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소실점 (17)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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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6 작성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

균열, 그 속에서부터 쏟아지는 미지의 재앙이 생존을 위협하는 와중에도 범죄는 쉬이 일어났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재앙, 필연적인 행정의 사각에 숨은 범법자들은 단 한 번도 그 명맥이 끊긴 적 없었다. 통계야 어찌 되었든 그런 사안은 대개 협회의 소관이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조금 더 법의 틀 안에 가까운 기관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곳에 방문한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센티넬이 필요하다는 것.

「이런 겨울에는…… 자원봉사를 나오는 분들이 음식을, 음식을 나눠주거든요. 얼어 죽지 말라고, 따뜻한 걸로다가. 그러면 우리는 그날 하루 배곯지는 않겠구나 하지요. 요즘 들어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사라지긴 했는데…… 갑자기 죽었든, 무슨 이유가 생겨 떠났든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죽은 것 같다고 해도, 없어진 놈 하나하나 찾아 헤맬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냥,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버티고 있는 거니까. 한심하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그날도 똑같았습니다. 감자수프였나, 뭐였더라, 아무튼 따뜻한 수프 같은 걸 줬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의심이나 할 입장이 됩니까. 그냥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배나 채우지요. 그걸 먹고 나니 이상할 정도로 피곤해서 그대로 잤습니다. 뭐가 불편해서 깨 보니 앞이 컴컴하지 뭡니까. 움직일 수도 없고. 이상하게 춥지도 않고…… 한겨울 길바닥에서 결국에는 이렇게 얼어 죽는가보다, 했지요.

그런데 뭐가 흔들리는 겁니다. 그때 알았어요. 몸이 얼어서 못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람 사이에 껴 있다는 거를. 그리고 소리에 좀 무딥니다, 나는. 길바닥이 조용해 봐야 뭐 얼마나 조용하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알았습니다. 차 트렁크 같은 데에 짐짝처럼 실려 있을 거라고는……. 경찰관님이라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길로 잠은 다 깨 버리고, 대체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고…… 눌려서 숨도 막히고, 뭐 그랬습니다.

근데 사람이 간사하데요. 이대로 끌려가서 무슨 일이라도 당할 것 같으니까 이제 지긋지긋한 인생 끝이라는 생각은 하나도 안 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싶지 뭡니까. 우습지요. 하여간에 차가 거의 안 멈추기도 했고, 위에 얹어진 사람 치울 만큼 힘이 안 돌아와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차에 사람을 실어 가면 결국엔 어디 한 군데서는 내려다가 옮길 거 아닙니까. 저기…… 물 좀 주십시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지요. 잠들었다 깨기도 했고, 애초부터 시간 감각이라고는 없이 살았고. 해 뜨면 아침이요, 해 지면 밤이겠거니 하고 산 지가 몇 년입니다. 차에다가 선팅을 뭐 얼마나 진하게 처발라놨는지 트렁크가 열리니까 눈이 다 부십디다. 그것들은요…… 사람을 무슨 짐짝처럼 다뤘습니다. 약을 믿었는지, 뭔지…… 묶지도 않고 사람을 죄다 흙바닥에 팽개치고, 다른 놈은 내려놓은 사람을 그대로 들어다가 건물 안으로 옮겼는데 거기까지는 못 가봤습니다.

그때가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대로 눈 뜨고 달렸으니까……. 몇 사람이나 잡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았어요. 솔직히 사람 수 세고 있을 정신머리가 있기나 했겠습니까. 오줌이나 안 싼 게 다행이지. 나는 그 사람들을 밟고, 넘고……. 상황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넘어져서 산비탈을 굴렀는지, 얻어맞다가 밀려나서 굴렀는지……. 사람이 다닐 수가 없는 길이어서 그것들이 쫓기를 포기했지 싶습니다.

사람이 살고 싶으면 아픈 것도 안 느껴지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하여튼, 사람 사는 곳이다 싶긴 했는데 아는 곳은 아니어서 무작정 걸었지요. 훌륭한 분이 제 꼴을 보고는 도와주셔서……」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녹취록이 멈추면,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증언하는 이의 목소리는 간혹 떨리고, 쓸모없는 말을 덧붙였으나 거짓말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두려움을 억누르는 모양새였다. 흠흠, 제복을 갖춰 입은 누군가가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이게 4주 전, 첫 번째 증언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부랑자들의 증언은 대개 신빙성이 낮은 편입니다. 또한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워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증언이 나누어 드렸던 자료 세 번째 장에 있습니다.”

