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부의담 下

匹傅㥋談 下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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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거 아닌 이야기입니다. 사쿠야 씨도 신령을 품고 계시지 않습니까. 인간에게는 각자의 혼이 존재하므로, 아무리 신이라 해도 허투루 몸에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그저 우러러보는 신이 그러한데, 감히 한낱 잡귀가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를 탐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손님 하나 없는 가게 안은 고요하다. 기계 하나 돌아가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 그저, 창 너머의 벚나무가 봉오리를 매단 채 느릿하게 흔들리는 모습에서, 싸르르한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상이 느껴질 뿐이다.

맞은 편의 사쿠야 토무야는 말없이 유진을 바라보고 있다. 위로 치켜올라간 눈꼬리는 얼핏 뱀을 닮은 듯하다. 원래도 저렇게나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었을까. 어쩌면, 신을 오래도록 몸에 품어 동화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저는…… 신을 모시는 그릇에 지나치게 적합한지라, 보통의 인간이라면 닫혀있어야 할 영적인 통로가 항시 열려있는 상태입니다. 설령 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도 저처럼 항시 통로를 열어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단 앞에서 제사를 드릴 때나 잠시 열려야 할 것이, 항상 열려 있어서, 그러니까…… 신이 아닌 잡신, 잡귀마저도 제 몸을 그릇으로 쉬이 삼을 수 있는 겁니다.”

유진에게 있어 그 통로랄 것은 왼눈이었다. 삿된 것들이 보이는 왼눈.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들도 시선은 기민하게 느끼곤 해서, 유진이 무심코 시야에 잡힌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 역시 유진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유진의 활짝 열린 통로를 눈치채고 만다. 통로로 몸을 비집고 들어온다. 끔찍한 현기증이 몸을 덮친다. 머리에서 시작된 고통이 신경을 타고 온 몸으로 흘러내린다. 의식이 멀어진다. 암전.

때때로 힘이 약한 잡귀가 몸을 차지할 때면 유진의 고유한 의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잡귀의 의식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자아가 제 몸으로 벌이는 일을 한 발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든 간에, 그저 지켜본다. 각성의 뒤편으로 밀려난 자신에게 앞면의 자아를 내칠 힘은 없다. 단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이 모든 행동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사쿠야 씨도 이런 감각을 알고 있을까.

유진은 시선을 떨어뜨린 채 말을 잇는다.

“교수님께서는 저의 통로를 닫아주시는 역할을 합니다. 마력을 사용해 주문을 활성화시키신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마력이라는 것이 또, 무한한 자원이 아니라는 사실도 저는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항상, 그분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마력이라면 나는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어.”

사쿠야가 돌연 허리를 굽혔다. 유진을 향해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이다.

“토코 씨는…… 내 생각보다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나 봐.“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은 눈으로 이계를 볼 수 있어,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 교수에게서는 무엇도 보이질 않았나?”

“뭘 묻고 계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토코 씨, 그런 체질이라면 항상 잡귀들에게 시달릴 거 아니야. 피곤하겠어, 아주. 그런 와중에, 교수 곁으로 가면 뭔가 느껴지지 않았어?“

사쿠야의 눈은 맑다. 배 안에 뱀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눈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이 눈은 인간 사쿠야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 아닐까. 눈앞의 재단사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 걸친 허물인 것이 아닐까.

유진은 한순간 그런 생각을 하고야 만다.

교수님 곁에서 느낀 거라곤, 많다 못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마나의 흐름. 신을 모신 재단사의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교수님 역시 상당한 마력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계신지도 모른다.

“그래…… 그거 말이야.”

사쿠야가 얇은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인다. 느슨한 초승달 같은 미소가 입꼬리에 걸렸다. 구태여 대답을 하지 않아도, 네가 생각하는 건 뭐든 알고 있다는 듯이.

“그 어마어마한 마력을, 토코 씨의 교수는 대체 어떻게 충당하고 있느냐는 거야.“

“아마, 주문이라든가, 아티팩트에서……“

“내가 아까 그러지 않았어, 나는 토코 씨의 상사보다 훨씬 안정하다고.”

