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겸

[규겸] 터무니 없는 이야기

갑자기 쓰고 싶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고교생으로 조각글...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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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호등을 건널 때마다, 그런 생각 하잖아. 흰색을 밟으면 살고, 검은색을 밟으면 죽는 거야. 그런 식으로 우리한테도 종말이 올 수 있는 거야. 흰색을 밟으면 살지만, 검은색을 밟으면 죽는 거야. 너는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어?

 

  민규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쳐다 보았다 가도, 혹여나 석민이 삐질까 싶어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려 시선을 굴렸다.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면 매미 소리가 찌르르 찌르르 시끄럽게 울었고, 유독 더위를 타는 석민의 목에서 땀이 흘러 옷에 툭 떨어졌다. 거기에 시선이 뺏겼다가, 큼 목을 가다듬었다.

 

  “넌 부정적인 생각은 진짜 전혀 안 하는 거 같아.”

  “기껏 맞춰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쟁이야. 딴 생각 했잖아, 너.”

 

  그래. 딴 생각 했다. 근데 그 생각이 뭔 지는 안 들켜서 다행이었다. 민규는 그늘 안에서 발을 구르며 저 멀리 하늘을 쳐다 보았다. 야속하게 맑고 넓은 하늘에 비행기가 하나 지나 갔다. 이렇게 평화로운데, 너는 왜 매번 세상이 망하는 생각을 할까? 난. 난 네가 있는 세상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안 망하면 안 되냐?”

  “뭐?”

  “그냥 나랑 이렇게 재밌게 놀자고. 그런 생각하지 말고.”

 

  석민은 뚱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가 바닥을 운동화 코 끝으로 긁었다. 저 뚱한 표정. 유독 너는 나한테 그러지. 좋은 말을 해줘도 유독 숫기 없이 굴고. 민규는 하복 셔츠를 흔들며 괜히 더운 척 에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석민은 더워? 그런 말을 하며 민규의 낯을 살피고. 또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회유 했다. 나름, 이석민이 김민규에 대하여 흰색을 밟는 요령 같은 것이었다. 사실 김민규는 그가 검은색을 밟아도 자주 넘어가 주었지만 이석민은 알 리 없었다. 

 

 *

 

  이석민은 상상력이 풍부했고, 동시에 그 상상력에 감화되는 감정이 풍부했다. 그런 그에게 닥친 사춘기란 다소 버거운 것일 지도 몰랐다. 그나마 사랑 받는 집안에서 예쁘게 자라서 다행이지. 타고나기를 착하고 선해서 세계에 대한 절망 같은 건 모른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상상이 응달로 기울어지는 것 같으면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것은 옆에 딸린 김민규 였다. 얘는 또 왜 우울해 하는 거야. 이석민의 안전띠 김민규는 성능이 좋았다. 금세 기울어진 그의 손을 잡고 제 자리로 세우는 것은 늘 그의 역할이었다.

 

  같이 아이스크림도 먹으러 가고, 게임도 하러 가고. 이웃집이었기에 밤에 몰래 그의 방에 들어가 이야기도 하고, 숙제도 도와주고. 잃어버린 준비물은 그의 품에 쥐어주고 대신 혼나기까지. 이석민이 다소 김민규에게 틱틱 대긴 했어도 그 고마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서. 혹은 상냥해서. 가끔씩 민규의 옆에서 챙기는 이석민도 그 상냥함이 병인 것처럼 굴었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쥐어 준 준비물을 내려다 보다가, 어딘가 숨기고 같이 벌을 받는다 거나. 그런 거. 민규가 좋아하는 반찬은 아껴뒀다가 건네준다 거나, 뭐 그런 거.

 

 그럼에도 민규가 석민에게 반한 건 그런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였었다. 가끔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가 상냥한 것도 부가적인 이유였고, 제 손을 타느라 가끔 얌전해지는 게 예쁜 것도 부가적 이었다. 나중에 와서는 왜 좋은 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저 감정이 커지고 일상이 그가 되어 버렸을 뿐.

 

  그런 그가 유독 근래 들어 절망에 대한 상상에 빠져 들어 있었다. 이석민이나 김민규나 긍정적인 사람인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기울어질 수 있는 틈이 조금이라도 있던 것은 이석민 이긴 했었다. 자주 울고, 자주 상처 받는 애였다. 그래서 그가 혼자 있을 틈을 두지도 못할 정도로 과보호 하게 되는 경향도 생겼었다. 이석민한테 말 조심해라. 덩치도 큰 머스마가 이석민 뒤에서 으르렁대고 있으면 걔가 울 일도 줄어들 수 있었다.

 

  그랬는데. 그렇게 지켰었는데.

 

  “민규야. 만약에, 나 때문에 갑자기 세상이 멸망하면 어떡할 거야?”

 

  또 다시 시작되는 물음에 민규는 가는 눈으로 석민을 쳐다 보았다. 또 시작이다. 쟤를 응달로 끌고 가는 그 상상이.

 

  “만약에. 나를 죽이면 이 세상이 살아난대. 그러면?”

 

  상상일 뿐인데. 얘는 벌써부터 세상을 짊어진 것처럼 눈가가 푹 젖어 있었다. 민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석민의 얼굴에 그늘이 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대로 다가가 양 뺨을 감싼 채 꾹 눌렀다.

 

  “난 너랑 놀 거야. 세상이 망하던가, 말던가.”

  “...정말?”

 

  그와 함께. 거짓말 같이 해가 그늘에 가렸다.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에서 붉은 비가 떨어지고, 멀리서부터 땅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민규는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주변을 둘러 보다 석민을 쳐다 보면, 그 애는 뚝뚝 울고 있을 뿐이었다.

 

  “민규야. 다시, 다시 선택해도 돼.”

 

  다 뭉그러진 울음이 흘렀다. 민규는 석민이 겁쟁이인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곧장 그의 품을 끌어 안았다. 저 멀리서 부터 폭발음이 들려 왔다. 벌써부터 뜨거운 기운이 얼굴에 훅 끼쳐왔다. 그제야 이 모든 것이 실감이 났다. 석민을 안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석민아.”

  “...”

  “우린 안전할 거야. 정말로.”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입 맞췄다. 크게 뜨인 석민의 눈이 민규의 시선과 마주쳤다. 잘게 떨리던 손이 민규의 어깨를 쥐었다. 그러면 곧 입 속으로 속삭였다. 눈 감아. 석민아. 이건 꿈이야. 그런 말을 속삭였고, 석민은 마저 답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난 네가 있는 세상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네가 없는 세상은 망해도 상관 없을 거 같다는 이야기야. 사실 김민규에게 있어 이석민에게 가는 길은 흰색이어도, 검은색이어도 딱히 필요 없었다. 가끔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가 첫사랑이 되었던 순간만큼, 그들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김민규는 정말로 이석민을 지킬 수 있을 것처럼, 멸망을 마주 바라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민규는 현실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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