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공전

바람꽃 공전 - 7 (完)

EP. 귀착(02)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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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2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바람꽃 공전 >

“보복이 두렵지도 않은가!”

팔이 뒤로 돌려 묶이고, 무릎이 꿇려진 채로 장교는 짐짓 준엄하게 꾸짖었다. 연극적인 어투였다. 직후에 욕지거리를 갈겼던 것도 같았으나, 주위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묻혀 그 내용을 바로 들은 이가 없었다. 혁명군 중 하나가 다가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짝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장교의 낯이 모멸감으로 물드는 모습이 어떤 저열한 희열을 가져다주었는지, 아마 그는 영원토록 알 수 없으리라.

“적을 코앞에 두고도 네들끼리 싸워 자멸해놓고, 보복 같은 소리를 잘도 지껄이네. 네 옷에 달린 별이 울겠어.”

뺨을 벌겋게 물들인 장교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분노는 달궈진 쇳덩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찬물이 한 번 끼얹어져 어느 정도 식은 셈이었다. 장교가 입을 다물자, 그를 긁어대던 이는 흥미를 잃고 자리를 떴다. 무감한 눈으로 한 걸음 떨어져 상황을 관망하던 이리트는 문득, 연인의 복부에 남은 상처를 떠올렸다.

때와 시기를 가리지 못하고 아군을 공격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페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던 둘은 심지어 빠져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의 전력이었던 탓에 지금도 억류되어 있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감정에 휩쓸려 합리성을 잃곤 하는 것 같았다. 이리트는 이내 그 자신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페를 매개로 제게 찾아든 감정은 재난과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그러나 이 자각이 그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진 않았다. 이리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잠금장치는 여전히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장치 바로 옆을 스친 총탄 자국이 선명했다. 총을 맞아 고장이라도 났다면 꽤 곤란했으리라. 그리페는 문을 몇 번 두드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힘으로 부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출입구도 뚫을 수 없어 약한 부분을 찾아 벽을 허물지 않았는가. 그마저도 건축을 맡은 쪽에서 예산을 빼먹기라도 했는지 일부 벽면에 보강재가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자멸의 길을 향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리트는 의식의 잃은 이의 손을 성의 없이 끌어와 센서에 인식시켰다. 초록색 빛이 반짝이고, 그리페가 그를 들어 카메라가 있는 곳에 얼굴을 위치시켰다. 억지로 눈꺼풀을 벌리면 보안 시스템이 해제되며 알람소리를 울렸다. 느릿하게 열리는 문 너머 자리한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내부는 이 국가의 오랜 비밀을 품고 있는 것답지 않게 단출했다.

벽면을 차지한 책장에는 서류철이 가득히 꽂혀 있었다. 근래에 쓰인 것과 얼핏 보기에도 세월의 티가 나는 파일이 함께 보관된 곳에서는 오래된 서가의 향기가 났다. 잉크와 종이의 냄새. 서류를 훑던 이리트는 곧 이질감을 느꼈다. 연도별로 정리된 서류철에 드러난 시간의 흔적이 들쭉날쭉했다. 중간에 오래된 자료를 새 종이에 옮겨 썼다고 가정하면 흐름이 맞지 않는 것이 설명되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읽힐 것을 두려워해 인쇄조차 하지 않고 수기로 작성한 자료라면, 차라리 어떤 방식으로든 남겨두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세월에 삭아 버린 자료를 새로이 써 가면서까지 복구한 연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리트의 시선은 책장의 가장 위로 향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 전쟁이 끝나고 지금의 국가 체제가 확립된 시기의 자료는 근래 옮겨 쓴 것 중 하나로 보였다. 홀린 듯 내뻗은 손끝이 무엇에 겁을 먹었는지 자각도 하지 못한 사이 떨렸다. 미지근한 온도를 지닌 손이 서류철을 뽑아 들었으나 펼치지 못했다. 이리트의 시선은 오랫동안 겉면에 머무르다가, 결국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내용을 읽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리트는 알았다. 그러나 어떤 불안감이 분명 손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난장판이 된 상황은 에르마를 비롯한 동지들이 이미 뒤처리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리트는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핑계도 댈 수 없었다. 실체를 마주하지 않으면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등 뒤에 닿는 시선은 제가 매몰되지 않도록 붙잡아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리트는 긴 망설임 끝에 한 뭉치의 서류를 펼쳤다. 필기체로 기술된 자료는 일종의 회고록 같았다. 제가 곧 죽을 것을 아는 이가 일생을 되돌아보며, 마지막에 앞서 짐을 내려놓듯 쓴 글. 처음 이 회고록을 쓴 이는 전쟁이 종식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환으로 사망한 군 정부의 첫 수장이었다.

