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부의담 上

匹傅㥋談 上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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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재단사의 가게는 매화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동네에 있었다.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건 자연의 순리. 그 중에서도 매화는 유달리 꽃망울을 피우는 시기가 일러서, 삼 월이 거진 지난 지금에는 이미 목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나 있었다. 다음 주만 되면 분명 매화의 시신을 거름으로 벚꽃이 풍성하게 피어날 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벚꽃은 무섭게도 아름다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 앞서 찬란하게 피어났다가 목숨을 다하고 떨어진 동족의 사체를 영양분으로 삼아 피어날 수가 있다니. 저 옛날의 문인이,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파묻혀 있다고 말한 것이 마냥 농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과연 남을 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가 있단 말인가.

벚나무가 사람을 영양분으로 삼는다고 놀라는 건 이상하다. 사람도 다른 식물들을 매일 같이 섭취하고 있는데. 먹이사슬의 최정상이라는 레테르 하나에서 기인한 인간의 오만함이란 정말이지 우습구나.

그리고…… 애당초 인간이 먹이가 되지 않는다는 믿음 또한 우습다.

무얼 그렇게 기고만장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있으면 유쾌하여 조금 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고 싶다.

라고, 재단사는 언제부턴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시발점은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이 계기였는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어쩌면 까닭이랄 것은 없고, 단순한 무에서의 깨달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 세상을 거닐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명제라는 것이 이 땅 위에는 존재했다.

그래도 곤란하단 말이지. 나는 앞으로도 한참을 더 살아남아야 할 텐데. 벌써부터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다니.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아, 앞으로 백 년만 더 살면 분명 온갖 것이 시시해질 거다. 틈만 나면 죽고 태어나는 인간들의 생태에도 관심이 없어지게 되면, 그 때가 되면,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게 신이라는 것이죠.

언젠가 만났던 무녀가 읊조렸던 말이 귓가에서 맴돈다.

그것이 신이라는 존재입니다. 토지 위의 주인인 인간들의 인지를 아득히 초월하여 그저 살아갈 뿐인, 그곳에 존재할 뿐인, 그럼에도 신앙의 대상이 되는 애매한 물질이 바로 신입니다.

하지만 무녀, 신을 겨우 물질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모독적이지 않아. 당장 당신도 신을 모시는 신사에서, 신을 모시는 옷을 입고 신을 모시고 있는데.

신이란, 생명이라 일컫기엔 아득하고 비생명이라 일컫기엔 희미한 자아가 엿보이는 존재입니다. 물체라고 말하기엔 형체가 일정하지 않고 기척이라고 말하기엔 존재가 명확한 것이기도 하지요. 사쿠야 님이 삼키신 그 뱀이 실로 그러하지 않습니까?

재단사는 불퉁한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손님이 없는 가게의 소파에 앉아 녹차를 마시던 재단사는 그런 기억을 되살려낸다.

투명한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벚나무는 아직 봉오리만을 수없이 매달고 있다. 앙상한 가지가 바람을 받아 가늘게 흔들린다.

가게에서 일하던 직원 아이는 일찍 집으로 보냈다. 중요한 손님이 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아이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숨기지도 않고,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데 왜 자신이 퇴근해야 하냐며 물었다. 그렇게 중요하신 분이라면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게 있지 않겠습니까. 당당한 모습의 여자아이는 보고 있자면 제 조카가 떠올라 제법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오늘은 아이의 기세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도와주고 싶은 게 있다면 안에서 녹차나 한 주전자 끓여주고 가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는 정말로 녹차를 끓이고 나갔다.

녹차는 맛있었다. 찻잎 자체가 상등품이니 차를 태워버리기라도 하지 않는 한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간다. 손님은 비행기를 타고 올까, 차원에 구멍을 내어서 올까.

"어떻게 생각해?"

아무도 없는 가게 안에서 대뜸 입을 연다.

"사람답게 비행기를 타고 올 것 같아, 괴물답게 차원문을 열어서 올 것 같아?"

재단사의 가슴께에서 무언가 꿈틀댄다.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엉성하게 입은 기모노. 그 안에서, 육체에 달라붙은 뱀이 얄쌍한 머리를 치켜든다.

뱀에게 부피는 없다.

몸에 그려진 문신에게는, 그림에게는, 본래 부피가 없는 것이다.

재단사는 귀를 기울인다. 그에게밖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재단사는 웃었다.

