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공전

바람꽃 공전 - 2

EP. 취동(02)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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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2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바람꽃 공전 >

지금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제 눈앞에 버젓이 서 있었다. 그리페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를 제 집무실까지 데려온 이들을 보았다. 푸른 눈동자는 대답을 요구하듯 느릿하게 깜박이며 시선을 맞춰 왔다.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에 입을 다문다고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리트였다.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답니다. 말을 도무지 들어먹질 않아 불가피하게 데려왔습니다.”

이리트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는지, 그가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이마라도 짓찧을 기세로 고개를 숙인 이는 먹먹한 목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했다. 회색 바닥에 다시 피가 번졌다. 벌어진 상처의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떨림을 채 감추지 못한 등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처음부터 수도에 터를 잡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모성에서 이주해올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고,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곳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탓이었다. 어떻게든 굴복시킬 생각이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그리페는 무너져 앉은 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학살극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들이 저항하지 않는다면.”

“아, 아아……”

흙먼지며 말라붙은 피딱지 따위가 묻은 얼굴 위로 굵은 물줄기가 덧그려졌다. 한참이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은 한없이 차갑고, 일말의 동정심조차 비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제 스스로 발아래로 기어들어가 짐승이라도 되겠다며 목숨을 구걸한 꼴이었다. 이곳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이 될 수 없었다. 한낱 가축으로, 혹은 그보다 못한 도구로 전락했다. 하지만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전력 차 앞에서 제가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목숨마저 내버리며 항전하면, 최후에 남은 것은 폐허뿐일 테다.

무릎을 꿇은 채 무너진 왕은 언어를 잃은 듯 울었다. 간헐적인 숨소리도, 낮은 울음소리도 짜증을 유발할 뿐이었다. 내내 싸늘하기 그지없던 그리페는 짜증을 채 숨기지 못하고 손짓했다. 남자는 팔을 붙잡힌 채, 발을 질질 끌며 사라졌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와 가장 늦게 방을 나서는 이리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문을 닫으려다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평소에는 특유의 분위기에 가려 티가 잘 나지 않는 동그란 눈이 똑바로 저를 향했다.

말을 꺼내기에 적당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그리페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이리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서 문을 닫았다. 이리트는 일련의 일들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군인이니 당연한 일임을 알면서도, 어째서 의문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온통 논리적이지 못한 판단이었다. 침묵이 길어졌으나 이리트는 묵묵히 기다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불렀어요. 7119-B2에 남게 될 사람들을 어떻게 처분하면 좋을까, 해서.”

왜 제게 묻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남은 사람을 어떻게 처분하면 좋겠냐고. 그건 애초에 말단 병사에게 꺼낼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상주하는 참모들은 장식이 아니었으므로. 그리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그건 일상에 대한 이야기에 가까웠다. 제 대답이 그에게 무게를 가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저를 떠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타인의 사견이 궁금했을 뿐이리라.

“사람은 가능한 한 많이 살렸으면 합니다.”

“어째서?”

“이곳의 환경은 지구와는 다릅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 또한. 인력을 파견하더라도 적응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리고, 적응한 이후에도 원주민과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즉, 효율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 그렇지…….”

“다만 이 경우에, 남은 이들이 저항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겠죠. 그들이 뭉친다 한들 큰 위협이 되진 않을 테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잖습니까.”

그래서 그 위협을 감당할 여력이 없을 시절엔 침탈한 행성 거주민을 거의 다 죽여 버리지 않았던가. 지금도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수도 하나를 쓸어 버렸고. 이리트는 악감정이 섞인 문장을 눌러 삼켰다. 그리페의 앞에서 내뱉기엔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는 바닥에 남은, 아직 덜 굳은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이 행성을 집어삼키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과정 중에 사람이 얼마나 죽어 나갈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리트의 대답은 또렷했고, 망설임이 묻어나지 않는 어투였다. 누군가가 묻기 이전에 고민해본 적 있는 사람처럼. 더불어 그 내용은 제가 고민하던 부분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행성을 모조리 청소하는 것보다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더 긴 과정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이리트 또한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럼에도 그쪽으로 다시 한번 마음이 기울었다. 무의미한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줄여야 했다. 옛날의 방식은 이제 와 쓰기엔 너무 원초적이었으므로.

“이제 가 봐도 돼요.”

다시 문을 닫고 나온 이리트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말을 걸렀음에도 진심이 절로 섞여든 탓이었다. 그리페가 딱히 의아하게 여긴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정부가 언제나 표방해오고 있는 전쟁의 방식을 모르지 않았다. 광자포 대신 굳이 미사일을 쓰는 건 오로지 그리페, 개인의 판단이었을 테다. 그럴 만한 힘을 지닌 이였으므로. 하지만 왜 그가 여타 인사들과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그 새끼들 사이에서도 사람이 나긴 하나 보지. 이리트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뇌까렸다.

 


 

7119-B2에 자리한 가장 큰 국가가 외세에 처참하게 짓밟혀 고개를 숙였다. 불행하게도 진위가 확실한 말이 전 세계에 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변변찮은 소국들은 피를 흘려 보기도 전에 고개를 숙였고, 나름대로 손에 꼽는 국력을 가진 곳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 채 반발했으나 광자포로 국토 위를 온통 지져진 후에는 여지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그리페를 비롯한 패스파인더의 소속 인원들은 국가 간의 ‘적절한’ 협상을 하거나, 무력행사를 하는 탓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이어졌다.

