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겸

[규겸] 당신의 비밀을 먹고 자랐습니다

미쳐서 폰으로 급하게 쓴 조각글. 히어로물. (202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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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어로란 건 대체 뭘까? 민규는 저 멀리 나무에 올라가버려 우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날아가는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주제에 덜덜 떨며 아이를 내려주고 나면, 얼굴을 반쯤 가린 마스크를 고쳐쓰고 그대로 두두두 뛰어 모습을 감췄다. 남겨진 아이만 멍하니 울다 만 얼굴로 민규를 쳐다 보았다. 민규는 모른 척 휘파람 불며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이석민이 동네 히어로라는 건 비밀이니까. 대신 만나기로 한 골목으로 최대한 빠르게 걸어 갔다. 

  마지막에는 거의 뛰다시피 하여 곧바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역시나 하얗게 질린 석민이 지친 듯 벤치에 엎어져 있었다. 미리 준비한 따뜻한 물을 그에게 건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대단하다, 진짜."

  늘 하는 말에 석민은 울상으로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논지는 이랬다. 그래야만 하는 거니까. 사람을 구할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도움이 되어 줘야지. 그다운 답변이었다. 

  석민은 그렇게 능력을 가진 이래로 많은 사람들을 99%의 확률로 구해낼 수 있었다. 유일하게 구하지 못한 1%는 민규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석민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러 갔을 때, 민규가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도 목숨을 잃진 않았지만 다소 심한 부상을 입었고 그 흔적들은 없어지지 못하고 그의 몸에 남았다.

  그럼에도 민규는 그것을 서운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도리어 사람을 구하는 석민을 구하는 일에 유독 집착 했었다. 능력도 없으면서. 마치 영화 속 사이드킥이 된 것처럼. 매일같이 그의 옆에 붙어 그를 도왔다. 히어로로 선택 받았음에도 이석민은 여전한 겁쟁이였으니까. 어딘가 몰려 있는 석민의 손을 잡고. 늘 진창에서 끌어 올리는 것이 김민규의 역할이었다.

  아무리 히어로라 하더라도 날 때부터 히어로는 아니었으니 지쳐 엎어져 있는 날엔 어깨를 빌려주고.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다가 비에 쫄딱 맞아 감기에 걸린 날엔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그가 남을 구하는 걸 옆에서 유일하게 지켜보며. 민규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인 것처럼 석민을 구했다. 석민은 그런 민규를 보며                                .

  *

    민규는 꿈을 꿨다.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사고 현장이었다. 무거운 철괴 아래에 끼어 타들어간 흔적들이 화상으로 남아 괴로웠다. 그리고 저 멀리로, 익숙한 히어로가 날아갔다. 민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바쁘게 날아다니는 그가 저 멀리로 사라질 때까지, 그저 그것을 바라보았다.

  민, 규야.

  울먹거리는 소리가 제 귓가에 울렸다. 점차 어두워진 배경 속에서 울음소리가 작은 메아리처럼 들려 왔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느 새 정말 죽을 것처럼 우는 석민이 제 병상 옆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왜 너가 히어로가 됐을까? 늘 너를 구하던 건 나였는데. 왜 이 울보 천치를 히어로로 만든 걸까? 자기자신은 구하지도 못하는 애를.

  능력도 없던 어린 석민이 우는 석민의 뒤에 서서 민규를 쳐다 보았다. 공간이 뒤틀리고.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밝은 얼굴로 웃으며 옆으로 다가온 어린 민규의 손을 잡고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꿈에서 깨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손을 꾹 잡은 채 잠이 든 현실의 석민이 옆에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민규가 석민을 구하기 시작한 것은                     .

  *

  석민은 잠에 들어 식은 땀을 흘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민규를 내려다 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낯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땀을 닦아내고, 옆에 앉아 입술을 깍 깨물었다. 티셔츠 사이 얼핏 보이는 화상 자국을 보다가 젖은 눈가를 아무렇게나 훔쳤다. 민규야 미안해.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 말은 닳고 닳아 있었다. 그저 그의 손을 끌어 제 뺨에 품었다. 그러고 나면 거짓말 같이 그의 얼굴이 편안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석민은 자주 자신이 히어로가 된 순간을 떠올렸다. 바보같이 어두운 창고에 갇혀 울고 있던 자신을 구해준 김민규가 멋있어서. 강아지를 잃어 버리고 울고 있던 자신의 손을 끌어 결국 같이 찾아준 김민규가 멋있어서. 석민은 늘 꿈을 품었고 마법 같이, 혹은 거짓말 같이 그것이 이루어졌다. 바라던 히어로가 된 것이다. 그건 민규가 모르는 유일한 그의 비밀이었다.

  *

  히어로의 삶은 계속 이어졌다. 만화 영화와 달리 현실은 엔딩이 없었으니까. 석민은 늘 소소하게 사람을 구해왔고 민규는 그런 석민을 늘 도와주고 맞이했다. 딱 한 명을 구하지 못한 히어로를 구하는 그는, 가끔씩, 유일하게 구원하지 않은 석민의 죄악감을 곱씹곤 했다. 그의 웃음이 자신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그의 울음소리를 묶어 악당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건, 석민이 모르는 유일한 그의 비밀이었고, 평생 몰라야 할 비밀이었다. 

 둘은 서로의 비밀을 먹고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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