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겸

[규겸] 수리수리 마수리

예전에 썼던 소재가 어울리길래... (2024.03.03)


*

 

  김민규와 그녀는 완벽한 쇼윈도 커플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선남선녀로 엄청 부추겨졌다. 계속 둘만 있도록 상황을 만들 지 않나, 무슨 짝을 지어 하는 게임만 있으면 늘 묶이기 마련이었다. 그 상황에 질린 것은 자신 만은 아니었던 지, 어쩌다 보니 둘은 암묵적인 룰을 둔 채 사귀게 되었다. 일단 목표는 좋아하기였으나, 사실 둘 다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은 채 시작한 관계였다. 적당히 주변의 귀찮은 대시도 끊어낼 겸, 귀찮게 구는 주변 등쌀도 차단할 겸. 그렇게 사귀게 된 그녀는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데이트랍시고 자신을 불러 와서는 타로를 봐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연애운을?

 

  “우리 사이에 볼 연애운은 있어?”

  “연애? 내가? 너랑? 헛소리 하지 마. 난 지금 쇼생크탈출이야.”

 

  쇼생크탈출. 그래, 보면 재밌어. 그 영화. 허나 알 수 없는 비유에 민규는 그녀를 흘끔 바라보다가, 결국은 카드 몇 장을 뽑았다. 그녀는 멀뚱히 책자를 가져와 이것저것을 맞춰 보기 시작하더니, 약간 불길하게 웃어 보였다.

 

  “너. 이제 운명의 상대를 만난대.”

  “뭔 소리야. 설명을 좀 해 봐.”

  “우리 헤어지자.”

 

  정말 어이없는 결별 선언이었고, 그게 어찌 되었건 둘은 해방이 되었다. 혹은 헤어졌거나?

 

*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석민은 얼굴에 만화책을 덮고 있었다. 허나 부르르 떨리는 몸은 분명 미친 듯이 웃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약 올라서 만화책을 들어 올리자 역시나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민규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와,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그렇게 차여?”

  “놀리냐? 어떻게 보면 협의 이별이야. 어차피 둘 다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고.”

  “...난 그래도 둘이 좀 해피엔딩이 될 줄 알았는데.”

 

  은근슬쩍 제 손에 들린 만화책을 가져와 다시 자신의 얼굴에 덮는 석민을 바라보았다. 쟤는 또 왜 저래.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 보면 만화책 밑에서 뭉개진 발음이 새어 나왔다.

 

  “웃기다...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나도 몰랐어. 골 때리는 애 라니까.”

  “왜. 술이라도 마셔 줄까? 일단 차인 거 잖아.”

  

  민규는 석민의 옆, 침대에 걸쳐 앉아 다시 만화책을 들어 올렸다. 괜히 미간 찌푸리고 짜증 내는 얼굴이 보이면 이건 또 왜 이러나 쳐다 보았다.

 

  “내가 뭐, 걔랑 뒤지고 볶고 했어야 실연의 아픔이란 게 있는 거지...”

  “그래서?”

  “...근데 술은 땡긴다. 존나 착잡하다.”

 

  또 다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 오면 민규는 괜히 얄미운 생각이 들어 그를 간지럽혔다. 소꿉친구로 자란 이래 제일 얄미운 모습이라. 그만, 그만. 거의 죽다 살아난 그가 엎어지면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손을 뗐다. 가끔씩, 이 묘한 느낌은 뭘까.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얼굴이 벌게진 석민이 자신을 올려다 보기에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운명의 상대가 나타난다 했잖아.”

  “어. 근데 그냥 헤어지고 싶어서 말한 거 같은데.”

  “아냐. 분명 뭔가 있어. 내가 찾아 줄까?”

 

  귀찮다는 얼굴로 석민의 배 위에 얼굴을 베고 누우면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뱃속에서 울렸다. 또 헤어졌다고 하면 선배들도 그렇고 동기들도 그렇고, 너한테 또 귀찮게 굴 거 아냐. 그러니까 이 친구님이 도와 주신다고. 일단 소개팅 되는 사람을 여기저기 알아보고, 나도 주변에 좀 알아볼 테니까, 그러니까.