“……교수님께서도 무언가를 모시고 계신다는 겁니까?”

“토코 씨는 본 적이 없나?”

“……무엇을요?”

“아무래도 못 본 모양이구만. 제자 앞에서 그런 꼴을 보여주긴 싫었나보지? 흐음……”

재단사는 굽혔던 몸을 뒤로 물린다. 콧등을 타고내린 둥근 안경을 적당히 밀어올리더니, 작게 코웃음을 한 번 치다가, 다시금 유진을 바라본다.

“토코 씨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사쿠야 씨는, 교수님이 무엇을 모시고 계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인연이 길다고 하지 않았어.”

짧은 머리를 매만지는 사쿠야의 팔은 언뜻 보기에도 탄탄하다.

“궁금하신가, 토코 씨?”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토코 씨의 이야기를 좀 더 해 줬으면 하는데.”

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거든, 하는 말이 귓바퀴 근처에서 맴돈다.

메아리 같은 울림.

이건, 화신이 하는 말인가? 아니면, 사쿠야 씨가 하시는 말인가.

확실한 것은, 그를 앞에 둔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사실이다.

유진은 가벼운 옷감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이야기를 재개했다.

한겨울의 삿포로를 기억한다.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늘한 대기를 들이마시면 그저 겨울의 내음만이 머리를 꽉 채웠다. 도시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은 꼭 장식처럼 어울렸다. 하늘에는 언제나 서먹한 하얀 구름이 가득해서, 심심할 틈도 없이 눈을 잔뜩 흩뿌리고는 했다.

“눈이 오는 게 좋아.”

아늑한 목조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의 한 창가석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손으로 감싼 아내가 말했다.

“비는 황급하게 떨어지지 못해서 안달이지만, 눈은 그렇지 않으니까.”

느긋하게 살랑대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비는 별로야?”

내가 물었다.

“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도 좋아.”

그저 떨어지는 것이 제 인생의 목적이라는 듯이 호쾌하게 추락하는 모습이 보기 좋댔다.

“인생을 힘차고 즐겁게 사는 것 같잖아.”

그렇게 말하며 아내는 미소지었다.

부드럽게 컬이 들어간 검은 머리칼이 온풍기의 바람을 받아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을, 나는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영화의 등장인물도 아내의 미소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교수님께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으신 건 아니었습니다. 삿포로까지는 확실히 교수님의 힘이 닿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저에게 부적을 지어주셨습니다. 상냥하신 분이죠……”

자신의 과오를 남에게 털어놓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이 드는 일은 아니다. 멍청한 선택을 한 자신을 타인에게 낱낱이 까발리는 꼴이 아닌가.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노출 행위가 참회와 해소의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무엇보다, 신 앞이니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다…… 라고, 유진은 얼버무렸다.

“부적? 보호 주문이라도 걸었나보지.”

“네…… 교수님도 그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저를 보호해 줄 부적이라고…… 급하게 지은 터라 교수님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보호는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도 너무 과신은 하지 말아라. 가장 중요한 건 유진이 네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거란다. 신혼여행인데도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미안하다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하던 양 교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때의 복장과, 어투와, 눈빛까지, 세세하게 읊을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자신은 수도 없이 양 교수의 조언을 생각했으니까. 왜 교수님의 말을 따르지 않았을까, 후회했으니까.

“일주일동안 여행을 했습니다. 삿포로는, 저보다 사쿠야 씨가 더 잘 아시겠지만, 일주일이나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둘러볼 수 있는 동네입니다만, ……아내가, 느긋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해서, 또한 저도 바쁜 여행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서……”

말문이 막힌다.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 일에 얽힌 주박에서 해방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에고는 여즉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일을 잊고 묻어버리고, 앞으로 애써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째서일까?

왜 아직도 그 얼굴을 떠올리면 아득한 침잠에 휩쓸릴까.

