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겸

[규겸] Make a wish

꿈꿨음; (2024.02.04)


*

 

  어릴 적엔 별똥별이 많이 떨어졌었다. 시골은 좁지만 하늘은 어느 도시보다 넓었으니까. 늘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쉼 없이 같은 소원을 빌었던 석민은 옆에 자리한 소원의 주체를 바라 보았다. 야, 김민규. 부르는 목소리에 멀대 같은 남자 아이가 석민을 쳐다 보았다. 

 

  “형이 그러는데, 저 별이 떨어진 게 사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보다 더 오래 전에 있던 일이래. 그만큼 멀리 있대.”

  “그럼 넌 왜 맨날 뒷북치고 있냐? 이미 떨어진 데다 왜 맨날 소원을 빌어.”

  “시끄러.”

 

  넌 알지도 못하면서. 석민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흘겨 보다 다시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의 석민은 민규라는 아이를 좋아 했었다. 같이 겁에 질려 벌레에 쫓기던 날도, 같이 물놀이를 하다 빠진 자신을 보며 엉엉 울었던 날도. 어느 새 보면 자신을 위해 벌벌 떨면서도 벌레를 밟고, 엉엉 울면서도 몸을 내던져 자신을 구하려다 어른들에게 붙잡혀 소리를 지르던 그였으니까. 그래서 이석민의 소원은 늘 그였다. 빛이라는 것은 결국 몇 광년이 걸리든 결국은 도착하게 되니까. 언젠가는 이 감정이 돌고 돌아 그에게 도착하도록 해주세요.

 

  석민은 민규만큼 용기가 없었고 그와 멀어지는 것이 싫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광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면, 그 땐 민규는 거절도 하지 못하겠지. 다시 몇 광년이 지난 뒤에야 그의 대답이 도착할 테니까. 그런 비겁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 우린 별똥별이 진 걸 이제야 알았네.”

 

  괜히 그게 서러워서, 그렇다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석민은 시큰거리는 코를 문질렀다. 넌 뭐 그런 거에도 울어. 그런 석민에 당황한 민규는 당연한 것처럼 팔목 안쪽으로 그의 젖은 눈가를 문질러 주었다.

 

  “어떻게 보면 유언이잖아.”

  “... 넌 진짜 상상력이 대단하다, 진짜.”

 

  그는 자신의 티셔츠 한 쪽을 쭉 늘여 석민의 눈가를 닦고 코에 댔다. 흥 해, 흥. 장난치는 그의 반응에 석민은 드러난 그의 배를 툭 쳤다. 하지마. 민규는 깔깔거리며 혀를 쭉 내밀어 메롱 했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야. 백미터 달리기도 혼자 뛰면 백미터지만 각자 같이 뛰면 오십미터 만에 만나.”

  “... 뭔 소리야.”

  “쟤도 너처럼 나 같은 친구가 있을 거라고 믿으라고. 쟤가 간 것보다 더 많이 걸어서 먼저 도착했을 수도 있어.”

 

  친구 김민규. 그 말이 또 서러워서 석민은 와앙 울었다. 너는 왜 기껏 맞춰 주니까 더 울어! 당황한 민규의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처럼 작아지기 시작했다.

 

  “울지마, 바보야! 내가 너한테, ...

 

  그리고 추억은 여기까지. 김민규가 무슨 말을 했었더라?

 

  28살의 이석민은 멀건 컴퓨터 바탕 화면을 바라 보다가, 문득 시스템 시계가 퇴근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책 맞게 떠오른 첫사랑의 기억을 고이 접고, 재킷과 가방을 챙겼다. 지금은 그 자식이 뭔 말을 했는 지 중요치 않다. 자신의 앞에는 밝고 빛나는 연휴 만이 남아 있었으니까.

