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겸

[규겸] Sa(n)d timer

읽지 않아도 되는, 다른 갈래의 조각글. (2024.02.23)

Sand timer

에서 이어지는 조각글.

이 조각글은 읽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

 

  민규는 그런 꿈을 꿨다. 이석민이 자신을 찾아오는, 그런 꿈. 자신이 먼저 발견하고 물러서지 않아도, 그가 겁을 이겨내고 자신에게로 다가와 안기는 꿈. 해수욕장 위, 많은 사람들이 보드를 타고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다가 부딪히는 소리도 꽤 컸다. 익숙한 그의 숙소 안에서 그의 목에 입술을 묻고, 허리를 감고. 늘 상상한 것처럼 그의 몸을 매만졌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그게 거짓인 걸 알았지만 깨고 싶지 않았다. 옷을 갈아 입을 때마다 보이던 갈비뼈를 검지로 쓸어 내렸다. 고개를 내려, 그 부위를 핥아 내려다가. 문득 다시 고개를 올렸다. 난, 더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석민아.”

 

  그를 부르고, 입을 겹치는 것. 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 그의 목소리를 지척에서 듣는 것.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이 주제가 되기에. 민규는 다급하게 그와 입을 맞췄다. 네가 다시 꿈에 와 줄까, 그게 한 없이 두렵고 알 수 없어서. 

 

*

 

  석민은 비행기에서 내려 익숙한 경로 그대로 해변을 향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캘리포니아의 해변. 눈 부신 햇볕은 자신이 늘 꿈에서 보던 것보다는 눈이 덜 시려웠다. 그러나 제대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수평선엔 꿈처럼 그가 있진 않았다. 늘 자신을 찾아오기만 했던 그를, 자신이 찾아 나서는 것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이미 그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번을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더 이상 너를 찾지 못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사이에는 자그마치 십 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바다는 그대로였지만 착각이기도 했다. 시간은 바다 흐르듯 제 멋대로 굴었고, 그걸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석민은 그저 자신을 두고 흘러간 바다를 그 때의 바다라고 착각하곤 마주 바라보며 모래에 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보드를 타고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다가 부딪히는 소리도 꽤 컸다. 

 

*

 

  드라마는 늘 각본에 따라 드라마틱한 만남을 예정에 두고 굴러갔다. 예정된 만남을 산다는 건 어떤 걸까? 누군가의 힘으로 맺음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건 어떨까? 우리의 일상은 더할 나위 없이 수수하고, 사소한 재난 속에 늘 눌어 붙어 떨어지지 않는데. 신이 주사위를 굴리는, 그런 극적인 상황은 드라마의 주인공에게만 통하는 것이었다. 석민은 날이 지면 곧장 새로 빌린 숙소로 향했다. 야속하게도 예전에 빌렸던 곳은 없어진 지 오래 였다. 그와 같이 갔던 펍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기적 만을 바라며 숙소와 바다를 오갔다. 

 

  낮 바다도 밤 바다도 사람은 많았다. 끝도 없는 모래사장은 유난히 넓었다. 모래사장 위 바늘 찾기. 올 지도 모르는, 버려져 있는 지도 모르는. 내 것도 아닌 바늘 찾기. 석민은 가방 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 안에 편지를 적었다. 생애 처음으로 하는 고백과, 자신의 연락처였다. 그것을, 제 자리에 묻었다. 더 이상 이 세계에는 남지도 않은, 그와의 추억은 오로지 이곳에만 있었기에. 기억을 수장하는 것과 같았다. 

 

  어느 덧 내일이 귀국이었다. 석민은 눈을 감고, 그대로 젖은 모래 사장에 누웠다. 젖어도 죽어도 상관 없을 것만 같았다.

 

 *

 

  민규는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늘 똑같은 안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다시 닫고, 무의미하게 거실을 돌아 다녔다. 연인과 헤어진 뒤 생긴 버릇이었다. 이따금씩 해변을 바라 보았다. 다시 거실을 돌아다니다가, 의자에 앉아 손 끝을 만지작거렸다.

 

  더할 나위 없이 똑같은 일상이, 다소 무거웠다. 늘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따금 이 기다림에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다. 십 년의 세월은 혼자 견디기엔 길었다. 그럼에도 족쇄를 찬 것처럼, 그를 두고 뒤돌아 버렸던 제 발목은 그대로 여기에 묶인 것이었다. 분명, 죄는 아니었다. 그저 후회였다. 일방적인 후회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네가 바라던 걸 내가 망친 죄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는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 보았다. 교육 일정이 앞으로 이틀 뒤에 있었다. 당분간은 바다를 볼 일이 없었기에, 그가 있는 바다를 찾으러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는 것은, 그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이곳에 자신을 수장하는 일이었다. 마른 침대 위에 누울 때, 그는 눈물 속에 빠져 질식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어 갈 것이고, 너는 가정을 이루겠지. 나 대신 안기고 안아줄 상냥한 아내라면, 언젠가는 아이도 낳을 수 있을 것이었다. 넌 아이를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 곁으로 유령처럼 흘러가는 자신의 그림자는 모래사장에 묻은 채,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쉰을 앞둔 그 날까지도, 민규는 그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바다가 자신을 받아 들이는 날까지도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바다에 묻힌 제 기억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를 잡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었기에. 늘 그것을 자신의 감정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

 

  사소한 그들이 그 뜻을 영원히 모르더라도. 세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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