“저는…… 여행을 하는 동안, 교수님께서 주신 부적을 늘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외투를 벗게 되면, 부적만을 꺼내 최대한 가까운 위치에 두곤 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아내와 함께하는 동안 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래…… 다섯 째 날까지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꼭, 여태까지의 인생에서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이변이 거짓이라는 듯이……

신혼여행 여섯 째 날. 사실상의 마지막 날이었다. 일곱 째가 되는 날은 아침부터 온갖 짐을 챙겨 공항으로 떠나야 했다. 그것을 여행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즐거움의 정도가 약하지 않나.

아내는 근처의 신사를 가 보고 싶다고 했다. 일본은 수많은 신을 섬기는 만큼 신사도 유명하니까. 일본에 온 이상 한 번은 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나도 그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체질이 염려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신사는 기본적으로 신을 모시는 장소다. 나는 당장 한국의 여느 절에만 가도 미묘한 기류를 느끼곤 했다. 말로는 감히 형용하기 어려운 오싹한, 하지만 어느 쪽 눈에도 보이는 건 없어 더욱 오싹한 그 기류를.

그래도 신이 다스리는 땅인 이상 별 일이야 있겠는가. 내게 보이는 게 없다는 건 잡귀 하나 없다는 것과 같다. 단순히 신의 힘이 강력하여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아내를 위해서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애매한 오후. 렌트카에 시동을 걸어 신사로 향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산 위에 있어 조금은 차로 올라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눈이 잔뜩 오는 날씨에 등산을 했다간 까딱하면 발이 미끄러질지도 모른다.

운전석이 반대편에 있는 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한 갈래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새빨간 조형물이 줄지어 선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도리이들이 우리를 향해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원색적으로 붉은 도리이가 한 방향으로 수없이 늘어섰다. 보고 있자니 지옥길의 입구 같아 사위스럽기 그저 없는데, 주위에 소복하게 쌓인 새하얀 눈들에 대조되어 그 빛깔의 형형함이 극에 달했다.

외할머니의 제단을 보는 것 같다……

맥락 없는 감상이 순간 떠오른다.

“이거, 도리이라고 하지?”

아내가 대뜸 물어왔다.

“신사의 문이래…… 보통은 하나씩 있는데, 여기에는 스물 일곱 개나 있다지 뭐야.”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문이 스물 일곱 개나 있다니. 뭘 그렇게 숨기고 싶었길래…… 문을 스물 일곱 개 씩이나 단 걸까?”

아내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분명, 안색이 좋지 않은 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여기고 있는 걸 테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새빨간 길 안으로 나아갔다.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애매하기도 하지만, 요일이 애매하기도 하지만.

기이할 정도로 인기척이 없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

삿포로는 해가 이르게 진다.

겨울은, 더더욱 이르게.

이르게 찾아오는 황혼녘.

산 것과 죽은 것의 경계가 애매해지는 시간.

여우가……

밝은 색의 여우가.

여우가 도리이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 위를 깡총깡총 뛰어다닌다.

아내를 향해 달려온다.

“어머, 아무리 산 속이라지만…… 춥지도 않은가?”

아내의 품에 달겨든다.

“이것 봐, 몸이 차갑잖아.”

털이 고운 주황빛의 여우.

나를 대신해 아내의 품에 안겨 있는……

여우의 눈이 반짝인다.

황혼을 받아 빛난다.

“아기 같아서 귀엽다.”

열 일곱 번째 도리이를 지난다.

열 개의 도리이 너머에는 신사가.

조금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아내가 안겨왔다.

아내를 안는다.

품에 있던 여우는 온데간데 없다.

외투에 털이 묻지 않을까……

“괜찮아.”

살이 맞닿는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등에 도리이가 닿는다.

입을 맞춘다.

외투의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손이 그 안으로 파고든다.

“간지러워……”

차가운 손.

계속 잡고 있었는데, 벌써 이렇게 식다니.

손을 잡아주자……

하고 생각한 순간,

빠져나갔다.

손이……

부적이……

눈밭 위로 떨어진다.

“잠깐…….”

숨이 막힌다.

아내는 여전히 달라붙어있다.

내 목을 양껏 조르면서……

그 뒤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떠올려야만 했다.