그날 이후, 그리페를 따로 만날 일은 없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으나 외려 낯설게 느껴졌다.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모든 일정이 끝난 밤, 제가 머무는 방에 앉아 이리트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곳에 온 뒤로는 자주 혼란스러웠다. 그리페의 판단은 조금 더 인간적이었으나 동시에 고개를 숙이지 않은 곳을 아무렇지 않게 포격할 만큼 냉정했다. 전장을 지휘하는 그와, 그의 평소 모습의 간극만큼이나 큰 차이였다.

물론 이리트는 지금 제 혼란의 근원이 그 간극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요는 호감이었다. 어지간한 걸 다 제 계획 아래 두고서도, 마음만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아주 미약한 균열이었으나 이리트는 이질감을 놓치지 않았다. 쉬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덩치를 키울 뿐인 감정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목적성을 흐리고,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드는 원인이 될 테지. 심지어 그리페는 몇 번이나 제 뒷조사를 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테고, 제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테지만 없었던 셈 칠 수는 없었다.

상념이 하늘에 뜬 별의 개수에 비견될 즈음, 문득 이리트는 늘어져 앉아 있던 자세를 바로 고쳤다. 바깥의 기척이 이상했다. 전함의 방음은 아주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으므로, 이 이질감은 직감에 가까웠다. 방 안의 불을 끄고 커튼 틈 사이로 바깥을 살폈으나 이쪽에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바깥에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트는 숨을 죽이고 날을 세웠다. 조용한 아우성이 사라졌을 때, 그가 제 무장을 챙기고 출입구를 열었다. 누군가 전함에 침입한 것 같았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소간의 편의성을 위해 전함은 언제나 최소 하나의 출입구가 열려 있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 로봇 한 기와 부대원 한 명이 짝을 지어 경계를 섰다. 이는 빠짐없이 맞물려 조금도 비는 시간이 없었고, 함선 내부며 전투 로봇을 포함한 부대원에게는 다중 통신 프로토콜을 비롯해 만일을 사태를 대비한 장치가 완비되어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경계 인원을 한 번에 무력화하는 것.

침입한 이가 그에 맞는 이능을 지니고 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근원과 원리를 밝혀내지 못한 기이한 능력은 때때로 군부가 골머리를 앓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통상적으로 발현 확률이 낮은 편이지만 지구에 속한 이들에게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그 수가 드문 탓에 더더욱 그러했다. 무엇보다 특이한 건 비교적 직관적인 신체 강화 계열을 제외한 이능은 군부에 속한 이들에게서는 발현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체로 이러한 이능은 피를 타고 전해지지만, 분명 연고 없이 나타나는 사례가 있었음에도.

이리트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을 털어냈다. 부정할 수 없이 기이한 점이었으나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 상대가 경비를 무력화할 정도의 이능을 지녔다면.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이내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단지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이 착각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묵직한 군화가 소리 없이 금속제 바닥 위를 스쳤다.

침침한 야간용 안내등만이 켜진 내부는 어둡고 적막했다. 어디에서 무엇이든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경계심이 극에 달했을 즈음, 저 멀리 바깥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비쳐들었다. 그래, 사람 혹은 그와 비슷한 존재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이. 이리트는 고민할 새도 없이 비상벨을 울렸다. 복도의 조명이 빛을 발하고, 열렸던 단 하나의 출입구가 봉쇄되었다.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던 경계병과 전투 로봇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그들은 상처 하나 없이,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다. 전투로봇은 상태를 당장 확인할 수 없었지만, 경계병의 가슴은 미약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적어도 사람을 즉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진 못했다. 다수가 상대하게 된다면 대개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으리라. 이리트는 무전을 들어 간결한 상황 보고를 했다.

빠르게 도착한 의무병이 쓰러진 이를 이송하고, 이리트는 함선 안쪽으로 향했다. 침입자도 제가 발각됐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리라. 그러나 특별한 권한 없이 함선에 출입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으니 숨을 곳은 한정적이었다. 제가 경종을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잡혔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어쨌거나 침입자의 목적은 그 뒤에 알아낼 테니 제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귓가에 울리는 경고음 탓에 얼핏 잠들었던 이가 번뜩 눈을 떴다. 어떤 규칙성을 띠고 반짝이는 신호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함선 내 침입자가 있다는 것. 이런 곳에서 어떻게. 상황실로 이동하는 중에 직통으로 보고가 올라왔다. 담담한 목소리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일정한 속도로 음어를 읊었다. 그리페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 목소리가 반가운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병사와 전투로봇을 상처 없이 제압한 침입자에 대한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창백한 빛이 켜진 복도에 붉은 경계등이 점멸했다. 그나마 어두운 틈새에 몸을 숨긴 침입자는 밭은 숨을 골랐다. 계획은 분명히 완벽했다. 함선의 규모에 비해 인원은 적은 편이었고, 경계를 서는 소수는 충분히 제가 제압할 수 있었다. 경계를 울릴 틈조차 주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군홧발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발이 닿는 데로 뛰어 도망친 탓에 이곳이 함선의 어느 즈음인지도 알 수 없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간다면 출입구가 드러날 테지만 그랬다간 단박에 들킬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춰 있어도 다를 건 없다. 긴장으로 머리가 굳은 것만 같았다. 형태 없는 불안이 정신을 파먹는다. 등 뒤가 싸늘하게 식고,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곳은 폐쇄적인 공간이다. 설령 제가 출입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곳을 봉쇄했다면. 이제는 숫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처음부터 무리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괜히 왕을 구하겠답시고 나서서.