 

  “저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유독 큰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

 

  이석민은 일생을 겁쟁이로 살아왔지만, 딱 한 번 용감 했던 적이 있었다. 서울로 전학 가기 전, 김민규에게 고백을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규는 혼란스러운 듯 바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석민은 그대로 다시 겁쟁이로 돌아와 버렸다. 12시가 땡땡 치고 다시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아서. 바로 뒤로 돌아 뛰어 도망갔지. 그게 그렇게 끝이었다. 처음에는 몇 달이고 민규에게서 전화가 오곤 했었지만 석민은 모든 것을 회피했다. 그렇게 점차 모든 것을 등지고 나면, 그 다음엔 감정이 무뎌졌다. 그래. 매일 백 날을 울었으면 무뎌져야지. 매일 같이 울고불고 얼굴이 퉁퉁 부은 석민을 보며 부모님은 단단히 오해를 했고, 더 이상 민규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석민은 모든 진실을 외면하며 그냥 그게 잘 된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 했었다. 

 

  그러니까. 추억은 이제 그만. 석민은 오늘 따라 유독 떠오르는 그의 까무잡잡한 어린 얼굴을 흐트러뜨렸다. 이게 다 뭐 그, 몇 년 만에 온다는 유성우 소식 때문이다. 일은 다 끝나 할 일은 없고, 별 생각 없이 본 뉴스 헤드라인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 때부터 불현듯 어릴 적이 떠오른 추억들. 석민은 한숨을 푹푹 쉬며 가방을 안은 채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바닥만 괜히 퍽퍽 치고. 이제 버스가 얼마나 남았을까, 시간을 확인하려 눈을 올려 본 그곳에 자신을 내려다 보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잘 생기고, 엄청 큰 누군가가. 

 

  “이석민 씨 맞죠?”

  “...네?”

  “이석민 씨 맞냐구요.”

 

  석민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얼핏, 뭔가 익숙한 얼굴인데...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었다. 이내 한숨을 쉬더니, 심각한 낯으로 다시 입을 열었고.

 

  “그, 전... 김민규 인데요. 저 기억 하시면 저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별안간, 예기치 못한 별똥별이 떨어졌다.

 

*

 

  도망치려다 뒷목 잡혀 끌려간 카페 안에서 김민규는 정말 낯선 표정을 한 채 이석민을 쳐다 보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왜 존대를 하는 거야. 그게 소름 돋아서 쳐다 보다 보면, 분명 그 얼굴이 그 얼굴이 맞다는 것은 빌어 먹게도 알겠다 싶었다. 그래서 어버버 하는 사이, 어쩌지도 못하고 이렇게 앉아 또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들어 주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기억을... 잃었다고? 기억상실증?”

  “네.”

  “...소름끼치니까 존댓말 좀 그만해.”

 

  이석민은 앞에 나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쭉쭉 빨았다. 다시 눈을 올려 데구르르 굴려 살펴 보아도, 정말 빌어 먹게도 이 자식은 김민규 같았다. 내가 저 얼굴을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 했는데. 어릴 때 얼굴 그대로 더 잘생겨져 버린 그의 낯이 야속했다. 키는 또 왜 이렇게 큰 거야.

 

  “존댓말 안 하면 도와줄 거예요?”

  “아니, 글쎄. 내가 왜...”

  “이석민 씨.”

  “징그러워, 그만해!”

 

  유독 목소리가 큰 석민이 질겁하며 빽 이야기 하자 카페 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 보았다. 석민은 어설프게 웃으며 주변에 사과하듯 고개를 조금씩 수그렸고, 목소리를 줄이며 그를 노려 보았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 난 마법사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잖아.”

  “어릴 때 기억만 없는데, 그 때 같이 지냈던 사람이 이석민씨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추억을 좀 공유해 주신다면...”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존댓말 좀... 그만해봐.”

 

  그가 자신을 잊었다. 자신이 그렇게도 내치고 싶었던 추억을, 그는 이렇게 쉽게 잃어버렸다. 그 사실이 그의 존댓말과 함께 현실이 되고 나면 괜히 짜증이 나고 서러웠다. 석민은 울듯이 고개를 수그렸고 곧 앞에 냅킨이 내밀어졌다. 민규가 내민 것이었다.

 

  “우세... 아니, 울어?”

 

  당황한 그의 낯이, 문득 추억의 끝자락과 겹쳐지고. 석민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수 년도 지났는데, 또 얘 앞에서 울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 자신의 낯을 살피는 민규의 눈길이 느껴져 벌건 눈으로 쳐다 보았다.

