랑 먹으려고요."
자연스럽게 지난 여름의 일을 떠올린다. 유준이 당시에 만나던 여자친구는, 알고 보니 사이비 종교의 신도였다. 그 아이를 지금까지 만나고 있지는 않을 성 싶다.
그런 함의가 담긴 유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참 어린 후배는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아무튼 교수님은 지금 안 계세요.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저도 모르고. 시험기간이라 동아리 애들도 은근 바쁘거든요. 그러니까, 누구 찔러 볼 생각 마세요."
유진은 별 수 없이 모교의 교정을 거닐다가 귀가했다.
석민은 그날 밤 유진의 침실에 나타났다.
부엌 식탁에 앉아 다음 달 치 원고를 쓰고 있던 유진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잠시 긴장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집에 침입한다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원고를 쓰던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조금 열려 있는 침실의 문틈을 주시한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나다, 유진아."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유진은 몸에 실었던 힘을 풀었다. 문틈에서 기다란 손가락이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곧 문을 밀고 모습을 드러낸다.
셔츠에 얇은 코트라는 차림새는 영 초겨울에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차원은 이 세계보다 따뜻하기라도 한 걸까. 검댕따위가 거뭇거뭇 묻은 은사의 코트를 살피면서, 유진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커피 드실래요?"
"그래, 그래."
식탁 앞에서 구두를 벗는 모습은 꽤 아스트랄한 면이 있다. 새카만 구두를 현관에 가져다 놓고, 얼룩진 코트를 식탁 의자에 걸어둔다.
"희태는 좀 어떻더니?"
"아, 네. 별 일 없으시다고 하시던데..."
고양이 두 마리가 마루에 난 발자국을 탐색하고 있다. 말라붙은 진흙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석민은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식탁 위로 옮겼다.
"단순한 악몽이라고 생각하는가 보구나."
"네, 저도 첫날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으음, 희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다행이지만......"
"괜찮지 않을까요? 그 안에서 하는 거라곤, 초면의 상대와 나누는 시시한 대화가 전부라서요."
유진은 인스턴트 커피를 석민에게 내밀었다. 설탕이 들어있지 않은 분말 커피다. 자신의 몫도 제조하고 나서, 은사의 맞은 편에 앉아 이야기를 재개한다.
"며칠도 아니고 고작 하루니 별 일 없었을 거예요......"
석민은 좋지 않은 얼굴로 즉석 커피를 홀짝인다. 유진도 그를 따라 커피를 한 모금 머금는다.
"컨셉이 달라졌다고 하지 않았니, 내가."
"네?"
"잊어먹은 모양이구나."
침묵. 생활 소음 용으로 틀어둔 TV에서 예능 쇼의 패널들이 웃는 소리. 진흙을 가지고 놀던 고양이가 낮게 가르릉대는 소리.
애써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유진의 얼굴을 보고, 석민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
"유진이 너는, 그 안에서 무얼 했다고 했지?"
"저는, 그 안에서 소설을 썼습니다. 어, 꼭 소설만 써야 했던 건 아니죠. 그저 창작만 하면 되었는데, 저는 작가니까요. 가장 익숙한 창작인 소설 집필을......"
"그래, 그런데 이제 컨셉이 바뀌었어."
다시 한 번 커피잔을 기울인다.
"편을 갈라서 싸움을 한다."
"네?"
"히어로와 빌런 놀이를 하고 있더구나."
또 다시 침묵.
유진은 식탁 위에 놓인 커피잔을 매만지기나 하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은사를 바라보았다.
"......컨셉이 너무 다르지 않아요?"
"신화적인 존재들이란 본래 변덕스럽기 마련이니."
석민은 중얼거리듯이 그런 말을 뱉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안경의 다리를 잡아올린다.
"내가 걱정되는 건, 희태가 얼토당토 않은 싸움에 휘말려서 상처를 입는 것이란다."
그곳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단지 잠에서 깨어나, 삼십 분 동안 꿈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뿐이다. 라는 말을, 유진은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다.
석민은 제 친동생인 희태를 유별나게 아낀다.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막둥이 동생이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딱 네 살 차이만이 날 뿐인데, 쉰이 넘은 지금도 동생의 일이라면 앞뒤 분간하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이 기이하다면 기이하다.
그래서 유진은 희태의 죽음과 관련된 화제를 입에 담지 못했다.
어떤 후폭풍이 불어닥칠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에이...... 그 분은 말수도 적으시고, 차분하시잖아요. 싸움에 휘말릴 성격은 아니시죠."
라며 은사를 진정시키는 게 최선이었다.
석민은 유진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2인용 침대가 간만에 딱 맞는 인원을 수용했다. 침실에 어울리는 행위를 한 것 역시 오래간만이었다.
"여름의 일을 기억하니?"
아니요, 라고 대답한 것 같았다.
"그럼 되었다."
부드러운 미소. 유진은 희미하게 따라 웃는다.
몸을 씻었다. 목욕물이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한 층 노곤해진 의식을 자각한다. 이불 안으로 파고드니, 옆 자리의 은사는 인간들의 휴대용 통신 수단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감기가 들었다는구나, 희태가."
오뚝한 콧날은 이쪽을 향하지도 않는다.
"환절기 감기신가 보네요."
"우리 희태는 튼튼한 아인데......"
유진은 대답을 궁리하다가, 애수에 찬 석민의 옆 얼굴을 보고, 액정에 늘어선 걱정의 말 수 줄을 보고, 단념했다.
초겨울의 꿈이 눈꺼풀을 감겨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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