위압적인 발걸음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압박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으로 뒤엉켰던 이성이 외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실내를 쟁쟁하게 울리는 사이렌 탓에 몇 명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만일 눈앞에 나타나는 이들의 수가 적다면 지금 당장 발각되는 건 막을 수 있으리라. 계획은 모두 틀어져 엉망이 되었고, 저는 결국 붙잡히게 될 테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발악이라도 해야 했다.

쉴 틈 없이 움직이는 걸음이 여러 곳으로 갈라졌다. 그들은 언제든지 무기를 빼 들 준비를 한 채 침입자를 탐색했다. 막 잠이 들었던 이들과 한창 꿈나라에 빠져 있다가 깬 이들에게서는 피로함을 찾을 수 없었다. 저기다!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무전이 울렸다. 침입자의 정확한 위치가 전해지면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사불란하게 한 구역으로 이동했다.

더 도망칠 수도 없이 가로막힌 길. 등을 벽에 붙이고 선 사람은 이렇다 할 무기조차 지니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빛으로 그의 눈동자가 까맣게 번득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것과 거의 같은 순간에, 선두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쓰러졌다. 아주 짧은 찰나, 공기마저 차갑게 얼어붙을 침묵이 스쳤다. 그는 제게 흔들림 하나 없이 겨눠진 수많은 총구를 마주했고, 더 이상은 이능을 쓸 여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제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팔을 뒤돌려 묶고 눈을 가린 것으로도 모자라 재갈을 물렸다. 그는 사지를 구속당한 채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었던 구역으로 이송되었다. 무채색의 복도를 붉게 물들였던 경계등이 꺼지고 다시 적막이 흐른다. 꼬나 쥐었던 무기를 홀스터에 꽂아 넣은 이들은 쓰러진 이들을 수습했다. 상황은 빠르게 정상화되었고, 대다수의 인원은 다시금 수면을 취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 외의 일부는 침입자를 심문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단 한 명, 이리트만은 그리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머리가 수면을 요구하듯 지끈거렸다. 단지 부족한 수면 때문인가. 그리페는 제 앞에 앉은 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색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 없이 저를 마주했다. 농담으로도 이리트를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으나,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트가 이 일과 연관되어 있을 리는 없었다. 그에게 갈 이득도 없거니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사건은 이리트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그리페는 오랫동안 전장에 머무른 이였고, 그만큼 직감의 존재를 실감하는 사람도 드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의 위기를 넘겨 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감이 확신에 이르는 데까지 걸리는 과정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제 앞에 앉은 이리트는 분명 작은 흔들림조차 없이 제 감각을 신뢰했다. 판단에서 실행까지 걸리는 시간이 채 몇십 분에 미치지 않았다.

첫 실전에 파견된 신병이 맞는지 차라리 반문하고 싶었다. 정체가 무엇이냐고. 그러나 몇 번에 걸쳐 이루어진 시도에도 이리트의 신상명세는 깨끗하기만 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평범함을 그대로 새겨 넣은 듯한 생애. 의문스러운 이는 아주 자주 평범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드물게 평범함을 꾸며냈다. 그가 지닌 비밀이 무엇이기에 제 능력으로도 밝혀낼 수 없는가. 그리페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더 추궁해도 나올 것이 없음을 아는 탓이었다. 이리트는 방을 떠나고, 홀로 남은 이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간밤의 소란은 낮까지도 이어졌다. 여러 심문 끝에 침입자는 인질을 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시인했고, 그가 지닌 이능의 정체까지 밝혀졌다. 마침 7119-B2의 정복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으로, 그는 그토록 구하고자 했던 이들과 함께 낯선 별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페와 그의 부대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는 것으로도 모자라, 적당한 인질까지 얻은 셈이었다.

7119-B2을 짓밟는 데에 걸린 시간은 딱 한 달이었다. 한 달 내내 머무르던 전함이 느릿하게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행성의 생존자들은 더 이상 흐를 눈물도 없을 때 눈가가 아플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삶은 이제 사라진 것과 진배없었다. 앞으로는 무엇이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 그 누구도 알려주지 못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절망감이 스산하게 스몄다.

돌아오는 함선에서, 부대원들은 그저 조용했다. 우울감 혹은 두려움 따위는 아니었고, 그저 누적된 피로 탓에 활동 시간 대부분을 휴식으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리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거의 제 개인 숙소를 나서지도 않고 시간을 보냈다. 첫 우주 비행의 설렘 따위는 스러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였던 아름다운 풍경의 기억이 바랠 만큼, 그 이후에 있었던 학살에 가까운 전쟁은 잔혹했다.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과거에는 그보다 더한 일들이 있었던 것일 테지.

