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

소실점 2부(17)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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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지키는 사람이 더 있으면 어떡하려고…… 팀, 팀장님!”

제 이름을 부르는 이의 목소리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뻐근한 몸도 나중 문제였다. 차마 먼저 다가서지도 못한 채 이리트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자면, 저 멀리 계단에서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렸다. 그때에야 그리페는 내내 저를 감시하던 이가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건 아마도 러셀하르트가 한 일일 테다.

여전히 영 움직이려 들지 않는 이리트는 적어도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것들이 제게 들이밀었던 사진은 처음부터 조작된 가짜였음이 분명했다.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리트가 이런 얘기를 들으면 불만을 표할까. 그러나 속내를 털어놓기에는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간 그리페는 이리트의 손에 쥐어진 슬레지해머를 빼내었다. 처음부터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던 손은 쉬이 제게 무기를 건네주었다.

“일단 빠져나가고, 나중에 얘기해요.”

“……많이 다쳤어?”

“몇 대 맞은 것뿐이에요.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알잖아, 이리트.”

“하지만.”

“이리트, 나중에.”

“……일 층에서 네 팀원이 싸우고 있어.”

“그래도 당신부터 빠져나가는 게 맞아. 적당히 거리 두고 따라붙어요. 러셀하르트, 부탁할게요.”

“네, 맡겨주세요!”

하슬러를 비롯한 이들은 충분히 버텨낼 수 있으리라. 하나 이리트는 경우가 달랐다. 제 한 몸을 지킬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말로 일반인을 상대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미 난전이 벌어졌다면 더욱. 아래쪽 상황을 눈치챈 이들은 이미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 무기는 정신이 돌아왔을 때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다. 쥐고 휘두를만한 건 이리트가 어디선가 가져온 묵직한 망치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무게감이었으나 없는 것보단 나았다.

등 뒤에서 따라붙는 걸음 소리는 멀어지지 않고 일정했다. 뻐근한 몸을 풀 새도 없이, 그리페는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계단 위에서는 이쪽의 상황을 눈치챈 제 동료가 계단을 등진 채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럭저럭 버티는 모양새였으나, 이미 여기저기 다친 게 분명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뒤를 확인하고서야 제게 자리를 내주었다. 일순간 스치는 웃음은 반가움인지, 안도감인지.

슬레지해머를 휘두르는 그리페의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묵직한 쇳덩이가 공기를 가르고, 그를 막으려는 움직임은 무엇 하나 빠짐없이 무용하게 스러졌다. 그리페의 힘을 버텨내지 못한 칼 따위가 손아귀를 벗어나 바닥을 굴렀다. 이 정도로는 이리트가 빠져나갈 만큼 안전하지 않았다. 개중에 그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도 없었다. 그들이 이리트의 안위를 걸고넘어지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테지.

달려드는 이들을 모조리 한 번의 공격으로 무력화시키는 그리페의 얼굴에 금이 가 있었다. 상대가 너무 많았다. 언제, 어디서 눈먼 공격이 이쪽으로 튈지 몰랐다. 저나 제 팀원들은 그 정도의 공격에는 설사 당하더라도 어지간해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이리트는 경우가 달랐다. 자꾸만 신경이 곤두섰다. 과도한 긴장은 오히려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 뿐인데도, 등 뒤에 따라붙은 이의 안색이 지나치게 나빴던 게 자꾸만 떠올라서.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다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그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는 건 정말로 다 죽여 버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 같았다. 차라리 흩어진 동료를 모두 모아 한 번에 빠져나가는 게 나으리라.

“전원 집합!”

