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덴 - 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랬다. 이런 멍청한 애송이와는 단 하루도 같이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마키마의 명령이니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이지 아니었다면 악마는 잡아도 애보기는 못한다고 어떻게든 악다구니를 썼을 터이리라.
그렇게 마지못해 동거인이 된 그 녀석은 아니나 다를까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란 것인지 청소, 빨래 등의 가사는 물론이고 목욕은 매일 해야 한다는 것이나, 밥 먹을 때의 예의범절도 몰랐다. 그 녀석은 짐승이었다. 아니, 진짜 짐승이라면 차라리 귀여웠지. 혼내도 듣지 않고 타일러도 흘려듣기만 할뿐인 그놈은 길들이면 말을 듣는 개새끼만도 못해서 아키는 한동안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이 녀석과 살면 총악마를 잡기도 전에 화병으로 죽겠다 생각하면서.
그러나 구원은 의외의 인물한테서 왔다. 그 녀석에 이어 새로 온 동거인은 녀석보다 더 심했다. 하기야 그놈은 인간조차 아니었으니. 혼자서 언성을 높이던 일이 어느새 두 명의 목소리가 됐고, 자신이 그랬듯 녀석도 타인이 싸지른 똥을 치우는 처지가 됐다. 균형은 거기서부터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이 늘수록 어수선했던 하루는 점점 더 안정 되어갔다. 이제는 그녀석도 악마 놈도 시키는 건 그럭저럭 따르게 됐다. 매일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거르지 않는 등의 당연한 일과를 해나가면서. 아키는 그제야 마음을 놨다. 이 정도면 셋이라도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정신적 여유를 가진 다음에는 자연스레 정이 붙었다. 싫어하고 경멸했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져 어느새 그 녀석과 악마를 돌보고 있었다. 그녀석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을 졸이고 화를 내거나 눈을 떼지 못하며.
어느새 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
거대한 애벌레 악마의 입속으로 삼켜진 놈은 금방 배를 가르고 튀어나올 줄 알았다. 허나 30초가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이, 오히려 놈을 삼킨 악마만이 으스대고 있었다. [자아. 다음은 누가 먹히고 싶으냐. 눈엣가시 같은 악마사냥꾼들아. 모조리 먹어버리겠다.] 두꺼운 몸통에 다닥다닥 매달린 짧은 다리가 징그러운 동작으로 움직였다. 거기까지 지켜보다가 아키는 담배를 껐다. 악마의 머리 부분을 노려 특유의 손동작을 만든 후 여우 악마를 소환했다.
“켕.”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여우가 악마의 머리를 짓이겼다. 문 채로 이리저리 흔들자 머리에서 뚝 떨어져나간 몸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파워.”
아키는 파워를 시켜 벌레 악마의 몸체를 가르라고 했다. 파워는 영 꺼려하는 표정으로 검을 만들어 휘둘렀다. 덴지는 체액으로 범벅이 된 채 토막 난 인간들 사이에 있었다. 놈은 멀쩡해보였지만 도통 몸을 가누지 못했다.
“뭐하냐.”
주저앉은 놈을 아키가 발로 툭툭 쳤다. 덴지는 체인소를 위험하게 흔들며 입을 막는 제스처를 취했다.
“으엑, 냄새.....야이씨 넌 코가 막혔냐. 이놈 뱃속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잖아. 우웁. 억, 올라온다.....!”
확실히 악취가 심하긴 했다. 부패된 시체에서 나는 것과 악마의 위에서 분비된 염산 냄새가 섞여서. 파워도 역겹다면서 저만치 떨어져 코를 감싸 쥐고 있었다.
여우에게 목이 뜯긴 벌레 악마는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아키는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소탕 작전이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들어와 현장을 수습했다. 부상자들을 옮기고 사건 청취를 듣고 악마의 사체를 치웠다.
관계자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덴지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고 파워는 그런 덴지를 깔깔대며 놀리고 있었다.
“케헤헤. 니 몸 온통 끈적끈적해서 더럽구나 덴지. 그대로 뱃속에 있었다면 네놈도 녹아서 벌레 악마의 양식이 됐을 텐데.”
아쉽구나 하면서 파워가 덴지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덴지는 그만한 힘도 못 이겨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했다. 안색이 창백한 걸 보니 확실히 상태가 안 좋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비단 벌레에게 먹힌 역겨운 경험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최근 악마가 나타났다는 신고가 폭발적으로 늘어 아키 일행도 계속 야근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나와 쉬지도 못하고 계속 싸웠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실실대며 덴지를 놀리던 파워 곁에 주저앉아 아키가 덴지에게 말을 걸었다.
“일어나. 집에 가자.”
