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15)
2023.05.05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사람을 기다리는 법을 모르는 시간은 덧없이 흘렀다. 협회 내의 우중충한 분위기기는 그리 오랫동안 유지되지 않았다. 잃는 것은 원치 않아도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었으며, 그들의 슬픔과는 무관하게 사건은 발생하기 마련이었으므로. 협회가 인원을 충원하고, 각 팀에 배속된 신입들이 소속감을 지니게 될 즈음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일 년의 시작, 적당히 들뜨고 느슨한 분위기 틈에도 불온한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새해를 기점으로 균열 발생률이 치솟았다. 균열의 이상 현상 발생률 또한 매한가지였다. 이제 균열 하나에서 이종의 괴수가 등장하는 건 새삼 경악할 만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정보를 아는 이들은 입을 다물었고, 아는 바가 없는 이들의 불안은 해소되는 법 없이 쌓여만 갔다.
정보를 손에 쥐었으나, 일선에 서야만 하는 그리페의 입장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그들이 침묵함으로써 무능한 이미지를 덮어쓰는 건 상관없었다. 일반인들의 인식이야 애초에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협회에 속해 있는 센티넬의 사기였지. 괴수와 싸우는 건 그들의 몫이었으나 그들 또한 결국 사람이었다. 다치면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
그리페는 여느 때처럼 도열한 채 작전 시작을 기다리는 팀원의 면면을 훑었다. 개중에는 불과 며칠 전, 더는 못 견디겠다며 제게 개인적으로 찾아온 이가 있었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끝에 그는 잔류를 결정했으나 그리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협회의 상황은 살얼음판 위와 같아서, 조금만 삐끗하더라도 발밑이 무너져 내리리라는 것을. 그러나 이 사안의 해결은 제 몫이 아니었다. 반강제로 정보를 쥐여 준 이리트가 아니었다면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저 또한 불안을 누르고 있었을 터였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은 늘 같았다. 하나, 괴수를 죽일 것. 둘, 피해를 최대한 줄일 것. 두 가지로 끝나던 원칙은 최근 하나가 더 늘어났다. 다치지 말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살아남아 돌아오라고, 저를 꼭 붙잡은 채 몇 번이나 당부하던 이리트 덕에. 파트너가 있는 가이드의 대다수는 그렇지 않은 가이드보다 빠르게 퇴직했다. 파트너가 죽거나 그에 준하는 부상을 겪었을 때 더 큰 충격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트도 그렇게 될까. 그리페는 잘 벼려진 창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상상하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전장에 나선 순간부터 센티넬은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괴수를 처리하기 위한 병기일 뿐. 적어도 그리페는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생각해 왔다. 그 때문에 협회 소속의 센티넬로 활동하는 시기 내내 몸을 아낀 적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살아남아야 했다. 이리트가 그것을 바랐으므로. 그래, 제게도 돌아갈 곳이 있다. 버릇이 된 장비 점검을 끝낸 그리페는 깊게 호흡했다. 상념을 치워야 할 때였다. 거의 동일한 위치에 열린 균열 두 개가 합쳐졌다고 했던가, 현상이 어떻건 분석하는 건 전투계 센티넬의 몫이 아니었다.
괴수와의 전투는 늘 비슷한 모양새였다. 괴수의 반수 이상은 특별한 능력 없이, 압도적인 크기와 단단함, 힘 또는 속도로 승부를 걸어왔다. 그건 인류에게 있어서 차라리 행운이었다. 상대가 지금과 같은 능력으로 전술까지 펼쳤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 터였으므로. 쩍 벌어진 틈새에서는 흉측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십 년쯤 이 바닥을 구르다 보면, 새로운 괴수를 마주하는 일이 더 드물었다.
그리페가 주춤거릴 만한 사안은 이곳에 없다. 상대할 것은 괴수뿐이고, 후방에는 이리트가 있다. 창을 휘두르는 순간마다 피육이 간단히 갈라진다. 비산하는 살점이며 핏방울이 꽃잎처럼 흩날리고, 팀원의 기합 소리와 울부짖음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때때로 구른 시선은 팀원의 위치를 확인한다. 위험에 처한 이는 없고, 상대하던 괴수를 마무리하는 건 팀원들로 충분하다.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전장에서의 그리페는 맹수나 다름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손톱 대신 창을 휘두르고,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적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괴수를 무찌르는 것만을 목표로 삼은 맹목. 그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괴수의 약점을 노리고, 이미 갈라져 피를 흘리는 상처를 몇 번이고 헤집었다. 집요한 공격은 강철 같은 뼈를 기어이 부수고 신체 말단을 끊어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수의 음성에도 고통은 섞이는가. 혹은 이능의 반동으로 이명이 생긴 탓에 그렇게 착각하게 되는 것뿐인지. 어느 쪽이든 그리페를 멈추는 데에는 불충분했다.