 

  “주변에 있대.”

  “뭐?”

 

  그가 중얼대는 내용이 좀 듣기 싫었다. 누군가와 사귀는 것에 이제 진절머리가 난 것일까? 민규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을 끊고 문득 생각나는 것을 내뱉었다. 주변에 운명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운명이 있었으면 너 이전에 이어졌어야지. 무어라 불평을 하기도 전에 사라진 그녀를 잡지도 못하고 벙 쪘다가, 결국 찾아온 곳이 바로 20년지기 이석민이었다. 누구한테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겠냐고.

 

  이제 좀 쉬나 싶었는데. 그 20년지기는 그 말을 듣더니 눈치도 없이 자신을 벗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노트와 펜을 가져오더니 의자를 끌어와 앉고는 그에게 가져온 것을 건네주었다.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적어봐. 내가 찾는 거 도와줄게.”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민규는 귀찮다는 듯 노트와 펜을 내려다 보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무어라 불평을 해도 결국은 말을 잘 듣는 그였다. 노트의 백지를 내려다 보다가, 주소록에 적힌 여자애들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영희, 선주, 희선이, 혜인이... 막히는 가 싶으면 옆에서 석민이 하나하나 추가해주기 시작했고, 결국은 기다란 목록이 완성되었다. 민규는 벌써부터 질리는 얼굴로 그것들을 쳐다 보았다.

 

  “이걸 꼭 해야 돼?”

  “엉. 꼭 해야 돼.”

 

  이석민은 생각보다 결연했다. 그 모습이,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고. 민규는 에라 모르겠다 다시 침대에 늘어져 누웠다. 그리고 문득 주둥이가 이끄는 대로 내뱉었다.

 

  “근데 그게 여자만 된다는 보장이 있어?”

 

  한참 답이 들려 오지 않았다. 얘가 호모포비아였나. 슬쩍 옆을 보면 그건 아닌 듯 그는 리스트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요즘 시대가 시대잖냐. 남자도 될 수 있지.”

  “어엉...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자 말이 없던 석민이 무언가를 다시 적기 시작했다. 영민이, 철수, 동인이... 중얼거리는 것이 어느 새 잦아들 정도로 집중해 무언가를 쓰길래. 민규는 벌떡 일어나 그것을 빼앗았다. 뭐냐고 둥근 눈으로 올려다 보는 석민을 내려다 보았다.

 

  “나 배고파. 이제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다.”

  “...뭐 먹을래?”

 

  약간, 늦는 답. 계속 거슬리게 구는 석민의 행동에, 민규는 의문을 떠올린 채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학교 앞에 술집에서 반주나 하자고 했다. 저 얼굴. 저 우울한 얼굴. 왜인지 울기 직전의 얼굴 같아서. 더 빠지기 전에 끌어내 주는 것이, 생각해 보면 지금껏 잊고 있었던 자신의 역할이었다.

 

  그러네. 잊고 있었네.

 

*

 

  전 여자친구와 김민규는 쿨하다면 너무 쿨했다. 애초에 사랑한 적도 없어서 그랬을 지도. 아무렇지 않게 만나 카페에서 헛소리나 내뱉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근래 들어 갑자기 이석민도 바쁘다고 그를 내친 덕분에 뭐 할 일도 없이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바쁘다는 걸까. 괜히 그게 거슬리는데, 또 이것도 누구에게 말할 대상이 없어서. 그래서 결국은 전여친을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녀 역시도 민규에게 거부감까지 들 이유는 없었기에 금세 나왔고. 누가 보면 우리가 소꿉친구인 줄 알겠다.

 

  “운명은 어디 가고 계속 날 불러.”

  “아, 누군지 모르겠다고. 알려주고 내치든 가.”

  “이석민은?”

  “바쁘대. 나 없이 산 동안 바쁠 일이 많이 생겼나 보지, 뭐.”