“으어....죽을 것 같....욱, 마카마 씨......마키마 씨의 냄새가 맡고 싶어....”
중얼중얼 헛소리를 해대던 덴지는 이미 반쯤 의식을 놓은 모습이었다. 가자고 끌어당겨도 도통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키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였다면 걷어차서라도 제 발로 걷게 만들었겠지만. 녀석 딴엔 제법 성실하게 일했으니 이 정도는 봐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덴지를 부축하고 일어서서 보니 파워가 시체더미 속을 알짱대고 있었다. 잘린 팔을 거꾸로 든 채 혀를 베 내밀고 있기에 얼른 야단을 쳤다.
“파워. 사람들 있는 곳에선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했지.”
그러자 파워가 깨갱대며 팔을 내려놨다.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녀석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아키가 걸음을 뗐다. 기절한 덴지를 데리고 두 사람은 주차해둔 차로 향했다.
“이해가 안 간다. 죽은 건 죽은 건데 왜 그것조차 못 먹게 하는 거냐.”
“그야 자기 가족이나 친구의 시체가 악마에게 먹히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미 죽은 것인데도?”
“그래. 죽은 것이라 해도.”
“너희들은 이상하구나.”
못마땅한 듯 파워가 혀를 찼다.
조수석에 덴지를 던져놓고 보니 녀석의 셔츠가 거의 녹아있다시피 했다. 벌레의 뱃속에 들어갔을 때 위액에 닿아 녹은 모양이었다. 괴로운 표정으로 끙끙대던 녀석이 재채기를 했다. 잠결에도 추운지 몸을 떨며 양팔을 만졌다. 할 수 없이 제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아키는 덴지에게 덮어줬다. 그제야 좀 추위가 가셨는지 찡그린 표정이 펴졌다. 아키는 한숨을 내쉬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여느 때처럼 차가 막혔다.
어둠이 내린 도로 위로 다닥다닥 붙어선 차들의 붉은 후미등이 눈이 시릴 정도였다. 아키는 몰려오는 피로를 견디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집에 가서 또 저녁을 차릴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오늘은 그냥 시켜먹을까 생각하면서 백미러를 봤다. 파워는 뒷좌석을 전부 차지하고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픽 웃고 아키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있던 덴지를 보면서, 문득 이 녀석이 우리집에 온 지 얼마나 됐더라 하고 헤아려보니 어느덧 반년이었다. 벌써 그만큼이나 지났던가 하는 놀람과 고작 그것밖에 안됐어? 하는 지긋지긋함이 교차했다. 어떻게 무사히 여기까지 오긴 왔구나 하는 안도도.
“에취!”
덴지가 재채기를 했다. 아키는 히터를 켰다. 그렇게 추운 것 같지도 않은데 녀석은 자꾸만 재채기를 했다. 감기라도 걸리려고 하나 생각하면서 손을 뻗어 녀석의 이마를 짚은 순간이었다. 불현듯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몸이 약한 타이요는 자주 열이 올랐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 집에 없을 때 타이요가 아프면 동생을 돌보는 건 자연히 제 몫이 됐다. 얼굴에 발갛게 홍조가 떠올라 땀을 흘리는 타이요의 이마를 짚어보면 그것은 언제나 뜨거웠다. 툭하면 앓는 그런 동생을 귀찮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아키는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타이요 대신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났다.
“......”
이내 아키는 덴지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덴지가 감기 따위에 걸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진지하게 걱정했던 건 그래. 자신도 모르게 죽은 타이요를 생각하듯 이 녀석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덴지에게 남동생을 겹쳐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덴지는 죽은 타이요보다 몇 살이나 더 많고 그 애를 연상케 할 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타이요의 얌전한 말투나 어린애답게 응석을 부리는 행동, 그리고 형과 놀고 싶은 마음에 눈치를 보면서 말을 붙여오는 소심한 면도. 그건 전부 죽은 타이요만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남자애라서 그런 건가.”
아키는 다시금 덴지에게 손을 뻗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마다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소중한 피붙이를 향한 애정이 한낱 귀찮은 동거인에 불과한 녀석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빵-!
등 뒤에서 울려 퍼진 경적 소리에 아키는 깜짝 놀라서 앞을 봤다. 신호가 어느새 초록불로 바뀌어있었다. 나 참. 얼빠져있기는.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으며 그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
가족이 죽은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눈밭을 미친 듯이 파헤치며 습격에 휩쓸린 부모와 동생을 찾았던 기억이. 산산조각 난 집의 잔해를 맨손으로 들어 옮겼고, 그러다 날카로운 것에 긁혀 다치기도 했지만, 아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가족들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찾아낸 가족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온몸이 끔찍하리만치 총알에 관통 당한 모습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는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된 채였지만 동생 타이요는 그나마 온전했다. 그 애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총악마가 너무도 순식간에 그 애의 목숨을 앗아서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모른 채 죽은 모습이었다. 그 애가 누워있던 자리 주변으로 넓게 핏물이 번져있었다. 아키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동생의 작은 육신에서 저토록 많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는 게.