「나의 청춘은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 긴 세월, 더없이 많은 전투를 벌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의 행동은 그 시기에만 가질 수 있었던 특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청춘은 오래전에 저물었고 죽음이 머지않은 지금, 기억을 되짚어 기록을 남겨 두려 한다.

볕이 찬연한 여름의 중간, 고난과도 다를 바 없는 전쟁의 서막이 울렸다. 외세의 침입으로 시작된 전투는 십삼 년간 이어졌다. 여러모로 고전하였으나 우리는 승리하였고, 그대로 전쟁이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부는 빼든 칼을 집어넣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칼끝이 향한 곳은, 전쟁에서 크나큰 공을 세운 이능자 부대였다.

이전까지는 그토록 힘겨운 전쟁을 벌인 적이 없었던 탓에 이능자 부대는 여타 부대와 다름없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이능으로 하여금 일반 병사와 다른 전투 방식을 사용해, 일반 부대에서는 어울릴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이질적이었으나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아직도 정식으로 불리는 이름이 없는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납득할 수 있었던 건 제 몸을 강화해 싸우는 이들뿐이었다. 그들은 일반 병사와도 문제없이 작전 수행이 가능했으므로.

그들의 능력은 현존하는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은 외세의 침입을 꺾고 승리의 깃발을 드높였다. 불가사의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끌어내었다. 본능에 새겨진 거부감은 그들을 향해 경고를 울려댔다. 단 한 번, 오로지 하루 동안 같은 전장에 섰을 뿐인 나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이 두려웠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이들이. 그들의 이능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만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다.

긴 전쟁의 끝 무렵, 본질이 바뀌었다. 외세의 공세는 이제 거의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고, 우리의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크기를 키웠다. 우리의 숙원은 긴 전쟁을 끝내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우리의 터전에서 몰아내는 쪽으로 기울었다. 십삼 년, 혹은 십사 년으로 끝났어야 할 전쟁이 내전으로 발전한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죄가 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저 외계 종족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이능을 가진 이들이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우리는 너무나도 오랜 전쟁으로 인해 집단적으로 미쳐 있었던 것 같다. 십 년이 넘게 전장을 구르는 동안, 우리는 너무나도 지쳤다.

이제 와 무어라 떠들건, 바뀌는 것이 없다는 걸 안다. 무슨 이유에서건 우리는 이능을 가진 이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덮어 버렸다. 십삼 년에 더하여진 팔 년간의 전쟁은 오롯이 이 행성 내에서만 일어난 일이었다. 이곳을 탐내던 외계 종족을 떨쳐내고, 우리의 옆에 살아 숨 쉬는 불가사의를 없애고자.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도, 원증으로 뒤끓던 그들의 눈동자가 떠오르면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군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이능을 지닌 이는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능의 발현은 저주와도 같아서, 그들이 모두 죽은 뒤에 새로이 탄생하는 세대에게도 종종 나타났다. 우리의 뒤를 이어야 할 아이들에게. 날 때부터 이능을 지닌 아이들은 눈도 채 뜨지 못하고 버려지거나, 죽음으로서 존재가 지워졌다.

이건 차라리 나은 경우였다. 이능의 발현 시기는 제각각이었다. 아직 어리나 주위의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는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이능이 발현되면,」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리던 이리트는 더 견디지 못하고 서류뭉치를 덮어 버렸다. 더러운 것에라도 닿은 듯한 기분에 내던지다시피 서류를 내려놓으면, 그리페가 제 이름을 불렀다. 지금 제 표정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부디 제 표정이 너무 일그러져 있지 않기만을 바라며,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이리트의 어깨 너머로 얼핏 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서류를 던져 버린 이리트의 눈은 온갖 감정으로 일렁였다. 서류를 펼칠 때와는 다른 이유로 떨리는 손을 감싸 쥔 그리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예상했던 사안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음을 깨달았을 이에게 제가 무슨 염치로 그를 감히 위로하거나, 이해하겠다 말하겠는가. 한참이나 저와 시선을 마주치던 이리트는, 긴 숨을 내쉬었다.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게 세 명이라고 했었지.”

“그랬죠.”

이리트가 쏴 갈긴 얼음덩어리가 한 곳, 비어있는 벽에 박혔다. 짧은 찰나,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그리페는 놓치지 않았다. 큼직하게 균열이 생긴 벽에 한 번 더 충격을 가하면, 얇은 벽이 무너지며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외부에서 보이는 것보다 좁은 내부와 유일하게 책장이 벽면 전체를 차지하지 않은 곳. 셋 중 오로지 하나만이 밖에 있었던 것까지. 이리트는 그 모든 사실을 간단히 조합하여 정답을 맞혔다. 그들이 철저하게 기척을 감추고 있었음에도.

