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겸

[규겸] Sand timer

서퍼보이 규와 도망온 여행객 겸으로 영화 화양연화(왕가위) 모티브 가져온 이야기... (2024.02.21)

상단의 서퍼보이 규와 도망온 여행객 겸 썰에서 기인하는 조각글 모음집


 

  0.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펭귄을 발견한다

느리게 족적을 찍는 나의 재앙

내가 얼어 붙는다면, 아마도 너에겐

재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지

우리의 일방적인 기억은

가장 사소한 재난으로 남는다

 

  1-1.

 

  그렇게 살기 싫다고 생각하는 건 여느 때나 똑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 역시 매 순간 주어져 있었다. 그것을 고치지 못한 자신은 늘 물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고, 어느 덧 서른을 바라 보는 나이에 문득 그게 한스러웠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채 도망쳤다. 쉴 새 없이 울리는 벨소리를 뒤로 한 채 석민은 수평선을 바라 보았다. 캘리포니아. 얕은 고정관념으로 보았을 때 가장 걱정 없는 동네라 해서 왔지만, 배 다른 배신감이 들 정도로 이곳은 모든 게 행복해 보였다. 사실 자신의 고정관념이 조금이라도 깨졌으면 했었다. 불행한 것이 나 뿐만이 아니었길. 그 착하던 이석민은 처음으로 그런 소원을 빌었었다. 누군가 이 불행을 같이 공유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1-1.

 

  이 곳에서의 김민규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도망쳐 온 곳에 낙원은 없다 하지만, 이곳의 나이브함은 늘 자신을 부정에게서 눈을 가려주었으니까. 모두와 함께 합동하여 거짓말을 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적어도 당장 자신을 밑창으로 끌어 당기는 손이 없었으니까. 당장 보이는 것은 그저 멍청할 정도로 찌기만 하는 햇볕, 계속 부딪히면서도 원상복귀 되는 바다. 그런 것들만 있었으니까. 당장은 행복했다. 할 만한 직장, 서퍼보드,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애인을 의무처럼 얻었다.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지만, 그는 비좁은 한국에서의 역할극보단 차라리 이게 더 나은 것이라 자신을 속였다. 그리고,

 

  김민규는 그 거짓말 같은 풍경 속에서 이석민을 발견했다. 자신이 한국에 두고 온 불행이 한 조각, 바다에서부터 떠밀려 온 것만 같은 그였다. 

 

  5.

 

  둘은 생각보다 맘이 잘 맞았다. 홀리듯 석민에게 다가가 말을 건 민규는 옆에 앉아 자신도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혔다. 우울해 보였던 인상과 다르게 다소 유쾌하고, 그러나 조금은 낯을 가리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민규는 그에게서 보았던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이곳의 행복에 대해 거짓말을 해주었다. 아마 그도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온 것만 같았었으니까. 당분간 그곳의 가이드를 해주기로 약속하고, 숙소 위치를 공유했다. 휴대폰이 고장 났다고 거짓말 하는 그의 얼굴은 너무도 순했기에. 눈치 빠른 민규는 그것을 무시하고 받아 들여 주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누구나 익숙한 거짓말의 현장에서, 이석민 만큼은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점이 늘 걸리고, 옆에서 손을 잡아 주어야만 할 것 같아서. 그 날부터 민규는 매일 같이 석민의 숙소에 방문 했고, 석민은 거짓 없이 그를 반가워 했다.

 

  10.

 

  시간이 무르익을 수록, 그들의 고개가 기우는 시간 역시 길어졌다. 같이 밥을 먹고, 바다를 돌아다니고. 민규의 서핑을 구경하던 석민이 자주 넋이 나가던 때가 많았으며, 축제에서 노래를 부르는 석민의 얼굴을 바라보던 민규는 귀가 늘 뜨거웠다. 가끔은 서로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라 매번 바닥을 바라보곤 했었다. 저녁에는 늘 맥주병을 같이 기울였다. 진솔함 뒤로, 그들은 늘 한 가지를 숨겼다. 포커를 하지 못하는 석민은 늘 패를 들켰고, 잘 하는 민규는 그를 위해 마지막 패를 숨겨 두었다. 그럼에도 서로 약속한 것처럼 결과는 보지 않았다. 하루하루 게임은 계속 되어 가고, 그들은 올인은 하지도 못한 채 콜만 외치는 격이었다.

 

  술을 마신 뒤 이어지는 취중진담에서, 석민은 자신의 약혼을 이야기 했다. 그 날은 민규의 애인과 우연한 만남이 있던 날이었다. 왜인지 그는 자신이 가져온 불행보다 좀 더 울었고, 민규는 그를 껴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저 그의 약한 눈가가 다칠 까봐 젖은 손수건을 구해와 건네는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언어로, 그 날은 내내 이야기를 했다. 술집이 닫고 나서도 해변가에 누워서 이야기를 했다.