구조대는 사흘 만에 왔다. 아키는 그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동생의 시신을 안고 있었다.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부모는 그렇다 쳐도 동생은 살 수도 있었다. 총 악마의 습격이 있기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 애는 제 옆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키가 캐치볼을 하고 싶다고 말했기에. 그래서 그 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것이었기에.
타이요는 나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키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타이요를 죽인 건 그였다.
+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나서도 한동안 타이요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아키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계를 끄곤 얼굴을 움켜쥐었다. 손안에 감춘 눈이 뻑뻑하니 아팠다. 아침부터 기분이 최악이었다. 이제와 새삼 그날 일의 꿈을 다 꾸다니. 벌써 몇 년은 잊고 지냈는데.
아키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그랬다. 피곤한 채로 잠자리에 들면 꼭 잠을 설치면서 악몽을 꿨다.
마음 같아선 수면제를 먹고 도로 눕고 싶었지만 출근을 안 할 순 없었다. 그가 쉬면 덴지와 파워까지 쉬어야 했으니까. 천근같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는 덴지 방으로 갔다. [덴지. 아침이야, 일어나. 이러다 늦겠다.] 어깨를 흔들며 말을 걸자 끄으응, 앓는 소리가 났다. 이내 흐느적대며 일어난 녀석이 눈을 감은 채로 하품을 한다. [일어나기 싫어.....] 아키는 그런 덴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또다시 덴지의 모습에 겹쳐 타이요가 떠올랐다. [형아, 일어나기 싫어.] 잠투정을 해대는 어린 목소리가 들린다.
엄습하는 불쾌감. 발끝까지 차게 식어 들어가는 듯한. 아키는 그대로 덴지의 방을 나와 욕실로 갔다. 거울을 보니 창백하게 질린 채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제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 지를. 이미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을 다시 사랑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그것이 죽은 자에 대한 속죄가 될 것처럼.
그는 어느새 덴지를 타이요의 대신으로 대하고 있었다.
+
“어이 아키. 넥타이 좀.”
출근 준비를 끝내고 차에 올라탔을 때 덴지가 말했다. 손엔 구겨진 넥타이가 들려있었고 녀석은 아키가 당연히 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키는 내밀어진 넥타이와 덴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혼자서 해. 몇 번이나 가르쳐줬잖아.”
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뭐냐 갑자기. 아침마다 해줬으면서.”
“이제 안 해줄 거다.”
“왜?”
“왜가 어디 있어. 당연히 네가 스스로 해야 하는 거니까 그렇지. 파워도 넥타이 정돈 혼자서 하잖아. 너도 좀 배워.”
뒷좌석에서 파워가 으스대는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단정하게 매듭지어진 넥타이를 보이며 ‘이런 건 식은 죽 먹기지 않느냐’ 하고 약을 올린다.
“.....나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까먹었어.”
덴지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민다. 아키는 못 들은 척 차를 출발시켰다. 아무 생각 없이 응석을 받아주고 습관처럼 녀석을 돌봐준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덴지는 넥타이를 매는 사소한 일조차 그가 해주기를 기다린다.
공안으로 향하는 내내 덴지는 넥타이를 갖고 씨름을 해댔다. 종종 도와달라는 듯 아키를 쳐다보기도 했지만 아키는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덴지는 그의 동생이 아니고 그는 덴지의 형이 아니라는 걸. 아무리 이 녀석을 아끼고 사랑해봤자 그것은 속죄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아키는 일부러 그것을 계속 상기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다시 덴지에게 손을 뻗을 것만 같았다. 다정하게 대해버릴 것만 같았다.
+
아키는 하루 종일 덴지에게 거리를 뒀다. 꼭 필요한 용건이 아닌 이상에야 말을 안했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것은 거의 무시에 가까운 단절이었다. 덴지가 막 그의 집에 왔을 무렵에는, 비록 녀석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갖고 있긴 했어도, 아키는 녀석과 대화를 했다. 제대로 눈을 마주보면서 화를 냈고 버릇없음을 지적했으며 녀석이 배우지 못했던 여러 가지 것을 가르쳤다. 그런 것을 생각하자면 무관심이 미움보다 더 나쁘다고들 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아예 반응조차도 않은 채 침묵하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 시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키는 덴지에게 타이요를 겹쳐보는 그 자신이 싫었기에 그녀석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어느 순간부턴 덴지도 아키의 태도가 이상해졌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녀석은 자꾸만 아키에게 말을 걸면서 곁을 맴돌았다. 자기를 좀 봐달라는 듯이 팔을 잡아당겼고 아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듯 평소보다 더 얌전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헛된 일이었다. 아키는 딱히 덴지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으니까.