벽이 무너지며 남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그리페는 내부를 살폈다. 그들은 한구석의 벽에 몸을 꼭 붙인 채 서 있었다. 그렇게 하면 들키지 않기라도 할 것처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벽에 달라붙은 둘을 바라보며 그리페는 여상히 물었다. 주름진 얼굴이 볼품없이 찌푸려졌다. 그들은 꼴사나운 모습으로 잘도 모멸감을 표현했다.

“감히, 감히 네가, 어떻게…! 그리페 하랄트,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그 자리에 있지도,”

“당신들은 나를 이용한 것뿐이었지. 패스파인더가 가져오는 성과로 가장 이득을 본 게 누구였습니까?”

그는 여전히 이렇다 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당장 해소할 수 없는 격정을 가라앉힌 이리트는 새삼 그리페를 바라보았다. 굳건했던 권력의 구조가 무너지고 그리페가 스스로 구속을 벗어던진 지금, 그들의 언어에는 아무런 힘도 남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내뱉는 대로 부스러지고, 도리어 그들 자신의 숨통을 죄였다. 일평생을 타인의 위에 군림하던 이, 수없이 많은 명령을 휘두르던 한 국가의 수장은 아직도 제가 지녔노라 믿는 힘을 휘두르려 애를 썼다. 그의 손은 텅 비었으며 무언가 해보려 한들 더 처참하게 무너질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이.

그리페는 웃지도 않았다. 자신은 거의 마주할 일 없는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제게 저런 얼굴을 보였던 게 언제였더라, 이리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건 실없는 생각을 곱씹었다. 의식적인 사고의 차단이었다. 지금 여기서 저들을 죽여 버린다 한들 그건 그저 제 분풀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에.

그 사이 그리페는 부서진 벽 너머로 다가가 그들을 쉽게도 제압했다. 그들의 힘은 언제나 무형의 권력이었으므로, 그 기반이 무너진 지금 그들은 그저 늙고 무능한 군인일 뿐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소리는 몇 번 이어지지도 않았다. 채 다 내지르지도 못한 비명이 끊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페는 사람 둘을 짐짝처럼 들고 돌아왔다.


 

혁명군의 가장 큰 목표가 완수된 지금, 그들이 억류해둔 정부군 측의 인사만 해도 수십이 넘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여전히 분노와 결이 같은 감정이 새겨져 있었으나, 그만큼 많은 수가 절망하거나 체념했다. 대개 혁명군의 이능을 눈앞에서 마주했던 이들이었다. 어떠한 전통처럼, 그들에게 있어 이능은 설명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불길함의 상징이었으므로.

무력을 동반한 혁명은 필연적으로 피를 요구했다. 당장 오늘 사령부의 앞마당에서 죽어 버린 이들의 수가 얼마였는지. 에르마는 스러진 목숨의 수를 가늠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회 전반의 혼란은 지론이었다. 알파 구역에 사는 이들 중 대다수는 군인이거나, 군 관계자였으니 문제는 오히려 알파 구역의 바깥에서 발생하리라. 어쩌면 더 많은 피를 봐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러한 문제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비롯한 오랜 동료들이 해결할 몫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무엇이건, 에르마는 당면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이를테면, 혼란스러운 전장의 정리가 끝나자마자 결박해둔 두 사람을 찾아온 이리트를. 그는 대체로 남이 무얼 하건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이리트를 둘러싼 주변의 상황은 그가 그렇게 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럼에도 이리트가 이곳까지 다시 찾아 왔다는 건, 그만큼 화가 깊다는 뜻이리라.

이리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는 이제 고개를 들어야 했고, 가늘고 여렸던 손은 여느 동지 못지않게 거칠어졌음을 알았다.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마음껏 아파할 수도 없었던 소년은 어느새 장성하여 혁명군의 버팀목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럼에도 에르마에게 이리트는 언제나 아픈 손가락 중 하나였다. 무거운 짐을 진 탓에 너무 이르게 철이 들어 버린 아이.

그러나 그리페와 함께 있던 이리트는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그를 기점으로 한 때 정부군의 장교였던 이를 향한 의심은 한순간 완전히 소산하여,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건 거의 전적으로 이리트의 덕분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제 신뢰야 어찌 되었든, 이때까지 이리트가 그토록 편한 상대를 두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므로.

이리트의 표정이며 시선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급함이 스민 걸음걸이를 제외하면, 행동거지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하건, 지금 이리트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에르마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길을 비켜 주었다. 차라리 분노로 길길이 날뛰기나 했으면 덜 불안했을지도 몰랐다.