"그릇은 인간도 괴물도 아니라, 라.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재밌네."

틈을 넘으니 이국이었다. 성인 남자 한 명이 겨우 들어갈만한 크기였던 틈은 유진이 몸을 비집고 나오자마자 소멸됐다. 방금 전까지 한국에 있었던 건 꿈이었다는 듯이. 너는 처음부터 이 이국에 있었다는 듯이.

틈의 입구는 양 교수의 연구실에 있었다. 공간을 찢어 개구멍을 만든 장본인이 양 교수이니 당연하다. 그리고, 틈의 출구는, 이곳이 어디인가 하면, 화장실이다. 변기칸이다. 코앞의 문은 잠겨있지 않다. 밖에선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주춤주춤 화장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봄날의 볕이 눈부시다. 크지 않은, 도심의 공원 한가운데다. 아무래도 틈의 출구는 공중화장실이었던 모양이다. CCTV에도 잡히지 않는 장소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있겠다.

양 교수에게서 받은 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무언가가 일본어로 적혀 있다. 양 교수는 이것이 건물의 이름이라고 했다.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서 이곳으로 가 달라고 하면 될 거라고. 그곳의 주인에게 이미 연락을 해 두었으니 네가 고민할 건 없다고.

목 안이 간지러웠다.

유진은 주변을 훌훌 살피다가 도로를 향해 걸어나갔다.

“이야, 안녕하세요. 토코 군. 오는 길에 힘들지는 않았어?”

머리칼을 스포츠 헤어로 시원하게 깎은 중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웃는다. 콧잔등에 얹힌 둥그런 안경이 눈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인상을 겨우 약화시키고 있다. 재단사, 곧 전통복 제작자답게 기모노를 걸치고는 있지만, 말 그대로 걸치고만 있다는 느낌이다. 제대로 여미지 않은 옷깃 너머로 건강한 빛의 피부가 엿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영문 모를 영물도, 유진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가에 서 있는 유진을 향해, 재단사는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그렇게 괴물 보듯이 보지 말라고. 나는 토코 군의 상사와 달라서, 제멋대로 날뛰거나 하지 않아.”

“그건……”

“일단 앉아요, 앉아.”

유진이 겨우 소파에 앉는 사이 재단사는 뭔지 모를 서류철을 펄럭인다. 유진으로서는 읽을 수 없는 이국의 글자가 잔뜩 쓰여있다.

“차도 한 잔 하시고.”

유진은 그제야 제 앞에 찻잔이 하나 놓여있음을 깨닫는다. 조금 푸른 감이 있는 투명한 액체가 다소곳하게 담겨 있다. 녹차일까. 아니면, 녹차를 닮은 무언가일까.

“녹차예요, 녹차. 뭐 이상한 거 아니야. 그 교수, 토코 씨한테 뭘 그렇게 먹였길래 반응이 그래?”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어를 잘하네?”

“교수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서류철을 내려놓은 재단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님을 바라본다. 낯을 살피던 그 시선이 빙글 굴러 목까지 내려온다. 유진은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덥석 찻잔을 들어올려 기울였다. 무난하게 맛이 좋은 녹차를 머금었다가, 삼킨다. 여전히 목에 이물감이 있다.

“그걸 목에 박아넣은 건가?”

“예…… 언어를 교환해주는 물건이라고 하셨습니다.”

“별 걸 다 만드는군. 그런데 왜 옷감은 만들지 못하는 건지.”

목을 매만진다. 목젖 옆을 누르면 둥글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진다. 작은 구슬을 목에 이식했으니 당연하다. 누르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아 다른 이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살 일은 없지만, 목에 알약이 걸려있는 듯한 이물감은 빈말로도 편안하다고 할 수 없다.

“하여튼, 그래. 소개가 늦었네. 사쿠야 토무야라고 합니다. 이 거리에서 옷을 좀 짓고 있습니다. 토코 군의 교수와는 인연이 꽤 길어.”

“……독고유진입니다. 교수님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따로 일은 안 하고?”

“아, 소설을 조금 씁니다.”

“오옷, 소설? 무슨 소설? 혹시 추리소설 같은 거 쓰나?”

“아, 아니요. 호러 소설을 씁니다.”

“호러인가…… 그건 소설이라기보단 자서전이겠어.”

“……정확하십니다.”