 

  그녀는 문득 커피잔을 들었다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난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그런 말을 중얼거리길래 그 한 잔을 다 비우고 말해 줄 때까지 쳐다 보았다.

 

  “내가 운명,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고 했잖아.”

  “뭔 소리야. 좀 쉽게 이야기 해봐.”

 

  민규는 석민이 부득불 챙겨 준 노트를 그녀 앞에 두었다. 빼곡히 적힌 리스트는 운명 리스트 라기 보다는 그냥 민규의 휴대폰 주소록을 옮겨 놓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푸하하 웃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조금 남은 여백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은혜 갚을 거면 난 호텔 뷔페로.”

 

  그런 말을 하며 펜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또 자리를 떴다. 민규는 여전히 벙 찐 얼굴로 빈 자리를 쳐다 보다가, 그녀가 쓴 자리를 내려다 보았다.

 

  이석민.

 

  분명 비어 있던 자리에 그 이름이 써 있었다.

 

*

 

  처음에는 약간 답답한 기분이었다. 걔는 분명 친구 이석민 인데. 그런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도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친구로써 자리한 지도 20년 째. 그와 자신의 관계는 이미 그 때부터 못질 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못질이 낡아 떨어졌다면? 아니 사실 그녀가 아예 빠루로 못을 아작 낸 것에 가까웠지만. 그걸 탓할 생각도 못할 정도로 김민규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몇 년 어치 감정들이 확 몰아친 것 같아서. 계속 그에게 든 묘한 생각, 느낌.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실, 그래. 인정하자. 친구라서. 친구라고 하니까. 그저 흘려 보냈던 이야기들이 많기도 했었다. 유독 이석민을 챙기고 드는 자신의 성정도 그렇고. 그가 있으면 담력훈련 에서도 그의 손을 잡고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었다. 둘 다 겁쟁이인 주제에. 눈이 벌게져서 우는 걸 보니 갑자기 귀신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는 것이다. 걔는 늘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애였다.

 

  그럼에도 사회적 통념이나 고정관념은 무서운 것이었다. 투명 막에 가린 것처럼 그를 보고 있었다. 그냥 친구라서. 친구여야 되니까. 그러니까. 가끔 그가 낮잠에 들어 순한 얼굴을 해도, 어느 순간부터는 같이 옷 갈아 입는 것이 살짝 껄끄러워져도. 묘하게 인기 많은 그가 고백을 받는 걸 본 순간에 든 그 이상한 감정에도 아무 이름을 붙이지 못한 것이었다.

 

  유레카.

 

  한 마디로, 김민규는 좆됐다.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으며, 아무 준비도 없이 알게 된 그 감정의 후폭풍에 한참을 고생해야 했었다. 그리고 그의 그 고생에도 불구하고, 전 여친은 한 통의 문자를 보내왔다. 야 이석민 요즘 소개팅하고 다닌대.

 

*

 

  그 날 당장 이석민을 불렀다. 자주 만나던 그 오래 된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으면, 이석민은 여느 때처럼 자신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표정이 이상해 보이니까. 김민규는 그러거나 말거나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석민을 쳐다 보았다.

 

  “나 운명 찾아 준다며.”

  “어... 그랬지?”

  “이제부터 도와줘. 운명 찾게.”

 

  그런 말을 하면 석민의 표정이 잠시 멈춰 있었다. 이내 씩 웃는 모양이, 묘하게 쓴 맛이 났다. 민규는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도와준다며. 너만 소개팅 하지 말고, 당분간 나랑 같이 찾아줘.”

