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21)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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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4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 바르게 선 이리트의 발치에 밝은 빛이 닿았다. 그가 다가오는 만큼, 밝은 빛이 이리트를 점점 더 환히 비추었다.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은 채, 오롯이 자신만을 응시하는 이는 꼭 환상 같았다. 더없이 반가운 얼굴을 앞에 두고 있자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가도,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그리페는 이내 입을 다물고 걸음을 뗐다. 이리트를, 제 연인이자 가이드인 이를 끌어안고 싶을 뿐이었다.

홀린 듯, 답지 않게 휘청거리기까지 하며 걸음을 옮기던 그리페가 문득 멈춰 섰다. 주변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멀쩡한 것 하나 없이 모조리 부서진 가구들, 아무렇게나 쓰러진 아군 사이 홀로 선 자신, 등 뒤에서 꿈틀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비숍까지. 이성이 한 박자 늦게 돌아오는 순간, 늘어트린 손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감각이 선연했다.

발에 걸리는 부서진 집기를 슬슬 밀어 걷어내고, 널브러진 이들을 가볍게 넘어 다가온 이리트가 대뜸 그리페의 뺨을 감싸 쥐었다. 내가, 내뱉으려던 말은 입술이 맞부딪히며 뭉개졌다. 타액이 뒤섞이는 진득한 입맞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 사라지는 온갖 고통. 차마 이리트를 끌어안지 못한 그리페의 손이 어정쩡하게 허공에 머물렀다. 머뭇거리는 기색을 알아챈 이리트가 그리페의 팔을 눌러 제 허리에 붙였다. 그 손에 묻은 게 끝내 터져버린 폭력의 흔적이라는 사실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어떻게…… 어떻게 왔어요, 여길. 위험한데.”

“연락받았지.”

이리트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드러누워 있는 헬리온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이곳에 온 게 이리트 하나만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이가 침음했다. 의식을 잃은 이들을 수습하느라 바쁜 이들을 보고 있자면, 저를 돌려세운 이리트가 등의 상처를 살폈다. 길게 갈라져 아직도 피가 멎지 않은 자상을. 고개를 돌려 힐끗 바라본 이리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미안해요. 그래도 이제 거의 다 끝났어.”

“이런 걸로 사과하지 마. 이게 네 잘못도 아니고.”

“……”

“잘못은 저게 했지.”

피떡이 된 채 바닥을 구르는 비숍을 응시하는 자안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비숍이 굳이 이리트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저를 자극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그것만이라기에는 그가 꺼낸 말이 지나치게 자세했다. 어쩌면 이리트가 자신보다도 먼저 비숍을 만났으리라. 그리페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의식적으로 폈다. 지금이라도 이리트의 눈을 돌려야 하는지.

“협회는 시체에서도 정보를 빼낼 수 있지. 맞아?”

제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묻는 이리트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뼈대가 무너지고 부어 엉망이 된 얼굴이었으나 이리트는 비숍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는 몰라서 제게 묻는 게 아니었다. 이미 아는 것을 되물어 보는 이유를 짐작한 그리페는 차마 답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 여러 감정으로 일렁이는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 독단이라고 보고해. 일전의 일로 눈이 뒤집어져서 저질렀다고.”

책임을 홀로 지겠다던 제 말이 헬리온에게는 이렇게 들렸을까. 완전히 같지는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이리트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작전에 동원된 센티넬이 이만큼 박살 나는 건, 협회의 체계가 잡히기도 전의 극초기를 제외하면 전례가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협회의 그 누구도 목표물을 생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걸고넘어지지는 않으리라. 저 상태가 되어가면서까지 어떻게든 상대의 정신을 건드리려 했으므로, 안전을 위해서라도 살려 둘 수 없는 존재였다.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의 질이 떨어지더라도. 그러니 비숍의 생사는 애초부터 문제가 아니었다.

“비숍은 죽이는 게 나아.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지만, 이리트.”

붙잡힌 팔에 힐끗 시선을 던진 이리트는 이제야 그리페를 똑바로 응시했다. 찌푸린 눈, 꾹 다물었으나 미약하게 일그러진 입매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듯, 아슬아슬하게 눌러 참고 있는 표정을 눈앞에 두고서는 쉬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단순한 분노와는 분명 다른 감정이었다. 차라리 화를 낼 뿐이었다면.

“당신이 단지 복수하고 싶을 뿐이라면 말리지 않을 거예요.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건,”

“알아요. 내 욕심이지. 나는… 이리트, 네가 걱정돼. 아프지 않았으면 해.”

“뭘 걱정하는지 알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다친 것부터 어떻게 해. 가만히 있을 테니까.”

