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16)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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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뭡니까.”

[팀장님을 찾으려는데, 상부에서 허가가 떨어지질 않아서요.]

“그걸 왜 내게……”

그즈음 화면이 뚝, 꺼졌다. 무언가 말하려던 하슬러의 목소리가 덩달아 끊기고, 문을 열어주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도로 켜진 화면 속 하슬러는 이전보다 몇 배는 빠르게 말을 뱉었다.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러 가며 구구절절 내뱉은 말의 요지는 하나였다. 상부의 허가가 나지 않으니 독단적으로 그리페를 구하러 갈 생각이며, 이는 그의 팀원들이 모두 동의한 사안이라는 것. 저를 찾아온 이유는 웨이드 때문이라 했다. 조용히 그들에게 찾아온 웨이드는 이리트는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으리라, 확신에 가득 찬 태도로 말했다고.

웨이드가 제 상황을 짐작하는 것 자체는 그리 의심스럽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말을 그럴듯하게 지어내는 것 정도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물론 하슬러는 그리페의 좋은 동료였으며, 친구라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고민하는 사이 또다시 꺼진 패널만을 노려보고 있자면 다시 한번 화면이 켜졌다. 무언가 부스럭거리나 싶던 하슬러는 화면 앞에 카드처럼 보이는 물체를 내밀었다.

그림자가 져 알아보는 데 시간이 약간 걸렸으나, 그건 분명 웨이드의 신분증이었다. 제가 쉬이 믿지 않으리라는 것조차 짐작하고 제 신분증을 쥐여준 게 분명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잃었을 뿐이건만, 작은 화면 너머 상대는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꼬깃꼬깃하게 접은 종이를 펼쳐 보였다. ‘정말이야.’ 짧은 문구가 덩그러니 적힌 종이 한구석에 웨이드는 착실하게 서명까지 해 놨다. 과정이야 어떻든 하슬러를 비롯한 그리페의 팀원들이라면 더없이 반가운 실질적인 무력이었다.

이 이상 고민은 무의미했다. 인터폰 너머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면, 끝내 거절하기라도 한 줄 알았는지 멀어지는 하슬러의 등이 보였다. 분명 패널이 꺼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하슬러의 등이 이미 멀어져 있었다. 하슬러.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그는 퍼뜩 뒤돌아 이쪽으로 다가왔다. 몇 걸음 사이에 다가오는 이, 그 기세에 하마터면 면전에서 문을 닫을 뻔한 이리트는 짐짓 태연하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안 되나보다, 했어요. 실망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게, 상황이 안 좋으니까 당연히 그러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직접 오고 싶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우르르 오면 그것도 좀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아서 혼자 왔습니다.”

침묵이 어색한 건지, 제가 불편한 건지 하슬러는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보통 때라면 없는 사회성을 끌어다가 무슨 대답이라도 건넸을 테지만, 그러기에 지금의 이리트는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선 채였다. 그리페를 구출해 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인물임을 알면서도. 자각하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면, 하슬러는 끊임없이 떠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해지자 비로소 그를 바라보는 이리트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오른 채였으나, 하슬러는 이리트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자색 눈이 저를 똑바로 향하면, 하슬러는 입을 더 놀릴 수가 없었다. 그리페와는 다른 의미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제가 그리페와 함께 있는 그를 본 게 거의 전부여서 그런 지도 모르지. 그리페의 소식을 아는 것이 분명한 이리트는 그럼에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혼자 집에 있었다기에는 완벽에 가까운 옷차림, 센티넬처럼 보일 만큼 군더더기가 없는 움직임 따위가. 겉으로 보기에 이리트는 평시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제 파트너가 사라졌음에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뚫어지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이리트는 어디선가 종이를 여러 장 꺼내와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죽죽 긋는 선. 그 위로 이따금 쓰는 짧은 단어. 한 장 한 장을 가득 채우더니, 그는 테이블 위로 종이를 차례로 나열했다. 이리트는 한 번 입을 여는 법 없었으나,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지도였다. 한 장씩 그렸으나 펼쳐 보면 하나인 지도.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듯 전체를 훑은 이리트가 곧 색이 다른 펜을 들었다. 손으로 그린 지도 위에 덧대어 그려진 붉은 표식이 셋, 푸른 표식이 둘이었다.

“어디인지 압니까?”

“네, 압니다.”

“이곳 중 하나에 반드시 그리페가 있을 겁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이리트는 단언했다. 상황상 바깥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게 전부였을 텐데도 현황을 훤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이전에도 생각한 적 있었으나, 이 시점에 와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잘은 몰라도 뭔가 있기는 한 게 분명하다고. 하슬러는 한 박자 늦게 지도 위에 남은 표식의 위치를 제대로 확인했다.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위치. 언뜻 보기에는 같은 구역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보이지 않았다.