 

  욕심이었다. 일단은 임시방편이기도 했었고. 어쩌지도 못하고 자신을 빤히 쳐다 보는 이석민의 표정을 살피다가, 숨기지도 못할 거면서 다시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는 얼굴을 보면. 뭔가 견딜 수 없었다. 너는 늘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브레이크는 없었다. 운명 찾기를 방패로 두고, 예전처럼 그와 늘 붙어 다녔다. 정확히는 전과는 조금 달랐다. 트레이닝복으로 PC방을 가거나 김밥천국에서 대충 점심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날 때마다 잘 차려 입은 데이트룩으로 시계에 머리 손질까지 다 했다. 만나는 곳마다 카페와 분위기 좋은 맛집까지. 아예 코스로 찾아 두었다. 전 여자친구랑도 하지 않은 짓을, 이제서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헛웃음도 나왔지만.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는 이석민의 반응을 보는 것도 재밌었다. 어떻게 데이트 내내 저렇게 귀가 빨갛게 오를 수 있을까. 자기는 자기가 거짓말을 잘 하는 줄 알까? 표정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내 긴장한 기색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더더욱 멈출 수 없었다. 김민규는 이석민을 무조건 꼬셔야 했다.

 

  *

 

  어릴 때 둘은 비슷한 듯 다른 듯. 성격에서부터 많은 차이가 났었다. 무서운 것을 앞에 두어도 이석민은 주춤거리며 며칠이고 그 앞에서 고사를 지내면, 김민규는 에라 모르겠다 그의 손을 잡고 뛰는 격이었다. 일단 해봐. 넌 할 수 있어. 그리고 너도 무조건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해내곤 했었다.

 

  이석민이 김민규를 좋아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그런 것들 때문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친구였기에, 그는 늘 친구 김민규였고 석민은 한 번도 제 감정을 고백해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그가 연애를 시작했을 때에도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 김민규가 이별을 했다고 했다. 입학하자마자 매일 엮이던 그녀와 갑자기 사귀는 가 싶더니 또 갑자기 헤어졌다고 한 것이다. 매번 별 생각 없다고 했던 그가 결국은 그녀와 사귄다고 했을 때, 자신은 어땠더라. 그 때부터 자신 또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차이라면 자신은 그저 자신 만의 이별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끝이 났다고 한다. 이걸 웃어야 할까, 아니면 울어야 될까. 머리가 복잡한 가운데, 이 새끼는 운명이 어쩌구 하는 게 미웠다. 

 

  “주변에 있대.”

 

  나도 이별하고 있었는데. 넌 결국 다시 다른 사람한테 갈 텐데. 내 이별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 나냐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애써 그의 등을 밀어버리려 이석민은 답지 않게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노트와 펜을 가져와 그와 이어질 수 있는 여러 명의 이름을 적고 있는데, 이 새끼가 또 사람 염장 지르는 소리를 해왔다.

 

  “근데 그게 여자만 된다는 보장이 있어?”

 

  어찌 보면 그게 이석민의 방패막이었을 지도 몰랐다. 남자는 안되니까. 얘는 이성애자니까. 그러니까 자신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대학을 가자마자 예쁜 여자친구도 생기고, 그러니까. 나는 안 되는 것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아예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어떻게든 이별하려 했었는데.

 

  ...

 

  문득 그러면 나도 욕심이 생겨 버리잖아. 이석민은 남자의 이름을 하나 둘 적다가, 울고 싶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마지막 남은 한 칸에, 내 이름을 적으면 어떻게 될까? 마법처럼, 너의 운명이 내가 된다면.

 

  무언가를 쓰려던 순간 김민규는 노트를 뺏어갔다. 마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진짜로 이별을 할 시간이었다. 마법 같은 것에, 운명 같은 것에 마음을 주기엔 이젠 더 이상 버틸 재간도 없다 생각 했었다. 무엇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그의 변한 태도였다. 어찌 된 일인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가 싶더니. 그를 도와주는 내내 차려 입은 옷이며 향수 냄새, 같이 가는 카페와 분위기 좋은 맛집까지. 온통 못 견디는 것들을 선물처럼 제 품에 안겨 주었다.

 

  그럴 수록 드는 것은 열등감이었다. 넌 데이트 할 때마다 이런 걸 했었구나. 늘 츄리닝 입고 PC방이나 김밥천국에 가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늘어져 지내던 시간들은 모두 친구 김민규의 시간들 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석민은 비뚤어진 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제는 그 시간들을 다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엔, 그에게 다시 바쁘다 했다. 다시 소개팅을 잡고, 사람을 만나고. 헌팅 어플은... 무서워서 그만뒀지만. 딴에는 엄청 노력을 했다.