길고 지루한 비행 끝에 돌아온 모성은 그리 오래 떠나 있지도 않았건만 새삼 낯설었다. 여러 절차마저 끝마치면 진이 빠질 정도였다. 이미 반쯤 저문 하루를 휴식으로 보내고 나면, 내일부터는 또다시 익숙하기 그지없는 훈련이 반복될 테다. 자리를 비운 사이 병영은 누군가 관리했는지 깔끔하기만 했다. 제 손길이 닿지 않아도 깔끔한 공간에는 그 어떤 무엇도 남겨둘 수 없겠다고, 이리트는 문득 떠올렸다.

돌아오는 내내 그는 편지를 쓰기 위해 몇 번이나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길 반복했다. 회색 줄이 인쇄된 단출한 편지지를 마주하면 언제나 한숨이 앞섰고, 섣부른 연락으로 꼬투리를 잡힐지도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서. 하지만 더 이상 연락을 미룰 수는 없었다. 먼 곳의 동료들도 오늘 패스파인더가 돌아왔음을 알고 있으리라.

 

「친애하는 에르마.

안부를 전할 겸 편지를 씁니다. 백지를 마주하면 매번 여러 걱정으로 머리가 복잡해져 자꾸만 펜을 내려놓고 말아요. 그러니 연락이 드물다고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괘씸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알지만, 에르마, 편지를 비롯한 연락의 수가 줄어든다고 우리가 남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완전히 잊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별 문제없이 잘 지냈고, 근래에 큰 작전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우주에서 처음으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은 경이로웠습니다. 지표 대부분을 덮은 푸른 물은 대개 우리가 살지 못하는 땅일 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더군요. 멀어지니 푸르고 창백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별은… 그래, 우리가 나아갈 미래처럼 찬란했습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수많은 감정이 스쳤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한 감각은 확신이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확신은 뚜렷해지고, 수없이 많은 고뇌는 어둠 속에 묻혔습니다. 에르마, 나는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나를 말렸던 걸 아니 자꾸만 마음이 쓰여,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가 머지않았습니다. 아직은 여유가 있지만, 언제 날씨가 급변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때입니다.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는지요. 먼 곳에 있어 돕지 못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직접 가서 돕지는 못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부디 연락해 주십시오.

이리트로부터.」

 편지를 접어 봉투 속에 넣은 그는 종이 위에 아로새겨진 주소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에르마는 일찍 부모를 여읜 제게 있어 대모와 같은 존재였다. 제 키가 지금의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던 시절부터 당연한 듯 옆에 자리했던 이. 이리트는 긴 숨을 내쉬었다. 주어진 여유 시간은 채 일 년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가 나아갈 미래. 힘주어 눌러 쓴 글씨가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었다.

우리는 거들먹거리는 이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자연스레 모여들었고, 서로의 뜻이 일치함에 혁명군을 이루었다.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조직은 안정화되었고, 그 과정 중에 다소간의 희생이 있었으나 조직의 존재 자체는 크게 주목을 받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외곽 지역이라는 생각이 만연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완전한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때가 왔다. 이제 막 첫걸음을 떼었으나 처음부터 커다란 성공을 일구어냈으므로 그들은 이제 망설이지 않으리라.

손꼽아 기다리는 때에 자신은 아마 그곳에 있지 못할 테지만, 그런 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어디에 있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테니. 다만 걱정되는 건 짧은 여유 기간이었다. 일 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저만 해도 이곳에 오고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제가 떠나오기 전에 이미 준비는 반절 이상이 완료되었으니 지금 즈음이면 이미 모든 게 준비되었을 거라고, 이리트는 치미는 불안감을 억눌렀다.


 

 

시간은 덧없이 흘렀다. 그사이 이리트는 7119-B2에서 발생했던 침입 사건을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1계급 특진하여 중사가 되었다. 여러모로 이례적인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애초에 이리트가 패스파인더에 속하게 된 것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큰 잡음 없이 넘어가게 되었다. 더불어, 일이 그렇게 진행될 수 있도록 힘을 쓴 그리페는 그저 담담하게 이리트를 축하하고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계급 따위가 어떻게 되건 말건 이리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패스파인더는 독립적인 여단으로, 그걸 나쁘게 말하자면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계급 하나가 올랐다 해도 후임이 생기는 게 아니었으므로, 체감되는 건 오로지 급여뿐이었다. 그마저도 그에게는 이렇다 할 감흥을 불러일으키질 못했다. 애초에 이리트는 이곳에 적을 둘 생각이 없는 탓이었다.

이례적인 특진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는 것 같았다. 짙은 자색 눈이 낯선 풍경을 훑었다. 3041-D9는 과거, 내전 이후에 이어진 정복 전쟁에서 새로이 지구 소속이 된 행성이었다. 그 시기 정복당한 다른 행성과는 달리 이곳에 사는 인류의 반수 이상이 생존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존재했다. 전쟁의 주 형태가 보병을 이용한 소모전이 아니라 한들, 전쟁 말기에 들어서는 병사 사이에 전반적인 피로감이 꽤나 짙었다. 더불어 3041-D9는 지표의 9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고, 지배종족은 주로 수중생활을 하는 이들이었다.