최대한 압축해서, 단순화해서, 정신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정신을 차리니 아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급하게 손을 뗐다. 주변에 산재한 도리이와 나무줄기 뒤편에서 삿된 것들이 부부를 흘긋이고 있었다. 패닉에 빠진 유진은 눈에 흠뻑 젖은 부적을 회수하고 아내를 업어 산을 내려갔다.

부적 덕분인지 그 뒤로 기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현실적인 일만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두려워했다.

유진 역시 그러했다.

“당신의 그 체질이라는 거.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믿지는 못했어. 그야, 나는 살아생전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

그런 일을 겪은 이상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내가 당신을 죽이면 어떡해?

내가 아닌 내가 당신을 죽이면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해?

“한국에 있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단언할 수는 없어.

나는 그런 체질이니까……

어쩌면, 우리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도 그런 체질이 될지도 몰라……

그래서 두 사람은 결별을 결심했다.

조금 늦은 깨달음이었다.

아내의 불신과 유진의 낙관이 한때 로맨틱한 비율로 합쳐졌던 결과였다.

“너무 슬퍼하지 마. 어차피 지난 일. 돌이킬 수 없는 일 아냐.”

사쿠야가 어르고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배 안에 뱀을 품고 있는 이 치고는 퍽 상냥한 목소리다.

“자네도 자네지만…… 교수도 상심이 컸겠어.”

“아, 예…… 부적이, 그런 식으로 제거될 줄은…… 제가 좀 더 숨겼어야 했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유진은 급하게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다. 그런다고 돌아올 목소리는 아니지만.

“부적도 그렇고…… 토코 씨한테 다른 선물도 하려고 했거든, 그 교수가.”

“예? 아, 아까 말씀하셨던……”

“그래. 갑자기 교수랑은 연도 없는 물건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꽤 당황했던 기억이 있어. 그건 역시 교수의 것이 아니라…… 당신 거였구만.”

사쿠야는 유진의 손에 들린 옷감을 가리킨다.

“그것과 비슷한 원단으로 배냇저고리를 지어달라고 했었지.”

유진은 입을 열지 못한다.

“그런데…… 얼마 후에 주문을 취소했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면서.”

눈시울이 따끔하다. 이젠 그 일로 눈물을 흘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도.

“……그 연유가 나는 조금 궁금했을 뿐이야. 자식은 없지만 소중한 조카가 있는 몸으로서.”

찡한 코끝을 몇 번 문질러도 한 번 흐른 눈물은 가시지 않았다.

“뭐…… 적어도 지금은 배냇저고리 같은 건 만들지 않겠군. 조만간 주문이라도 받아낼 일이 있는 건가? 그 교수.”

교수와의 첫만남은 최악이었다.

웬 기분 나쁘게 웃는 중년이 (십 몇 년 전에도 사십을 넘었으니 참 많이도 살았다) 가게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당신이 원단에 주문을 걸 수 있냐고 물었다. 아니, 지금에 와서야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거지만, 당시에는 하도 횡설수설하여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듣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중년은 말도 끝맺지 못하고 가게 바닥에 무언가를 잔뜩 토해냈다.

도무지 인간의 뱃속에서 나온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상황을 파악하고자 숙였던 고개를 드니, 이제는 끔찍한 모양의 촉수가 그의 뱃가죽을 찢고 튀어나오고 있었다. 재단사니 일단 색에는 일반인보다 민감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그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색의 촉수 수 가닥이 꾸물꾸물 기어나왔다.

이거…… 옛 것들의 고치라도 되나?

하고, 사쿠야는 생각했다.

아득한 녀석들이 인간에게 알을 심어두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니까.

무난하게 가게 주변에 아공간을 만들어 고치를 제압했다. 이제는 뱃가죽을 넘어 몸통 전체를 뒤덮은 촉수들이 고통스럽게 꿈틀댔다. 남자의 얼굴은 촉수들의 움직임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사쿠야는 가장 두꺼운 촉수 몇 가닥을 뜯어냈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어라? 뭐야, 살아있잖아.”