“붉게 표시한 곳의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습니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기도 할 겁니다.”

“각오한 일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리트는 지도를 그리던 검은 펜으로 표식 위에 숫자를 휘갈겼다. 다섯 개의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리트는 먼저 가면 좋은 곳까지 알려 주고 있는 셈이었다. 그즈음엔 도대체 이 모든 걸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페와 달리 이리트는 쉬이 말을 붙이기 어려웠으므로, 하슬러는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물어본다고 한들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와 제대로 말을 섞을 일도 없었겠지. 이리트는 펼친 종이를 그러모아 제게 건넸다.

“금방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래야죠. 감사합니다. 팀장님 꼭 멀쩡하게 데려올 테니, 기다리고 계십시오.”

“……그,”

내내 한 번 망설이는 법 없이 정보를 건네던 이리트가 머뭇거렸다. 미약하게 찌푸려진 눈이나 바깥으로 구르는 시선, 그건 꼭 이리트가 곤란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님을.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고 매몰차게 뒤돌아설 만큼 성격이 나쁘지 않은 하슬러는 금세 이리트가 망설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동행하고 싶으십니까?”

자각하지 못한 채로, 이리트는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 없음을 아는 탓이었다. 자신은 이들이 움직이는 데에 오히려 방해였다. 이런저런 훈련을 받은 적 있다지만 그건 그저 과거에 지나지 않고, 특별히 무력이 필요하지 않은 가이드로 지낸 지 몇 년이었다. 게다가 그리페를 납치한 이들은 그리페에 비해 약할 뿐이지, 그들 또한 센티넬일 가능성이 컸다. 제가 동행했다가는 그리페의 팀원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외려 보호받게 될 게 뻔했다. 그러면서도 미련이 남아 선뜻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제가.

“같이 가셔도 괜찮습니다.”

“방해될 겁니다.”

“아닐걸요.”

“하지만……”

“헤르데, 누구도 가이드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지 않아요.”

“……”

“팀장님이 폭주하거나…… 아무튼 상태가 안 좋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러니 같이 가시죠. 당신을 보호하는 것 정도로 발이 묶일 이들이면 팀장님 구할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정말 괜찮습니까?”

“네, 그러니 그만 망설이셔도 됩니다.”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리트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방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은 이리트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기기는 이미 챙겼으니 그 외에 필요한 건 없었다. 이런저런 물품을 챙겨간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데에만 도움이 될 테였다. 그대로 이리트는 문을 벌컥 열고, 소파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하슬러에게 손짓했다.

“가죠.”


차창 밖으로 풍경이 이지러졌다. 그리 급하지 않게 굴던 이는 내심 초조했는지,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손끝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낯선 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평범한 주택이었다. 협회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주인 모를 가정집에 도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집입니다. 모일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머쓱하게 웃은 하슬러가 앞장섰다. 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면,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얼굴들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됐어. 멀리서부터 물으며 다가오던 이는 하슬러의 뒤에 선 저를 발견하고 굳었다.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이상해 그저 서 있자면, 하슬러가 이런저런 사족을 붙여 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즈음 굳어 있던 이는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인 소란은 잠깐이었다. 이리트에게 일인용 소파를 내어주고, 저들은 소파며 바닥에 모여 앉았다. 그리 넓지 않은 거실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이들은 얼핏 보기에도 꽤 친밀해 보였다. 그리페의 인망이 좋긴 하지, 따위의 생각이 잠시간 스쳤다. 이리트는 하슬러에게 건넸던 지도를 다시금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미 한 번 한 설명이었다. 요지를 설명하는 과정은 빨랐고, 그들은 즉시 작전을 계획했다.

표식과 표식 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편이었다. 모두 한 구역에 몰려 있었고, 가장 먼 거리조차 그들이 전력을 다해 이동하는 것을 기준으로 칠팔 분이면 오갈 수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노출되지 않아야 했으며, 발각되지 않고 내부를 살피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했다. 그럼 차라리 다섯 곳을 한 번에 확인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기점으로, 그들은 각자 역할을 나누었다.

상황이 정리되는 데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사이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깊게 믿고 있는지를 읽어낸 이리트는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도 이리트의 거취는 의견이 갈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많지 않은 인원을 나누어야 하는 작전이었다. 무력이라고는 없는 개인을 보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사자가 자리에 있는 탓에 의견은 소극적으로 오갔지만, 이리트는 쉬이 그 이면에 담긴 뜻을 읽어냈다.

하지만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지닌 무력은 약소하기 그지없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는 아니었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바였으나, 상황이 이런 와중에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이리트는 아무 말 없이 애용하던 권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수십 개의 눈이 쇳덩어리를 향했다가, 곧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투에 익숙한 이들이니, 총신에 남은 흠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터였다.