오늘도 밤늦게까지 추가 근무가 계속 됐다. 겨우 마지막 악마 놈을 퇴치한 후 돌아가는 길에 음식점에 들러 식사를 했다.
먼저 밥을 먹고 나와서 골목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그때 덴지가 나타났다.
“아키.”
“다 먹었어? 파워는?”
“아직 먹고 있는 중.”
“그럼 차에 먼저 가서 기다려. 나도 이것만 피우고 갈 테니까.”
“나한테 화난 거 있으면 그냥 혼내.”
덴지가 갑자기 말했지만 아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단순하고 참을성 부족한 놈의 성격상 슬슬 따지고 올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아키는 일부러 덴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시선을 내렸다. 덴지는 주먹을 쥐고 있었다.
“쪼잔하게 무시하지 말고 제대로 야단치라고. 그럼 나도.....나도 확실히 반성할 테니까.”
“딱히 화난 거 아닌데.”
“거짓말 하지 마. 하루 종일 말 걸어도 무시하고 눈도 안 마주치는 주제에.”
“일 때문에 바빠서 그랬겠지. 무시한 적도 없다. 기분 탓이야.”
“그럼 지금은?”
“.......”
“내가 앞에 있는 지금도 네놈은 딴 곳만 보고 있잖아.”
아키는 마지못해 덴지를 봤고 놀랐다. 덴지는 생각지 못하게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꼬리를 내린 채 입술을 삐죽이던 그 얼굴은 여태 봐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 더 타이요와 닮아있었다.
한심하게도 그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괜찮다고 달래주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그같은 충동을 따라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찰나였다.
그 애가, 타이요의 망령이 나타났다.
타이요는 덴지 옆에 서서 그날과 같은 모습으로 아키를 보고 있었다. 온몸이 총알에 꿰뚫려 피범벅인데 오직 얼굴만이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그래서 그 애가 분노하며 우는 모습이 더욱 잘 보였다. 아키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 눈도.
이제 이 사람이 나 대신인 거야?
형의 새로운 동생이야?
속이 메스꺼웠다. 누가 자신을 잡고 흔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야가 뱅뱅 돌았다. 아키는 입을 막았다. 등과 목이 순식간에 땀으로 축축해졌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비틀거리던 그를 보곤 덴지가 다가왔다. [어이, 아키. 괜찮냐?] 녀석이 아키의 팔을 잡았다. 거기서 더 견디지 못하고 아키는 몸을 구부렸다. 바닥으로 머리를 향하자마자 방금 먹었던 음식물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한바탕 구토를 한 후 아키는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쯤이면 사라졌겠지 하고 바란 보람도 없이 타이요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주저앉아 있던 그의 눈높이보다 살짝 높은 위치에서 그 애가 아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찢어진 겨울옷이 넝마처럼 보인다. 늘어뜨려진 그 애의 손끝에선 지금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생생한 붉음에 아키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은 그 애를 또다시 잃는 것처럼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웃고 있었다. 타이요는.
꼴좋다는 것처럼. 너는 그래도 싸다는 것처럼.
혼자만 살아남은 주제에 행복할 줄 알았느냐고 그렇게 아키를 비난하고 있었다.
“아키. 너 얼굴이 창백하다고. 진짜 괜찮은 거 맞는 거냐?”
“손대지마.”
“아키.”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뭐야, 갑자기.”
“......”
“대체 왜 그러는데. 내가 뭐 잘못했어? 그럼 말을 해. 이야기를 하라고.”
“......”
“아키.”
“이쪽 보지 마. 덴지.”
“......”
“제발. 부탁이니까. 역겹다고.”
진심을.....완전무결한 진심을 증명해야 한다. 죽은 동생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덴지를 상처 입히는 건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함도 없이 기꺼이 녀석을 내칠 수 있어야했다.
무엇도 너와 비교할 수 없어, 타이요. 걱정 마. 덴지는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 어떤 것도 너에 비한다면 하찮고 덧없을 뿐이지. 그렇고말고.