 

  “그 쪽이랑 나랑 안 친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 알아봐요.”

  “거짓말. 이미 다 알아 보고 왔거든.”

 

  이 자식은 기억도 잃었다면서 저 얄미운 태도는 왜 잃어버리지 못한 걸까. 뒤바뀐 존대와 반말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석민은 한숨을 쉬며 제 얼굴을 쓸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그저 황금 같은 휴일 뿐이었는데. 시작부터 이렇게 초를 칠 수 있을까?

 

  “석민 씨. 아니 석민아... 나 좀 도와주면 안돼?”

  “...”

  “기억만 되찾으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응?”

 

  눈썹을 불쌍한 강아지 마냥 찌푸리며 자신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부탁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지 않았다. 그래, 기억이 나진 않겠지만 늘 그는 자신을 이렇게 이겨 왔었지. 늘 이석민의 틱틱거림을 받아 주는 건 김민규 였지만, 결국 모든 걸 져 주는 건 맘 약한 이석민 이었지. 석민은 한숨을 쉬었다. 김민규를 노려 보다가, 결국 휴대폰 번호를 냅킨에 써서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펜과 함께 자신의 노트를 내밀었다.

 

  “여기다 적고 싸인 해. 뭐든지 들어준다고.”

 

  이석민은 이를 승리를 위한 한 보 후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또 다시 자신을 설득했다. 그에게 유독 약한, 어린 자신이 본인을 추억 속에서 물끄러미 쳐다 보아도 모른 척. 계약서를 챙긴 뒤 김민규를 내버려 두고 카페를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5분 후. 뒤늦게 나마 자신의 휴대폰이 맞는 지 확인 전화를 하는 김민규의 목소리에 또 다시 붙잡혔지만.

 

*

 

  그로부터 이틀 뒤.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저 집에서 쥐 죽은 듯 쉬려고 생각했던 자신의 연휴를, 현실 같지도 않은 현실에 갖다 바친다는 것이 이제 실감났다. 석민은 낯설 정도로 정비된 도로들 너머를 보며, 유리창에 비친 김민규를 쳐다 보았다. 멀미를 하는 지 푹 잠이 든 것을 보다가, 버릇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한숨이야.”

  “...”

 

  자는 줄 알았던 민규가 눈도 안 뜨고 조곤조곤 물어 오자, 석민은 그 소리에 놀라 창에 거의 붙었다. 혹여 라도 자신이 훔쳐 보던 것을 들킨 것처럼. 열 오른 이마를 창문에 붙였다. 신경 쓰지 마.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하다가, 마침 덜컹이는 버스 덕분에 창문에 이마 박는 소리가 시원하게 났다. 그제서야 눈을 뜬 민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곧 이마를 문질러 주었다. 괜찮아?

 

  “...”

 

  넌 늘 그랬다. 감당할 만큼만 다정했어야지. 석민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남이사. 불퉁한 어린 애처럼 툴툴거리곤 다시 창문을 바라 보았다. 곧 민규에게서 한숨 소리가 나왔다. 넌 왜 이렇게 한숨이야. 그걸 되려 묻지도 못하고, 석민은 잘못을 저지른 애처럼 창문에 더 바짝 붙으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시간이 흘러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보니 변하지 않은 흔적들이 문득문득 향수를 불러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냄새. 흙 냄새. 똥 냄새. 똥 같은 김민규. 똥 같은 내 인생. 별똥별에 소원 좀 빌었다고 멀리 돌고 돌아 나에게 이런 똥을 투척하다니. 세상이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며 석민은 앞서 걸었다. 그러다 가도 문득 기억을 잃었다는 민규가 혹여 길을 잃어 버릴까 슬쩍 뒤를 돌아 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민규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석민은 다시 도망치듯 고개를 돌려 앞장 섰다.