낮고도 힘찬 목소리는 혼란스러운 내부에서도 선명했다. 그의 외침은 일종의 신호탄처럼 작용했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싸우던 이들이 일시에 반응했다. 들려오는 대답은 가지각색이었으나, 위치를 확인하는 데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러셀하르트라면 계단 입구에서 잠시간 버티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리페는 얼핏 보기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이들 쪽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일변했다. 이를 악물고 싸우던 협회 측 센티넬의 낯에는 희미하게나마 웃음이 스치고, 그들을 비웃던 이들은 낭패했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페가 빠져나왔다는 건, 그의 가이드가 안전한 상태임을 알았다는 뜻이었다. 스스로를 옥죄던 족쇄를 풀어 던진 센티넬을 이곳의 누구도 단신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몇이 함께 달려들더라도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을 게 뻔했다. 당장 요청을 한들, 지원이 도착하기 전에 이곳이 모두 정리될 가능성이 더 컸다. 그렇다고 넋 빼고 앉아서 그들이 빠져나가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더럽게 꼬였다. 지원을 요청한 이는 골치가 아파, 욕을 짓씹으며 다시금 제 무기를 고쳐 들었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셈이었다. 그들은 결국 이곳을 두 발로 나서게 되리라. 그러니 그들은 그리페를 구출하고자 온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피해를 주어야 했다. 그 정도는 해야만 적어도 고개도 못 들 상황은 오지 않으리라. 어차피 그리페는 이쪽 선에서 해결할 수 없으니, 노릴 상대는 이미 다친 이들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페는 말 그대로 전장을 나는 듯이 누볐다. 누구도 그의 앞을 막지 못했으며, 설령 막아섰다고 한들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 바닥을 굴렀다. 그런 일이 몇 번쯤 반복되면, 누구 하나 그의 앞에 바로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리페는 그러한 심리를 기가 막힐 만큼 잘 이용했다. 그가 걸음을 내딛는 곳은 꼭 대로라도 되는 듯 막힘이 없었다.

그리페는 여기저기 부상을 달고 있는 이들을 건져내고, 다시금 길을 막는 이들을 쓰러트렸다. 어느새 전투는 난전에서 다수 간의 대치로 바뀌었다. 발치에 쓰러진 이들이 자꾸만 걸렸다. 이리트를 비롯하여 부상을 입은 이들을 가장 뒤로 보낸 이들은 상대와 부딪히면서도 조금씩 물러섰다. 이미 기세부터 이쪽에 기울어 있었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더 이상 인력을 잃지 않는 게 최선임을 아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완전히 길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이유가 그들에게도 존재할 터였다.

하나 그게 제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아니었다. 저는 모두가 빠져나갈 때까지 버티고 서 있어야 했으므로. 좁은 후문으로 전원이 한 번에 빠져나갈 수는 없었고, 여기서 가장 강한 건 저였다. 팀원 대다수가 모였을 때에나 겨우 계단에서 빠져나온 이리트는 제 귓가에 집에서 얘기하자고 속삭이고 멀어졌다. 지금은 이미 건물 밖에서 빠져나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제법 속이 상했겠지. 이리트를 어르고 달래는 건 언제나 제 몫이었으며, 그게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리트를 위해서라도, 부상은 최소화해야만 했다. 긴장과 흥분 따위로 번들거리는 상대의 시선을 마주하는 건 익숙한 일이라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어느새 흠집이 늘어난 망치 머리에는 사람의 살점 따위도 묻어 있었다. 슬레지해머를 쥔 그리페는 짐짓 느슨한 듯 서 있으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지원은 결코 제때 도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페가 지하에서 탈출한 순간부터 그들에게 승산이 없었음을. 이전까지 쉬이 끌어들였던 다른 센티넬과는 격이 달랐다. 그가 하루 내도록 불편한 자세로 묶인 채,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음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페의 등 뒤로 다치고 지친,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는 이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드물게 총을 쏴 갈기거나, 투척 무기를 던지는 것 따위의 공격을 시도했으나 그건 모두 그리페의 선에서 정리되었다. 압도적인 힘, 그 앞에 느껴지는 벽은 도저히 제힘으로는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난전 속, 적의 피를 보며 치솟은 흥분이 가라앉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그와 대치하고 서 있는 건 일종의 명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페를 납치해 달라고 사주한 이들에게 내밀 저들의 노력.

몇몇은 참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소수의 돌발적인 움직임 따위는 충분히 예상 범위 안이라는 듯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모조리 쓰러트렸다. 그리페의 움직임은 그리 화려하지도 않았건만, 달려드는 이들은 고작 한 번의 공격도 버텨내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바닥을 구르는 이들을 다시 확인도 하지 않았다. 의식을 잃었음을 확신하는 듯. 그건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그가 휘두르는 묵직한 망치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으면 자연히 납득하게 되었다. 그래, 사람이 저런 것을 맞고도 정신을 차린다면 그건 그 자체로 이능으로 취급해야 했으리라.