종이가 넘어가며 팔락거리는 소리가 제각각 울렸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세 개의 증언은 납치 방식과 대상에 차이가 있을 뿐, 중요한 내용은 모두 일치했다. 산속에 위치한 의문의 건물,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듯 지워진 증거. 경찰 측은 며칠에 걸쳐 인근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피해자들이 말한 건물을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게 바로 경찰 쪽이 협회 본부로 찾아온 이유였다. 이능을 이용한 범죄일 가능성이 있는바, 공식적인 협업 요청을 하기 위해서.

더러운 냄새가 났다. 이 건에는 필시 팔마가 엮여 있을 터였다. 지금은 사건 조사에 손을 보태는 정도로 그치지만, 팔마가 엮여 있는 게 확실해진다면 사건은 협회로 이관되어야 했다. 한 달가량 협회 내부 전력을 다듬을 시간이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그 사이 사람을 납치한 팔마가 무슨 짓거리를 벌였는지를 걱정해야 하는 건지. 협회장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제기랄. 내뱉지 못할 욕을 눌러 참은 협회장이 협업 요청을 승인했다.


  

최근 드물게 여유로운 시기를 보내던 협회의 정보부에 폭탄이 떨어졌다. 경찰 측에서 넘겨준 자료와 증거를 재확인하고, 이능을 간파할 수 있는 이들을 포함해 현장 조사를 나가야 했다. 한쪽에서는 파일을 산처럼 쌓아두고, 한쪽에서는 근방 폐쇄회로카메라 영상을 훑었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진한 커피를 앞에 둔 채였다. 여기저기 비어 있는 자리는 현장을 뛰러 나간 이들의 흔적이었고, 그나마도 자료를 쌓아두는 선반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근처 산을 죄 수색한 지 닷새, 이능으로 숨겨져 있던 건물이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사흘 후 돌아온 정보부 소속 요원, 안드레아는 협회장과 정보부의 수장인 웨이드를 앞에 두고 담담하게 보고했다. 해당 건축물은 피해자의 증언과 특성이 일치하며, 내부에서는 적지 않은 수의 기척이 존재했다는 것. 그곳에 팔마의 간부급 되는 인물이 다수 존재했고,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있었으나 태도로 미루어 보아 누구 하나 급이 떨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는 것 또한. 이는 이미 예상한 사안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안드레아를 응시하던 웨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 외의 것은?”

“납치당한 이들은 세뇌당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목적은 불명. 약물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내보내는 폐기물에 관련 흔적은 없었으므로 이능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산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 형태의 건축물로 사료되나, 내부까지는 잠입이 불가했습니다. 세뇌가 불가능한 소수는 죽였고, 그들의 시신 또한 이용하는 게 분명하나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내부 잠입에 성공할 시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양손을 등 뒤에서 맞잡고 선 채 안드레아는 그 수라장을 떠올렸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신을 향해 기도할 것을 강요당한 이들. 그들 옆에서는 불신자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아마도 팔마 측 인사들이 통일해 입혔을 하얀 로브에 핏방울이 아무렇게나 튀어도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들이 일을 꾸며온 시간에 비하면 찰나, 그 틈에 알 수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은 듯, 협회장은 그런대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래……. 고생했군. 가보도록.”

“예, 곧 세부 사항이 포함된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긴 안드레아가 모습을 감추었다. 흐트러진 서류를 툭툭 두드려 정리한 협회장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은 침잠해 어두웠다. 날씨마저 우중충하기가 그지없었다. 팔마가 완전히 뒤바뀐 시점을 놓친 건, 우리가 방심했던 탓이리라.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대치하던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 해이해졌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사건이 협회로 넘어온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경찰 측이 접촉해 온 것을 아는 이들은 대개 그럴 줄 알았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이미 한 달, 혹은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을 민간인 납치. 이미 그들이 숨은 곳도 아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저들끼리 수립한 것이 분명한 작전이 급하게 하달되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그리페와 그 팀을 필두로 하겠다는 협회 상부의 뜻에 이리트는 또다시 이를 갈았다.

“이리트, 너무 화내지 말아요.”

“이런 대인전에 더 적합한 팀이 있잖아.”

“팔마에 균열을 열 능력이 있다는 걸 알잖아요. 게다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쪽 팀도 붙었고.”

“당일에 이런 식으로 통보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그러려고 평소에 훈련하는 거지.”

