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2부(24)
※ 해당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역사, 기관, 사건, 인물, 지명 등은 모두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 소실점 2부 〉
언제나 제게 주어진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으며,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제가 아닌 누군가의 목숨이 쉬이 날아가고는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리트는 이번 작전이 실패했다고 한들 저를 탓하지 않을 터였다. 하나 제가 저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더는 못하겠다고 말하는 건 더없이 쉬웠다. 당장 연결된 통신에 한 마디 속삭이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이리트는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어투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어렴풋이 눈치채기까지 했다. 그러면 그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저를 여기서 빼내 줄 테지.
아니, 겨우 그런 끝을 맞이하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제 이능의 강력함만을 따지자면 여느 S급은 쉬이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상성이며 상황이 좋지 않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그것을 변명 삼을 수는 없었다. 헉, 버겁게 숨을 들이켠 그리페가 제 목을 감싸 쥐었으나 손에 닿는 것은 자신의 살갗뿐이었다. 좁아지는 시야, 아롱아롱한 상대의 윤곽이. 생각을 거듭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호흡이 흔들리는 순간, 단단하기 그지없던 자세도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상대를 겨눈 창끝만은 가까스로 다잡았으나, 그게 전부였다. 이능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 움직였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와도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페.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챈 이리트가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의식이 아슬아슬 끊어지려는 때, 목을 죄던 압박감이 일시에 사라졌다.
생을 갈구하는 몸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거친 기침 뒤로 아릿한 통증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잠깐 사이 숨을 고른 그리페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한 걸음, 크게 발을 내딛자마자 다시금 목이 졸리지 않았다면 목표를 완수했을까. 이전과 달리 단번에 숨이 막힐 만큼 강한 압박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능을 이용하여 몸을 더듬어 댈 때부터 짐작했으며, 다시금 확실히 깨달은 사실.
상대는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이게 목숨이 오가는 전투임을 알고 있기는 할까. 불가해하게까지 느껴지는 여유는 그저 낯설 뿐이었다. 밝은 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나는 눈이 제 앞에 선 이를 훑었다. 몇 번을 들여다본들 그의 진의를 파악하진 못할 터였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저를 쉬이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기회가 분명 다시 올 터였다. 등 뒤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시간을 끌면 분명 누군가 이 상태를 알아챌 테지만, 그들이 알아챈다고 한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외려 그에게 당하는 이가 더 늘 수도 있었지.
[지원을 보낼까.]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
[네 목소리가 전부……! 아니, 그래, 알았어.]
이리트가 꺼낸 말에 한참을 대답이 없다, 겨우 숨통이 트인 틈을 타 속삭이면 곧바로 돌아오는 이리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짐짓 짜증이 난 것처럼 들리는 음성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한 소리 하는 대신 저 스스로를 진정시킨 이리트가 잠시간 침묵했다. 여유가 있다면 웃음이 샜을 텐데, 그러면 아마 이리트가 또다시 성질을 부렸을 터였다. 그러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등 뒤에 있는 광원을 부숴 버려, 그리페. 너도 시야 확보가 어려워질 테지만……]
제 시야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어느 정도는 싸울 수 있도록 훈련을 거듭해 오지 않았던가.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정답이라고. 묵직한 압박감 속에서도 그리페는 허벅지에 착용한 홀스터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길게 뻗은 상대의 그림자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광원의 위치는 상대방이 선 곳으로부터 조금 더 왼쪽. 높이는 골반부터 어깨높이 사이. 빛이 넓게 번지는 탓에 거리는 불확실했으나, 후광처럼 비치는 꼴을 보아하니 애초에 그리 멀지 않으리라. 다시 숨통이 트이는 순간, 그리페가 발을 내딛는 동시에 대거를 던졌다.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억누르고, 이미 손을 떠난 단검이 방해받지 않도록 거리를 좁혔다.
잠깐 사이 이미 던져진 검과 자신을 번갈아 본 상대가 선택한 건 자신이었다. 거칠게 붙잡힌 목, 한층 더 단단하게 발목을 죄어오는 감각이.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린 순간, 펑 소리가 울리며 일시에 주변이 어둠에 삼켜졌다. 피아가 구분되지 않음에도, 그리페의 걸음은 올곧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움직인 자신과 그저 버거워 단검조차 제대로 던지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적이 같은 대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열린 문 너머에서는 여전히 빛이 새어 들어왔다. 하나 먼 곳의 희미한 빛은 주변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삽시간에 달라진 밝기, 눈이 적응하지 못하는 건 자신도 매한가지였으므로 그리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내부의 구조도, 상대의 위치도 잔상처럼 남아 선명했다. 이제 그를 막는 것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목을 죄던 힘도, 발목에 휘감기던 낯선 감촉도 사라졌다. 그림자는 오로지 빛 아래에서만 존재하며, 빛이 힘을 잃을수록 덩달아 흐려지기 마련이었으므로. 더없이 눈 부신 빛, 그만큼 짙은 그림자에 결박된 채로도 숨이 막히기 전까지는 움직이던 그리페였다. 조금도 진중하지 않은 태도와는 별개로 전투 경험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약해진 힘으로 저를 묶는 건 턱없이 부족함을 알아챘을 터였다.