7119-B2에 사는 이들을 살려야 할 이유로 제가 말했던 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반추한 셈이었다. 어쩌면 그곳의 미래도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쇳덩이로 이루어진 탄환이 끝없이 깊은 물 속으로 처박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포말이 치솟아 오른다. 함선 바깥에 있었다면 귀가 울리도록 시끄러운 소리를 마주해야 했겠지만, 내부는 정적이기 그지없었다. 온갖 기계가 작동하며 나는 작은 소음, 짧은 신호음, 때때로 상황을 보고하는 명확하고 침착한 목소리 따위들.

그 틈 사이에서 이리트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력감을 견뎌야 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복이 목을 죄는 것 같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자신과 동료들이 가진 목표와 다르지 않은 탓이었다. 비밀을 가득히 껴안은 채, 또 다른 동료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안다. 이곳에서 참지 않는다 한들, 모행성에 있는 동료들에게 폐가 될 뿐이라는 사실 같은 건. 그들이 물속에 터전을 잡았음이 제게는 차라리 다행인 일인가.

파도치는 물결 위로 퍼지는 메밀꽃이 지긋지긋했다. 임무 중 전투복 대신 흑색 정복을 차려입은 건 처음이었다. 굳이 정복을 입게 하는 이유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멍청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리트는 속으로만 수십 번 한숨을 쉬었다. 일반적으로는 일반 병사가 나설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다. 그러니 차려입은 정복은 그저 군부의 위상을 드러내는 데 쓰이는 장식물 같은 꼴이었다. 그 순간, 이전까지와 다른 신호가 잡혔다.

“목표물 근처, 지성체 접근 중.”

드넓게 펼쳐진 바다와 꼭 닮은 눈이 레이더를 훑었다. 이때까지 보이지 않던 지성체라면 단 하나뿐이다. 그들의 목적은 한눈에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부디 항복을 선언하기 위한 것임을 바랐다. 그러나 유일하게 섬 위로 몸을 드러낸 이는 어떤 신호도 없이 우뚝 선 채 함선이 있는 방향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반란을 핑계 삼아 모조리 쓸어버리면 될 테지만, 이곳은 경우가 달랐다. 특수한 환경이 그들의 목숨을 어느 정도는 보장해 주는 셈이었다.

“착륙한다.”

“예!”

선내가 울리도록 큰 목소리였다. 신물이 날 만큼 떨어지던 포격이 마침내 멎어들고, 먹빛 함선이 느릿하게 대지 위에 발을 디뎠다. 출입구가 열리면, 하얀 제복을 입은 그리페의 뒤로 수십 명이 도열한 채 뒤를 따랐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길게 늘어진 망토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선두에 선 이와 달리 검은 제복을 갖춰 입은 이들은 수십에 이르렀으나, 걸음 소리는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열중쉬어! 힘 있는 목소리가 울리면, 한 몸이라도 된 듯 이동하던 이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홀로 선 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똑같은 종족이 열을 맞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두에 선 두 사람은 무기를 들지 않았다. 거친 바닷바람에 늘어진 망토 자락이 휘날렸다.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일광 아래, 서로의 전력을 탐색하는 눈길은 거칠 것 하나 없이 노골적이었다.

“왜 이런 짓을 벌였습니까, 우르티아.”

“너희가 가진 것들은 모두 거짓되었다. 빼앗고, 훔쳐 온 것들로 이루어진 가짜들.”

“당신들이 삶을 보장받은 이유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의 일이지. 야만적인 거래였다.”

분노하고 힘없는 자의 비난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 채 흩어졌다.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분명 오랫동안 반역을 준비해 왔으나, 그만큼 강대해진 무력 앞에서 이렇다 할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리페가 아닌 다른 지휘관이었다면 섬 위로 모습을 드러내건 말건 포격을 속행했으리라. 하얀 깃발을 들고 나타나기 전까지. 그러나 결국 무용한 대화였다. 그 누구도 발을 물리는 자가 없는 탓이다.

그리페가 짧은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방울져 떨어지는 물기를 떨쳐내는 이들 중 하나가 무기를 들지 않은 그리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페를 가운데 두고 도열한 이들 중 가장 앞에 선 이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 상대에게 겨누었다. 단 한 명의 명령을 기다리는 이들에게서는 일말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르티아라 불린 이는 차마 그리페를 습격한 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겨눠진 총구 따위는 차라리 두렵지 않았다. 유난히 열의 넘치던 젊은이를 살릴 방법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이 비늘이 떨리도록 괴로웠다. 분명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에 가까운 설득을 했건만. 그리페에게 접근해 있는 탓에 총구가 불을 뿜지 않았지만, 우르티아는 하얀 제복을 입은 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습격자는 투박한 작살 창을 휘둘렀다. 안타깝게도, 창은 그리페의 주력 무기 중 하나였다. 첫 번째 공격을 흘리고 발을 걸어 넘어트린다. 복부를 짓밟듯 내리누르고, 어설프게 휘두르는 창을 빼앗아 내리찍는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다.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습격자를 제압한 그리페는 바닥까지 박힌 창을 뽑아 들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던 그리페는 창대 끝으로 쾅, 거칠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예견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우르티아를 대표로 세운 그들은 뭍에서도 숨 쉴 수 있으나 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종족이었다. 차라리 수중전투였다면 미약한 가능성이나마 점쳐 볼 수 있었을 텐데. 우르티아는 검은 제복을 입은 무뢰배들에게 맞서라 명령하는 중에도 절망했다. 총을 쓰지 못하도록 난전으로 이끌었으나, 가까이 달라붙은 이들은 각종 근접무기에 속절없이 살이 깎여나갔다. 처음부터 그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상공에 자리한 채 쏘아내던 폭격은 잔혹했고, 수면 아래 자리한 그들의 터전이라도 지켜보려 모습을 드러낸 건 도박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살갗이 크게 갈라져 쏟아지는 내장을 부여잡으며 긁는 듯한 신음을 뱉던 청년은 무어라 중얼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고통으로 활짝 벌어진 아가미는 삶을 향한 갈망을 처절하도록 드러냈다. 척추가 끊어져 일어날 수 없는 이가 누운 자리는 피로 젖어 들고, 청년의 의식은 꼭 그만큼 멀어졌다. 끝내 땅 위를 섧게 긁던 손에 힘이 빠지고, 들썩이던 가슴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난전 중에도 그를 자꾸만 힐끗거리던 우르티아는 단장의 고통으로 길게 울부짖었다.