그나마 여유가 있는 의료팀 중 한 명을 불러 저를 맡긴 이리트는 비숍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리트는 제가 한 말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이미 온몸이 곤죽이 되어 이따금 꿈틀거릴 뿐인 비숍을 응시하는 이리트의 표정이 낯설었다. 이리트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으나, 더없이 익숙한 표정이었다. 분노와 혐오 아래 깔린, 채 다 벗어나지 못한 기억으로 인한 두려움.

무너지기 직전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얼굴을 해 보였다. 그 자신조차 연료로 불태워 앙갚음하려는 이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벗어날 방도가 없는 기억을 가진 이들이 끝끝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부서지고 마는 모습을, 그리페는 이미 몇 번이나 목격했다. 제게 수없이 감사를 표하던 이들의 부고장을 기억했다. 심지어는 어떻게든 복수를 이루어낸 이들에게서조차 그리 좋지 않은 근황이 들려온 것이 대체 몇 번이었던가. 그들은 분명 제 손으로 두려움의 근원을 꺾었으나 죄책감마저 이겨내지는 못했다. 씻어낼 수 없는 살인의 기억은 삶을 끊임없이 부식시켰다. 그들이 특별히 선한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물론,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이리트는 목표를 이루지 못할 리 없었으며,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단단한 사람이었으므로. 게다가 이리트는 사람의 목숨을 수단으로 여기고, 그 필요성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래 들어 저와 함께하며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한순간 없는 일이 되지 않는 이상 쉬이 변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리트는 이미 비숍이 죽어야만 함을 알았다. 그가 당장 총부터 꺼내 들지 않는 건 오로지 제가 이리트를 말렸기 때문이었다. 늘 무던한 이가 이토록 분노한 와중에도 자신을 먼저 생각해서. 진실로 끝까지 반대한다면 이리트는 제 목표를 포기할 터였다. 제가 지닌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지만, 결국 비숍이 죽는다는 결괏값은 변하지 않으므로.

부상을 이리저리 살피던 이가 늘 그렇듯 잔소리를 해댔으나 그리페의 귀에 제대로 들릴 리는 없었다. 익숙한 듯 한숨을 삼킨 센티넬은 길게 갈라진 상처 위로 힘을 불어넣었다. 상처 위로 따스한 기운이 스치고, 서서히 피가 멎었다. 임시로 출혈을 막았을 뿐이니 제발 조심하라는 당부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부석처럼 선 이리트에게 다가섰다. 이리트. 이름을 부르면 느리게 제 쪽으로 돌아오는 시선은 어느새 평소처럼 안정적이어서, 그리페는 외려 긴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잠깐 사이 평정을 되찾은 이리트가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격렬한 분노를 가라앉힌 이가 허벅지에 착용한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단호한 태도는 일전의 걱정을 무색하게 할 정도여서, 그리페는 말을 잃은 채 이리트가 하는 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늘 하는 일인 양 총을 점검한 이리트는 저와 눈을 마주쳐 왔다.

“그러니까…… 도와줘, 그리페. 내가 이건 잘 못 써.”

도움을 청하는 이리트의 어투는 평이하기만 했으며, 총을 다루는 손길은 어지간한 센티넬만큼이나 능숙했다. 손안에서 한 바퀴 돌려 잡은 총은 자잘한 흠이 새겨진, 분명 몇 번이고 사용한 적 있는 물건이었다. 어색한 시늉조차 하지 않는 이리트를 두고 무어라 말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리트를 말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런 반응이 돌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탓이었다.

멍하니 보고 있자면 이리트가 비숍 쪽으로 총을 겨눈 채 고개를 까딱였다. 어서 돕지 않고 뭐하냐는 듯이. 그때까지도 할 말을 찾지 못한 그리페는 끝내 이리트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한 손으로 총을 쥔 모양새며, 조준까지도 고쳐줄 것 하나 없이 완벽했다.

“이리트, 거짓말에 성의가 없는 것 같은데요.”

“어리바리한 척해도 거짓말인 걸 알아챌 게 뻔한데, 굳이?”

“……정말 후회 안 해요?”

“안 해. 혼자 다 떠맡게 두고 싶지도 않고, 마침 원한도 있고.”

농담을 건네듯 말하는 이리트가 천천히 등을 기대 왔다. 총구는 여전히 오차 없이 비숍을 겨눈 채였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일직선으로 내뻗은 팔을 받치면, 이리트가 더 시간을 끌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가까스로 숨을 헐떡이던 비숍의 육체에 탄환이 박히는 순간, 충격으로 몸뚱이가 흔들렸다. 조준한 목표가 조금씩 꿈틀거리거나 말거나,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한 번 더.

