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겸

[규겸] 가위, 바위, 보.

고등학교 3학년 규겸. 베텔기우스 가사 보다가... (2023.06.30)

 

*

  그 해의 여름은 이상하리 만치 길었다. 더위에 약한 네가 이미 풀이 죽어 엎드려 있는 것을 흘끔 바라보았다. 네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여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한 편의 욕심으론 더 길어지길 바랐다. 네가 좋아하는 겨울이 다가온다는 것은 결국 졸업과 헤어짐이 다가온다는 사실과 같았으니까. 모든 나의 계절에 네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짜증이 나곤 했지만, 김민규는 티 내지 않았다. 그는 생각보다 연기를 잘 했고, 바보 같고 착한 이석민은 그것을 몰랐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가위바위보와 같았다. 김민규가 낼 수 있는 것은 가위 뿐이었다. 당장 펼쳐 내밀기에도, 그저 꽉 쥐어 숨기기에도 애매한 그 감정. 장난치듯 진심만 오려 버린 가위를 내밀어 이석민을 슬쩍 찔러 볼 뿐이었다. 그렇게 쭉 바라보고 있으면 더위에 지친 이석민이 고개를 들고, 당연하게도 눈이 마주쳤다. 이석민은 그저 가는 눈으로 그를 노려 보다가 그대로 다시 팔 위로 얼굴을 묻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 시간이 지나도, 일어날 생각도 안 하는 것처럼. 김민규는 팔을 뻗어 이석민을 깨웠다. 빨리 일어나, 석민아. 자신의 말이 들려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서는 찡찡 대는 것을 듣는 것도, 이번 년도가 마지막. 그것을 곱씹으며 김민규는 그의 등을 두드린, 애꿎은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석민은 늘 자신의 감정을 죄다 쥐지도 못하면서 주먹을 꽉 쥐어 시비 걸듯 내밀곤 했다. 그의 감정이 줄줄 녹아 떨어지는 게 바로 보이는데도, 그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주먹 안에 숨겼다. 김민규는 당연하게도 늘, 그것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늘 애매한 가위를 내밀면 당연히 자기가 이기리라 예상한 사람처럼 웃는 이석민의 얼굴에서는 다소 쓴 맛이 났다. 네가 이긴 건데도 매번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은 왜인지. 알았지만 김민규는 늘 모른 척했다. 그저 늘 져 주기만 하는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음 약한 그가 울 때마다 안겨 오는 것을 모른 척 하고, 여자애에게 고백 받은 자신을 눈치채곤 둘이서만 놀자며 끌고 가는 손을 모른 척 하고. 자는 척 하는 동안 입술 위에 보드랍게 얹은 그 입술도 모른 척 하고. 

 

  이석민과 김민규의 인연은 유치원 때 부터였다. 종알종알 말도 많고 착하고 귀여운 놈이 겁은 또 많아서. 어느 순간 덩치는 더 큰 자신의 뒤에 숨어 다니곤 했고 그게 곧 우리의 관계가 되었다. 난 늘 너를 뒤에 두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앞길은 내가 다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처럼 일단 챙기고 보았지만, 사실 김민규도 소문난 겁쟁이 중 겁쟁이였다. 과연 너는 계속, 내가 가자는 대로 끝까지 따라가 줄까? 분명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뻔하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네 입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었다. 혹시 라도 아니면 어쩌지. 혹시 라도 이미 질린 거면 어쩌지? 혹시라도, 펼친 네 손에 사실 아무것도 없었으면 어쩌지?

 

  하교 뒤. 푹푹 찌는 무더위에 아이스크림 하나 씩 물고 그네를 타다가,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이 오가면 석민의 웃는 소리가 울렸다. 민규는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바에 장난스레 짜증을 내며 크게 베어 물었고 남은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뚝 떨어짐과 동시에, 석민의 웃는 소리가 더 커졌다.

 

  “야 나 한 입만.”

  “싫어. 다 쳐 먹을 거잖아.”

 

  이미 멜론 맛에 입이 달아 질리면서도, 괜히 그의 아이스바를 탐내는 척 건드리면 석민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도망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민규의 집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스스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거실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또 자연스럽게 민규 방에 들어가 에어컨부터 틀었다. 따라 들어가면 다 먹은 줄 알았던 아이스크림 한 입 거리를 내미는 그가 있었다. 민규는 바람 빠지듯 웃고 그것을 한 입에 먹은 채 우물거렸다. 쓰레기 버리기 귀찮다고 주냐? 괜스레 중얼거리면 석민은 기껏 줬더니 쪼잔하기는, 또 중얼거리고. 그대로 민규의 침대에 풀썩 누워 낮잠이라도 자려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컴퓨터 책상의 의자를 빼 앉으면서 누워 있는 석민을 쳐다 보았다. 점차 습한 더위가 물러가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주변을 맴돌면, 괜히 마음도 버석거렸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들릴 것만 같아 눈길을 돌려 괜히 문제집을 꺼냈다. 이내 조곤조곤 속삭이는 듯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쟤는 공부하러 와서는 낮잠만 자고. 들리지도 않을 투덜거림을 내뱉으며, 민규는 다시 한 번 겁을 집어 먹는다. 내가 그렇게 편한가? 이제 내가 떨리지도 않는 건가?