하지만 그럼에도 덴지의 얼굴을 봤을 땐 그랬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
아키는 나중에야 말이 심했다고 후회했지만 그것을 사과하진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 일 이후로 덴지는 더 이상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애매하게 피하고 무시하면서 천천히 정을 떼어내는 것보단 차라리 이렇게 확 미움을 받는 편이 더 나낫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잔뜩 주눅이 든 채 어떻게든 그에게 닿지 않으려 애쓰는 덴지를 보면 가슴이 아팠다. 덴지가 아키에게 다가오지 않는 건 아키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아키는 무심한 남자가 아니었다.
덴지와의 관계가 냉랭해진 이후에도 악몽은 계속됐다. 아키는 가족이 죽던 날의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끔찍하게 훼손된 부모의 얼굴을 보고 까무러쳤고 차게 식은 타이요를 안은 채 절규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밤중에 잠을 깨면 어김없이 구토가 올라왔다. 아키는 화장실로 뛰어가 속을 게우면서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끔찍한 꿈이 끝날지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벌 같았다. 죽은 가족을 두고 혼자만 살아남아 감히 행복을 맛보고 있었던 벌. 덴지를 타이요 대신으로 삼으려했던 벌.
밤에는 악몽에 시달리고 낮에는 악마에게 시달리는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본부에서 출장 지시가 떨어졌다. 후쿠오카 쪽에 지원이 필요하니 천사와 함께 일주일 정도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아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왜냐하면 전날 파워도 다른 지역으로 동원된 참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까지 타 지역으로 차출된다면 덴지는 혼자 남게 된다. 물론 체인소 악마라는 신변이 신변이니만큼 공안에서 따로 버디를 붙이겠지만 -혹은 ‘감시인’이든지- 그래도 불안했다. 그가 없어지면 뭔가 덴지에게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상부에선 급한 사안이니 당장 출발하라고 했다. 아키는 할 수 없이 덴지를 다른 데블 헌터에게 인계하고 녀석에게 출장을 가게 됐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덴지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가든 말든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아예 데리고 오지 그랬어.”
후쿠오카로 향하는 신칸센에서 천사가 말했다. 아키가 계속 덴지를 생각한다고 표정이 굳어있으니까 건넨 말인 듯했다.
아키는 천사를 한번 슥 봤다가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석도 어린애는 아닌데 혼자 잘하겠지.”
“어린애 맞던데. 같이 사는 어른한테 관심 받고 싶어서 안달 난 어린애.”
무심하게 대꾸하면서 천사가 컵에 꽂힌 빨대를 쭉 빨아들였다. 아키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덴지를 어린애라고 칭하는 이는 공안 내에서도 잘 없다. 모두가 그를 ‘체인소 악마’라고 언급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살펴줄 이유 같은 건 없어. 그 녀석과 난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
“아무 관계도 아니라면서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거야?”
“직장 선배로서 조금 챙겨준 것뿐이야.”
“너는 거짓말이 서툴구나.”
아키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 고개를 바로 했다. 그 이상 나불대지 말라며 천사를 째려봤지만 천사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뭐 최근 들어선 조금 냉정해진 것 같다만. 이제 슬슬 보모 노릇은 그만두려고 그러는 건가? 생각했다만 그것보단......피하는 느낌이었지. 일부러 매몰차게 밀어내기까지 하면서 말이야.”
“......언제부터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지 모르겠다만,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냥 이해가 안가서.”
“뭐가?”
“너희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부자연스럽게 뭔가를 억지로 사랑하거나, 아니면 뭔가를 억지로 싫어하려 하지. 대체 왜?”
“......”
“그래봤자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올 거면서.”
그래봤자 결국, 미워하지도 못할 거면서.
말문이 막혔다. 천사에게 제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설명한다고 해도 또다시 이해받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천사는 아키의 말을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댈 것이다. 그래서? 라며 그게 뭐가 문제냐고 말하겠지.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악마가 인간에 대해 뭘 알겠느냐고 아키는 냉소적으로 쏘아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도 천사가 옳다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부정해도 마음으로는 그것이 맞다고 인정했다. 그래. 확실히 부자연스럽다. 사랑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사랑하려 애쓰고.
싫어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떨쳐내기 위해 모질게 굴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넌 판단을 그르친 걸 수도 있어.”
천사가 손가락으로 아키를 가리켰다.
“공안은 악마를 증오하는 인간들만 모인 곳이지. 그리고 나나 덴지 같은 존재는, 어쨌든 간에 너희 같은 자들에게 ‘종속된 상태’이고. 가뜩이나 눈앞에 미워서 죽이고 싶은 상대가 있는데 그가 저항하지 못한다면, 저지를 일이야 뻔해. 마음껏 때리고 학대하면서 분풀이를 해대겠지.”