불만을 담은 채 삐죽이는 입술을 톡 건드리면 제가 하는 양을 가만히 응시하던 자색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 어디에서 타인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곳만 아니었다면 입을 맞췄을 텐데.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손목을 잡아챈 이리트가 검지 끝을 가볍게 깨물었다가 금세 놓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간지러움과 찰나 스친 숨결. 저항할 생각도 없던 그리페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이리트.”

“이래도 키스 안 해줄 거 알아.”

“누가 올 줄 알고.”

“센티넬이랑 가이드가 입술 붙이고 있는 것 가지고 누가 뭐래.”

“그렇게 말하지 마, 이리트.”

제가 괜히 투덜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페는 상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정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작전을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민간인이 엮인 이상 그가 물러설 리가 없었다. 굳이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더라도 자청해 현장에 나갔을 테지. 그런 면모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어지간히 비틀어진 인간이 아니고서야 누가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자 함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

구명을 위해서는 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싸움터로 향하는 연인에게 마음을 쓰지 않을 방법을 적어도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리페에게 저마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그리페를 어떻게든 붙잡아 앉혀 두고 싶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꼭 가야만 하느냐고, 공연히 그리페의 어깨를 무겁게 할 뿐임을 알면서도.

지리멸렬한 고민 끝에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죽지 마. 다치지도 말고. 마주한 그리페의 표정에 서린 죄책감을 읽어내지 못했다면 좋았을 텐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우리를 자꾸만 서럽게 했다. 차라리 여느 민간인처럼 어떤 힘도 지니지 않았다면,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을까. 이리트는 그리페의 투박한 구석이 있는 손을 힘주어 잡았다. 가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작전은 시작부터 전면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대규모 부대를 들키지 않고 이능으로 숨겨진 장소로 잠입시킬 수 없는 탓이었다. 또한 저들은 이쪽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이곳에서 빠져나간 이들을 적극적으로 쫓지 않았다. 늘 사람 속에 사람을 숨기던 것과는 달리,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외진 산속에 자리를 잡은 것도 같은 맥락 위에 있으리라.

어쩌면 이곳은 잘 설계된 거대한 함정이 아닌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협회 정보부의 능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라 단언할 수 있었으나, 최근 팔마의 움직임은 매번 협회를 앞섰다. 그러나 설령 앞에 놓인 것이 협회를 위해 준비된 덫이라 할지언정 그들은 나아가야만 했다. 뒤를 쫓는 자에게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으므로.

부지 주위를 둘러친 철조망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녹슨 곳 하나 없이 말끔했다. 높이는 삼 미터에 못 미치고, 상단에는 가시철조망이 자리했다. 애초에 이능으로 숨겨져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자리한 철조망의 목적이야 하나뿐이었다. 바깥에서 안으로의 침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려는 이들을 막는 것. 센티넬 대다수에게는 제대로 된 걸림돌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곳으로 잡아들인 민간인들에게는 더없이 효과적일 터였다.

철조망을 제거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내부의 사정을 알지 못한 채로 무작정 진입할 수는 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울창한 숲, 기약 없는 대기가 자꾸만 길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 민간인과 그들을 납치한 이들이 자리하건만, 숲속의 분위기는 평화롭기만 했다. 녹음의 향기, 부드러운 바람결에 잎이 스치며 울리는 소리, 드문드문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까지. 나뭇잎 틈새로 비치는 햇빛이 이따금 눈을 찔렀다.

진입이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상념을 더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묵직한 전투화 아래, 키 작은 풀이 짓밟힌다. 조금 전 무너트린 철조망을 넘어서면,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이들이 건물 앞을 가로막았다. 오로지 그들만이. 지나치게 헐렁한 옷 아랫단이 바닥에 끌리고, 불규칙하게 튄 얼룩은 천을 더럽힌 지 시간이 오래 흐른 것처럼 보였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 이들은 하나같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도저히 전투 인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과 행색으로 앞을 막은 그들은 묵묵히 이쪽을 응시했다. 겨누어진 총구 앞에서도 그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려거든 그들을 밟고 가라는 것처럼. 그들을 무력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싸울 능력도, 의지도 부재했다.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눈은 이렇다 할 의지도 없이 죽어 있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들은 제대로 된 표정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가면을 뒤집어썼다고 한들 이보다는 생기가 있어 보일 테다. 그들은 분명 멀쩡하게 호흡하고 있었으나, 이미 죽은 시체를 일으켜 이능으로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지 자꾸만 의심하게 되었다.