어느 순간부터 괴수와의 전투는 다수와 다수가 싸우는 형태가 되었다. 균열 하나에서 이종의 괴수가 나타나는 것은 물론, 그 개체 수가 이전보다 증가했으므로. 균열 나름의 균형이 존재하는지 개체 하나의 힘은 감소한 탓에 개체 하나를 쓰러트리는 것 자체는 쉬워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황까지 비슷한 양상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난전으로 접어들면 누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탓이었다. 시야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악물고 괴수를 처치하는 것뿐이었다.
마지막 괴수가 쓰러지고 쩍 벌어진 균열이 서서히 닫힐 때, 그리페는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다시금 도열한 이들은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지만, 제 발로 서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이 정도면 최상의 결과라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겨우 긴장이 풀린 순간, 이명이 귓가를 울렸다. 이능의 대가는 늘 이런 식으로 찾아왔다. 혹은 전투 중에는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자잘한 고통 따위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거나.
전투의 여파로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에 이리트의 기척이 걸렸다. 곧바로 뒤돌아선 그리페는 제 몸을 훑는 이리트의 시선을 마주했다. 가이드의 시선은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이리트가 특이한 것이거나. 분명 그리 낱낱이 살펴보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 다치기라도 한 날에는 당장 이상을 알아채고 저를 끌어다가 치유계 센티넬의 앞에 앉혀 놓았다. 눈에 띄는 부상이라면 모를까, 경미한 내상을 입었거나 장비 아래에 상처가 자리했을 때조차.
“어떻게 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잘 알아요.”
“감.”
“그것만 가지고 되나.”
“되더라. ……오늘은 안 다쳤네. 고생했어.”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가 곧 사라졌다. 오늘 자 작전이 무사히 끝났음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반쯤 굳은 피로 끈적이는 손을 등 뒤로 숨긴 채, 그리페는 뺨을 닦아내려는 이리트의 손길에 기꺼이 얼굴을 내주었다. 괴수의 혈액이 번진 손수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접어 안주머니에 넣은 이리트는 제 손을 내밀었다.
“손 이리 내.”
“피 묻었어요.”
“그렇겠지.”
“……”
“손잡고 싶어.”
제게도 문제없이 비접촉 가이딩을 할 수 있으면서. 이리트는 꿋꿋하게 손을 내밀고 저와 눈을 맞추었다. 닿지 않게 내민 손을 잡아채듯 붙잡은 이리트는 태연하게 저를 끌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말끔한 손에 피가 묻는 걸 신경 쓰는 건 저 하나뿐인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해지는 심정과는 별개로, 이명은 들린 적도 없는 것처럼 사라졌다. 언제까지고 이 정도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좋을 텐데. 누구도 죽지 않는 전투, 압도적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승리로.
“조만간에 협회가 움직일 거야, 짐작했겠지만. 억누르는 것도 한계는 있으니까.”
“……”
“너 몰래 정보부 털어온 거 아니거든. 협회 놈들 생리를 알 뿐이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리트.”
“표정부터 어떻게 해 봐.”
그렇게 티가 나나. 분명 포커페이스에는 자신 있는 편이었는데. 그리페는 괜히 제 얼굴을 더듬으려다 멈추었다. 그새 말라붙은 피가 버석하게 부스러지는 탓이었다. 전투에 임할 때면 장갑을 착용하는데도 가끔씩 이런 꼴이 되었다. 전투복이 검지 않았다면 제 꼴도 꽤 볼만했을 테지. 돌아가요. 그리페는 이미 다 들킨 손을 새삼 숨기는 대신 이리트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번 균열을 토벌하면, 비상사태가 터지지 않는 이상 다음날 하루 정도는는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요사이, 특히 최근 일주일 동안 열린 균열이 너무 많아 센티넬이고 가이드고 하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균열은 계획이나 한 듯 모조리 센터 근방에 몰려 있었다. 이런 짓거리를 할 수 있는 건 딱 한 집단뿐이었다.