그러고 보면 덴지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듯했다. 파워는 차에 둔 채 둘이서만 공안에 들렀을 때의 일이었다. 아키가 서류를 제출한다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덴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나중에 찾고 보니 덴지는 평소 그를 안 좋게 생각했던 무리들에게 끌려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덴지를 거칠게 밀쳤고 뺨을 때리면서 손찌검을 했다. 심지어 너 같은 건 총악마에게 먹이로 던져줘야 한다든지, 가죽을 벗겨서 태워버려야 한다는 끔찍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 꼴을 보고 아키는 당연히 눈이 돌았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있는 대로 열이 받아서 고함을 지르자 남자들이 그제야 아키를 봤다.
[그냥 인사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소문의 체인소맨을 직접 보니 너무 반가워서요.]
[인사요?]
[네.]
[제 눈엔 다 큰 어른들이 어린애 하나 붙들고 화풀이를 하는 걸로밖엔 안 보이는데요.]
아키가 신랄하게 비꼬자 대답을 한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키는 그를 무시한 채 덴지에게 다가갔다. 벽처럼 덴지를 둘러싸고 있던 자들을 거칠게 밀쳐내고 덴지의 손을 잡고 나왔다.
[이제 악마와 친구라도 된 모양이에요 하야카와 씨.]
그대로 방을 떠나려는데 등 뒤에서 빈정대는 말이 들려왔다. 아키는 고개를 돌려 그 자를 노려봤다. [두 번은 안 넘어갑니다. 다음에도 또 이 녀석을 건드리면.] [건드리면, 어떡하시려고요?] 아직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비꼬는 꼴을 보니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도로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 아키는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숨통이 막힐 만큼 세게 틀어쥐니 그제야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미소 짓고 있던 두 눈 위로 공포가 떠올렸다.
[그땐 내가 직접 네놈의 가죽을 벗겨서 총악마에게 먹이로 던져줄 거다. 명심해.]
나중에 덴지에게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느냐고 따지자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그치만 네가 사고치지 말라고 했잖아. 본부에 올 때는 특히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아키는 기가 막혔다. 평소에는 말 좀 들어라 빌어도 안 듣는 놈이 꼭 이럴 때에만 고분고분하게 군다. 도무지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그렇다고 맞고만 있으란 뜻은 아니었다. 부당한 짓을 당하면 화도 내고 저항도 해. 그래도 괜찮아.] 그는 덴지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까 남자들에게 손찌검을 당한 탓인지 피부가 빨갰다. 딱히 크게 붓거나 멍이 들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이 끓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를 노려 놈들이 덴지를 데려갔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뭐 그런 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 그만이니까 신경 안 써. 게다가 네가 대신 화내줬으니까.] [......] [그걸로 됐다고 해야 할까.....아무튼 뭐......] 고마워, 아키. 인사를 건네는 덴지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타인에게 그런 호의를 받아본 게 난생 처음이라는 것처럼.
짧은 회상이 끝났다. 아키는 그제야 ‘판단을 잘못한 걸 수도 있다’는 천사의 말을 이해했다. 역시 덴지를 혼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출장을 거절하고, 그게 불가능했다면, 녀석을 함께 데리고 왔어야 했다.
+
원래라면 일주일이 걸렸을 출장은 나흘 만에 끝났다.
마지막 날은 잠도 포기한 채 밤새 악마를 처리한 후 아침이 되자마자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왔다. 서두르는 아키 때문에 덩달아 혹사당한 천사는 의외로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아키가 덴지 때문에 계속 안절부절 못해하니까 나름 신경을 써준 모양이었다. 아키는 그런 천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나중에 꼭 신세를 갚겠다고 생각했다.
덴지를 맡긴 동료에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공안 본부에 연락을 취해 물어보니 도쿄도 이틀 전부터 난리가 났다고 했다. 사이비 종교 집단의 교주가 신자들을 제물로 받쳐 악마 군단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수가 거의 천여 명에 달한다고 했으니 근래 있었던 악마 사냥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 때문에 전직원이 동원되어 전투를 벌이는 중이라고 했다.
아키도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싸움에 끼어들었지만 그보다는 덴지를 찾는 데에 더 집중했다. 어쩌다 덴지와 닮은 체구에 닮은 머리색을 한 주검이라도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발이 멈췄다. 덴지가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강박적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키는 데자뷰에 사로잡혔다. 아비규환이 된 현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덴지를 찾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십여 년 전 총악마에게 당한 가족들을 찾던 모습과 꼭 같았다. 스며드는 광기와 공포에 정신이 오염되는 듯했지만 아키는 애써 자신을 다잡았다. 덴지는 어딘가에 있을 거다. 분명 살아서. 그녀석은 인간이 아니니까.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니까. 그러니까 찾아내기만 하면.