“위급 시에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 당길 정도는 됩니다. 센티넬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무력이지만…… 보호받고만 있을 생각 없습니다.”

“…….”

“동행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은 압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고 싶지도 않습니다. 치기라 해도.”

“헤르데.”

그들이라고 이리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간절할지도 몰랐다.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으나, 결론은 하나로 수렴되었다. 이리트를 홀로 내버려둘 수는 없지만,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라면 오히려 데려가야만 한다고. 현장에 변수가 생겼을 때 따로 연락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마지막 문제까지 정리되면 정말로 시간을 더 끌 사안은 없었다. 제각각의 무기를 거머쥔 이들은 결연한 얼굴로 차를 나누어 탔다.

 


 

이미 잠입을 맡은 이들은 현장으로 돌입했다. 그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순간이 지독하리만치 길었다. 만에 하나,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 나갔거나 이쪽이 너무 늦어 그리페가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면. 치미는 불안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구역질이라도 할 것 같아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으면, 마찬가지로 대기하던 하슬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기실, 괜찮다는 말 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음을 두 사람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가상의 훈련도 아니고, 상대가 제 사정을 봐 가며 움직일 리도 없었다. 숨을 길게 삼키면, 차갑고 건조한 겨울의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정말로 그리페가 예상한 범위 내에 없다면, 어떻게든 정보를 끌어모아 다시금 그리페의 위치를 추적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영원 같던 기다림에도 끝은 찾아왔다. 별다른 사항이 없다는 요지의 소식이 여럿, 그러잖아도 좋지 않던 이리트의 안색이 파리해질 즈음 두 번째 붉은 표식으로 향했던 이들에게 연락이 왔다. 분명히 그리페가 여기 있다고, 얼른 지원을 와달라는 소식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움직여야 할 때였다. 본인부터 지켜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한 하슬러는 현장 근처에 차를 댔다.

“내부 상황 얼추 정리되면, 신호할 테니 그때 들어오세요.”

여전히 얼굴색이 좋지 않은 이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질려가는 낯빛이며 채 숨기지 못하고 떨리던 손끝 따위를 생각하면, 이리트를 이곳까지 데려온 게 잘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짓 담대하게 손 탄 흔적이 남은 총을 내밀어 보일 때까지만 해도 막연히 괜찮으리라고 생각했건만.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애초에 가이드가 지닌 무력에 큰 기대를 걸지도 않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팀원 하나를 붙여 놓기까지 했으니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겉보기에는 특별한 것 없는, 조금 연식이 있는 건물은 오며 가며 한 번쯤 본 적이 있었다. 여상히 지나칠 때에는 이런 일로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건만. 조용히 담을 넘어 뒤로 접근하면, 먼저 도착한 이들이 다가왔다. 그리 작지 않은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리페는 아마도 지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확인되는 전력은 이쪽 인원의 두 배가량이나, 센티넬이 아닌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제압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 추정되었다.

얼추 인원이 모였을 즈음, 그들은 더 기다리지 않고 내부로 진입했다. 가장 먼저 보초를 서던 이를 빠르게 제압하면 입이 틀어막힌 이가 온몸으로 꿈틀거렸다. 무어라 항변하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경동맥을 눌러 그를 기절시킨 이들은 빠르게 이동했다. 조용히 보초를 제압한 것이 무색하게도, 이들은 이미 외부의 습격을 예상한 듯 이미 전투를 준비한 태세였다.

시작부터 전면전을 벌이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으나, 약한 소리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투는 좋든 싫든 이골이 난 일이었다. 대치는 짧았고, 먼저 달려든 건 상대 쪽이었다. 허리 양쪽에 찬 손도끼를 빼든 하슬러가 숨을 들이켰다. 이런 상황에서는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이는 게 좋은데, 거기에 적절한 이는 이곳 어딘가에 가두어져 있었다. 입술을 짓씹은 이가 손도끼를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올린 가드. 두꺼운 옷이 쉬이 찢어지고, 새파란 날은 살갗을 뭉텅 베어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이제야 전투에 돌입했음이 실감 났다. 그리페를 되찾을 때까지는 멈출 수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몇이 되었건 쓰러트리고, 무력화해야 했다. 손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이따금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잘 벼려진 날은 피를 머금고, 페인트를 발라 마감한 바닥 위에 질척한 웅덩이가 고였다.

그들 하나하나의 무력을 따지자면, 비교하는 것이 무용할 만큼의 차이가 났다. 그러나 그 수는 무시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하나를 쓰러트리는 사이에 둘이 빈틈을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어떻게든 회피한다 한들 하나둘씩 상처가 새겨졌다. 이들은 정말로 그리페를 막아보겠답시고 이렇게 우르르 모여 있던 걸지도 모르지. 바깥의 습격을 예상했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제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를 악문 하슬러는 달려드는 상대를 쳐냈다.