긴 시간 쌓여온 균열의 규칙이 하나씩 깨지는 것이나, 이상할 정도로 한 구역에 몰린 균열의 양상을 지금까지도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센터 주변에 살던 이들은 급히 이사를 준비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관련 뉴스가 방영되었다. 말 그대로 몸이 축나고 있는 협회 소속의 센티넬과 가이드의 불만을 열거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상부도 분명 불안이며 부정적인 여론이 쌓여가고 있음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협회는 늘 굼뜬 편이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협회가 푼 정보로 수없이 많은 이들이 움직이므로, 그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늦었다. 이리트는 오늘도 천막 문간에 선 채, 센티넬과 괴수 사이의 전투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괴수에 맞서는 그리페를. 최근 나타나는 괴수의 전력이 비교적 약해졌다 한들 괴수는 괴수였다. 어지간한 현대식 화기는 통하지 않는 기이한 존재들의 공세는 협회의 전력을 조금씩이나마 깎아 먹고 있었다.
최근 이 주간 크고 작은 피해를 본 센티넬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았다. 언제나 증원을 희망하는 의료팀에 소속되어 있는 센티넬의 낯이 꺼멓게 죽어 있었다. 다치는 이들이 너무 많아 전투에 지장이 갈 정도의 큰 부상만 치료하는데도 그런 꼴이었다. 일선에 나서는 이들의 상태야 말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하다못해 무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리페조차 자잘한 상처를 매달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력했다. 협회의 일이라는 게 대개 그렇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맥이 풀리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기둥에 대충 기댄 채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현장은 늘 시끄러웠다. 뜻을 읽어낼 수 없는 울부짖음, 괴수의 거체가 움직일 때의 진동, 이능이 부딪히는 소리,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비명. 비명. 이리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찢어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리페가 아니었다. 그리페의 이름을 부르는 고함. 칼날처럼 날카로운 괴수의 촉수에 꿰뚫린 신체. 신음조차 짓씹어 삼킨 그리페가 제 몸을 관통한 괴수의 신체를 붙잡고 절단을 시도하는 순간, 괴수는 발작하듯 촉수를 휘둘렀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비산하는 핏줄기. 맥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그리페가.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제 팔을 붙잡아 당겼다.
“놔.”
“진정하십시오. 의료팀이 갈 겁니다.”
자색 눈은 여느 센티넬 못지않게 흉흉했다. 움직임을 막는 저를 죽일 듯 쏘아보는 것과는 달리, 하얗게 질린 얼굴에 서린 감정은 분명 익숙한 종류였다. 만면에 드리운 두려움을 누군들 모를까. 크고 작은 상처를 치유해야만 했던 센티넬은 누구보다도 그 표정을 잘 알았다. 붙잡은 팔, 손끝이 떨리면 주먹을 말아 쥐는 이가. 그는 문득 이 냉정하고 차갑기로 유명한 가이드가 꽤 어린 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안 죽을 겁니다. 살려놓을 거예요.”
답지 않게 확신할 수 없는 위로를 꺼낸 건, 이리트가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한 탓이었다. 이곳에서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흥분이 가신, 그러나 두려움까지 지워내지는 못한 얼굴. 악문 이와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쥔 손. ……알겠으니까, 놓으십시오. 다시금 존대하는 나지막한 음성은 가라앉은 채였다. 이리트가 무턱대고 뛰어나갈 것 같지 않다는 확신이 서고서야 그는 단단히 붙잡았던 팔을 놓았다.
제게 위로를 건넸던 센티넬은 막사 안으로 돌아갔다. 들것을 든 채 급히 달려오는 이들은 문간에 선 자신을 지나쳤다. 찰나 스친 그리페는 그 꼴을 하고서도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희미한 미소를 제게 내보였다. 그걸 보고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창백한 얼굴, 입술을 적시고 턱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너무 붉었다. 칸막이 너머로 사라진 그리페가. 구역질이 치밀었다.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이리트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피를 보는 일은 분명 익숙했다. 그런데 왜.
숨을 쉬는 일이 어려웠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리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센티넬이란 그리 쉽게 죽지 않는 존재였다. 치유계 이능을 쏟아부어 줄 이가 있다면 더더욱. 분명히 그럴 테다. 간이 칸막이 너머 그리페는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단신으로 전략 병기 수준의 무력을 지녔다 한들, 본질은 결국 인간이었다.
무너졌던 몸을 일으켜 세운 이리트는 의식적으로 심호흡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이런 식의 협업은 드물지 않게 행해지는 일이었다. 다만 그 대상이 그리페였던 적이 없을 뿐. 게다가 다른 센티넬과 달리 그리페는 가이딩마저 쉽지 않았다. 아마 그 센티넬이 제 반응을 보지 않았다면 진작 저를 불렀을 테다.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혼란스러울 와중에도 그는 다가오는 이의 기척을 금세 알아챘다. 난데없이 제게 던져진 말. 잠깐의 망설임 끝에, 이리트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대도 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니던가. 가이딩을 대체하는 약물이 있다지만, 실제 가이딩만 못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페는 간이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 고통을 인내하듯 구겨진 미간. 그새 피가 말라붙은 입술은 그 스스로가 토해냈던 피인지, 또다시 입술을 깨물어 터진 건지. 창백한 빛 아래 낱낱이 드러난 그리페의 벗은 상체는 엉망진창이었다. 겨우 피가 멎은 듯한 상처는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다시 피를 흘릴 것 같은 상태였다. 알고 있다. 이런 관통상은 치유계 이능만으로 치료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붙잡은 손이 차가웠다. 이리트는 그리페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제 체온이나마 전해지길 바랐다. 그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건 아니었는지.