“......덴지.”
사람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일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되면 그것을 왜곡시키거나 아니면 거부해버린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정보를 무리하게 받아들여서 망가지느니 차라리 외면하는 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타이요가 죽었을 때 아키는 사흘이나 걸려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죽음을 겪고 더 많은 끔찍한 일들을 봐와서, 단 몇 초면 충분했지만, 사실 그조차 지나치게 긴 도피였다.
그는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생각했다. 덴지가 죽었다고.
“......아키?”
그때 덴지가 아키를 봤다. 희뿌연 각막 밑의 붉은 두 눈이 이쪽을 향해 꿈틀거렸다. 덴지는 무릎 아래로 두 다리가 모두 잘려나간 상태였다. 그것도 깨끗하게 절단된 것이 아니라 짐승 따위에게 물어뜯긴 것 같았다. 제대로 끊어지지 못한 혈관과 살점, 뼈가 흉하게 늘어져있었다. 복부는 찢어져서 창자가 튀어나온 상태였다. 덴지는 그런 모습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틈에 누워있었다. 녀석이 켁켁 기침을 하자 벌건 핏물이 나왔다.
아키는 덴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또다시 타이요의 망령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에.
이제 지긋지긋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왜 너는 살아있는 나를 이토록 휘두르는 것인가.
[내가 제일 소중하지, 형?]
수천 번이고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죄악감에 숨이 멎도록 하는, 그 오래된 상처 같은 물음을 또다시 던지는 것인가.
그래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그는 타이요에게 증명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거라고 생각했다. 죽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설령 이곳에 없다 해도 너는 내게 첫 번째라는 사실을, 내 숨이 끊어지는 한, 아마 평생을 그럴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막 가족을 잃었을 당시에는 아키는 병적일 만큼 살아있음에 진저리를 쳤다. 자신에게 용납되는 모든 것들,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 두꺼운 이불에 둘러싸여 잠이 드는 것, 하늘을 가려주는 안전한 지붕 밑에서 비를 피하는 것, 그 모든 것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총 악마를 없애기 위해선 그는 싫어도 살아야했다. 마지못해 유예 받은 삶에서 죄악감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것은 호시탐탐 그의 목을 조를 기회를 엿봤다. 그가 조금이라도 행복을 맛보려고 하면 바로 총악마에게 습격당한 그날을 상기하게끔 했고,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려고 하면 죽은 타이요를 데려왔다. 네가 아무리 덴지에게서 타이요를 겹쳐본다고 해도.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그래도 덴지는 타이요의 대신이 될 수 없다고 그를 꾸짖었다.
알고 있다. 죽은 자에게 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은 그저 내 미련이다.
떠난 사람을 떠난 대로 놔주지 못한 채 붙들고 있는, 나의 어리석음이다.
아키는 타이요를 넘어 덴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대로 덴지의 얼굴을 보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반투명한 몸으로 서 있던 타이요를 통과하던 순간 그 애가 형 하고 그를 불렀다. 아키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타이요는 계속 그를 따라왔다. 형. 어디 가, 형.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날카로워졌다. 그가 몇 번이고 모른 척 지나쳐도 그 애는 몇 번이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소중하다고 했잖아. 나뿐이라고. 저런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그저 머물러있기만 했던 유령이 이제는 생귀처럼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르러선 타이요는 눈물을 쏟았다. [거짓말쟁이.] 슬프게 흐느끼는 소리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지만 시선을 마주치는 일은 끝까지 없었다. 마주쳤다간 또 홀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저건 타이요가 아니다. 그저 죽은 동생에 대한 그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망령일 뿐. 아키는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매달려 산 사람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싫어하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괜찮아, 덴지? 내 얼굴 알아보겠어?”
그는 벽에 기대어 있던 덴지를 품에 받쳐 안았다. 덴지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잠이 든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 안도한 표정이 몹시 강렬하게 남았다. 아키는 덴지의 절단된 두 다리를 지혈한 후 녀석을 안고 일어섰다. 그곳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타이요가 그를 불렀다. [형. 가지마.] 그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가지마.] 구멍이 뚫린 것처럼 새까만 두 눈이 그를 본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그 애가 진짜인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 따위가 아니라.
“......”
단지 그뿐이었다.
아키는 망설임 없이 그곳을 돌아 나왔다.
+
덴지는 수혈팩을 먹고 금방 회복했다. 사실 혈액만 제때 공급이 되었다면 그렇게까지 다쳐서 방치될 이유도 없었지만, 천사의 염려대로였다. 아키가 덴지를 맡기고 간 동료도, 그리고 다른 데블 헌터들도. 그들은 덴지를 싸우는 괴물 취급하면서 심하게 부려먹었다고 했다. 아침부터 자정까지 쉼 없이 일을 시켰고,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아키는 그 일을 마키마에게 바로 보고했고 관련자들이 모조리 징계 받도록 했다.