생의 구 할을 수중에서 보내는 이들의 삶은 오랜 착취로 피폐하게 변모한 지 오래였다. 전장이 뭍이 된 순간부터 성공할 수 없는 작전이었으나 그들에게는 물러설 곳도 주어지지 않았다. 물을 타고 전해지던 충격은 그야말로 내장을 뒤흔들어 놓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리는 몸과 마음을 겨우 다잡아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건만. 그들이 때때로 흘리는 피의 양은 동족이 흘린 피의 양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던 듯, 전투복 대신 정복을 입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동족 사이에서 우르티아를 비롯한 이들은 잿더미 속의 불씨와 같은 존재였다. 가능성에 대한 미약한 소망이자, 희망의 상징. 어쩌면 자신은 그러한 희망을 등에 지고 꽤 우쭐했던 걸지도 모른다. 상대의 전력조차 다 파악하지 못한 주제에 지녔던 오만.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판단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될 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새파랗게 날이 선 군용 대검에 단단한 비늘이 쉬이 갈라졌다.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에서 오는 고통인가, 부서진 마음이 우짖는 고통인가. 가까스로 전장에 발을 붙이고 선 이는 가늠할 수 없는 통증을 견뎌내며 거의 본능적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자신을 상대하는 군인의 눈동자는 지독하리만치 무감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구역질을 부르고, 한 치 망설임 없이 흉기를 내리치는 손길에는 변변찮은 방어구며 비늘로 덮인 살갗이 찢어진다. 시계가 가물거려,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뜨길 반복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지난한 삶의 끝이 이제야 다가온다. 생각이 스친 직후, 우르티아의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제가 하려는 짓이 도피와 무엇이 다른가? 구심점인 제가 죽어 나자빠진다면 그다음은 이 전장에 선 이들이다. 두 번째 기회는 아주 먼 미래에나 올 터였다. 오만도, 그에 따른 오판도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우르티아, 그 자신이었다. 들어라! 눈앞에 있는 적을 똑바로 보고, 거짓된 목숨을 빼앗아라. 결단코 포기하지 마라! 우르티아의 거친 노호가 전장을 울렸다. 그는 무엇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무기를 휘두르고, 빼앗은 목숨이 스러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들도 결국 생물이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들. 유리구슬 같은 눈알에도 삶을 향한 절박함은 자리했다. 물속으로 끌어들이진 못했지만, 그들이 자랑하는 압도적인 화력을 빼앗지 않았던가. 맹공을 견뎌내지 못한 무기의 손잡이가 헐거워지면 바닥을 구르는 무기를 주워가며 싸웠다. 그들의 무기는 아주 튼튼하고 날카로웠다. 흥분한 우르티아의 아가미가 벌어졌다가 닫히길 반복했다. 피에 젖은 손 탓에 무기가 자꾸 미끄러졌다. 어딘가에서 길게 잘라낸 천 조각으로 손과 손잡이를 통째로 묶어 버린 이가 비어 있는 손으로 뺨에 흐르는 피를 문질러 닦아냈다.

그는 불현듯 저 스스로가 명정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뇌리를 타고 흐르는 전율, 겪어본 바 없이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과 흥분해 떨리는 손끝 따위가. 일시에 찾아온 깨달음은 그의 행보를 막을 수 없었다. 번들거리는 눈이 이리저리 굴러, 가장 눈에 띄는 하얀 제복을 찾아 헤맸다. 길게 늘어진 망토가 분명 거슬릴 법도 하건만. 그는 한 방울 피조차 묻히지 않은 채였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 은실로 놓인 자수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더는 견딜 수 없다. 내딛는 걸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리페의 앞에 선 우르티아가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곧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하얀 제복을 걸친 이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페는 여전히 빼앗은 작살 창을 들고 있었다. 과시하듯 크게 휘둘러 창날에 묻은 이물을 털어내는 움직임은 얼마나 역겨운지. 핏발 선 눈이 멀끔한 얼굴을 쏘아보았다. 분노로 흐트러지는 호흡을 가다듬고, 이를 악문 우르티아가 그리페의 정면으로 날붙이를 들이댔다.