 

  여느 때처럼 다시 투닥투닥, 소꿉친구처럼 농담을 주고 받고 나면 아침이 되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던, 여느 때처럼 하루하루는 쉽게 흘러갔다. 서로의 빈 자리가 맞물려 빠른 시간 안에 서로가 특별해졌지만. 생각해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간도 그리 길지 만은 않았다. 단 5일 간의 사랑이었지만, 그들은 불타올랐었다.

 

  ‘사랑을 절제하라. 긴 사랑이 되려면.

  아주 빠른 것은 결국 너무 느린 것만큼이나 다를 바 없이 더디게 닿는도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론은 그러한 사랑에 경고를 담았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담지는 못했다. 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었고, 그저 사소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절제한다 하더라도, 정말 감정이 닿을 것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제했다. 그 누구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담지 못했고, 그건 둘의 게임에 암묵적인 룰처럼 자리 잡았다. 여전히 그들은 올인을 외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콜 사인도 들리지 않았다. 감정의 빚만 쌓여갔다. 

 

  15.

 

  처음으로 서핑 보드 위로 석민이 선 날. 축하주를 하러 간 자리에서 석민은 이야기 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가야 할 것이라고. 익숙하게 풍겨오는 민규의 바다 냄새를 맡으며, 석민은 눈을 감았다. 민규는 눈을 감은 석민을 내려다 보았다. 탁자를 약하게 검지로 두드리다가, 그가 눈 감은 것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 지척까지 제 손을 뻗었다. ...곧 거두어졌다. 그 순간 자신을 탓하듯,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정확히는,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석민은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손을 알지 못했고, 그저 다시 눈을 뜨고 아프게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에 그가 고집하던 향수 냄새가 났다. 우디 머스크. 이곳으로 오는 길에 면세로 샀다고 했었나. 민규는 그 향수의 이름을 묻지 못했다. 냄새는 생각보다 잔인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으니까. 새 제품을 산다고 한들. 바다 냄새가 섞이지 않은, 정형화된 냄새가 자신을 슬프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날 거짓말처럼 그들은 서로에 관련된 꿈을 꾸었다. 서로의 손을 깍지 껴 잡고, 껴안고. 목에 고개를 묻고 늘 맡고 싶었던 그 냄새를 제 몸에 묻혔다. 딱 맞는 서로의 품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품어주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품어졌다. 이렇게나 잘 맞는데. 우리는 왜 먼 길을 돌아온 걸까. 민규는 석민의 얇은 손가락에 입 맞추고, 석민은 두터운 민규의 목에 매달렸다. 입가를 맞추는 순간, 둘은 꿈에서 깼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울지 못했다.

 

  16.

 

  그 꿈을 꾼 날, 아침부터 석민은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했고 민규는 도리어 바쁘게 일어나 씻고 그의 숙소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도리어 더 밝게 웃으며 그에게 장난을 걸었다. 여전히 유쾌한 석민에게서 묘하게 그림자가 느껴지면, 민규는 곧장 캘리포니아의 햇볕 밑으로 그를 끌었다. 그가 좋아하는 산책을 하며 현실과 관련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날은, 술을 마시고. 어두운 밤 좁은 골목길에서 석민이 이야기 했다. 나, 헤어지는 거 정말 못해. 고개를 수그리는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며, 민규는 입 안이 쓰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내가 너의 손을 잡고 도망칠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늘 널 웃게 만들 수 있을까? 늘 가족 이야기에 쓰린 얼굴을 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민규는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만큼 무모해지지 못했다. 

 

  “우리, 연습하자.”

 

  헤어지는 거, 연습하자. 가끔씩 엉뚱한 소리를 하던 이석민이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그였기에, 이번에는 조금의 타박도 하지 못하고. 그게 마지막 소원인 것처럼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자. 네가 원하는 거.

 

  석민은 민규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정말 헤어지는 것을 못 했다. 민규야, 나 이제 갈게. 그런 말을 겨우 내뱉으면 민규는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하는 순간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잘 가. 그런 말을 다시 내뱉으면, 숙이고 있었던 석민의 얼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네가, 바다가 하나도 없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말라 죽지는 않을까? 민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20.

 

  석민이 떠났다. 이별 연습을 한 지 사흘 째 되던 날. 민규는 텅 빈 숙소 안 쇼파에 앉아 얼굴을 쓸었다. 자신은 바다가 있어도 말라 죽을 것만 같다. 그 정도로 울었다.

 

  30.