 

  이석민은 그런 애였다. 언제나 남 앞에서는 늘 활짝 펴진 웃음을 내밀고, 누구든 품을 것처럼 착해 빠진 보자기. 늘 말랑말랑하고 물에 적시면 녹을 것처럼 생겨 늘 걱정하게 만드는 애. 그런 주제에 이석민은 김민규의 앞에서만 다무진 주먹을 내밀었다. 야무지게도 꽁꽁 뭉쳐 괜히 사람 꽁해지게 만드는. 늘 자기보다 크고 단단한 소꿉친구 몸에 주먹을 약하게 내질렀다.

 

  그러니까 내가 불안한 거라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를 되뇌다 보면 문제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보란 듯이 자신과 다른 대학교에 들어갈 거라 자부하던 그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다시 맴돌았다. 분명 그건 자신과의 이별이었다. 바보 같은 이석민이 감정을 흘리고 흘리다 홀쭉해져서 혼자만의 이별을 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냥 말하면 될 텐데. 그냥 날 좋아한다고 말만 해주면 될 텐데. 겁을 먹고 제 뒤에 숨어서 자신을 올려다 보던 이석민을 생각해 보면, 그게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김민규는 욕심이 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자신에게 고백하는 상상을 하면. 그걸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손을 활짝 펼친 이석민이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리면 어쩌지?

 

  하반기에서 더욱 저물면, 이별의 그림자는 예견된 김민규의 겁처럼 기울여 다가올 것이었다. 민규는 문득 펜을 책상 위에 톡톡 두드리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옆을 쳐다 보았다. 낮잠은 무슨. 자지도 못하고 결국 얼굴을 숨기느라 몸을 틀어낸 석민을 바라보다가, 볼펜 끝을 물었다. 괜히 조급했다.

 

 *

 

  이석민은 재능이 많은 편이었다. 예체능이라면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다. 운동회든 장기자랑이든, 그는 어디든 빠지지 않고 불려갔다. 허나 그 천부적인 재능을 줌과 동시에, 신은 그에게서 거짓말 하는 재능을 앗아갔다. 정말 거짓말을 못했다. 지독할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석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에도 노력하던 사람이니까. 동시에 없는 재능에도 노력할 수 있다 믿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노력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는 죽어라 이 악 물고 노력 했다. 거짓말을 하면 나타나는 모든 증상과 특징, 자신의 버릇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어떻게든 진짜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 했다. 그저 단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 꽉 다문 주먹은 거의 결의의 의지나 다름이 없었다, 는 것을 그 딱 한 사람만 몰랐다.

 

  망할 놈의 김민규.

 

  김민규는 늘 이석민의 결연한 주먹에 장난처럼 가위를 내밀기만 했다. 내가 져 준다, 져줘. 그 가위가 이석민의 가슴을 동강 내는 것도 모르고. 늘 져주면서 김민규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이석민을 만들어 왔다. 이미 어릴 적부터라 언제부터 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석민은 오랜 기간 김민규를 좋아했다. 유치원 때부터 반했었다. 그저 어린 감정으로 멋있고 잘생기고 자기를 잘 챙겨 주는 다정함이 마냥 좋아서 시작했다. 그게 사랑인지도 모르고 붙어 다니다가, 어느 날 깨닫고 마는 것이었다. 사랑은 종소리나 노랫소리와 함께 하지 않고도 찾아온다는 것을. 그를 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부터 이석민은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김민규에게 숨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했었다. 거기에 고백이란 글자는 없었다. 그저 견고하게 쌓아온 자신들의 성이 무너질 까봐, 겁을 집어 먹고 숨기기 바빴다. 그럼에도 욕심이 날 때가 있어서. 마음이 약해지면 그의 품에서 울고, 고백 받은 그가 떠날 까봐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는 그에게 입 맞춘 적도 있었지.

  그럼에도 김민규는 늘 이석민에게 속아 가위를 내밀었다. 자신이 아니고서야 어쩔 줄 모르는 가엾은 이석민을 늘 자기가 챙겨야 하는 것처럼 져주었다. 이석민은 이 둥지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와의 세월로 쌓은 견고한 알 껍데기 속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미련하게 살다가 어느 날 결심했다.