창과 창이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몇 번이고 맞부딪친다. 그때마다 우르티아는 탄식하고 싶은 자신을 억눌렀다. 제가 몇 명이 더 있어도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을 수준임을 몸으로 깨닫는 탓이었다. 주인이 뒤바뀐 무기, 생채기가 난 살갗 위로 또 다른 상처가 새겨진다. 체력이 부쳐 허덕이는 저와 달리 그리페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노쇠한 탓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단지 그리페의 체력이며 그를 바탕으로 한 신체 능력이 상식을 벗어났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신체 강화 계열의 이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필사적으로 내뻗은 공격이 하얀 정복의 어깨 근처를 가르고, 살갗을 찢어냈다. 하얀 제복에 분명한 얼룩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지는 감각. 연료를 대신해 맹렬히 불태운 것이 제 명이었음을 알았다. 회광반조라 하던가. 그는 문득,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단어를 떠올렸다. 자꾸만 끊어지려는 의식을 붙잡고,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지는 팔을 휘둘렀다. 힘도, 제대로 된 기술도 실리지 않은 공격은 그리페에게 아무런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앞장서 희망을 부르짖은 이가 어찌 감히 단념할 수 있겠는가.

“그만두십시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우려가 담겨 있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일순간 멈추었던 이는 그리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노로 번득이는 눈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실핏줄이 터져 흰자위가 온통 시뻘겠다. 나를, 우리를 모욕하지 마라! 우르티아는 악귀처럼 소리를 질렀다. 다른 그 어떤 행동보다 진심 섞인 걱정이 가장 무참했다. 그야말로 시혜적인 태도가. 무엇보다 그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건, 이제 더는 손을 묶고서도 무기를 휘두를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거였다.

그는 사력을 다해 자신을 공격했고, 결국 힘이 모자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죽음을 앞당기려는 듯 굴었다. 제 몸 어딘가에 창이 꽂혀 죽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눈앞의 이가 진노했음은 알았으나, 제 말의 어디가 그를 이토록 자극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살고 싶어 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리페는 눈앞에서 비틀거리는 이를 응시했다. 내버려 둬도 죽을 상태였다. 다른 이들의 상황도 그리 다르진 않았다. 치켜들었던 창날의 끝이 바닥을 향했다. 싸움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대부분은 방금 전투를 벌인 것답지 않게 멀쩡한 꼴로 물러나 그리페의 뒤에 다시 도열했고, 일부는 너절한 꼴로도 일어서 각을 맞추었다. 물이 빠져나가듯, 검은 제복을 입은 이들이 물러나면 그 자리엔 쓰러진 우르티아와 그 동족들만이 남았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 위로 피 얼룩이 번져 붉었다. 우루르티아는 일어서 보려는 듯 바닥을 처절하게 긁었으나 통째로 묶어 버린 창날이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그의 숨이 영원히 멈추는 순간, 그리페는 모든 반역 사태가 진압되었음을 깨달았다.

“돌아간다.”

수습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3041-D9는 반역을 일으킨 대가로 더 가혹한 침탈을 받을 테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죽어 버린 이들의 빈자리와 무너진 시설의 영향으로 꽤 오랫동안 침체기에 들어서리라. 완전한 승리를 거머쥐었음에도 기쁘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반역을 일으킨 무리의 우두머리는 처절하게 저항했고, 결국에는 무너졌다. 분명 깔끔하게 끝난 임무가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페의 심정이 어떠하건, 임무를 완수한 그들은 모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떠오른 함선은 핏빛으로 물든 대지를 버려두고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이전에 이곳에 왔다가 끝내 발각되었던 이들도 이러한 회의를 느꼈을까. 아주 먼 곳에 자리한, 유난히 푸른 행성을 응시하는 눈이 아득한 기억 속에서 헤맸다. 때때로 그들의 언어 속에 담겼던 건 이제 와 생각하면 분명 설움이었다. 어떻게든 참아 내야만 하던, 힘없는 우리에 대한 서글픔이나 억울함 같은 것들. 현 정부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은 아닌가 하는 의심 또한 수십 번을 곱씹었겠지. 지금의 자신처럼.

우르티아는 훌륭한 우두머리였다. 끝의 끝까지 싸우던 모습에서 어찌 눈을 뗄 수 있었겠는가. 감히 티 낼 수 없었으나 마음만은 저 또한 그와 함께였다. 그에겐 기만처럼 보이겠지. 공통점이라고는 반역을 계획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이리트조차도 배부른 투정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게 분명했으므로, 이리트는 저 자신을 비웃었다.

우리는 왜 이러한 곳에 나고 자라 이러한 투쟁을 해야만 하는 걸까. 입 밖에 낼 수 없는 물음에는 처음부터 대답해줄 이도 없었다. 이곳에서 의문과 설움 따위를 곱씹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온갖 복잡한 심경을 한구석에 밀어 넣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이곳을 멀거니 바라보던 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때때로 꽤 피곤해 보였으나 오늘은 더욱 그러했다.

창날 끝에 찢어진 어깻죽지를 치료하지도 않은 채로 멀거니 선 그리페는 어딘가 나사라도 빠진 사람 같았다. 분명 눈이 마주쳤음에도 그는 움직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짧은 망설임이 스치고, 먼저 걸음을 옮긴 건 이리트였다. 큼직한 보폭,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가까워지는 이의 표정은. 어째서 제게도 그들 또한 사람임을 자꾸 인지하게 만드는지. 동시에 이리트는 그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이었는지 또한 잊을 수 없었다.

