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년, 카일룸 대법원

17시간에 걸친 국민참여재판의 기록, 그리고….

Isaac by Isa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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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원합의체¹는 위험해요. 카일룸의 대법관 열둘 중 다섯이 리히터와 연줄이 닿아있습니다."

"더이상 날 설득하려 하지 마, 아이작. 카일룸은 리히터의 무대라고. 리히터인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냐."

"그러니 무조건 리히터와 관련 없는 대법관이 심리하는 국민참여재판으로 끌고 가야 해요."

"내 말을 안 듣… 하아. 너는 그렇다 쳐도, 나는 리히터에서 쫓겨난 부진아야. 어떻게 그들을, 그것도 법정에서 이길 생각을…."

¹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원 13인이 찬반으로 의결하는 재판

2.

"…이게, 다 사실이라고?"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대법원에 재판을 청구할 검사의 권한뿐입니다. 이제 와 검사 과정을 밟기에는 시간이 없다고요. 이 재판을 여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은 당사자성까지 일부 주장할 수 있는 당신, …형 뿐이에요."

"……."

"리히터를 죽이는 것은 공화정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3.

"검사 측의 증거 제출 및 증인 신청에 앞서 본 소는 사건번호 579 고합 118호 형사재판으로, 561년 니힐룸 재해의 피해자로 알려진 기젤라 리히터가 계획적인 유기에 따른 존속살인의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청구된 재판입니다. 배심원단은 평의²와 평결³을 제외한 모든 재판 과정에 있어 대화를 나누거나 증인을 신문하는 것이 불가하며…"

² 평의는 법정 공방이 끝난 후 배심원들이 모여 피고인의 유무죄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

³ 평의를 통해 확정된 배심원의 최종 판단 결과

4.

(중략)

"검사 측은 피고인의 범행을 입증할 증거를 제출하십시오."

"…피, 고인이 범행에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561년 니힐룸 재해의 피해자로 알려진 기젤라 리히터의 동생인, 아이작 리히터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당사자 본인신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해당 재판은 민사법에 기반하지 않으므로 특별한 사유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 신문이 중단될 수 있습니다. 원고, 증인석으로 나와주십시오."

5.

"검사는 증인신문을 시작하십시오."

"……증인과 피고인은, 부자지간이 맞습니까?"

"예. 네 살 때 리히터에 입적되며 십 년간 계약을 이행해왔고, 이후 십일 년간 갈등을 빚었습니다."

"어떠한 계약이었습니까?"

"리히터가 제공하는 학업적,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정계, 법조계에 진출할 것을 구두 및 서면으로 맹세했습니다. 해당 내용을 진술할 수 있는 것은 침묵 술식이 걸린 계약서의 원본을 역방향 술식으로 해주했기 때문입니다. 해당 계약서의 원본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 세상에, 침묵 술식이 걸린 계약서라니….

"위반한 계약 조항은 무엇입니까?"

"테미스 법학 아카데미가 아닌 람파스 아카데미에 몰래 입학하며 법조인을 목표로 하는 의무를 불이행한 점입니다. 외부 발설이 금지된 계약서인 만큼 현재는 비밀 유지 조항도 어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당, …계약서가 비밀 유지를 중요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화국이 리히터의 치부를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리히터의 치부'라는 것은 리히터가 다년간 자식들에 자행한 학대와 관련이 있습니까?"

- 학대라고?

- 그렇다면 팔다리의 저 흉은 기사단 활동 중에 생긴 게 아니라….

"이의 있습니다. 증인은 현재 기소된 사실과 관련 없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증인, 진술하고 있는 사실이 기소 사유와 관련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검사 측, 이어서 신문하십시오. 변호인 측은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6.

(중략)

"…이에 리히터의 가주인 피고인을 제외한 가신, (중략) 총 11명이 증인에 관해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하는 부정적 여론 형성을 주도한 증거를 제출합니다. 해당 증거는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각하, 어째서 묵비권을 행사하십니까? 이대로는 변론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됐으니 이의 제기를 멈추시오."

"……예?"

"그대들을 이 자리에 변호인으로 앉힌 것은 가신들이지, 내가 아니라."

"이어서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561년 2월, 잉게미르 외곽에서 일어난 니힐룸 재해에 대해 아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4페이지는 기사단을 거쳐 상부를 통해 승인된 공식 기록입니다. 해당 내용 중 사실이 아닌 것을 구술해 주십시오."

"나는 그저, 내 아들의 죽음을 듣고 싶소. 지난 이십여 년간 듣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했어."