 

  그러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휴대폰에 지겹도록 김민규의 연락이 왔다. 몸이 멀어져야 마음이 멀어진다고. 그것을 무시하고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비가 엄청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쓸려 내려가도록.

 

*

 

  이석민이 연락을 안 받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웬일로 이석민이 소개팅을 다시 한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의 집 앞에 가도 그는 자신을 받아 들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걔도 나랑 비슷한 마음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

 

  가는 길에 민규의 전 여자친구와 우연히 마주쳤다. 반가워 하는 낯에 애써 웃어 보였다가, 갈 길이 바빠 마저 인사를 하고 가려 했다.

 

  “근데 어디 가?”

  “아... 나, 소개팅이 있어서.”

 

*

 

  야. 이석민 소개팅 하러 간대. 카페 XX. 거기.

 

  어릴 때부터 둘은 비슷한 듯 다른 듯. 성격에서부터 많은 차이가 났었다. 무서운 것을 앞에 두어도 이석민은 주춤거리며 며칠이고 그 앞에서 고사를 지내면, 김민규는 에라 모르겠다 그의 손을 잡고 뛰는 격이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그의 손을 잡고 뛰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김민규는 침대에 엎어져 있다가, 그 소식에 벌떡 일어섰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이석민에게 이유를 물어야 할 때가 찾아 왔다. 

 

*

 

  비가 죽어라 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친 듯이 내리는 장맛비에도 김민규는 우산을 쓸 생각도 못한 채 그 사이를 내달렸다. 이 비가 그치면, 문득 그가 떠날 것 같았다. 자신이 늘 그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떠난다면. 자신은 이석민처럼 그걸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대답은 아니었다. 절대 못 버틴다.

 

  도착지는 카페XX. 어째서인지 마침 혼자 카페 밖으로 나온 이석민의 앞에 도착했다. 그는 쫄딱 젖은 김민규의 모양새를 보다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너 괜찮, 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민규는 그의 손목을 콱 잡았다가, 바깥을 둘러 보았다. 너 여기 그대로 있어라? 다시 어디론가 뛰어 사라지더니, 금세 근처 편의점에서 우비를 구해 와 이석민에게 강제로 꿰어 입혔다.

 

  이 어이없는 새끼. 뭐하는 거야.

 

  뭐 하는 거냐고 물어도 그는 답이 없었다. 옷을 제대로 입혔다 생각이 들면 김민규는 이석민의 손목을 잡고 뛰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한참을 뛰어 놀이터에 도착하면,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늘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그와 자신, 그것 밖에 없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김민규는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마주 바라보았고. 내뱉었다.

 

  “야, 이석민. 우리 친구 하지 말자.”

  “뭐?”

  “나 너 좋아해. 나 진짜 친구 못하겠어.”

 

*

 

  어렸을 때. 수학여행을 갔다가 담력 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믿을 건 서로 밖에 없어서, 둘이서 손을 꽉 잡고 산을 올랐다. 분명 안전요원으로 선생님들이 몇몇 숨어 있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린 마음에 문득 그냥 그곳에 버려진 것만 같아 무섭기만 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앞으로 나갈까 고민하고 있으면, 옆에서 달달 떨고 있던 김민규가 자신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더니, 자기도 무서우면서 결연한 표정으로 앞장 서는 것이었다. 걔는 늘 그런 애였다. 겁쟁이도 할 수 있다고. 늘 자신의 앞에서 손을 잡아 끌어주던 애였다.

 

  이석민은 제 앞에 쫄딱 젖은 채 손목을 잡으며 고백하는 김민규를 바라 보았다. 문득, 그 산 속에서 자신을 쳐다 보며 말하는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일단 해봐. 넌 할 수 있어.

 

  마법이 아니었다. 운명은, 마법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나도 너 좋아해.

  그런 말이 가능 해질 때. 늘 바라던 마법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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