무장한 부대 앞에 미끼처럼 내놓는 것 하며, 퀭한 눈가며 살이 내린 뺨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이 제대로 된 팔마 소속 인원일 리는 없었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하게 납치당한 이들 중 일부겠지. 그리페는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무슨 짓을 했기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들이 총구 앞에서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지.

“생포해라. 가능한 한 상처가 나지 않게 하도록.”

이 순간 그리페는 지휘권이 제게 있지 않음에 차라리 안도했다.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는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는 듯 차가웠다. 헬리온,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협회 내에서 가장 강하다 일컬어졌으며,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한 지금도 대인전투에서만큼은 따라올 이가 없는 S급 근접전투계 센티넬. 그가 이번 작전의 총지휘관이었다.

전투원 몇몇이 걸음을 옮겨 조심스레 접근했다. 무장한 이들이 다가서거나 말거나, 그들은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외려 불안감을 느낀 듯 다가선 전투원이 머뭇거렸으나 명령이 철회되는 일은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이가 더럽혀진 하얀 로브를 붙잡는 순간, 처음으로 그들의 고개가 움직였다. 텅 비어 유리구슬 같은 눈이 일제히 옷을 잡은 이에게로 향했다.

“가장 깊은 곳에서 기다리겠다.”

여러 목소리가 같은 속도로 같은 문장을 뱉어냈다. 이미 입력된 대사를 출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앞에 서 있는 건 녹음기가 아닌 인간이었다. 기이한 옷을 입고, 눈을 뜨고 있으나 의식은 이미 떠나고 없는 것 같다고 한들. 이 자리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대치가 길어졌으나, 그들은 이미 할 말을 마친 듯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하나를 잡은 채 내내 머뭇거리던 이가 뒤늦게 팔을 잡아 뒤로 돌리려 했다. 그 순간, 억센 손아귀에 붙잡혔던 이가 시커멓고 끈기가 있는 액체를 토해냈다. 반사적으로 잡았던 손을 놓으면, 비썩 마른 몸뚱이가 나무토막처럼 무너졌다. 성분을 알 수 없는 액체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 썩어가는 것의 냄새, 정확히는 방치된 시체에서 풍기는 시취에 가까운. 어쩌면 저들은 이곳에 나타나던 시점에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하나가 무너지는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도 모조리 힘을 잃고 너부러졌다.

시간을 끌고, 이쪽을 도발하는 게 팔마의 목적이라면. 더 이상 시간을 빼앗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들의 수습을 대기조에 맡긴 본대는 서둘러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성전을 닮아 있었다. 정면에 걸려 있는 상징은 뱀이었다. 자기 자신의 꼬리를 집어삼킨 뱀. 그건 팔마가 원래 쓰던 상징물이 아니었다. 팔마의 본질이 변한 것 자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풍경을 목도하고 나서야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체감되었다.

일부러 어둑하게 설치한 조명 아래,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는 이들은 이쪽을 알아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의 옷도 바깥에서 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소속감을 유도하려는 목적이었을까. 어차피 세뇌할 것이라면 이와 같은 장치는 필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 머리를 굴려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지. 그리페는 다만 가라앉은 시선으로 사람들을 응시했다. 이들 또한 대개는 이렇다 할 힘을 지니지 않은 일반인들이었다.

교단 옆으로 난 길은 정보부의 보고에 따르면 유일하게 건물 심층으로 향할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짐승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게 차라리 더 안전할 것 같았으나, 여기까지 온 판에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전투화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묵직한 걸음 소리를 울렸고, 기도하는 이들은 여전히 이쪽을 신경도 쓰지 않는 채였다. 이쪽에 관심이 없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조용히 지나가면 될 테니.

그러나 팔마를 상대하며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이번에도 매한가지였다. 내내 잠잠하던 이들은 가장 앞선 이가 교단을 지나치는 순간 벌떡 일어섰다. 이곳의 이들 역시 제대로 먹지 못한 듯 야윈 티가 났으나, 바깥에서 본 이들과는 분명 달랐다. 하나하나 힘이 들어간 움직임이나 적개심으로 타오르는 눈은 그들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차라리 죽은 것들이라면 더 나았을까. 이지를 잃고 달려드는 이들을 해칠 수 없었다. 그들의 정신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이번 작전의 또 다른 목표는 팔마에 의해 납치당한 이들을 구조하는 것이었다. 이곳에 온 이들 대다수가 비교적 오래 살아남은 베테랑들이라고는 해도 제 몸조차 돌보지 않고 달려드는 약자들을 상대한 경험은 일천하기 마련이었다.