담담하게 대화는 이어나가고 있지만, 마주 앉으니 부담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살갗에 느껴지는 기묘한 압력. 기의 흐름이랄 것이 형체를 갖고 마구잡이로 방출되는 듯한 느낌. 이런 감각을, 유진은 수없이 느껴본 것이다. 교수님과 함께한 답사에서, 신화적 존재들을 마주한 그곳에서,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상대의 얼굴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무심코 떨어진다.

뱀과 눈이 마주친다.

옷깃 위로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있는 뱀의 머리에는, 말간 색의 초승달이 떠 있다.

“그래, 내 얘기는 교수한테서 들었나?”

사쿠야가 손가락을 튕기며 이목을 끌었다. 유진이 이물에 정신이 팔려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유진은 황급히 고개를 든다. 얄쌍하게 치켜올라간 눈꼬리와 마주친다.

“아, 예…… 신을 품고 계신다고 하셨지요.”

“하하, 신이라니. 그렇게 대단한 것까진 아닌데.”

뱀은 유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외부자인 유진으로서는 물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사쿠야 씨는 알고 있을 거다. 그릇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릇에 똬리를 틀고 앉은 신의 전언을 받들어야만 하는 존재이니까.

“뱀…… 입니까?”

“뱀이라기보단, 뱀의 모습으로 현신한 화신이랄까. 가네샤를 코끼리라고 하지는 않잖아.“

인도의 신을 입에 담는 사쿠야의 표정은 퍽 즐거워 보인다.

“나도 품고 싶어서 품고 있는 게 아니야. 음, 사건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사고로 뱀을 삼켜버리게 되었는데 말이야. 꺼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이 나이 이 때까지 이러고 살고 있지.”

본래 사람에게 달라붙은 신이란 떼내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것은, 유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대대로 신내림의 피가 흐르던 집안. 그곳에서 태어난 이가 유진이니까. 그의 외할머니는 무당이었다. 운이 좋게도 어머니는 그러한 기질을 물려받지 않았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유진은 영기가 트이고야 말았다. 무당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업이라, 손자인 유진에게는 발현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으나……

아무튼 태생부터 운이 나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튀어나오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토코 씨의 상사보단 내 쪽이 훨씬 안정적일걸.”

“안정적……?”

“이런, 아직 모르나? 토코 씨, 그 교수랑 꽤 오래 만나지 않았어?”

“아, 네. 이럭저럭 이십 년 정도는……”

“그래그래. 그 교수가 나한테 그걸 지어달라고 한 게 십 년이 다 되어가니깐, 분명 그 전부터 아끼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거라니요?”

유진은 양 교수가 자신에게 주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칼은 받았어도 옷은 받은 적이 없다. 모자라면 모를까, 전통복이라면 더더욱 받지 않았다.

그러자 사쿠야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 반응이 더욱 기묘한 데가 있어, 유진은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리기나 한다.

“음…… 토코 씨, 결혼은 했나?”

순간의 동요를 잠재우기에 녹차는 아주 알맞게 따뜻했다.

“아니요, 미혼입니다.”

“아하하, 그런가? 그렇군, 그래.”

“저…… 교수님께 옷감을 받은 적이 없는데, 뭘 지어주셨습니까?”

“그래, 옷감. 일단은 오늘의 옷감을 가져오도록 하지.”

재단사는 한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술한 기모노가 벗겨지는 게 아닐까 염려가 들 정도로, 벌떡. 그리고는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곳에 창고라도 있는 걸 테다.

유진은 생각에 잠겼다. 십여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유진은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교수님의 졸이 아닌, 인간 독고유진의 인생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니까.

결혼을 한 번 했었다. 그러니까…… 이성을 한 명 만나서, 교류를 하고, 교제를 이어나가다가, 서로의 취향과 가치관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인하고, 이 사람이라면 남은 인생을 함께해도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흔해빠진 러브스토리. 하지만 그렇기에 모두가 안락하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한 때는 되었었다.

그 때에도 유진은 양 교수와의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교류의 내용은 지금과 썩 다르지 않았다. 양 교수는 체질이 체질인 유진을 보호해주고, 유진은 그에 보답하기 위해 무력을 빌려주고. 하지만 유진에게 교제하는 여성이 생긴 이후로 두 사람의 교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양 교수가 그를 모독적인 답사에 자주 끌어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요즘은 그쪽 일이 많이 없나요?”