총성이 세 번쯤 울렸을 때 비숍은 이미 절명했으나 이리트는 멈추지 않았다. 이리트의 손목을 감싸 쥐어 흔들리는 조준점을 바로잡으면, 손안에 느껴지는 체온이 평소보다 더 낮았다.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겨도 철컥거리는 빈 소리만 울리고서야 이리트는 팔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한 발도 빗나가지 않은 탄환, 미동조차 없는 비숍의 몸뚱이 아래로 핏물이 퍼졌다. 소란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텅 비어 가벼워진 권총을 손아귀에서 빼내, 이리트의 홀스터에 도로 끼워 넣을 때까지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리트.”

부러 가벼이 떠들었으나 제 본심을 그리페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리페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다정했다. 저를 염려하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면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쳤다. 설움 같기도 했고 안도 같기도 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후련함 같았다. 끝이었다. 팔마도,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숨 쉬던 악몽의 실체도, 모두.

감상에 젖는 건 잠깐으로 족했다. 적합하지 않은 장소와 상황이었고, 애초에 그런 일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구르는 탄피를 발로 슬슬 밀어낸 이리트가 그리페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내내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저를 살피다가도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따라붙었다. 성큼성큼 내뻗은 걸음이 비숍의 시체 앞에서 멈추기 전까지는. 그 와중에도 약한 힘으로 손을 잡아당기는 그리페가.

“확실히 죽었네.”

“……그 상태로 총을 그렇게 맞으면 보통은 죽어요.”

멀쩡한 상태였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일까. 센티넬이 하는 양을 생각하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지. 물론, 사실 여부를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잠깐 스친 상념을 털어낸 이리트는 걸레짝이 된 시체를 지나쳐 주위를 살폈다. 앞쪽은 가구 따위가 모조리 부서져 엉망진창이었건만, 이곳은 비숍의 핏자국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했다.

과하다 못해 일견 촌스럽게까지 보이는 의자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이리트가 그리페를 바라봤다. 그리페는 못내 신경이 쓰였는지 그새 제 몸으로 시체를 가리고 서 있었다. 이리트의 입가가 미미한 호선을 그리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이것 좀 밀어 봐. 이미 죽음을 맞이한 비숍에게는 이미 볼일이 끝난 것처럼 무게감 없는 태도였으며, 퍽 당당한 요구였다. 굳이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한 그리페가 얌전히 묵직한 의자를 잡아 밀었다.

부드럽게 밀려난 의자 다리가 피 고인 웅덩이 위를 죽 긁고 긴 흔적을 남겼다. 그 아래 바닥은 주변부와 같은 재질이었으나, 좁은 틈새로 피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피가 묻든 말든 이리트는 그 틈새를 몇 번쯤 매만져 보더니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축축하게 묻어난 액체를 대충 의자에 문질러 닦은 이리트가 이번에는 주위를 살폈다. 한구석에 모아 쌓아둔 파편을 발끝으로 뒤적였다가,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사물함 여기저기를 열어봤다.

“이리트, 뭘 찾는 거예요?”

“흡착기.”

“말하지.”

“그런 것도 가지고 다녀?”

“아니요. 어쨌든 열리기만 하면 되니까……”

단검을 거꾸로 쥔 그리페가 그 끝을 틈새에 쑤셔 넣어 꺾었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행위만으로 타일의 틈새가 쉬이 벌어졌다. 검날이 곧 부러지기라도 할 듯 불안하게 떨렸으나 그리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머지 손으로 묵직한 타일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 드러난 건 분전반의 형태를 닮은 철제 상자였다. 덩그러니 달린 손잡이를 당기자 상자는 너무나도 쉽게 내용물을 드러냈다. 이미 정보를 아는 이가 아니라면 무엇 하나 섣불리 건드릴 수 없도록 일말의 표지조차 존재하지 않는 온갖 스위치와 버튼.

“잠깐 나와 봐.”

이리트는 잠시간 내부를 살피더니, 오래 망설이지 않고 엉망으로 엉킨 전선 몇 개의 위치를 옮기고 스위치며 버튼을 조작했다. 위험한 건 아니냐고 말을 붙일 틈도 없었다. 이리트가 온갖 곳을 다 뒤져볼 때도 정보가 될 만한 건 없었다. 그런데도 이리트는 이미 정답을 아는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복잡한 회로를 훑던 이리트가 뚜껑을 닫는 순간, 등 뒤에서 평범하게만 보이던 벽이 서서히 열렸다.

패널을 닫고 일어선 이리트와 부상자를 수습하던 이들, 심지어는 얼핏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 부상자조차도 움직이는 벽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의료반은 부상자를 수습해 최대한 빠르게 탈출하십시오. 누군가는 대답했고, 누군가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눈이 마주친 이리트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저들과 함께 나갈 생각 없다 주장하듯. 비숍은 이미 죽었고, 저 너머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트는 제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이 문을 연 것처럼.

“알았어. 같이 가요.”