 

  세월은 참 야속했다. 그렇게 잊으려고 노력한 자신에게는 보상을 주지 않았으니까. 석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기억하는 대로, 늘 놀았던 하천과 계곡으로 그를 끌었다. 자기가 가이드도 아니니, 딱히 할 말은 없어 그냥 그렇게 걸었다. 슬쩍슬쩍 뒤를 돌 때마다 민규는 주변을 둘러 보고 있었고, 그 역시도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산책이 쭉 진행되다 보면, 아직도 닦이지 않은 험한 산길 만이 남았다. 여기도 올라가야 하나. 직장인의 세월을 지내다 보니 금세 숨이 턱턱 막혀 와서 몰아 쉬다가, 민규를 쳐다 보았다. 그는 멀쩡해서 더 열 받는다. 석민은 숨을 몰아 쉬지 않은 척, 한숨을 내쉬는 척을 했다.

 

  “아직도 기억 안나?”

  “... 우리가 여길 왔었어?”

 

  XX. 석민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 보며, 속으로 육두 문자를 내뱉었다. 짜증이 나자 오기가 올랐고, 나는 기억하는 데 너는 기억 못하는 이 현실이 슬슬 화가 났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었더라?

 

  “바보. 멍충이.”

  “왜, 또.”

  “너 어릴 때 별명이야. 기억해 둬.”

 

  석민은 다시 뒤 돌아 산길을 걸었다. 차라리 기억해라. 차라리 빨리 기억해. 더 이상 너와 나는 같이 하지 않음을 기억해서. 그를 두고 도망친 자신에게 다시 실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객기로 산 속으로 들어섰고 민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따랐다.

 

*

 

  어느 새 중턱에 오르면 결국 석민은 쉽게 지치는 체력 덕에 바닥에 주저 앉아 숨을 몰아 쉴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화가 났을 땐 무슨 힘이 솟았는지 힘차게 걸어 왔지만 직장인 체력이 뭐 그렇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따르던 민규도 석민 옆에 앉아 작게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가져온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김밥.

 

  “...소풍 왔냐?”

  “배 안 고파? 난 고픈데.”

 

  저 얄미운 놈은 얄미운 표정 그대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고, 얄미운 도시락 역시 완벽했다. 매 끼니 건강하게 잘 챙겨 먹는 석민으로써는 벌써 점심을 넘긴 시간이 당연히 버거웠다. 민규가 김밥 하나를 내밀자 못 이기는 척 뺏어 들었고, 먹었다. 진짜 얄밉다. 맛있다.

 

  “...빨리 기억해내. 나 이제부터 바빠서 못 도와주니까.”

  “그게 쉽게 됐으면 너 안 찾아 왔어.”

 

  ... 그렇겠지. 네가 날 찾아 올 이유가 없지. 석민은 맛있던 김밥이 모래알이 되는 경험을 했다. 울상인 표정으로 느리게 씹고 있으면, 민규는 보냉병에 가져온 물을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진짜 체할 거 같아서 그냥 그 물을 받아 들어 원샷 했다.

 

  “... 근데. 사고 난 건 이제 괜찮은 거야?”

 

  미련한 석민은 그가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지 못했다. 물어 볼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물어 보면 민규는 여느 때처럼 작게 웃었다. 진짜 저 입을 꼬집고 싶다는 생각을 할 무렵 그가 자신의 팔을 걷어 흉터를 보여주었다. 화상 자국이었다.

 

  “죽다 살아났어. 기껏 살아났는데 기억이 반토막 이더라. 왜 그렇게 살고 싶었는지를 다 잊어버려서. 그거 찾고 싶어서 왔어.”

 

  석민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걱정스러운 눈길을 그의 흉터에 붙였다. 진짜 아팠겠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었고. 문득 눈길이 느껴져 다시 고개를 들면 그가 자신을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어릴 때도 이렇게 날 많이 걱정 했었을 거 같아, 넌.”

  “... 안 친했다니까.”

  “거짓말도 못했을 거 같아.”

 

  그 말에 곧장 그를 흘겨 보았다. 니가 어떻게 알아? 기억도 못하면서. 툴툴대며 등을 돌리자 다시 웃는 소리가 났다. 쟤는 왜 크기만 몇 배로 크고 변한 게 없을까. 다 잃어 버렸다면서. 내가 없어도 넌 여전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석민은 춥다, 괜히 중얼거리며 코를 훌쩍거렸다. 해가 지고 있었기에 눈물만 꾹 참으면 거짓말은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그 증거로, 민규는 곧바로 점퍼를 벗어 석민에게 건넸으니까. (다만 몇 분 뒤, 덜덜 떠는 민규를 보면서 얘는 추위 타는 것도 여전하구나 싶어 다시 돌려 주게 되었다.)

