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13)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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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휴가를 끝마치고 돌아오면, 쳇바퀴 같은 일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균열이 열리면 그곳으로 파견되어 괴수를 물리치고, 힘을 멋대로 휘두르려는 이들과 맞서 싸우는 일들. 협회는 여느 때처럼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 올슨과 그의 동료들은 어느새 협회 내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숨죽인 채 버틴 기간에 비하면 그들의 권세는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부상했으나, 레만의 움직임은 여전히 미미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즈음 협회 내에서 여러 소문이 퍼졌다. 협회는 더없이 큰 조직이었으며, 그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도는 것 자체는 늘 있던 일이었다. 소문의 대다수는 실체가 없어 쉬이 흩어지고 말았으나, 이번에는 상부까지 술렁였다. 일에 여유가 날 때면 으레 퍼지곤 하던 소문과는 결이 달랐다. 그 대상이 레만의 후계자로 알려진 아빌라인 탓이었다. 그는 차기 협회장으로 거론되는 만큼, 호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리트, 당신은 믿어져요?”

“그런 소문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보통 그렇긴 하지만……”

“이번엔 이상하다고?”

“조금.”

“그렇긴 하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건 고작 며칠 전이었다. 자극적인 소문은 빠르게 퍼지기 마련이라고 하나, 상부까지 말이 도는 건 다른 문제였다. 시작점조차 알 수 없도록 다발적으로 퍼진 말은, 누군가 작정하고 그를 모함하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그런 의도로 퍼트렸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이리트라면 어쩐지 뭐가 됐든 알 것 같았으므로 말을 꺼내 본 것이었으나, 그는 관심 없는 일을 대하듯 무던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리트의 예사로운 반응은 외려 제게 실마리가 되었다. 이리트는 이 사태에서 적어도 저보다는 많은 정보를 읽어냈거나,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올슨이 드디어 운신할 수 있게 된 모양이야.”

무심하게 튀어나온 말이 지닌 뜻은 단번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페는 한참 이리트의 얼굴을 응시하고, 이리트는 희미하게 웃으며 제가 내어준 차를 들이켰다. 올슨이 협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음을 가까스로 떠올리면, 어렴풋하게나마 인과관계를 알 것도 같았다. 협회 내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올슨의 세력이 할 일은 명확했다. 아빌라는 차기 협회장으로 자주 언급되곤 했으며, 또한 그부터가 레만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하나였다. 그를 끊어내는 건, 곧 레만의 수족 중 하나를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즈음 그리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올슨이 지닌 목표는 분명 올곧았으나, 그는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더러운 수를 쓸 수 있는 사람임을. 목표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을 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이리트부터가 그런 사람 중 하나였지. 그게 무작정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손을 더럽히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었다. 찰나 그리페의 머릿속에 제가 목숨을 빼앗은 이들의 얼굴이 스치고, 그는 펼쳤던 손을 꽉 말아쥐었다. 이리트가 제 생각을 알았다면 그건 경우가 다르다고 말해줬을까.

그러나 제게는 그리 다르지 않은 문제였다. 제게는 누군가를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다만 이리트가 제게 협회장이 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던 순간을 새삼 떠올리게 되어서. 어쩌면 그때 제가 권좌를 원했다면 가장 먼저 사달이 난 건, 아빌라가 아니라 올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리트는 늘 동류를 가장 경계했으므로.

“이리트, 그럼 아빌라가 인신매매를, 했다는 건……”

“진짜야. 올슨이 일부러 더 자극적인 소리를 더해두긴 했지만.”

사람이 사람을 팔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호인으로 알려진 아빌라가 엮였다면 더더욱. 어디서부터 말을 얹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리페는 잠시간 침묵하며 이리트를 응시했다. 느슨하게 기대앉은 이리트는 제 시선을 마주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니, 이리트도 모르고 한 말은 아닐 터였다. 고개를 가볍게 내저은 그리페가 이리트의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자연히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그쯤 되는 사람이 무엇을 원해서 사람을 팔았단 말인가.