아키네는 오랜만에 휴가를 얻었다. 거의 두 달을 가까이 주말도 없이 일한 보상이었다.
모처럼 얻은 휴일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아키는 덴지와 파워를 데리고 바다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모래사장에 도착하자마자 파워와 덴지는 신이 나서 운동화를 벗었다. 아키는 미리 발만 담그고 놀라고 주의를 줬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긴 했지만 날씨가 쌀쌀해서 걱정이 됐다. 감기에 걸릴까봐. 아키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이 부자연스럽단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눈에 비치는 둘은 그저 평범한 십대에 불과했다.
첨벙 첨벙 물장구를 치며 뛰놀던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와 화음처럼 어우러진다. 아키는 모래사장에 앉아 그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덴지를 생각했다. 덴지와 타이요, 그리고 왜 그토록 덴지를 허락할 수 없었던 지에 대해 생각했다.
출장에서 돌아와 덴지를 만나러갔던 그날 이후 악몽은 더 이상 꾸지 않는다. 타이요의 망령을 보는 일도 사라졌고 덴지를 봐도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다. 그 모든 게 스스로의 신경과민이 불러온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아키는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죽은 자는 죽은 것이다. 산 사람에게는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수천 번 미안하다고 사죄해도 돌아오지 않고, 보고 싶다고 울어도 그것을 들어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아키. 나 피 나.”
절뚝거리면서 걸어온 덴지가 오른쪽 발을 들어보였다. 날카로운 것에 긁힌 모양인지 발바닥이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아키는 덴지에게 앉으라고 한 후 가방에서 휴대용 구급상자를 꺼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봐서 미리 챙겨온 것이었다.
상처는 다행히 깊지 않았다. 찢어진 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았다. 아키는 덴지에게 이제 바다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상처가 덧날 수도 있다고. 덴지는 순순히 아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키가 덴지를 다시 예전처럼 대하기 시작하면서 덴지도 그를 예전처럼 의지해오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든 녀석이 머뭇거리면서 제 눈치를 살폈던 일을, 해달라고 부탁해도 되는 건지, 그래도 미움 받지 않는 것인지 고민했던 일을 아키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속 좁게 덴지를 밀어냈던 게 녀석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됐는지. 체인소맨이니 뭐니 해도 덴지는 그저 덴지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 아이인 것이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보다 어리고 서툰 존재에 대해 동정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덴지를 사랑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키는 그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뭔가를 아끼게 되면 자연히 잃고 싶지 않다고 바라게 되니까. 이제 아무것도 그의 안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데도 그 자리엔 이미 덴지가 있었다. 덴지와 파워가. 새삼 그 사실에 허탈함을 느끼며 아키는 손을 뻗었다. 금발 안에 손가락을 넣어 따끈따끈한 열을 내뿜는 두피를 살살 어루만지자 덴지가 그를 봤다. 스스로의 존재가 타인에게 끼치는 힘을, 그 파괴적이기까지 한 사랑스러움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무해한 눈. 그런 눈으로 덴지가 그를 본다. 너에게 휘둘리는 나의 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요동치고 있다. [뭐야. 왜 그래.] 수줍은 모양인지 붉어진 귀를 보면서 아키는 대답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네가 거기에 있는 것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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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쓰면서....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애도의 행위는 죽은 사람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그런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제사라던가, 추억하고 기념하고 울고 그런 것들.
전에 트위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아키의 트라우마와 동생에 대한 애정, 덴지에 대한 애정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얽힌 뭔가를 써보고 싶었어요. 아키의 결벽적인 성실함에 비춰봤을 땐 아마 타이요 일로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자책하지 않았을까....오래도록 탓하고 또 탓하면서, 나한테는 행복해질 자격도 없지만 또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도 없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괴롭혔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덴지를 아끼게 됐지만서도 자꾸 타이요가 생각나니까. 타이요한테 미안하니까......그런 감정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나중에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타이요의 망령에 시달리기도 하고, 덴지 보면서 역겨운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그 모든 걸 아키는 타이요가 자기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거라 생각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결국엔 산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토록 죽은 가족들에 미련을 두고, 과거에 얽매여서, 지금의 현재에 지금의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진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아키였지만......ㅠ 결국은 어떻게 해도 덴지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는 걸, 그걸 거스를 방법은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보고 싶었습니다.
+23년도 4월에 쓴 글 포타에서 옮겨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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