 

  해가 흐르고, 흐르고, 흐르고. 어느 새 서른을 훌쩍 넘긴 민규는 서핑 보드 강사로 취직하며 시간을 보냈다. 애인과는 헤어진 지 일 년 째. 누구를 만나도 그곳이 채워지지 않을 걸 아는 사람처럼, 그는 늘 혼자였다. 가끔씩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익숙한 골목길에서 몇 번 울었지만. 더 이상 울지 못하는 순간까지 오기도 했다.

 

  하지만 꿈은 여전했다. 점차 냄새가 옅어져 가도, 우디 머스크 향이 나는 그 풍경에서 자신은 어린 석민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어린 얼굴을 모르기에, 그리고 그의 얼굴이 점차 흐려져 가기에. 늘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저 그의 손을 잡고, 해변을 가로 질러 달렸다.

 

  늘 여전했다. 좀 더 어리고 무모했던 자신이, 현실에서 이석민을 구하는 이야기. 계속해서 흐려져 가는 그의 얼굴이 무서워서, 혹은 뒤를 돌아보면 에우리디케*가 사라질 까봐. 이석민 못지 않은 겁쟁이였던 그는 늘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다. 그의 손 만큼은 자국이 날 정도로 꽉 잡고.

 

  25.

 

  사라진 지 석 달 뒤. 석민은 한 번 돌아왔었다. 그 밤, 해변에 앉아 울고 있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싶어서. 저 멀리서도 그 모습이 선명해서.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부터 그에게 다가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이면, 민규의 걸음은 멈췄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해변에서 더 이상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30.

 

  해가 흐르고, 흐르고, 흐르고. 어느 새 서른을 훌쩍 넘긴 석민은 집안 사업을 이어 정리하며 회사 생활도 가정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이었기에, 상대는 자신의 위치를 이해해 주었다. 예전에는 그녀의 남자친구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석민은 따로 옆에 누굴 두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도 그곳이 채워지지 않을 걸 아는 사람처럼, 그는 늘 혼자였다. 가끔씩 빈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동해를 찾아가 밤바다 앞에서 울기도 했었지만 더 이상 울지 못하는 순간까지 오기도 했다.

 

  하지만 꿈은 여전했다. 점차 냄새가 옅어져 가도, 그곳의 바다 냄새는 나고 저 수평선 너머에 민규가 가물가물한 얼굴로 떠 있었다. 그가 무언가 자신에게 소리를 쳤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대화가 통하지 않자, 그는 바로 물 속으로 뛰어 들어 수영 해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너무 눈부셔서, 그를 끝까지 쳐다 보지도 못했다. 석민은 그저 가지 말라고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곧 혼자가 되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졌고, 석민은 자신이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울었다.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주던 것은 늘 김민규 였기에. 그가 없는 바다는 늘 두려웠다. 

 

  25.

 

  단 한 번 용기를 낸 적이 있었다. 결혼에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던 석민이, 신혼여행을 캘리포니아로 가자고 했을 때 예비 신부는 흔쾌히 허락 했다. 거기서 석민은 판돈을 걸었다. 다시 그를 발견하면, 정말 마지막으로. 올인을 해보고 싶어서.

 

  허나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거짓말처럼 떠난 그 바다엔 김민규가 없었고, 그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건 그저 바다 만의 냄새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게 너무 서러워서, 한동안 그 해변에 주저 앉아 울었다. 아내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 

 

  40.

 

  마흔을 앞둔 그 날까지도, 민규는 그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바다가 자신을 받아 들이는 날까지도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바다에 묻힌 제 기억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를 잡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었기에. 늘 그것을 자신의 감정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45.

 

  나이가 들고, 점차 얼굴에 주름이 지는 그 순간에도.

 

  50.

 

  더 이상 그의 생사조차 모르는 나이가 오더라도. 이곳에서, 영원히. 

 

  60.

 

  석민은 비행기표의 시간을 살폈다. 출발은 인천. 도착은 캘리포니아. 출발하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바란 자신에게 벌을 주세요. 그리고, 자신의 벌로 말미암아. 그에게는 자신이 행복한 기억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늘 자신의 힘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번엔 그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기를, 아마도 바라고 있었을 것이었다. 거대한 바닷속, 사소한 그들이 그 뜻을 영원히 모르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0.

 

해변은 쉼 없이 모이라이*의 갈퀴에 찢겨도

다시 부드러운 시간으로 돌아온다 세계의 법칙이다

네 시간도 그렇다 파도는 자전하고 거꾸로 매달린

너와의 시간이 다시 흐른다 나는 너에게

다시 흐른다 이건 너와 나의 법칙이다 

 


*에우리디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오르페우스의 아내.

*모이라이: 그리스로마 신화 속 운명 신 세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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