“아빌라는 아마 이대로 매장될 거야.”

“그런 일을 했으니 이전과 같은 행보를 보이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이리트, 확신하는 이유가 있는 거지.”

“너도 어느 정도는 짐작했을 거 아냐. 그쯤이나 되는 인간이 별 이유도 없이, 본인 쾌락을 위한 것도 아닌 일을 저지르겠어.”

“……결국 레만이 문제라는 이야기네요.”

“응.”

지리멸렬하게 흩어진 사실은 결국 한 사람을 향했다.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과거, 제가 처음 협회에 몸을 담을 때 레만은 어땠던가. 당시에도 협회 내에서는 레만을 그리 좋게만 보지 않는 이들이 즐비했다지만, 그래도 신뢰를 갖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갓 스물이 된 제가 알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인제 와서 과거 따위가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도대체 무엇이 모자라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레만에게는 이미 커다란 권력도, 그에 뒤따르는 명예도, 심지어는 재력까지도 주어졌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한 이는 결국 저 스스로를 진창으로 내몰고 있는 셈이었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거나, 들키더라도 이미 지닌 힘으로 무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그의 손에 쥔 것이 이런 일을 벌여야 할 만큼 욕망할 만한 가치는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리페는 가만히 제 연인을 응시했다. 차를 내어준 지 한참 만에 처음 입을 대고, 미지근한 온도에 꽤 만족하는 눈치인 이리트를.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어쩌면 당신에게…… 무례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뭔데.”

“당신은 오래전부터 레만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고 있었죠.”

“그랬지.”

“만약, 레만이 당신의 기억에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를 내버려뒀을 거예요?”

그가 무엇을 묻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그리페는 제 생각을 어느 정도는 짐작했으리라. 그런데도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근간부터 완전히 달랐다. 사소한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페의 신념에 관해서는 거의 대립하는 꼴이었다. 그리페는 그 스스로에게 엄격할 뿐, 타인에게까지 잣대를 들이대지 않음을 알면서도 간혹 이리트는 그리페를 보며 도덕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페의 저 물음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궁금할 뿐, 그리페가 제 대답으로 말미암아 저를 다시 판단하지 않으리라. 그래도 입안이 마르는 것 같아서, 이리트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느리게 삼켰다.

“내게 실망하면 어떡하려고 그런 걸 물어봐.”

“당신의 행보가 나쁘다고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알아. 그래도……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절대로 옳은 행동은 아니지.”

“……”

“예전의 나였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리페, 네가…… 나를 자꾸 생각하게 만들어.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애써 떠올려 가면서, 다시, 처음부터.”

“그게 싫거나, 불편해요?”

“편하진 않지? 그래도 싫은 건 아니야. 그래, 이건…… 싫은 게 아니야. 낯선 거지.”

벌떡 일어난 그리페가 이리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리트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의아한 듯 저를 보면서도 얌전히 곁을 내주었다. 이리트는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제게는 달랐다. 사람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리트가 제게 영향을 받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끝에 가서는 이리트가 자신과 반대되는 결론을 내리더라도 괜찮았다. 자신의 판단이 이따금 이리트를 닮아가고 있음을 아는 탓이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해.”

“내 표정이 어때서, 이리트.”

“울 것처럼……”

“당신이 좋아서 그래.”

“또 실없는 소리.”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빌라는 조용히 종적을 감추었다. 아빌라는 먼 미래, 긴 형기를 마친 후에도 협회에 다시 발을 들이지는 못할 터였다. 기이할 정도로 빠른 수습과 비정상적인 침묵은 레만이 어떻게든 언론을 틀어막은 덕이었다. 레만은 꼬리쯤은 얼마든지 미끼 삼아 던져줄 요량으로 일을 준비하고 있었으리라. 이리트는 또다시 내부의 파랑으로 그친 사태에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이리트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어투로 ‘그 교활한 자식이 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다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사이 이리트는 올슨과 몇 번 더 만났고, 한 번은 자신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제가 느끼기에는 그저 눈도장을 찍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리트와 올슨이 메모리 카드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마치 당연한 일을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안에 든 정보는 분명 한 사람과 관련이 되어 있을 터였다.