“대령님.”

늘 듣는 호칭을 이리트의 목소리로 듣자니 이상하게 낯설었다. 푸른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가 뒤늦게 응, 하고 느린 대답이 따랐다. 권위며 지휘관으로서의 무게감을 모조리 내다 버린 대답에도 이리트는 당황한 티조차 내지 않았다. 그의 차분한 시선이 그리페의 어깨 근처를 맴돌았다. 이 정도 상처는 내버려둬도 금방 나아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묻고 싶던 마음을 억누르고 나온 말에 이리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바라보았다.

“……의무실이 좀, 바빠서.”

변명처럼 덧붙인 말이었다. 멍청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제 사고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음을 충분히 인지한 그리페는 나름대로 미소를 띠었으나, 타인이 보기엔 어색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자리를 옮기려 했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리트를 바라보다, 이동할 타이밍을 놓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왜 망설였습니까?”

“…….”

“위력을 보이고 싶었다면, 그의 목숨을 직접 빼앗아야 했습니다.”

누군가 들었다면 하극상이라며 펄쩍 뛰고도 남을 말을 이리트는 태연하게 내뱉었다. 정곡을 찌르는 말, 그리페는 그때서야 무엇이 그토록 거슬렸는지 깨달았다.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진득하게 내려앉았다. 아무리 뚫어지라 바라보아도 이리트의 얼굴에선 어떠한 질책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

망설임을 채 다 지워내지 못한 그리페의 대답은 아주 간결했다. 불쾌하게 느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질문을 듣고서도. 그의 배경이 달랐다면, 어쩌면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이리트는 부질없는 가정을 했다가, 생각을 얼른 털어내었다. 그 작은 섬 위에서 그리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 제가 보고 듣지 않았는가. 사적인 감정으로 판단이 흐려져서는 안 되었다. 이리트는 뒤늦게 경례를 한 뒤에 걸음을 옮기려 했다.

멀어지지 않는 기척, 제 뺨에 와 닿는 시선에 그는 그때서야 제가 이리트의 손목을 잡아챘음을 자각했다. 미안해요. 얼이 빠진 채로 사과를 전하며 손목을 놓으면, 이리트는 별다른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게 그런 걸 물었는지. 어떻게 단번에 핵심을 찌를 수 있었는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아 외려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리트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관심을 거두어야 할 시기임을 알았다. 그러나 아는 것과 납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리트를 향한 의구심은 어느 순간부터 힘을 잃었던가? 자꾸만 그를 향하는 시선이나, 은근히 풀어지는 자신을 알았으나 그리페는 그 시기만큼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천천히 옮긴 걸음은 이리트가 오랫동안 서 있던 창 앞에 멈추고, 그리페는 아연하게 함선 밖의 풍경을 응시했다. 넋을 빼놓고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억누르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감정이라면, 차라리 거절당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3041-D9와 지구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그리페가 채 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도착한 함선이 서서히 착륙했다. 입구가 느릿하게 열리고, 줄지어 내리는 이들은 떠날 때와 거의 다름없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개중 일부는 여기저기 다쳤으나 그럼에도 그들의 기세를 꺾는 요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작전에 성공하고, 훌륭하게 승리하였음을 온몸으로 내보이는 이들이었다. 다친 이들은 제대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이동하고, 대다수의 병사는 휴식을 만끽하기 위해 떠났다. 그중 단 한 명, 그리페는 상부에 소식을 전하고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상, 3041-D9 제압 작전 보고를 마칩니다.”

게오르기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굵은 시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미 뿌연 실내에 새로운 연기가 퍼졌다. 제법 덩치 큰 이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의자에서 끼익,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렸다. 성의 없이 보고서를 넘기는 손, 검은 눈이 서류를 대강 훑는다. 잘 정리된 파일을 책상 위에 툭 올려놓은 남자는 그리페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가보도록.”

뒤돌아 나와 문을 닫은 그리페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패었다. 이렇다 할 능력도 없이 자리를 차지한 이였다. 매번 트집을 잡으려 애를 쓰는 놈은 일 처리를 배로 피곤하게 만드는 큰 원흉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에게서 겉치레식 치하를 받는다 하더라도 불쾌할 뿐이었다. 유난히 지독한 시가 냄새가 옷에 밴 것 같아, 괜히 한 차례 옷자락을 툭툭 털어낸 그리페는 걸음을 서둘렀다. 만에 하나라도 그 너구리굴을 나선 이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돌아온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까지는 전 부대원이 쉴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부상병이 충분히 회복할 때까지 복귀를 미루더라도 평소의 전력이 되돌아오는 데에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근시일 내로는 큰 작전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 작은 건은 타 부대로도 충분하니 당분간은 평시체제로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관에게 지시까지 남기고서야 그리페는 마침내 제 관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겉옷을 벗어 걸쳐 둔 그리페는 널브러지듯 안락의자에 몸을 던졌다. 미약한 통증이 어깨 근처에서 전해졌으나 이 정도는 익숙했다. 하염없이 하얀 천장을 바라보는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유난히 긴 하루였다.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오는 때부터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리트의 무감한 낯이 떠오르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대도 이보다는 덜 미숙할 테다. 한참 만에야 몸을 일으킨 그리페는 마른세수를 하고서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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