“그 자식들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

“네가 이러는데 걱정이 안 되게 생겼니.”

그가 으쓱이고서는 기기를 건넸다. 그리 크지 않은 화면 안에 빼곡히 자리한 글자, 그 내용은 얼핏 훑기에도 범상치 않은 내용이었다. 그는 이미 두 사람이 갇혀 있는 곳의 문을 열고 있었다. 사령부에서 찾았어요. 그걸 읽을 권한이 있던 놈들도 생포해 뒀고. 제 시선이 닿았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이리트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어떻게 그 뒤에 숨긴 열분을 읽어내지 못하겠는가. 에르마는 한참이나 닫힌 문을 응시했다.

문을 닫자마자, 이리트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제가 건넨 건 에르마뿐만 아니라 이능자가 대다수인 혁명군 내에 반드시 알려져야 할 정보였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와도 성기게 지내는 저보다는 에르마, 그가 더 능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복잡한 심경을 아무렇게나 밀어낸 이리트는 묶인 채 방치된 이들을 살폈다. 그들이 묶여 있었던 건 길게 쳐 봐야 겨우 하루였고, 극적인 차이가 나타날 법한 기간이 아니었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 정부군 출신의 이에게 향하는 이리트의 시선이 차가웠다.

“이름.”

“……유진.”

옷깃 너머 드러난 목은 온통 시퍼런 멍 자국이 가득했고, 내키지 않는 듯 내뱉는 목소리는 엉망으로 쉬어 있었다. 목이 졸렸을 때 성대에 상처라도 난 모양이었으나, 말을 할 수 있다면 유진의 건강 상태야 어떻든 상관없다. 이리트는 그들의 시선이 제게 고정되어 있건 말건, 이리트는 실내를 가로질러 벽면의 창을 열어젖혔다. 땅거미가 지는 때였다. 기반 시설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는지 어두워짐과 동시에 가로등이 빛을 발했다.

마르셀과 유진은 약속이나 한 듯 어떻게든 몸을 뒤채고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가 뒤에 있다는 것쯤은 뻔히 알더라도 감으로 느끼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으므로. 주황빛으로 물든 볕이 늘어지는 창가에 삐딱하게 기대선 채, 이리트는 무감한 얼굴로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의 부싯돌이 마찰하는 소리, 마르셀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리트의 손에 들린 건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기름 라이터였다. 그는 한 번도 저런 종류의 라이터를 쓴 적이 없었다. 매번 쉬이 망가지고 마는 싸구려를 가지고 다니거나,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들고 다니질 않았다. 이리트에게 불을 일으키는 도구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구식인, 편의성을 첫 번째 가치로 치지 않는 예스러운 물건은 알파 구역에서나 쓸 법한 물건이었다. 이곳에 그런 걸 가졌을 법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우리가 찌른 장교, 그리페의 것.

창을 바로 옆에 두고 있음에도 연기가 실내에 퍼졌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도 이리트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가 근처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 필터만 남다시피 한 담배를 비벼 끈 이는 다시 품속에서 금속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침묵은 너무나도 쉽게 숨통을 조였다.

마르셀은 오랫동안 이리트를 지켜봐 왔다. 그는 세작으로 군부에 갔던 이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언제나 벽에 기대선 채 담배를 피워댔다. 혁명군 중에는 그런 이들이 많았다. 상사초는 많은 동지의 동반자나 매한가지였다. 그건 슬픔, 혹은 해소할 길 없는 분노였으며 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잊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날에는 저 또한 남들의 눈을 피해 울음을 토해낸 적 있건만.

아무것도 모르는 유진이 차라리 부러웠고, 잊었던 죄악감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괴로웠다. 그리페의 출신이 어떠하건, 그는 이미 행동으로써 혁명군의 일원임을 당당하게 증명해 냈다. 그의 정보가 없었다면 이토록 빠르게 군부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다. 머리가 식고,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야 사고가 다시 작동하는 것 같았다. 그 새벽, 이리트의 얼굴에 떠오른 배신감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으나, 이미 무릎이 꿇린 채 묶여 있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다.

“내게 뭘 바라는 거야!”

세 번째 장초가 막 타오를 때, 유진은 더 견디지 못하고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듣지 못했을 리 없건만, 한참 늦게 눈만 굴려 힐끗 시선을 준 이리트는 이제야 걸음을 옮겼다. 재떨이를 적당히 밀어둔 그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줄담배를 피워 대는 것 말고는 평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오히려 식은땀이 흘렀다. 숫제 사죄라도 하고 싶었으나 입이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누가 상황을 전달해줬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승리했고, 오늘부로 군부는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 됐다. 두 사람의 처벌은 법을 따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죄목이 살인미수였던가.”