들키면 어떡하냐고, 위험한 건 아니냐고 묻는 말에 이리트는 여느 때처럼 웃었다. 그 정도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 레만은 잡을 시도조차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했었나. 그리페는 다시 창날을 매만졌다. 제가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현장을 나가는 것과 이리트가 레만을 잡으려는 건 결국 비슷한 선상의 일일지도 몰랐다. 이제야 그리페는 이리트가 왜 그토록 제게 다치지 말라고 당부했는지 깨닫고, 새삼 걱정이 늘었다.

“팀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미안합니다.”

“아니, 탓하려던 건 아니고요. 왜 그렇게 집중 못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럴 일이 좀 있어요. 준비는 다 됐습니까, 하슬러?”

“네, 전원 대기 중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쉬이 하슬러의 입을 다물게 한 그리페는 출진을 선언했다. 괴수와의 전투는 특수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정형화되어 있지만, 센티넬 간의 전투는 달랐다. 본격적인 교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관련된 일 전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쪽 계통의 일을 주로 처리하던 헬리온을 비롯한 대인전 전문 팀이 존재한들, 균열이 이전보다 확연히 드물게 열리는 만큼 제 팀의 손이 노는 탓이었다.

협회의 뜻에 반목하는 단체의 대명사인 동시에 악질 집단의 대표 격이었던 팔마가 무너지며, 남은 이들은 비어 버린 왕좌를 노렸다. 팔마가 지녔던 자원 등은 거의 협회 측에서 처리했으나, 남은 것은 다시 암흑가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대체로 비슷했다. 서로를 잡아먹으며 덩치를 키우는 데에는 한계에 도달했으므로, 외부를 공격하며 누가 더 뛰어난지를 겨루는 모양새였다. 그들이 공격하는 외부란, 비단 협회만이 아니라 지닌 무력이 없는 민간인이 포함되었다. 그 부분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복잡한 마음을 짓누르려 심호흡한 그리페가 몸을 움직였다. 하슬러는 작전 차량의 문을 열어젖히고, 기다렸다는 듯 차 내부까지 세찬 빗줄기가 들이찼다. 여름의 끝자락, 내리는 비는 달아오른 세상을 식히려는 듯 거칠게 쏟아졌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친 뒤에는 더위가 한풀 꺾일 테지. 그래도 하필 오늘 같은 날 쏟아질 게 뭐란 말인가. 그리페는 당장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불만을 속으로만 뇌까렸다.

찰나 모였던 이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전투화가 철벅거리는 소리를 울릴 때마다 얕게 깔린 물이 튀어 올랐다. 각자의 위치로 향하는 이들. 그리페는 거칠 것 없이 이름을 부를 가치조차 없는 세력의 본거지로 똑바로 걸었다. 기실, 오늘 작전은 본보기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가득했다. 자잘한 조직까지 모조리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바깥을 살피던 이들일까, 빠르게 뛰쳐나온 두 사람이 제 앞을 가로막았다.

각자 총을 쥔 이들은 창을 쥔 채 우뚝 선 남자를 응시했다. 얼핏 보기에도 키가 크고, 체격이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이의 얼굴은 장비로 가려져 있었으나,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장비 위로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그들은 짧은 대치에도 마른침을 삼켰다. 현대적인 제복에 창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 시대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둑한 하늘,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이는 분명 협회 소속의 센티넬이었다. 그는 분명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찾아온 것일 터였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서, 눈만 굴려 바라본 주위는 비 내리는 풍경이 전부였다. 총기를 든 두 명을 비롯한 그들의 본거지를 앞에 두고도 그는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분명 비를 맞고 서 있다는 점은 그들과 하나 다를 바 없었으나, 그의 주변으로만 비가 피해 가는 것만 같은 착각까지 일었다.