유진의 물음에 아직 마흔 줄이던 양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유진이 너도 이제 가정을 꾸리게 될 거 아니니.”

상냥하고 감동적인 이유였다.

그녀와의 연애가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아마, 행복했으니까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다른 세계의 악귀들에게 자주 시달리는 자신의 체질을 털어놓아도, 이래 뵈도 자신은 기가 세서 괜찮다며,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던 그녀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결혼식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영혼들의 방해도 없었다. 주변의 공기가 의아할 정도로 맑았다. 어떤 성당에 들어가도 이렇게까지 공기가 맑지는 못한데. 그 이유를 유진은 하객석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양 교수가 손목에 아티팩트를 차고 앉아 있었다. 연구실 한구석에 걸려 있었던 팔찌형 아티팩트다. 사용자의 마나를 흡수하여 근처의 모독적인 기운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고 들었던 기구였다.

“결혼이란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정장을 차려 입은 미혼의 양 교수가 말했다.

“축복하마.”

그러나 그 축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여느 신혼부부가 그렇듯, 두 사람은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내는 국외로 가고 싶어 했다. 유진 역시 그러했다. 인생에 한 번 뿐인 신혼여행이니까, 되도록이면 국외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목적지를 정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하루하루의 계획을 짜고, 2세 계획도, 은유적으로, 어쩌면 직접적으로, 준비했다.

여행 며칠 전에 양 교수를 만났다. 이유 없는 만남이었다. 당시에도 유진은 천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약속을 잡으면 가볍게 만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

“신혼여행을 삿포로로 간다고?”

“네. 마침 겨울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좋아해서요.”

“그건, 으음……”

보기 드물게 양 교수가 말끝을 흐리기에, 유진은 왜 그러시냐며 물었다.

“조금 멀구나.”

“아, 네. 세 시간은 걸리더라고요.”

“그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삿포로까지는 어떻게 해도 양 교수의 보호가 닿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라가 나라인지라, 미처 떠받들어지지 못해 한이 서린 잡신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곳에 보호받지 못한 그릇이 발을 내딛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양 교수조차도 차마 예상을 하지 못하겠다고.

“정말로 그곳까지 가야 하는 거니?”

이미 숙소도, 렌트도 예약이 끝났다. 이제 와서 목적지를 바꾸기엔 많이 늦었다. 하다못해 도쿄라면 다른 사람에게 보호를 부탁할 수 있다며, 양 교수는 유진을 설득했지만.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겨울의 삿포로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토코 씨.”

낯선 목소리가 회상에 파고들었다. 유진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사쿠야가 싱글싱글 웃으며 부드러워 보이는 긴 옷감을 양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아, 그게 교수님이 부탁하신……”

“그래. 특별 주문 받은 옷감이야.”

유진은 그에게서 옷감을 받아든다. 가볍고 부드러운 비단결이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게 아닐까, 하는 헛된 망상이 들 정도다.

“그걸 무언가의 재료로 사용할 모양이던데. 나야 그 교수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문이 걸려있는 건가요?”

“눈치가 빠르네.”

옷감을 건넨 재단사는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소파에 풀썩 앉는다.

“토코 씨가 이해할 만한 단어로 말하자면, 그래, 보호 주문이군. 보호 주문이 걸려 있어. 옷감 자체도 마력이 깃든 실로 지어서 주문이 훨씬 잘 먹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끊는다. 인위적인 공백. 어째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유진은 옷감을 잘 접어 허벅지 위에 올려둔다.

사쿠야는 혀를 한 번 차고 나서야 말을 잇는다.

“토코 씨, 이혼했지?”

“……네.”

“무슨 일이 있었어?”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세상에는 털어놓아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야기들도 있으니.”

뱀눈초리가 이쪽을 향한다.

아아……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분은 신을 모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한참 어렸을 적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항상 제단 앞에 앉아계시던 외할머니의 찡그린 얼굴. 할머니의 정수리 위로 둥실둥실 떠 다니던 무서운 표정의 어른. 원색적인 빛깔의 제단 앞에서 사위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으면, 유진이 생각하는 바를 읽어내곤 했던 할머니를 조종하는 어른.

신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다……

한낱 인간이 그 앞에서 진실을 숨겨봤자 신님이 노하실 뿐이다.

유진은 잘 접어둔 옷감을 만지작대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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