앞뒤 없이 달려든 이들이 원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결과적으로 본보기가 되었다. 누가 되었든 공격을 감행한다면 바닥을 구르는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될 거라고. 그리페가 걸쳤던 장비는 이미 이쪽에서 차지했고, 그는 협회의 제복만을 걸친 채였다. 기실 맨몸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상태였으나 반반한 센티넬의 낯에 떠오른 감정은 긴장감도, 결연함도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감정은 저기 버티고 선 이에게 가져다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다. 그는 다만 단단한 무표정으로 이쪽의 움직임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리페의 뒤로 이곳을 습격한 이들은 너무나도 쉬이 빠져나갔다. 그들이 이곳에 준 피해를 생각하면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냥 보내지 않으면 그리페와 다시 맞붙게 되리라. 손해는 더더욱 커질 뿐이었다. 차라리 자존심을 조금 구기더라도 그들을 그대로 보내 주는 게 최선이었다. 그는 잇새로 욕을 짓씹어 뱉었다. 그리페의 존재는 그 자체로 재해와 같았다. 그래, 누구도 재해에 맞서 싸우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차라리 상대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리페의 사지라도 부수어놓았다면 상황이 좀 나았을까. 이제 와 가정해도 의미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만약을 상정하게 되었다.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건 말건, 어느새 건물 내부에는 그리페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기실, 바깥에 빠져나간 이들을 습격하는 것 또한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럼에도 움직일 수 없는 건,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는 재해가 그때야말로 이곳을 제대로 덮치게 될 것을 아는 탓이었다.

마지막까지도 흔들림 없이 서 있던 이는 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목례를 건네고 뒤돌아섰다. 여기까지 오면 차라리 아득해졌다. 분노했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리페의 행동은 불가해, 그 자체였다. 전투가 삶의 일부나 다름없는 센티넬이 나사가 하나쯤 빠진 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라지만, 그리페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기뻐하기엔 일렀다. 아직 등 뒤에 적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들은 처음 이곳에 올 때처럼 각자 차를 나누어 타고, 다시금 하슬러의 집으로 향했다. 지친 것도, 부상도 홀가분한 기분을 막지는 못했다. 하슬러와 러셀하르트, 이리트가 타고 왔으며, 돌아가는 길에는 그리페가 더해진 차 안의 분위기를 제외하면 그랬다.

이리트는 내도록 말이 없었다.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 이리트는 차창 밖만 바라보았다. 그리페를 찾아내는 데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가라앉아 있으니,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하슬러와 러셀하르트는 눈만 굴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리트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그들은 늘 상대를 기다리게 할 뿐이었으므로.

“……댁으로 갈까요?”

저를 비롯한 이들은 그리페를 맞이하는 것보다 제각각의 부상을 치료하는 게 우선일 터였다. 애써 침음을 삼킨 하슬러가 거울 너머로 뒷좌석을 힐끔 바라봤다. 이리트는 여전히 어디에도 흥미가 없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어서, 그리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고, 입 모양으로만 속삭이는 건 덤이었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설 때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길고 긴 침묵. 평소보다 길게만 느껴지는 길을 달려 그들은 끝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굳어 버린 분위기는 마지막까지도 풀어지는 법이 없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남긴 이들이 떠나고, 이리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즈음 제가 연락이 끊긴 지 하루가 더 지났음을 깨달은 그리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리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추우니 일단 들어가자고 말이라도 해야 할까, 싶을 즈음 이리트가 저를 붙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집에 들어선 이리트는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그리페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 켜졌던 현관 센서등이 다시 꺼져 주변이 온통 어두워질 때까지 이리트는 그리페를 놓아주지 않았다. 끌어안는 팔에 힘이 들어가 거의 옥죄는 수준이었으나, 그리페는 조용히 이리트를 마주 안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미온한 체온이 더없이 달가우면서도 걱정이 되는 탓에.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미안해요.”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느릿하게 그리페를 놓아 준 이리트는 따뜻한 색 조명 아래 그리페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그를 다시 한번 껴안고 떨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더없이 많았으나 그리페 또한 내내 제대로 쉬지 못했으리라.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그보다 급하지는 않았다. 뒤늦게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나설 때와 달리 안정감이 느껴졌다. 사람 하나의 존재감이 그토록 컸다.