 

  그에게서 독립하자. 이제, 이 바보 같은 짝사랑에게 수고했다며 이별을 고하자. 

 

  *

 

  바보 같은 이석민은 바보 같은 김민규에게 고했다. 너와 다른 대학을 지망하고 있으며, 아마도 대학 생활을 하다 보면 너랑 만나기도 힘들 거야. 나 진짜 열심히 할 거거든. 그런 말을 내뱉으면 김민규는 멀뚱히 이석민을 바라보았다. 그도 무언갈 생각하는 듯 하다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였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민규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없었고, 석민은 차라리 그 반응에 속이 후련하면서도 아렸다. 그래. 이러니까 내가 그만두는 거야. 그저 낮아져만 가는 자존감에 휩싸여, 자신의 이별에 당위성을 붙일 뿐이었다. 

 

  그 발언 이후에도, 당연하게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흘러가는 계절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걸었다. 학력평가가 하나 둘 지나가면서, 이석민을 녹이던 여름은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이 다 달라질 수 있겠지. 속 시원하게 어리고 어리석던 시절을 내려놓고, 자신의 감정 정도는 정리 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이석민은 자주 상상해왔다. 옆에 김민규 없이 지내는 어른 이석민을. 그리고 문득, 멀어진 어른 김민규가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웃고 있으면, 괜히 코끝이 따가웠다. 그 다정한 얼굴을 못 보게 된다는 사실에 괜히 모든 게 미워서 문제집을 긁다가 구멍을 냈다.

 

  그럼에도 이석민은 노력파였다. 하반기가 더 저물기 시작하면, 점차 민규의 집에 가는 빈도수를 줄여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핑계거리는 많았다. 둘 다 수험생이니까. 김민규는 야속하게도 매번 알았다고 했다. 이제 너네 집 자주 못 가. 이제 너랑 하교도 자주 못 해. 이제 너랑 자주 못 놀아. 그럴 때마다 그는 이석민을 여느 때처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알았다고만 하는 것이었다. 늘 져 주는 그 가위가 못내 야속해서, 석민은 더 오기가 붙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하니까, 이제부터 너와 멀어지면 언젠가는 멋진 성인이 되어서 말끔하게 널 털어낼 수 있겠지. 졸업앨범처럼 그저 내 추억 속에 길었던 기록 하나로만 남을 수 있겠지. 언젠가는 너와 술 한 잔 기울이면서, 그런 날이 있었지, 하고 넘길 수 있겠지.

 

  더 이상 민규와 하교를 하지 않고 혼자 걷는 길에서, 눈물만 줄줄 나와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엄청 울었다. 더 이상 우는 자신을 가려 줄 품이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너한테서 먼저 졸업을 하지. 주먹을 꾹 쥐어 눈매를 훔치다 보면, 어느 새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챌 수 있었다.

 

  왜 너는 날 네 모양대로 조각조각 잘라내는 걸까. 더 이상 내 모양대로도 살지 못하게.

 

  김민규는 바보같이 순하게 울며 앉아 있는 이석민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무릎 꿇은 채 그를 제 품 안에 푹 안았다. 왜 너는 날 이기기만 하는 걸까. 나는 왜 너한테 지기만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처음으로 펼친 보자기에 꼭 들어맞는 바위처럼. 민규는 한참 우는 석민을 품에 끌어 안고 달랬다. 그의 주먹이 빠진 그 구멍이 너무 어둡고 슬퍼서 무서웠다고. 그런 말은 꾹 삼킨 채 우는 석민의 고개를 들었고. 입 맞췄다. 처음으로 그를 이긴 순간이었다. 

 

*

 

  그 마법에도 계절은 당연히 멈추지 않았다. 여름이 유독 길긴 했지만. 가을과 겨울은 착실하게 돌아왔다. 점차 낮이 짧아지고, 물기 없는 건조한 공기가 차가워지는 계절. 네가 좋아하는 계절. 목도리에 푹 파묻힌 석민이 민규에게 손을 펼쳐 내밀면, 민규 역시 손을 펼쳐 그의 손을 기워 잡았다.

  주먹을 내면 가위를 내고, 가위를 내면 보자기를 내고. 보자기를 내면 바위를 낼 필요 같은 건 없으니까. 민규는 보자기끼리 뭉쳐 쥔 손을 내려다 보다가 그대로 끌어당기며 웃었다.

 

  “석민아.”

  “응?”

  “나 사실, 너랑 같은 대학 썼어.”

 

  가위바위보는 이미 처음 만난 날에 승부가 났었다는 것을. 너와 나는 너무 오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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