“법? 이제 와서 법 같은 소릴 한다고, 너희가? 정신 차려, 무력으로 뒤엎어 놓은 게 누구인데. 그딴…… 그따위 헛소리를 어떻게 믿어.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그리페, 그 자식은 뭘 잃었는데? 내내 잘 살다가, 군부가 망할 꼴이 되니 너 같은 어린애 하나 꼬셔다가 살길 찾은 거 아니야. 내 말이 틀려?”

나른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가 샜다. 이 정도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으면 화도 나지 않음을 이리트는 이날 새로이 깨달았다. 경악한 듯 눈을 지릅뜬 마르셀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가 이토록 열등감에 젖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저를 어린애라 부르는 것에 놀랐거나.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그가 아직까지도 제 처지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러면, 법 대신 우리의 규율대로 할까. 그러면 좀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

웃음기 섞인 말, 이리트를 노려보는 유진의 눈이 형형했다. 그는 지금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법대로 하겠다는 건, 적어도 우리에게 해코지하지는 않겠단 뜻이었다. 차라리 소리라도 질러 유진이 입을 닥치게 해야 했나? 손목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제 손에 얼굴이라도 파묻었을 텐데. 슬금슬금 움직여 유진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마르셀의 눈동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제가 멍청했다. 열등감을 품었다는 건 알았으나 이 정도로 분위기 파악을 못 할 줄이라고는 생각이나 했겠는가.

유진은 단 한 번도 이리트와 같은 전장에 서 본 적이 없을 테니 어쩔 수 없던 걸지도 몰랐다. 그리페를 공격했던 날조차 그는 의식을 잃어 이리트를 마주하지 못했으므로. 분명 이리트는 혁명군 중에서도 젊다 못해 어린 편이었고, 쉽게 대하지 못할 분위기를 가졌다 한들 얼굴에서는 앳된 티가 났다. 그러나 열등감에 눈이 돌아 버린 이는 분위기를 읽어낼 정도의 이성조차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만만해 보이는 부분을 물어뜯는 것이거나.

유진을 막을 수도 없고, 이리트를 막아서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아군에게는 대체로 정도를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적에게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여태껏 이리트의 이능이나 얼굴을 본 정부군 중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사실을 유진이 알 리 없었다. 긴장한 심장이 맥동하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 마르셀은 심호흡이라도 해 보려 노력했다.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그건 너희가 들어야 할 말 아닌가.”

“그리페를 찌른 것 하나로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일 테지만…… 유진, 네 말대로 우린 피로 길을 만들고 시쳇더미를 짓밟아 가며 여기까지 왔잖아. 너 하나 그 수라장 사이에 섞어두는 게 별달리 어려운 일이라도 될 것 같아?”

“그러지 못하니 네가 이렇게 혀가 긴 건 아니고?”

그 순간 이렇다 할 기별도 없이 터져 나온 열기가 서늘한 공기를 덥혔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건만, 열기에 살갗이 달구어졌다. 허공에 뜬 불은 이질적이었다. 이리트가 원하기만 한다면 연료조차 없이 타오를 수 있는 불꽃은 그야말로 이능의 상징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마르셀은 생각을 거듭하며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광원을 응시한 탓에 시야에 잔상이 남았으나 그의 표정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숫제 비명이라도 지를 것처럼 경악에 차 있었다.

이리트는 쉬이 불꽃을 흐트러트렸다. 귀찮고 지루한 일이었다. 에르마와 그리페는 그들이 살아 있길 바랐다. 정확히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를 바란 거였지. 이제 와서, 따위의 시큰둥한 생각을 했다가도 이리트는 한 번 더 인내심을 발휘했다. 배신자를 살려 놓는 건 이때까지 가질 수 없었던 여유 중 하나였으므로.

혁명군은 처음 조직된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존속 여부조차 불명확한 조직이었다. 한 번 새어나간 정보로 인한 타격은 깊은 상흔을 남기고, 그만큼 배신에 민감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아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이들은 가차 없이 숨통을 끊어 왔다. 지금 여기서 유진을 한낱 잿더미로 만들어 놓는다 한들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두 사람은 흐르는 피의 양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어 했다. 이리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사실이었다.

유진은 화려한 이능을 본 뒤로는 넋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굳이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어떤 처분을 받게 되는지 알려줄 겸, 상태를 살피러 온 것뿐이었다. 꼭 한 대 치고야 말겠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이제 와서 그런 것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리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그 앞에 선 그리페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칫하면 문으로 얻어맞을 거리에 있으면서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의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제게는 어떤 타격도 입히지 못했으나, 그리페에게도 그러한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타격이 있건 없건 들어 봐야 하등 좋은 것 없는 말이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는지. 이리트는 그냥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에르마가 사령부로 갔어요.”