예상치 못한 오류가 있었는지 반쯤 열린 벽이 그대로 멈추었다. 그래도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충분한 넓이였다. 대뜸 걸음을 옮기는 이리트를 말린 그리페가 자연스레 앞장섰다.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두꺼운 철문. 그 앞에서는 몇 가지 잠금장치가 부착되어 있었으나, 철문 자체를 우그러뜨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무용한 장치였다. 팔마가 완전히 붕괴하고 내부 인원이 하나둘씩 제압당하는 지금, 요란하게 울리는 경고음은 그저 두 사람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지니지 못했다.

이미 지나온 곳에 비하면 훨씬 좁은 공간이었으나, 그 어느 곳보다 많은 기계와 전선 따위가 빼곡하게 자리했다. 벽면 한쪽을 통째로 채우다시피 한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기계와 그 한중간에 부품처럼 결박당한 사람 하나. 매달린 이에게는 수없이 많은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일부는 분명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장치로 보였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는 정체며 용도를 알 수 없었다. 미라와 다름없는 꼴을 했던 비숍보다는 월등히 상태가 좋아 보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비숍이 비교군일 때 이야기였다.

기계와 관, 구속구 사이로 보이는 살갗은 푸석푸석하게 말라 생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의식이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은 본래의 색을 대부분 잃어 하얗게 바랬다. 탁하게 물들어 초점조차 없는 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듯 때때로 묶인 사지가 미약하게나마 비틀렸다. 버석하게 말라 피딱지가 앉은 입술이 벌어져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코와 입을 덮은 호흡기에 먹혀 먹먹하게 울렸다.

끔찍한 꼴이었다. 핏물 속에 가둬져 있던 그 센티넬보다도 더. 어쩌면 앞의 그건 이 센티넬의 프로토타입일지도 몰랐다. 이런 방면으로는 아는 것이 없다 한들, 그런 제 눈에도 이곳의 시설이 더 발전된 것처럼 보였다. 분명 이는 팔마가 지닌 힘의 원천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도록 결박되어, 자신이 지닌 최소한의 권리조차 빼앗긴 채 착취당하는 사람 하나가. 비숍, 그 미치광이 센티넬이 저지른 일은 이토록 참담했다. 얹힌 듯 가슴 속이 답답했다.

어느 순간 다가와 손을 꽉 잡는 힘에, 그리페는 겨우 시선을 돌렸다. 이리트는 차분하기만 했다. 이런 광경 따위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전부터 팔마가 센티넬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일까. 저는 이만큼 참혹한 꼴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건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순간, 이리트가 손에 힘을 풀고는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자각하기도 전에 손을 단단히 붙잡으면, 이리트가 다급히 다른 손으로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크게 뜬 자안을 마주하고서야 힘이 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가 얼른 부여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잠깐 사이 붉은 자국이 남은 손.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그리페가 이번에는 적절한 힘으로 제 연인을 붙잡았다.

“가지 마, 이리트.”

“그리페.”

“위험해. 앞에서 저런 센티넬을 이미 만났는데, 일반적인 폭주와는 양상이 달랐어요.”

손에 남은 둔탁한 통증, 걱정으로 물든 새파란 눈. 그리페도 알고는 있으리라. 지금 제가 가이딩을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없음을. 그런데도 저를 말리는 건, 아마도 앞선 부상으로 그리페의 상태가 평소보다 좋지 않은 탓이리라. 만에 하나 저 센티넬이 이쪽을 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하기가 어려워서.

“어떻게 하고 싶어, 너는.”

이리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오롯이 혼자 해낸 일이 아니라 한들, 몇십 년간 이어져 온 기현상의 규칙을 비튼 것이 분명한 힘 앞에서도. 그러나 이리트의 기이할 정도로 담담한 태도보다 문제인 건 자신이었다. 재촉하지도 않는 평이한 되물음. 차마 이리트를 마주하지 못하고 못 박힌 센티넬을 바라보고 있자면, 자꾸만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바깥에는 균열이 열렸다고 했다. 비숍이 죽었다고 이 거대한 시설의 작동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온갖 기계와 장치는 여전히 멀쩡하게 작동했으며, 코어로 이용되는 센티넬은 착취당한 이능의 부작용으로 몸을 비틀었다. 기계를 멈춘다 한들, 폭주한 센티넬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결국 저 센티넬의 처리는 불가피하며,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이리트가 말한 대로 가이딩을 시도하거나, 혹은 제가 죽이거나.

이리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죽여야 했다. 비숍의 죽음으로 그의 정신을 헤집던 이능은 분명 힘을 잃었을 테지만, 장기간 폭주한 상태로 방치당한 센티넬은 어떤 방면으로든 정상이 아니라 보는 것이 합당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이딩을 통하면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도 없었다. 당장 가이딩을 시도하려는 이리트를 말린 것이 자신이었음에도.

“……모르겠어요,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여기까지 와서도.”

“그러면 지켜봐. 네가 어떤 가이드를 파트너로, 연인으로 두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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