마구잡이로 내뻗는 주먹질이나 발길질 따위를 막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굶은 이들의 공격에 제대로 된 위력이 실릴 리 만무했다. 어쩌다 공격이 닿는다고 한들, 괴수와 싸우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는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 몸에 상처가 나고, 묵직한 타격에 얻어맞고도 멈출 줄 몰랐다. 일반적으로는 더 이상 싸움을 이어 나가지 못할 정도였음에도. 그 맹목이 협회의 이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살려놓기만 해!”

무의미한 싸움에 시간을 더 뺏길 수 없었다.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이들과 싸우는 건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물러나 있을 수는 없었다. 헬리온은 앞장서 휘적거리는 이들의 급소를 적절한 힘으로 후려갈겼다. 수가 많고, 악착같이 들러붙어 온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기할 것 없는 상대였다. 의식을 잃은 이들을 벽 쪽으로 치워 두고, 헬리온과 그리페를 비롯한 그 휘하 인원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교단 너머, 벽 뒤에 숨겨진 공간은 몇 사람이 머물 수 있을 법한 공간이었다. 연단에 올라가기 전에 대기하는 용도로 쓰였던 걸지도 몰랐다. 방의 안쪽, 벽으로 위장한 문을 열면 아래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좁은 계단은 조명마저 어두워 그 깊이를 확신할 수 없었다.

“헬리온,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지 못할 겁니다. 다수를 들여보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나도 알아. 각 팀 팀장과 1조만 내려간다. 나머지는 쓰러진 이들을 후방으로 옮겨라. 정신을 차리면 또 달려들 수 있으니 구속해 두고. 그 후에 대기하도록. 이변이 생기면 즉시 연락해라. 1조는 차례대로 내려간다. 이후 적당한 공간이 있으니 거기서 정비하지.”

일부러 창문을 내지 않았을 공간은 쉬이 혼란을 일으켰다.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빙글빙글 돌아 걷다 보면 얼마나 내려왔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수십에 이르는 발걸음 소리는 혼란에 크게 기여했다. 어지럽기라도 한지 벽을 짚으며 내려가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억겁과 같은 시간이 끝났을 때, 눈앞에 그들이 도열하고도 남을 정도의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온통 흰빛으로 가득한 공간은 창문 하나 달리지 않았다. 병적으로 하얀 내부는 일전에 침입했던 팔마의 근거지와 닮아 있었다. 바깥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 이곳의 목적인 듯 보였다. 앞으로 펼쳐진 길은 여태 걸어 내려왔던 계단과는 달리 완만한 경사로로 길게 뻗어 있었다. 효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구조에는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숨을 곳이 없었다. 적어도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금세 혼란을 지워내고, 결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기이할 정도로 높은 천장과 굽은 곳 하나 없이 일직선으로 뻗은 길. 파묻히기 딱 좋겠는데. 누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말을 내뱉은 이조차 그만큼 주목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뒤늦게 입을 다물었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본 사안이었다. 사지에도 몸을 던져야 하는 게 협회의 센티넬이라 한들, 이런 곳에서 파묻혀 죽는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지 않으냐고.

“쓸데없는 말을 삼가라.”

헬리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길의 끝에는 천장의 높이만큼이나 큰 문이 자리했다. 이 문을 여는 시점부터는 정말로 더는 물러설 수 없을 거라고, 직감이 귓가에 속삭였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어떠한 사전정보도 없었다. 정보부 소속 요원도 이 이상 잠입이 불가하다고 판단했던 곳.

방어에 특화된 이들이 전방에서 이능을 펼치면 다른 이가 양개문을 한 쪽씩 잡고 당겨 열었다. 문틈 사이로 빛이 쏟아지듯 새어 나오고, 마침내 펼쳐진 풍경은 기이했다. 거대한 공동 한가운데를 차지한 원통형 수조는 어두워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수조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가 붙어 있었으며, 공간에서는 희미하나마 비릿한 향이 스쳤다. 말끔하게 정돈된 곳은 어느 곳 하나 불결한 곳이 없었음에도.

무엇보다 이상한 건,방문하는 사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차려 둔 만찬이었다.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은 어떻게 보아도 식사하는 데 적절한 공간은 아니었다. 식당 내지는 연회장 따위를 잘라 붙여 둔 것만 같았다. 긴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은 갓 완성된 듯 김이 피어올랐다. 음식 냄새는 조금도 나지 않건만.

“아, 드디어!”

활기찬 목소리가 거대한 공간 안에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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