땅을 박차고, 큰 보폭으로 세 걸음. 창을 사선으로 내리그으면 파공음이 울렸다. 그러나 매서운 날은 아무것도 가르지 못했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든 몸을 빼내려 하는 건 예상한 범위 내였다.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도록 무기를 쥔 그리페가 숨죽인 채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그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광원이 사라지기 전에 서 있던 곳으로부터 고작 몇 걸음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둠에 충분히 적응한 눈, 희미하게나마 비치는 사물의 윤곽. 상대는 먼저 달려들지 않고, 제가 던진 것과 비슷한 검을 쥔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경계처럼 세워진 문, 그 너머에는 분명 그의 동료가 있을 터였다. 시간을 끌면 이전처럼 조명이 켜질지도 모르지. 대치를 일방적으로 끊어낸 그리페가 다시 한번 창을 휘둘렀다.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창을 가까스로 막아낸 단검이 바르르, 떨렸다. 소위 초능력이라 하면 흔히 떠올릴 법한 이능을 지닌 이치고는 드물게 신체 능력도 그리 떨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슷한 계열 능력을 지닌 센티넬과 비교했을 때 우위일 뿐, 그리페를 막는 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심지어 그리페의 이능은 동일 계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므로 더욱.
조금 더 힘을 주어 쳐내면 상대의 손아귀에서 단검이 쉬이 빠져나왔다. 맥없이 바닥을 구르는 날붙이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그리페가 상대의 멱을 붙잡았다. 옷자락 틈새로 드러난 팔에 핏줄이 불거지도록 그의 옷깃을 틀어쥔 그리페가 걸음을 옮겼다. 숨이 막히기라도 하는지 인상을 찌푸린 이가 팔뚝을 쥐고 긁어내렸으나, 그건 간지럽지도 않게 느껴졌다.
속절없이 그리페의 움직임을 따라 뒷걸음질 치던 이의 등이 벽에 닿아 턱, 하는 소리가 울렸다. 저를 올려다보는 이의 눈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 일그러진 상대의 표정이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추정컨대 나이는 저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릴 터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상대의 반응은 어떻게 봐도 패배에 익숙하지 않은 티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센티넬의 이능은 개개인의 차이가 있다고 한들, 일반적으로 성년이 되기 전에 발현되었다. 발현되었다는 사실조차 숨기고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전투에 익숙해지는 건 필연이나 다름없었다. 못해도 오 년 이상은 전장에서 굴렀을 이가 패배감이 낯선 듯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는 건 제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패배할 수 없는 전장에서만 싸웠을지도 모르지. 생각이 거기까지 가 닿으면, 비웃음조차 새지 않았다.
[레만이 다른 조직과도 손을 잡은 모양이야. 그림자를 쓰는 능력은 협회 내엔 없고, 원래 레만이 손잡은 이들 중에도 없어.]
내내 조용하다, 한참 만에야 귓가를 울리는 나직한 이리트의 목소리.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출신을 찾아낸 탓이리라. 그런데…… 전투에 그다지 익숙하진 않은 모양인데요. 어중이떠중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속삭이면 손아귀에 잡힌 이가 다시 움찔거렸다. 상대의 반응을 살필 시간은 없었다. 열린 문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점점 더 선명해졌으므로. 패배를 상정하지 않은 듯, 제압당한 것만으로도 기세가 한풀 꺾인 상대였으나 충분하지는 않았다.
상대를 붙잡아 당기면 저항감이 느껴졌다. 옷만으로는 부족했다. 멱을 놓아주자마자 빠져나가려는 이의 목덜미를 붙잡은 그리페가 팔을 휘둘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대차게 내동댕이쳐진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일어서려는 듯 기는 이를 벌레 뒤집듯 발끝으로 엎은 그리페가 그의 복부를 짓밟았다. 그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리페는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창을 쑤셔 박았다.
옷감과 살갗이 맥없이 꿰뚫리고, 뼈가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으스러졌다. 몸을 완전히 관통하여 바닥까지 닿은 창을 뽑아내는 순간, 다시금 환한 빛이 쏟아졌다. 하얗게 번지는 시야, 쓰러진 몸뚱이로부터 천장에 닿을 기세로 선혈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제때 몸을 뺐음에도 튄 피를 대강 닦아내는 그리페의 뒤로 나머지 잔당을 처리한 아군이 따라붙었다.