“씻고…… 좀 누워 있어야겠어.”

“같이 씻을까, 이리트.”

“너도 쉬어야지.”

완곡한 거절이었다. 당신이 걱정되어 그렇다고 말한들 이리트가 제 제안을 수락할 것 같지는 않았다. 걱정을 내비치는 대신, 그리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의 욕실로 향했다. 이리트가 먼저 욕실로 향한다고 한들 먼저 나오는 건 제가 될 터였다. 너무 오래 욕실에 있는 것 같을 때 가서 들여다봐도 늦지 않으리라. 본의 아니게 빼앗긴 장비들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으나, 이제 와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므로 그리페는 하루 내도록 걸치고 있던 제복을 빠르게 벗어 내렸다.

뜨겁다시피 한 물을 맞으면, 내내 뻐근하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몰려오는 피로감, 긴 한숨을 내쉰 그리페는 문득 멈춰 섰다. 이번 일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묘하게 적극적이지 않던 적들은 물론이고, 분명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이리트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던 것까지. 팔마에 속했던 이들이 그리로 거취를 옮겼다면 또 모를 일이었으나, 팔마의 주요 인사 대다수는 협회 측에서 잡아들였다. 어중이떠중이까지 이리트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을 텐데.

그리페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패었으나, 아무리 고민한들 지금 제대로 된 답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누적된 피로며, 불쾌한 기분을 흘려보내는 기분으로 샤워를 끝마친 그리페가 가운을 대충 걸쳤다. 습기가 들어찬 욕실 문을 열어젖히면 멀리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평소보다 한참은 늦게 나왔건만, 이리트는 여전히 욕실 안인 모양이었다. 소파에 느슨하게 걸터앉아 머리칼을 문지르면 잘 마른 수건이 금세 물을 먹어 축 늘어졌다. 축축한 수건을 팔에 걸친 이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리페, 그리페.”

“아, 음…… 이리트?”

“들어가서 자.”

흐릿한 시야, 눈을 몇 번 깜박인 끝에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리트가 똑바로 보였다. 이리트가 너무 오래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따위를 걱정해 놓고 잠깐 새 잠든 모양이었다. 노곤함에 미적거리고 있자면 덜 마른 머리칼을 대충 털어내던 이리트가 팔에 걸쳐 둔 젖은 수건을 거두어갔다. 따듯한 물에 씻은 덕인지, 이리트의 안색은 그새 꽤 회복된 것 같았다. 수건을 빨래통에 던져두고 돌아온 이리트는 제게 손을 내밀었다. 저를 일으켜 주겠다는 뜻이 분명함에도, 그리페는 드물게 이리트를 붙잡아 당겼다.

당황한 듯 짧게 헛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몸이 제 위로 무너졌다. 제게 체중을 다 싣지 않으려 애쓰는 이리트를 고쳐 안자, 이리트는 이내 얌전히 몸을 내맡겼다. 물을 먹어 말랑말랑한 비늘 위로 입을 맞추면 느릿하게 뛰는 이리트의 맥박이 느껴졌다. 이리트는 어느 한 군데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비로소 느껴지는 안정감, 그리페는 이리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보고 싶었어, 이리트.”

“……나도.”

“갑자기 없어져서 미안해요.”

“네 잘못 아닌 거 알아. 아까는 네 팀원도 있고…… 아무튼, 화난 거 아니야.”

“알아요. 안색은 왜 그렇게 안 좋았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기억이 돌아왔어.”

비슷한 상황을 겪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이리트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중얼거렸다. 느슨하게 소파에 등을 대고 있던 그리페가 퍼뜩 몸을 일으킨 탓에, 이리트는 반사적으로 그리페의 옷깃을 붙잡았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여전히 단단하게 저를 받쳐 안고 있음을 알면서도.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평소보다 나른하게 떴던 눈은 어느새 졸음이 완전히 가신 채였다. 삽시간에 멱을 붙잡힌 꼴이 되고서도 그리페는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천천히 손을 놓은 이리트가 그리페의 구겨진 가운 자락을 괜히 토닥일 때까지도.