“여기서는 이 이상 치료할 수 없습니다. 병원으로 이송해야 해요.”
늘 제삼자의 입장에서 흘려듣던 말은 어째서 그토록 아찔하게만 느껴졌을까. 바깥의 센티넬들은 아직 싸우고 있었다. 개중에 파트너가 없는 이들을 가이딩하는 것 또한 제 일이었으나, 그 어떤 무엇도 그리페보다 우선순위가 높을 수는 없었다. 당연한 듯 보호자를 자처한 이리트는 그리페와 함께 현장을 떠났다.
그리페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나칠 정도로 길었다. 비로소 그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즈음엔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으나 며칠 정도는 정양하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한 의사는 금세 모습을 감췄다. 이리트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약 기운에 잠들었을 이의 얼굴을 훑었다. 평소보다 파리한 기색이 비치는 뺨, 피딱지가 앉은 입술.
그가 상대했던 괴수는 물론 약한 개체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치명상을 허용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당시 위치를 고려해 보자면 팀원을 구출하기 위해 부상을 감수한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리페가 방심했거나 연이은 임무로 수행 능력이 떨어진 탓에 발생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이제 와 그리페가 방심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결국 팔마와 협회가 문제였다.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늦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벌떡 일어선 이리트는 창틀에 양손을 짚고 바깥을 내다봤다.
센티넬을 균열을 제거하기 위해 쓰는 도구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지 이미 오래였다. 센티넬을 보호하고, 균열을 대처하겠다는 목적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변질하였다. 그럼에도 협회를 대체할 수 있는 집단이 없고, 오래 쌓여온 온갖 규약이 센티넬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는 것도 사실인 탓에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리트는 짜증 서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센티넬은 부족했다. 한낱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기에는 그 가치가 여느 공산품과 비교조차 할 수 없건만.
개인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그 틈바구니에서 이리트는 정말로 팔마를 꺾어버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소모가 적은 해결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협회가 균열의 이상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거나 말거나 균열이 열리면 협회 소속 센티넬들은 전장에 나서야 했으며, 팔마는 꾸준하게 공격해 올 터였다.
그러나 팔마 토벌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은신처라 알려졌던 곳들은 협회가 숨을 고르는 사이 대다수가 처분되었으며, 그나마 남은 것조차 어중이떠중이들의 안식처로 변모했다. 그들에게는 균열이라는 수단이 존재했으므로,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협회를 공격할 수 있었다. 그들을 찾아내지 않으면 공격할 방법도 없는 이쪽과는 달리.
“이리트.”
속삭이는 목소리는 잠긴 채였다. 왜 그리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목이 메었는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이리트가 뒤돌아섰다. 뱃가죽에 구멍이 뚫려 놓고 아프지도 않은지 몸을 일으키려 들기에, 성큼성큼 다가선 이리트는 그리페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누워. 얌전히 제 손에 눌려 도로 누운 그는 어쩐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많이 놀랐어?”
“……”
“……미안해요, 이리트.”
“의사가 며칠 정도는 쉬라더라. 퇴원할 생각 하지 마.”
“지금 같은 때에 어떻게 쉬어요. 나야 이능 덕에 별문제 없는 거 알잖아요.”
“문제가 없었으면, 그리페, 네가 겨우 그런 것에 이만한 상처를 허용했겠어?”
“그건 단지 부주의,”
“부주의라고. 이게, 단순한 실수였을 뿐이라고?”
제 말꼬리를 잡아채 되물어 오는 이리트의 표정이. 깨진 평정 아래 내비치는 진득한 감정의 이름을 그리페는 알았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과거, 이리트가 지금의 자신처럼 너절해진 모습을 마주했을 때 이미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충격을 받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병원 신세를 질 만한 상처를 입은 건 이미 여러 번이었으나, 이리트의 눈앞에서 이만큼 다친 건 처음이었으므로.