“그럴 것 같았어.”

그들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복도에서 그리페가 먼저 걸음을 멈추면, 이리트 또한 덩달아 멈춰 섰다. 때아니게 찾아든 침묵이 길었고, 확신은 일수유에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그가 유진의 말을 들었음이 틀림없다. 이리트는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 공을 들였다. 사소한 행동이 그에게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으므로.

“이리트,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간 가라앉은 채였다. 그리페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고, 그의 옆선을 응시하다 보면 짜증이 치밀었다. 유진, 그 우습지도 않은 놈이 입을 놀리게 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페의 앞을 막아도 그는 멈춰 설 뿐, 여전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질 않았다.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하는데도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런 때조차.

제 얼굴을 살피는 이리트의 표정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뺨에 닿는 손은 미약한 온기를 지녔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여린 손짓이건만 어째서 이토록 달가웠는지. 눈을 깜박이는 것이 조심스럽고, 호흡마저 얕아지면 그의 얼굴에 흐린 웃음이 떠올랐다. 이리트는 그 스스로가 새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붉은 기가 남은 흉터에 유난히 오래 시선을 주었다.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그딴 게 내게 무슨 상관이야.”

“……”

“그렇게 가벼운 마음이었으면 네가……, 우리가 여기까지 못 왔지. 그러니까 그 자식 말은 그만 곱씹어, 그리페.”

그의 말에 아로새겨진 역증은 분명히 제가 아닌 타인을 향했다. 일순간 치받친 감정은 희열이라 부르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페는 연인의 손목을 붙잡아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손안에 입을 맞추었다. 이리트의 길쭉한 손끝이 움칠거리면 그는 마침내 평소와 같은 웃음을 내보였다.


군부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이후로도 처리해야만 하는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군부의 정보며 기밀은 퍼즐 조각처럼 나뉘어 온갖 곳에 숨겨져 있었다. 심지어는 조각을 다 끼워 맞추지 않고서도 얼마나 부패했는지가 선연했다. 모든 자료를 취합하는 데에만 일주일이 넘게 걸렸으나, 이조차도 참모라 불리던 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이루어낸 일이었다.

세밀하게 엮인 사실이 모조리 밝혀진 이후 드러난 사실은 그러므로 새삼스레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군부는 자멸하는 과정 중에 있었고, 몇 년 안에 저들끼리 세력이 갈라져 다시금 전쟁을 벌였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에르마를 비롯한 혁명군의 주요 인사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틈조차 없이 온갖 일에 치여 외려 이전보다 낯빛이 거무죽죽했다.

종국에 이르는 도중이었다 한들 무력으로 정권을 뒤엎은 이후의 혼란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알파 구역의 생존자 외에는 커다란 반발이 일지 않았다. 군부는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강박적으로 정보의 우위에 서려 했고, 그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으나 모든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알파 외 구역 출신의 사병들을 소모품처럼 쓰던 건 하루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며 견디지 못하고 퇴역한 이들의 입까지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들을 모조리 죽여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있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수가 적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를테면 알파 구역 내에서 발현한 이능자의 처분처럼.

군부가 자멸하는 길을 기꺼이 걸었던 시간만큼 그들을 향한 불만도 전역에서 쌓이고 있었던 셈이었다. 혁명군의 누군가는 이번에 우리가 성공해서 다행이라고, 군부가 전쟁이라도 벌였다간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을, 혁명군에 오래 몸담았던 이들이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멈춰 서는 법이 없었다.

마지막까지도 아귀다툼을 벌이던 이들은 그들 자체의 필요 하에 세워진 교도소에 갇혔다. 혁명군 내부에서도 반대하는 의견이 존재했으나 그들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매일 새로이 군부의 허물이 밝혀지고,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군중들은 이제야 분노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명확히 그들을 향하는 민중의 분노가 끝내 그들의 목을 치게 되리라. 죽지 못한 전 권력자들의 만행은 제 기능을 되찾은 언론을 통해 사방에 전시되었으며, 일의 진행이며 반응은 그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권력이 전부였던 이들은 발아래를 받치던 것이 무너졌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졌다.

알파 구역에 속했던 이들 중에서 혁명군에 협력한 건 그리페 하나만이 아니었다. 최신식 무기를 보급할 수 있었던 이유였고, 누군가는 그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어렴풋이 짐작했을 일들. 그들 스스로 젠체한 적이 없었기에 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알려졌다. 그들을 비롯해 알파 외 구역 다수의 협력이 있었던 탓에 혼란은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예상보다 작은 혼란은 알파 구역이 숨겼던 가장 치명적인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되레 제동을 걸었다.