 

*

 

  겨울은 해가 금방 지는 계절이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결국은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내려가는 길이 어두울 것은 분명했다. 짜증 난다고 말도 없이 미련하게 끌고 올라온 자신의 잘못이지만, 괜히 떼 쓰듯 민규를 노려 보자 그는 익숙하게 혀를 쑥 내밀어 메롱을 했다.

  문득,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민규의 형상과 기억이 겹쳐 들고. 오히려 잃어 버린 기억을 제가 찾듯 석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 보았다. 익숙한 산 냄새. 하늘 색깔.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김민규. 얄미운 김민규.

 

  그게 문득, 모두 서러웠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게 싫었으면 친구라도 하게 해주지. 그렇게 늘 친구친구 하던 놈이. 그렇게 날 쳐다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지 말았어야지. 난 네 그 얼굴이 가장 무서운데.

 

  얘 앞에서 또 울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석민은 북받쳐 오르는 울음에 표정이 다 구겨졌다. 그 얼굴에 당황한 민규가 그에게 다가왔고, 석민은 그에게서 다시 도망가려는 것처럼 뒤로 발을 딛었다. 그 때, 야속하게도 돌을 밟고 미끄러진 몸이 기울었다.

 

  XX. 이젠 얘도 못 쫓아 오는 곳으로 도망가게 생겼네.

 

  바보같이, 금세 든 생각이 그거였다. 하지만 민규는 손을 뻗었고, 어릴 적보다 더 길어진 팔은 어린 그 때처럼 석민을 놓치지 않았다. 곧장 그를 푹 껴안았고, 그 산을 올라도 크게 고르지 않았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 왔다. 벌레한테 쫓길 때, 계곡에서 겨우 건져졌을 때. 그 때 자신을 푹 껴안았던 품이 더 선명해졌다 생각했을 때. 그의 거친 손길에 따라 잠시 멀어졌다. 석민의 팔뚝을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 민규는 토해내듯 얘기했다. 

 

  “제발... 조심해, 제발. 너 때문에 진짜 내 심장이 남아 나질 않는다.”

  “아니, 나도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넌 옛날부터 맨날 이런 식인데, 내가 어떻게 널 혼자 두...”

 

  이석민은 잦아드는 목소리를 따라 둥근 눈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진짜 눈알이 떨어질 것 같다. 너무 놀라 입까지 벌어졌다가, 검지로 그를 가리키면 김민규는 고개를 돌렸다. ...좆됐네. 무시할 수 없는 속삭임이 잇따르자, 석민은 생애에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야!!!!!!!!!!!!”

 

*

 

  산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고. 김민규는 생각했다. 무슨 산신도 아니고 온 마을을 뒤집어 놓는 저 목소리는 정말 여전하다, 고도 생각했다. 김민규는 얌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맨 바닥에 앉았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이석민을 쳐다 보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는데...

 

  “설명.”

  “...”

  “안 하면 나 진짜 저 밑으로 뛰어 들 거야.”

  “...미안. 진짜 미안. 방법이 없었어. 어떻게 겨우 찾은 건데, 또 도망갈 거 같아서...”

 

  이 새끼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영민했다. 같은 바본 줄 알았더니, 잔머리가 엄청 나서 늘 자기를 이겨 먹곤 했었지. 석민은 땀에 푹 절은 얼굴을 손 안에 묻었다. 진짜 울고 싶다. 모든 걱정을 푹 내려놓고 나니 어지러웠지만, 문득 그의 흉터가 먼저 떠오른 것은... 이석민의 타고난 성질 때문이었다.

 

  “그럼 그 흉터는 뭐야? 그것도 거짓말이야?”