잘 살펴보니 단순한 고치라고 하기엔 무언가 이상했다.

고치라고 함은, 태아가 세상에 나오기 전 잠시 머무는 곳. 그러니, 태아가 태어나면 고치는 쓸모를 잃는다. 기껏해야 갓 태어난 녀석에게 먹히는 게 고치의 마지막 임무다.

하지만 남자는 촉수에게 먹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죽지도 않았다. 그것이 참으로 기묘하다.

“당신…… 뭐하는 인간이야?”

이런 꼴을 하고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만, 일단은 나도 남들에게 인간으로 보이고 있으니 인간이라고 불러주마.

그러자 남자는 양손으로 바닥을 벅벅 긁어대는 것으로 고통으로 뒤틀린 얼굴을 수복하곤 겨우겨우 대답을 짜내는 것이다.

“도와…… 주십시오……”

라고.

“그게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나……”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사쿠야는 나지막하게 중얼댄다.

소파에 웅크려 연신 코를 훌쩍이던 한국인은 이미 국경을 거슬렀다. 올 때도 여권 하나 없이 온 몸이니, 갈 때도 심사가 필요없는 방법을 택해야 하지 않겠나. 사정이 있어 도쿄를 떠날 수 없는 몸인 사쿠야로서는, 차원을 가르는 통로 따위 사용할 수 없지만…… 여는 방법은 오래전부터 익히고 있었으므로.

가게 뒷마당에서 그는 귀국했다. 교수가 의뢰한, 마력이 깃든 천을 꼭 부여잡은 채.

“삿포로에, 도리이가 잔뜩 있는 신사라면…… 그거구만, 여우가 잔뜩 사는 신사.”

후시미이나리 신사. 본당은 교토에 있지만, 분파의 형태로 삿포로에도 소규모의 신사가 지어져 있다. 스물 일곱 개의 도리이가 신사까지 죽 늘어선 모습은 신성해 보이기도 하고, 사위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뱀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다지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나리 신인가. 그 위대하신 분이 한낱 인간을 놀릴 이유는 없으니, 여우 모습으로 분한 악귀라도 되는 거겠지.”

돌연 뱀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나리의 이름을 대고 쇠락한 신사가 있을 리 없다.

그런 내용의 귀울음이 들렸다.

“쇠락한 신사에는 본디 잡귀들이 꼬이기 마련이지만 말이야. 거기는 쇠락했다기보단, 일단 분가니까. 영력이 그리 강하지는 못할 테지…… 게다가.”

황혼녘은 마물이 나타나는 시간이 아닌가.

오마가토키逢魔時. 낮과 밤의 경계이자, 토코 씨가 이야기 했듯, 생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간. 마물이 이 세상에 잠시 발을 딛을 수 있는 시간. 인간에게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시간.

“그 때라면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인간이 미워서 견딜 수 없는 악귀가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어?”

뱀은 다시 입을 닫아버렸다.

그는 본래 말수가 많지 않다.

“아무튼 간에…… 흥미로운 사람들이네. 그 교수도, 토코 씨도.”

어디가? 라는 물음은 당연하게도 들려오지 않았다.

혼잣말이 늘었다. 과묵한 청취자가 언제나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난 후부터. 그러니까, 한참 된 버릇이다.

“그릇이 그릇을 키우고 있는 셈이잖아. 그릇한테 필요한 건, 그릇이 아니라 보호자일텐데……”

그에게는 이미 보호자가 있다.

“교수한테?”

모종의 계약이, 아까의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다른 차원에서 내려진 계약이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무슨 소리야. 토코 씨한테 다른 보호자가 있다고?”

네가 말하는 교수를 보호하는 이가 그에게 내린 계약이다.

“어려운 소리를 하네. 항상 그랬지만……”

그러니 교수는 보호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 몰골로 어떻게 남을 보호할 수 있는 건지.”

대답은 없다.

“오염된 핏줄이라는 인생은 참 기구해……”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딱히 내가 할 말은 아니지.”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대답은, 또한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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