차라리 먼저 공격해 오면 총이라도 부담 없이 쏴 갈길 수 있었을까.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는 여전히 창을 늘어트린 채 이쪽을 응시할 뿐이었다. 옆의 동료가 어떻게 좀 해 보라며 제 옆구리를 팔꿈치로 갈기면, 그는 퍼뜩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부터 제대로 조준되지 않은 총구가 불을 뿜었다. 완전히 빗나간 탄환은 길을 덮은 블록에 흔적을 남겼을 뿐이었으나, 검은 제복을 입은 이는 기다렸다는 듯 창을 들었다.

먹구름이 깔려 한낮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위가 어두웠는데도, 그가 휘두르는 창날이 이따금 번득였다. 겨우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 검은 인영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헉, 당혹스러움에 숨을 삼킨 이가 무엇이라도 막아보려는 듯 총신을 전면으로 내밀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찰나 얼굴 앞에서 불티가 튀었다. 총을 받쳐 든 팔이 그대로 부러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 전해지고, 그는 버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젖은 땅 위로 나동그라졌다.

체면을 챙기는 건 여유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임을, 그는 온몸으로 깨달아야만 했다. 한 걸음, 묵직한 발걸음이 다가올 때마다 그는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 네발로 기어 주춤주춤 물러섰다. 손바닥이 거친 바닥에 쓸려 상처가 나는 것 따위로는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는 무기를 잃은 제게 창을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총화기도 의미를 잃었다. 어렴풋이 살려만 달라고 빌었던 것 같기도 했다.

멎을 줄 모르고 내리는 비, 주저앉은 채 올곧게 선 이를 바라보자니 자꾸만 눈에 빗물이 들어가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시야 구석에는 이미 나동그라진 동료의 신발이 비쳤다. 차라리 제가 저 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왜인지 쉽사리 저를 공격하지 않았다. 손끝이 차게 식고, 이가 딱딱 소리를 내가며 부딪혔다. 이대로, 이런 식으로 무력하게 당할 수는 없었다. 손을 뻗어 제 몸뚱이와 함께 구른 총을 쥐었다. 차게 얼어 감각이 무뎌진 손, 온통 흐르는 빗물에 손이 미끄러졌으나 그는 끝내 제 총기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희망은 간절했던 만큼 쉬이 무너졌다. 눈앞에서 저를 보고 있으면서도 행동을 막지 않는 이유를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공포며 당혹감으로 사고가 마비되었다는 전제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그냥,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연원 모를 추위에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그는 거의 반으로 찌그러진 총기를 아연하게 바라보다, 끝내 품에 안았다.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묵직한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을 더 할 수 있더라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상대를 이길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등 뒤, 건물 안의 동료들이 모조리 달려 나온들 상황은 바뀌지 않으리라.

그리페는 상대의 의지가 꺾이는 순간을 쉬이 알아챘다. 처절하게 기는 몸, 지푸라기라도 잡듯 망가진 무기를 안은 이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때를. 시간을 끄는 것도 이즈음이면 충분했다. 함께하는 동료들은 이미 건물 내부로 침입했을 테고, 내부 인원의 시선도 적당할 만큼 끌었다. 싸울 의지를 잃은 이를 기절시키는 건 쉬운 일이었다. 힘을 잃고 늘어지는 몸을 입구 옆으로 치워둔 그리페는 걸음을 옮겼다.

실내로 들어서면, 그리페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물방울이 떨어졌다. 바깥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물론, 그들이 위험한 무기로 치장을 했건 말건 그리페에게 제대로 된 위협이 될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B급이나 될까 싶은 이들은 그의 앞을 막으러 나오면서도 면면에 패배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페는 등 뒤에 걸어 둔 창을 꺼내지도 않았다.