"전부 거짓입니다. 기젤라 리히터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사가 아닌 가신들의 계획적인 유기 및 존속 살인이며, 그들은 이후 증거 인멸을 위해 상부로 전달되는 보고서마저 중간에서 바꿔치기하여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갔습니다. 범죄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자는 가신 다섯과 신원 불명의 용병 약 스무 명, 그리고 이를 묵인한 현 세대까지의 리히터 일가 전원입니다. 중앙 의회의 전 의장인 그레이엄 리히터, 그 이전 세대 중앙 의회 소속 의원이었던 베네눔 리히터, 에우로페 리히터, 현 의원인 헤이데이 리히터, 델피나 리히터를 포함하여 5페이지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모든 이들이 범행을 묵인했습니다. 증거는…"

"그러니 양형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증인의 말을 막지 말라는 말이오."

7.

"그들이 기젤라 리히터를 니힐룸에 유기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리히터가 백여 년 전 마도학 연구의 주축이 되었던 마도학자를 니힐룸에 유기했다는 증거를 기젤라 리히터가 찾았기 때문입니다."

"……!"

- !

"계속 진술하십시오."

"이것은 기젤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내용입니다. 당시에 적었던 자필 일기를 증거로 제출하였으나, 증거로 채택되기에 불충분하다면 기젤라 리히터가 자필로 적어 맡겨놓은 유서와 그가 개인적으로 조사해 찾아낸 리히터의 기밀 문서들을 추가 제출하겠습니다."

"리히터가 니힐룸에 유기한 마도학자의 이름을 아십니까?"

"성이 슈펠스베겐이고, 실종 처리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해당 마도학자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이 의도적으로 소실되어 압수 및 수색 영장이 발부되어야만 제출이 가능합니다. 사전영장과 사후영장, 어느 쪽도 아직까지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바, 추가 제출할 증거는 없습니다."

"변호인 측, 반대신문하시겠습니까?"

"……."

"변호인?"

8.

"카일룸 대법원 579고합118호 존속살인, 증거인멸 및 조작 사건,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에 따라 피고인 이디트 리히터와 리히터 백작가에 대한 판결을 선고합니다."


법정의 시간은 금보다 귀하다. 그러나 17시간동안 일반인 배심원단을 묶어둘 수 있는 사건은 그보다 더 귀했다. 판결문의 낭독이 끝나고 재판이 파하자마자 덜 귀한 이들이 아우성치며 짐을 챙겨 법정을 떠나간다. 법정이란 원래 목이 완전히 쉬어 한 단어도 말하지 못하는 이와 입이 있음에도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이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무려 공화국의 시작부터 함께한 백작가 하나가 의사봉 몇 번의 두들김에 벨레스의 역사에서 영영 지워진다. 카일룸에 위치한 리히터 본저는 무너지거나 매각되겠고, 그의 일원들은 만 하루만에 보금자리를 잃었으니 한동안 망령처럼 세상을 떠돌 것이며, 저는…. 아이작 리히터는 기사단 본부로 돌아가 단장에게 이를 고하고 적법한 처분을 받을 것이다.

17시간, 그리고 17년간의 필리버스터가 끝났다. 일곱 살의 아이작 리히터가 안배한-그러나 결코 이십여 년이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지금은 생각보다 볼품없었다. 목은 하다 하다 이제는 정말로 찢어진 듯 침조차 삼켜지질 않고, 증인석 앞을 당당히 차지하고 섰던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다. 변론을 위해 서류를 몇 번이고 넘기던 손은 종이에 낱낱이 베여 핏덩어리가 시간차로 굳어있었다.

그래서인가, 스스로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으로 리히터를 벗어던지고 제2의 자유로운 인생을 맞이하고자 했던 달콤한 상상도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눈앞에 당도했어야 할 축하 케이크가 아직도 주방에 있는 것처럼 까마득했다. 승리란 이런 것인가? 원래 이렇게나 극적이지 못한 거야? 축제같은 북소리는? 전쟁같은 환호성은? 종이를 공중으로 높이 던지고는 두 주먹을 쥘 힘 정도는 솟아야 할 것 아닌가?


아이작 리히터

- 장기간 축적된 스트레스로 인한 의욕 저하, 욕구 결여, 시간감 상실, 반복적인 환각 · 환청

- 인지능력이 양호하여 자신의 상태를 숨기는 데 능숙하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보임.

- 마도학에 관련한 지식은 왜곡된 부분 없이 온전하며, 마도구 개발에 적게나마 의욕을 보이고 있음.


'아직도 니힐룸 어딘가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치는 상상을 합니다.'

-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열네 살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기형적으로 변하지도 않았고, 드문드문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 들어본 적은요?'

'이해할 수 없는 말소리가 대부분인데, 종종 명확하게 이름을 부르고… 가끔은 웃기도 합니다.'

- '그런데 이 대목에서 늘 힘들어하시는군요.'

기젤라. 나의 다음 '리히터'는 뭐지?

'그 소리가 늘 저를 현실로 불러들이니까요.'

- '그의 웃음소리가요?'

'예. 그는 리히터에게 웃어준 적이 없기 때문에.'

- '…….'

'그러니 제가 죽기 전까지는 결코 저를 보고 웃을 수 없지요.'

왜 웃고만 있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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