내부를 모조리 정리하는 건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목이 이쪽에 쏠렸을 때 지하로 돌입해야 했다. 상대측에서도 같은 의도로 움직일 가능성이 충분하니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이들은 합류하는 대로 모조리 아래로 보내야 했다. 여유롭게 내부 상황을 공유할 시간은 없었다. 잠깐 일선에서 물러선 하슬러는 이리트에게 짧은 문장을 전송했다. 축약된 내용이라 한들 이리트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터였다.

기다림은 익숙한 일이라 하나, 불안은 시간의 흐름을 길게 늘여 놓았다. 내부의 소란은 드물게 이곳까지 전해지고, 이리트는 차마 나서지도 못한 채 식은땀으로 절은 손바닥만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진입한 이들이 잘못된 건 아닐지 걱정이 치밀 즈음, 대충 던져두었던 기기가 울렸다. 짧고 간결한 문장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더 기다리지 말고 그리페를 먼저 구출할 것. 이리트가 퍼뜩 상체를 세울 때부터 뛰쳐나갈 태세였던 이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접근해야 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화는 불필요했다. 건물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 이들은 발소리를 감추고 걸었다. 뒷문을 지키는 이가 있었으나, 단신이었으므로 동행한 센티넬이 제압하는 데에는 채 오 분이 걸리지 않았다. 멀리서 비명과 함성,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따위가 뒤섞여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제게는 그리페가 더 중요했다. 더 좋은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위쪽에 펼쳐진 난장판과는 달리 고요했다.

 


 

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서는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나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신은 명정했으며, 몸 상태 또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한 자세로 묶여 있었던 탓에 움직이면 뻐근하긴 할 테지만, 그 정도는 그리페에게는 별달리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지금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제 손목을 감은 구속구를 끊어내고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손아귀에 있을지도 모를 이리트가 걱정되어 얌전히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기세 좋게 저를 납치해 온 것 치고는 온건하게 굴었다. 몇 대쯤 얻어맞아 입안이 터진 것 정도는 문제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더 위에 결정권자를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라진 다른 모든 센티넬 또한 그랬을지, 혹은 제 경우가 특이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협회의 움직임이기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그리페는 근래 협회가 실종자를 찾는 데 그리 열정적이지 않음을 떠올렸다. 하나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건, 이리트가 같은 일을 다시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탓이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이 조금씩 더 커졌다. 천장을 통해서 전해지는 발걸음 소리는 추정컨대 수십에 이르렀다. 누군가 이곳을 작정하고 습격한 게 아니라면 일어날 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몇 시간째 저를 노려보던 이는 연락을 받고, 제 쪽으로 불안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고, 연달아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정말로 협회가 움직인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이리트는 먼저 구출되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자신을 감시하는 눈은 어떤 이유로든 사라졌다. 더 이상 숨죽인 채 버티고 있을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창조차 없는 이 공간에 폐쇄회로카메라 따위가 달려 있었다면 사람을 몇 시간에 한 번씩 바꿔 가며 붙여 두지도 않았으리라. 뒤로 돌려 묶인 손목에 힘을 주려는 순간, 바깥에서 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그걸 그렇게……! ……면 어떻……. 다급함을 감추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문을 통과한 탓에 확실치 않았으나, 분명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차라리 몸을 숨길까, 적당한 곳으로 이동하려는 차에 또다시 굉음이 울렸다. 문이 통째로 들썩였다. 그즈음 그리페는 확신했다.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는 저를 납치한 이들이 형식상으로나마 문을 잠그기 위해 해둔 일일 테니, 지금 무작스레 문을 후려갈기는 이는 적어도 그들과 한 편은 아닐 거라고. 더불어 기함한 듯 빠르게 속삭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제가 아는 이였다. 러셀하르트, 그리페는 익숙한 이름을 떠올렸다. 차라리 구속을 푸는 게 낫겠다고, 주먹을 단단히 쥔 그리페가 손목에 힘을 주는 것과 동시에 다시 한번 문을 내려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시도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바깥에서 금속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울렸다. 너덜거리는 문이 열리고 그 틈새로 창백한 빛이 비쳤다. 쇳덩이가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은 콘크리트 바닥을 긁으며 묘한 소리를 울렸다. 구속구를 힘으로 끊어내고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건, 이리트였다.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 한 손에 쥔 슬레지해머를 질질 끌며 들어서는 이. 이리트의 등 뒤로 복도의 빛이 비쳐들었다. 평소에도 창백한 이는 숫제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안색이 파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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