잘 단련된 몸은 이미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병기와 다름이 없었다. 공격을 막고, 흘려내며 이따금 주먹을 휘두르거나 걷어차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이들에게서는 한 명도 빠짐없이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페는 때로는 그것을 휘두르고, 때로는 다른 이들이 쓸 수 없도록 망가트렸다. 둔탁한 타격에도 피는 튀고, 무력화된 이들이 바닥을 굴렀다.

쪽수는 쉬이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페에게 덤벼든 이들은 대개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쓰러졌으나, 그 틈새에도 그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위험한 공격을 막아내다 보면, 가벼운 공격 따위는 허용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이를테면, 지금 어깨 근처를 내려친 각목 같은 것들. 그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각목을 곧바로 빼앗아 휘둘렀다.

그즈음, 내부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제가 들어온 것에 대한 경보가 이제야 울릴 리는 없고, 팀원 쪽이 발각된 모양이었다. 착용한 리시버는 이런저런 보고를 올렸다. 어느 쪽도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그리페는 쏟아지는 이들을 밀어내며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침입했다. 무엇 하나 어려운 것이 없었다. 미약한 피해는 조금씩 누적되었으나, 그 정도로는 몸을 움직이는 데에 하등 영향이 없었으므로.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오합지졸만을 앞세울 생각인 건지 의심스러워질 즈음, 앞의 떨거지들과는 달리 제법 강해 보이는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손짓하면 아직 정신이 남은 이들은 빠르게 물러섰다. 일사불란한 움직임, 상대는 최소한 간부급은 될 것 같았다. 빠지는 이들은 아마도 다른 쪽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일 테지. 그리페는 부러 손에 들었던 긴 몽둥이를 던져 도망치는 이를 가격했다.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간 둔기는 뒤통수에 명중했다. 서둘러 움직이던 몸이 쉽사리 무너지고, 그 모습을 목격한 상대가 대번에 달려들었다.

상대를 자극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으나, 이토록 빠른 반응이 올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그들 나름대로 유대감을 쌓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그리페는 의식적으로 사고의 흐름을 끊었다. 그들의 사정 따위를 생각할 상황도 아니었고, 떠올린다 한들 오히려 머뭇거리게 될 뿐이었다. 그리페는 차분하게 공격을 받아넘겼다. 이런 순간이 오면, 얼굴이 완전히 가려져 있음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감추는 데에는 능숙한 편이었으나, 간혹 기이할 정도로 사람의 표정을 잘 읽어내는 이들이 존재했던 탓이었다.

적어도 이 현장에서 자신은 자비 없는 협회의 집행자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애초에 적성에 맞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으나 하고 싶은 일만을 할 수는 없었다. 늘 그런 식이긴 했지. 그리페는 긴 한숨을 삼켰다. 몸은 분명 그리 힘들지 않건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벌써 머리 한쪽을 차지한 채였다. 저를 공격해 오는 이는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건 제 동료를 공격한 데에 대한 분노였으며, 또한 두려움의 발출이었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이건, 주의 깊게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나불거리는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창을 쓰기에는 복도가 좁았다. 내내 공격을 흘리던 그리페는 어느 순간 바닥을 구르던 단검을 차올려 손에 쥐었다. 제 공세가 통하지 않았음을 알았는지, 혹은 그저 무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상대가 먼저 한발 물러섰다. 그가 강하다 한들, 어차피 제게 비견될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여느 떨거지들처럼 가벼운 제압으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굳이 챙겨 든 단검은 눈속임용이었다. 보란 듯 위로 던졌다가 받은 그리페가 그대로 검을 내던지면,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거의 같은 순간, 가볍게 발을 딛고 상대에게로 달려들었다. 사납게 쏘아진 단검을 피하려 몸을 살짝 튼 상대의 허벅지를 군홧발로 걷어차면, 쾅 소리와 함께 몸뚱이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저항할 생각도 잊은 이는 얻어맞은 허벅지를 쥐고 바닥을 굴렀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어설픈 마무리는 후일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므로, 그리페는 허벅지를 짓밟았다.