이능과 관련된 사항은 아직까지도 혁명군 바깥의 세력에게 밝혀진 적이 없었다. 내부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탓이었다. 승리를 이루어 내고서도 두 달이 지난 시점, 안정세에 들었다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초기의 혼란은 어느 정도나마 가라앉은 시기였다. 혁명군은 규모가 작지 않은 단체였으며, 기존 구성원 중 삼 할이 이능을 지녔다. 비공식적 통계라 한들, 통상적인 이능 발현율이 겨우 일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고려하면 현세대 이능자의 대다수가 혁명군에 몸담았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은 수치였다.

그들 중 다수의 이능은 미약했고, 실질적으로 전투에 기용할 수 있는 인원만을 센다면 반수보다 더 줄어든다. 그러나 혁명군 내에는 이리트와 에르마를 필두로 하는, 사실상 전력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존재했다. 이 같은 요인의 작용으로 혁명군 내에는 이능을 마냥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있더라도 나설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므로 군부가 벌였던 일을 낱낱이 밝혀야만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문제가 되는 건 시기였다.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있던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퍽 견고했다. 일생토록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시선을 받으며 내몰리듯 살아온 이들은 그럼에도 모두가 강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쌓여 온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군부의 개짓거리가 밝혀지고도 세상의 시선이 바뀌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고, 누군가는 해묵은 감정의 해결보다도 세상의 혼란을 가중하지 않겠냐는 걱정을 앞세웠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이 사실을 밝힐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이리트는 단연코 이른 시일 내에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이제 와 외부의 시선이 두려울 리가 없었다. 이능을 발현한 순간부터 이리트의 삶은 내내 녹록하지 않았으므로. 일부가 느끼는 아득함 내지는 막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정세가 안정되고서야 뒤늦게 밝히는 사실은 외려 더 큰 위협이 될 게 뻔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죄책감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게 오랫동안 굳어온 관습이나 마찬가지라면 더더욱. 이능을 가진 이들의 수는 적고, 극소수와 관련된 문제를 모르는 척 넘겨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와 관련된 단체가 피로 승리를 쟁취했다면, 심지어는 그 전첩을 퇴색시키는 것마저 불사할 테다. 그러니 군부를 향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터트려야 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모든 잘못과 죄의식을 군부에 떠넘기고, 면피하여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마주할 수 있도록.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리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에르마를 만난 이후로도 사람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적 없었다. 에르마와 그리페는 예외적인 존재였고, 광포한 불꽃은 그 존재만으로도 거부감을 일으키기 십상이었으므로. 경이 너머 자리한 위구를 읽어내지 못할 만큼만 멍청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누구에게도 꺼낸 적 없는 문장을 오늘도 입속에서만 짓씹었다.

이리트는 이러한 사견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제 말이 다시금 아물지 않는 상흔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탓이었다. 더불어, 이유가 이것 하나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을 밝혀서 얻게 될 이득은 애초에 지금 세대가 누릴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혁명군과 그에 속한 이능자들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했다. 의견의 차이가 있다 한들, 그것만은 모두가 같은 생각일 테다.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인식을 완전히 개선하는 건 어렵겠지요. 모든 걸 알리고,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관습이나 다름없는 풍조가 사라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그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에르마의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이제는 정말로 더 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는 시기였다. 바로 며칠 전에도 같은 사안으로 에르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숨겨진 정보를 봤을 때부터 두 사람의 의견은 같은 방향을 향했다. 늦더라도 며칠 내엔 사실을 밝히는 쪽으로 결정이 날 테지. 문득 이리트는 제 옆에 앉은 그리페를 바라보았다. 회의에 집중한 것 같다가도, 금방 시선을 알아채고 눈을 마주쳐 오는 이.

바다를 조각내 떼어놓은 듯한 눈동자 안에 의아함이 서렸다. 장난치듯 그의 허벅지를 가벼이 두드리면 보기 좋게 휘어지는 눈. 장난기 서린 손이 일순간 멈춰 버리고, 이리트는 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결심의 순간은 터무니없는 때에 찾아들기 마련이었다. 지금처럼. 탄탄한 허벅지에 손을 올린 채, 그는 머리를 굴렸다. 더는 회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 사안만 결정되면 큰 건은 모두 정리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잘한 건은 관여할 생각도 없었고, 이 문제마저도 오래전부터 에르마와 말을 맞춰둔 부분이었다.