제 어깨를 누르던 무게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뒤돌아 창가에 선 이리트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하나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많았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호흡이 습기를 가득 머금은 탓이었다. 이리트가 울고 있었다. 복부에 잔불처럼 남은 통증도, 이리트의 손이 남긴 감각도 모두 뒷전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신발을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가가 이리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울지 마, 이리트.”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씨근거리는 숨소리와 이따금 들썩이는 어깨가. 전투 중의 변수는 다양했다. 요즈음의 균열은 더 그랬지. 일이 몰리며 피로가 쌓였던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 부상은 결국 제 부주의의 산물이었다. 겨우 피로가 쌓인 정도로 해치우지 못할 괴수가 아니었으므로. 이리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가 받은 충격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팔마 같은 건…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설픈 균형을 유지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마침 이번에 협회도 손해를 꽤 봤으니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팔마 그 자식들이 말도 안 되는 무기를 손에 넣었더라. 지금이야 어떻게든 센티넬들이 구르면서 해결한다지만, 이미 한계가 눈에 보이잖아. 결국 팔마를 꺾는 게 최선이고, 거기에 네가 빠질 리가 없다는 게, 나를……”
선명히 드러난 두려움의 실체. 그리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고를 선택지도, 피할 방법도 없는 문제는 이리트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태도도. 이리트를 단단히 껴안았던 팔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건, 단 한 번도 이리트가 자신을 붙잡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 나는 당신에게 나를 알려준 적은 없었구나.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서 그저 당신을 알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치면 그리페는 조심스레 이리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변명처럼 들릴 테고, 어쩌면 정말로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아주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면서 외면했던 것 같기도 해요. 당신에게 이해를 강요했다는 걸 이제 알았어요. 미안해요.”
일순간 이리트는 마지막까지 저를 챙긴 후에 떠나가던 그리페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을 구명하는 것을 더 우선하던 태도도. 서운하지 않은 적 없다고 하면 거짓일 테지만, 그렇다고 싫은 적도 없었다. 그러한 점을 알고도 사랑을 결심한 건 순전히 제 선택이었으므로 그리페가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덫이나 다름없는 현 상황이 원망스러웠을 뿐이었다. 정말 그리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고,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여 서러웠다. 격한 감정의 충돌에 눈물부터 솟았던 것이었으나 이리트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어린애처럼 보일 것 같아서. 긴 한숨을 내쉰 이리트가 아무렇게나 제 눈가를 닦아냈다. 시선을 맞추려 몸을 돌리면, 그리페는 제 얼굴조차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네 목적이 어째서 구명에 있는지 궁금했던 건 맞는데…… 네 잘못이 아닌 일로 사과하지 마, 그리페.”
“하지만 이리트, 나는 나의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정말로…… 그걸로 괜찮아요?”
그리페는 정보부 출신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혹은 그런 방향으로는 조금도 생각이 닿지 못했거나. 어느 쪽이 정답이든 곤란한 건 매한가지였다.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입에 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거북했다. 뒷조사했다는 말을 대체 누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심지어 자꾸만 그리페에게 기울던 마음을 어떻게든 바로 세워 보려고, 그의 단점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행한 일이라면.
“아니, 일단… 누워, 아직 아프잖아.”
“이리트……”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면, 제가 그리페에게 단단히 미쳐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결국 제 고민은 무의미했다. 숨겨 봤자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탓이었다. 어서, 말할 거 있어. 짧은 침묵 너머 그리페는 이대로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다고 말하듯 저를 보다가, 말하지 않을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자면 다시금 침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예전에 뒷조사했어.”
“무슨……”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은 없잖아, 보통. 네 나쁜 점을 마주하면… 그 이유를 들어서라도 자꾸만 네게 향하는 마음을 끊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이제 와 생각하면 완전히 오판이었지만……”
“……”
“하여간, 네가 미안할 일 아니야.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 하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리트가 한때나마 정보부 소속이었음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되어서. 게다가 마냥 불쾌해하기에는 덧붙인 말이 지나치게 달았다. 그리페는 실없는 웃음이 새려는 입가를 괜히 문질렀다. 제게서 은근슬쩍 눈을 돌린 이리트의 손을 잡아 입술을 누르면, 부드러운 손이 제 손을 꼭 쥐어 왔다.
“키스하고 싶어요.”
“하면 되잖아.”
“그러면 그다음도 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퇴원하고 해.”
“오늘 퇴원하면 안 돼요?”
“안 돼. 네가 입원이라도 해야 간부랍시고 앉아있는 놈들이 정신을 좀 차릴 거 아냐.”
“설마 그럴까.”
“모르지, 또.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지.”
“……하지 마, 이리트.”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들이받을 생각 하고 있었잖아요.”
“이런 건 어떻게 잘 알아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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