“전부?”

“아마도.”

“……그럼,”

운을 떼려는 듯 벌렸던 입술이 닫히기를 몇 번, 그리페가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의 내용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페는 제가 사라졌던 일주일, 그 당시의 일을 떠올리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던 적이 있으므로. 저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은 흔들리는 채였다. 굳어 버린 몸을 단단히 껴안은 이리트는 한숨처럼 속삭였다. 그래, 그때 일도. 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리페의 손이 제 등을 토닥였다.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에…… 많이 아파서, 네가 보고 싶었어. 너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았어.”

“……”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화가 났어. 내가 빼앗긴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깨달아서.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그래서 온갖 방법으로 정보를 끌어모아서 널 찾았어.”

“이리트,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옆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는데……”

“돌아왔잖아. 그거면 됐어.”

“하지만,”

몸을 일으켜 그리페를 마주 본 이리트는 어물거리는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부딪쳤다. 이따금 그리페는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곤 했으며, 그의 입을 막는 데에는 이보다 좋은 수단이 없었으므로. 고장이라도 난 듯 머뭇거리던 그리페가 고개를 틀면, 입술이 좀 더 진득하게 맞물렸다. 한참 만에 떨어진 입술 새에 타액이 이어졌다가 툭, 끊어졌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엉키는 시선, 눈을 아래로 깔고 그리페를 바라보던 이리트는 젖은 입술 위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평소 같으면 하자고 했을 텐데…… 지금은 안 되겠어.”

“……”

“왜 그런 표정이야, 그리페. 너도 아까 여기서 자고 있었으면서.”

“아쉬워서 그러지.”

“내일 해. ……그렇게 웃지 마. 얼굴도 엉망이면서.”

“알았어요.”

“대답만 하지. 갈 거야.”

“가지 마, 이리트. 같이 있어.”

그러더니 그리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삽시간에 안긴 채 덜렁 들린 꼴이 된 이리트는 짐짓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리페를 보다가도, 이내 입가에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한 차례 잃었던 탓일까, 혹은 붙어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눈 덕일까.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으나 어쩐지 더는 악몽에 시달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막연한 낙관임을 알고 있음에도.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페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어두운 방 안, 그리페가 버릇처럼 켜둔 협탁 위 작은 조명 빛에 의지해 이리트는 제 연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가 자고 일어나면 구태여 말하지 않았던 일까지도 전해야 할 터였다. 잘 마른 이불이 마찰하는 소리, 이리트의 손끝이 조심스레 그리페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번 사태가 레만이 벌인 일임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레만의 의도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꼬리가 잡혔으니 진실이 밝혀지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기실, 동기는 이미 명확했다. 그가 지닌 욕망이 원인일 테지. 제게 지금 필요한 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레만이 더는 빠져나갈 수 없을 덫. 생각을 곱씹던 이리트는 그리페에게서 시선을 떼고, 새카맣기만 한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불시에 겪은 사건을 기점으로 가지처럼 뻗어 나가는 온갖 생각들.

이전에는 레만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근본은 결국 맹목이었으며, 자신이 지닌 것과 본질이 같았다. 유일한 차이점이라고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차이는 전부를 바꾸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를테면 신뢰 따위가 그랬다. 모든 사태가 일단락되고 생각해 보면, 제가 한 일에는 허점이 가득했다. 하슬러가 찾아왔을 때부터는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관련된 사람이 많아질수록 배신자가 섞여 있을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런데도 자신은 그들을 덜컥 믿어 버렸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자색 눈이 도르르 굴러 여전히 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그리페를 향했다. 사람 간의 신의는 언제나 불명확하며, 언제든지 깨져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제대로 된 확인도 거치지 않고 하슬러를 따라나선 이유를, 그들의 무력이 제게 주어진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었다. 그리페의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별달리 이상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외려 괜찮은 것 같았다.

슬금슬금 몸을 움직인 이리트가 그리페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따끈한 체온을 멋대로 껴안은 채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지워내기를 반복하면 어느새 피로감이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내도록 잠을 자지 못한 건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몰려오는 수마에 저항하지 않으면, 의식이 빠르게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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