표결에 부친 사안은 마침내 당장 밝혀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숨기지 못하고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과 기뻐하는 이들 틈 사이로 이리트는 제 손을 단단히 붙잡고 빠르게 걸었다. 조금 전, 지루한 듯 가벼운 장난을 치는가 싶더니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어, 그리페는 언제나 그러하듯 얌전히 이리트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한동안 쓰인 적 없는 패스파인더의 함선이었다. 당장 함선을 손볼 사람이 없었으므로 외관에는 여전히 전투의 흔적이 남았으나 내부는 깨끗했다. 좋은 추억만 남은 곳이 아니라 해도, 여기만큼 타인의 눈과 귀를 피하기 좋은 곳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이리트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한참을 망설였다. 이전에 이미 약속한 바 있는 일이었다. 상황이 정리되면 제 얘기를 해 주겠다고. 그리페는 어느 정도 이유를 알아챈 것 같았다.

“내가 이능을 처음 발현한 건, 겨우 일곱 살 때였어. 갑작스레 찾아온 이능은 꼭 사변 같아서…… 건물을 불태우고 사람을 다치고 죽게 했거든. 그래도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그걸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 배웠어. 살던 곳에서 쫓겨난 우리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고, 내내 고생만 하던 부모님께서는 사고를 당해 돌아가셨어. 그때 내가 열두 살이었던가.”

이리트는 내내 차분하게 말을 잇다가, 잠시간 침묵했다. 맞장구를 칠 수도 없이, 그리페는 그저 침묵하며 이리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보다 차갑게 식은 손끝은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전했다.

“에르마는 어머니의 오랜 친우였고, 혼자 남겨진 나를 데려다가 당신의 자식처럼 키우셨다. 에르마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나는 늘 품고 있던 질문을 꺼낼 수밖에 없었어. 에르마의 일이 성공하면, 이능으로 인해 손가락질 받을 일이 없어질 수도 있느냐고. ……당신께서는 나를 끌어안고 오래 우셨다. 우리는 긴 시간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결국 혁명군의 일원이 되었지. 어느 때에는 전투 계획을 세웠고, 어느 때에는 직접 나가서 싸웠고……. 아무튼, 그러다 보니 내가 직접 군부에 잠입하기까지 한 거였어. 그 뒤의 일은 알 테지.”

“……”

“조금 다른 얘기를 하자면,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엔 혼자 조용히 살 생각이었어. 이능의 존재가 개인에게 결함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꿈꿨지만, 그게 당연한 일이 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무엇보다 같은 이상을 가지고 함께 걷는 동료조차 내 이능을 두려워하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나는……. 혁명군으로서의 내가 잊히길 바랐어.”

이리트는 서러워하지도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닳아 무뎌진 듯 떨림도 망설임도 부재하는 목소리는 다만 담담했다. 그러나 잡은 손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리트의 말은 가혹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는 이번 혁명의 가장 큰 축이었고, 적보다 아군에게 더 위명이 퍼진 이였다. 그리페조차 혁명군에 속한 다른 이들이 그를 두렵게 여김을 모르지 않았다. 하물며 그것을 면전에서 겪어 온 이리트는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페의 표정이 미약하게나마 일그러지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우중충한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모든 배경을 잘라내고 하고 싶은 말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 손을 단단히 감싸 쥔 그리페의 손이 따스했고, 푸른 눈은 오롯이 저를 향했다. 어째서 다른 어떤 것보다 그 사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는지. 얼굴을 계속 마주하고 있자면 정말 눈물이 터질 것 같아, 그리페를 끌어안았다. 잡았던 손이 떨어지고, 단단한 팔이 자연스레 제 허리에 감겼다.

“우리의 이름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채 잊힐 테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그리페, 같이 살자, 우리.”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에는 채 숨기지 못한 망설임이 묻어났다. 이 순간, 이리트의 표정을 볼 수 없음이 아쉬웠으나 그리페는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지기라도 할 듯 부유하던 이리트의 분위기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자리했던 불안감은 해소되고 난 이후에야 존재를 드러냈다. 품 안 가득히 끌어안은 몸, 불안의 근원은 끝내 제게 손을 내밀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무엇이라 불러야 했는지.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싶었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심장이 떨리듯 맥동하고,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실없는 웃음이 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그 무엇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제 이름이 어디에 남건, 혹은 그렇지 않건 중요하지 않았다. 역사에 족적을 남기는 일은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가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 옷자락 너머로 체온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나의 삶은 당신이 등장하고 난 뒤로 내내 창양했지만, 이리트, 이제 나는 오히려 당신이 존재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요. 그러니…… 더는 상처받지 않길 바라요. 내가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도 언제든 기꺼이 어깨를 내줄 테니 억지로 울음을 참지 말아요, 이리트.”

“……안 울어.”

“알아요.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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