길고 굵은 뼈는 그리페의 발아래 쉬이 부러졌다. 손과 함께 허벅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그는 밟히지 않은 손으로나마 그리페의 정강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어떻게든 발을 떼어내려는 듯. 그러나 이미 우위를 점한 이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엄습하는 고통은 멎을 줄 몰랐다. 시야가 흐린 이유는 무엇인지. 그러나 눈앞이 트였다 한들 상대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전무했다. 이렇게까지 내몰리면 차라리 묻고 싶었다. 왜 하필 우리여야만 하냐고, 저들과 비슷한 단체가 분명 여럿이 있지 않으냐고. 그러나 입을 열 틈 없이 의식이 멀어졌다. 퓨즈가 나간 것처럼.

찢어지는 비명이 일순간 뚝, 멎었다. 어떻게든 저를 밀어내려던 미약한 힘이 사라지고, 손이 툭 떨어졌다. 그리페는 그때에서야 발을 떼어냈다. 그다지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비명이 울리는 와중에도 귓가에서는 여기저기서 목표를 완료했다고 말하는 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페는 더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객관적으로 그리 약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팔마의 자리를 노릴 만큼 성장한 단체의 우두머리로는 모자랐다.

제 공격은 그들에게 있어 아주 작은 피해였다. 조직의 머릿수를 차지하는 약한 이들 대다수는 의식이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처럼 활동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머리를 잡아야 했다. 어쩌면 이미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정보부는 현장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근방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떻게든 도망을 친들, 원래의 목표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질 터였다. 상황을 이리저리 재어보며 그리페는 주변을 수색했다.

주위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앞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 정말로 모습을 감춘 걸까, 생각하는 순간 리시버에서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도망치는 우두머리를 붙잡았으니 복귀해도 좋다는 소식이었다. 그리페는 제게 밟혀 손과 허벅지가 으스러진 이의 얼굴을 잠시간 떠올렸다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디선가 나타나 앞을 막는 이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길을 막은 상대는 제 허리께에나 올까 싶은 어린애였다.

“네가 했어?”

“……”

“대답해, 협회의 개.”

고작 그런 말에 모멸감을 느낄 리가 없었다. 저를 협회의 개라 부르든, 그보다도 못한 도구로 취급하든 따지자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쪽을 노려보는 녹색 눈은 격렬하게 들끓었다. 분노와 원망이 뒤섞인 눈은 원치 않아도 익숙해진 것 중 하나였다. 그렇게 노려본들 제가 사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단체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니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리페는 뒷골목의 삶을 알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제 거취를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음을.

설득이 통할 상대는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저는 설득할 수 없었다. 맹목적인 분노는 자신을 향했으며, 그건 옳은 방향이기도 했다. 가능하면 손을 쓰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발견한 어린애를 이런 곳에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리페가 성큼 다가서면, 그 애는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리페가 한숨을 삼키고, 작은 몸뚱이를 제압했다. 억센 손아귀에 잡힌 어린애는 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으나 그리페의 힘을 떨쳐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별 어려움도 없이 상대를 제압한 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옆구리에 발작하는 어린애를 끼고 나타난 그리페에게 단숨에 시선이 모였다. 이동하는 내내 몸을 비틀고, 소리를 빽빽 질러대던 아이는 삽시간에 모이는 시선에 움츠러들었다. 제가 움츠러들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지 되레 어설프게 욕지거리를 뱉었지만,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풀에 지친 아이가 축 늘어지고서야 그리페는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변에 사람이 가득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은 어린애는 그저 씩씩거리며 주위를 이리저리 노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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