  “아니... 그건 진짠데. 진짜로... 이건 거짓말 아냐. 진단서도 떼다 줄 수 있어.”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 보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고 진실의 눈으로 마주 보았다. 석민은 문득 다시 스쳐 지나가는 그의 흉터를 곱씹으며 괜히 시선을 돌렸다. 지는 나 없이 그런 사고나 당하면서, 무슨. 그저 투덜거릴 뿐.

  어느 덧 물러진 그의 분위기를 재빠르게 읽어낸 민규는 느리게 일어서 그의 양 팔목을 잡았다. 무슨, 다시 도망갈 것 같은 사람을 잡는 것처럼. 석민은 미간을 좁힌 채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나 진짜 죽을 뻔 했거든? 근데, 마지막에 네 생각이 나더라.”

 

  거짓말쟁이. 지금껏 거짓말을 해온 그에게 이야기 하며 힐난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꿈인가? 일어나면 자신은 다시 연휴의 문턱에 서서 재미없는 뉴스나 보고 있을 것 같은데. 석민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쳐다 보는 그의 눈길에 잡힌 채, 숨을 골랐다. 너무 바라면... 그게 이루어지진 않아도 꿈으로 나타나잖아. 근데 깨면 사라지잖아.

 

  “미안해. 진짜 미안해. 겁먹게 해서 미안해. 빨리 대답 못해서 미안해.”

  “...”

  “너무 길게 돌아와서 미안해. 그래도 1광년 보단 빨리 찾았는데... 나 좀 용서해주면 안돼?”

  “...나, 무서워. 민규야.”

 

  갑자기 들이닥친 비밀들이,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석민은 이 모든 것이 꿈이면 어쩌나 불현듯 무서워졌다. 이석민은 늘 겁쟁이로 살아왔으니까. 처음 보는 유성우는 너무 거대해서 곧 자신이 멸망해 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허나 김민규의 생각은 달랐다. 먼저 지는 별을 따라, 그의 마지막 말이 정말 유언이 되지 않도록. 미친 듯이 달렸으니까. 유성우는 그저 그를 따라 나선 자신의 궤적에 불과했다. 내가 널 어떻게 따라 잡았는데.

 

  그럼에도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김민규는 불안한 눈으로 이석민을 훑었다. 석민은 멍하니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곧 다시 북받쳐 오르는 울음에 표정이 또 무너졌다. 친구라며. 그렇게 서럽게 내뱉자 김민규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아직이구나. 중얼거렸다.

  말이라는 것은 화가 날 정도로 너무 느렸다. 덕분에 그를 놓쳤었다. 이제야 몇 겁의 세월을 건너 도착한 곳에서, 겨우 잡은 그를 붙잡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민규는 석민을 끌어 당겨 입가를 겹쳤다. 말보다는 숨이 더 빠르니까. 차게 식은 그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쌌다.

  이석민은 우느라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뜨며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의 등 뒤로 까만 밤하늘에, 유성우는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김민규가 그에게로 떨어졌다.

 

  울지마, 바보야. 내가 너한테 가면 되잖아. 

  그러고 보니, 얘가 그런 말을 했었다.

 

*

 

  김민규는 겁이 많았다. 동갑에 비해 큰 덩치를 가지고도 벌레는 물론 귀신이며 발이 닿지 않는 높은 것까지 모두 무서워서 큰 몸을 말고 지레 겁을 먹곤 했었다. 너는 언제 겁쟁이 졸업할래. 엄마가 하는 말을 들으며 투덜대곤 했지만, 막상 그 모든 것들이 무서워지지 않는 순간들이 오기는 올까, 그 사실에 다시 겁을 먹곤 했었지. 허나, 

 

  너 이름이 뭐야?

 

  김민규는 일생을 겁쟁이로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가 용감해지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생긴 어떤 전학생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물어보고, 옆에 붙어 친구를 자처하고. 벌레에게서 그를 구하고, 발도 닿지 않는 물 속에서 그를 구하기 위해서. 단 순간 놓쳐 버린 그를 다시 되찾기 위해서도. 

 

  이런 영웅의 일대기를 모르는 이석민은 별안간 나타난 별똥별에게 바보같은 소원을 빌었다. 네가 언제든 나를 구하게 해주세요. 내 고백이, 우리의 유언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소원은 멀고 먼 길을 돌아, 드디어 그에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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