의견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잠시나마 시야가 차단된 건 이쪽일 뿐이었다. 저 너머에 있을 이들은 환한 빛에 반짝이는 핏줄기를 이미 목도했으리라. 아군 하나하나 안위를 챙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페는 침묵한 채 걸음을 옮기고, 그런 그리페의 앞으로 투명한 보호막이 덧씌워졌다. 저들도 무용함을 아는지, 눈을 찌르던 환한 빛이 꺼졌다. 잔상이 남은 시야가 돌아오기도 전에, 좁은 실내에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저를 두른 이능이 깨지는 순간, 그리페는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숨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굉음에 노출된 덕에 이명이 울렸다. 직전에 본 건, 이쪽을 향해 겨누어진 새카만 총구 하나. 그건 분명 기관총이었다. 이런 곳에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곳이니만큼 가져다 놓은 것일 테지. 벽에 등을 기댄 그리페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실, 저기 있는 게 중기관총이라면 이런 콘크리트 벽 따위로는 막을 수 없었다. 모습을 감춘 뒤로 사격이 멈추었음을 희망으로 삼아도 되는 걸까. 섣불리 확신해서는 안 됐다.
센티넬의 몸은 대개 강하며, S급쯤 되면 총탄에 몇 발 피격당하는 것 정도는 육체를 움직이는 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연발로 탄환을 쏘아대는 물건 앞에 나서는 건 누가 됐든 제정신으로 할 법한 짓은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선 이들 중에, 충분히 거리를 둔 채 이곳을 노리고 있는 기관총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이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긴장한 기색이 그득한 이들을 다시금 살핀 그리페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섬광탄은 한 번 더 까 넣는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을 터였다. 이미 이쪽에 비슷한 수단이 있음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으므로. 개인화기만을 지닌 아군의 대응 사격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쓸 만한 수단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리페가 벽에서 등을 떼고 한 걸음 나서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각각의 빛깔로 반짝이는 눈을 마주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페, 그건 안 돼. 제가 하려는 행동을 직감한 이리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으나, 그리페는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연막을 칠 겁니다. 전원 몸을 낮추고 대기하세요.”
“혼자 돌입하실 겁니까?”
“예. 나머지는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총을 제압하면 신호할 테니 그때 합류하세요.”
“저쪽에서 입구 쪽으로 아무렇게나 사격할 텐데요.”
“보조계도 있으니, 몇 발 정도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만. 모건,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도 혼자 돌입하겠다는 계획은 관두시죠. 함께 가겠습니다.”
“위험할 겁니다.”
“압니다.”
가만히 모건을 바라보던 그리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였다면 말렸을 테지만, 모건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의 신체 능력도 충분히 받쳐주니, 거절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었다. 시간을 길게 끌 필요는 없었다. 연기가 시야를 가리려는 순간부터 그들은 하나뿐인 입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갈겼다. 그리페와 모건의 주위로 파르스름한 보호막이 덧씌워졌다.
[나쁜 자식.]
“자신 있어요. 그러니까 이리트, 걱정 안 해도 돼.”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선의 선택지가 이것이었을 뿐이었다. 이리트의 표정이 어떨지 아는 그리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 어린 연인을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양쪽 문간에 각각 등을 기대고 선 이들이 희부연 시야로도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먼저 문을 빠져나가는 건 그리페였다. 덧씌워진 보호막이 삽시간에 터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이가 잠시간 멈춰선 채 모건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 역시도 큰 문제 없이 첫 번째 난관을 넘어섰으므로.
화력이 집중되는 입구를 넘었다면 의도한 계획의 절반은 이룬 셈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발을 박찼다. 모건은 옆으로 돌았고, 그리페는 일직선으로. 한발 먼저 앞서나간 건 모건이었다. 그가 나타난 쪽으로 돌아가는 총구, 그리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지지대를 걷어차 무너트렸다. 삽시간에 중심을 잃은 총이 무너지고,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던 이가 방아쇠를 당긴 탓에 총구가 불을 뿜었다. 바닥으로 곧장 꽂히는 탄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창을 휘둘러 총을 쥔 이의 팔을 잘라내고서야 총격이 멈추었다. 삽시간에 팔을 잃은 이가 울부짖고, 달궈진 총구에 피가 튀며 익는 소리가 났다.
“돌입해라!”
기관총이 무력화되는 모습을 본 모건이 먼저 나서 소리쳤다. 그리페는 묵묵히 적을 찌르고, 갈랐다. 이만한 화기가 이곳에 더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었지만, 공멸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들도 난전 중에 중화기를 쓰지는 않으리라. 저와 달리 기척을 숨길 필요가 없는 이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울렸다. 뒤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기세를 잡았을 때 최대한 그들을 밀어내야 했다.
연기가 퍼져 천장 조명이 희부연 경계를 그렸다. 그리페의 창이 그리는 궤적마다 일순 연기가 번졌다가 소용돌이치며 따라붙었다. 몇 번 즈음 공격을 받아내는 이들이 존재했으나, 그리페의 앞을 제대로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일순 저 안에서부터 연막탄과는 다른 안개가 퍼져 나왔다. 삽시간에 퍼지는 실안개에 닿은 눈이 따끔거렸다. 일반적인 안개가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았으나, 이런 수단을 쓰려면 처음부터 방독면 따위를 착용하기 마련 아닌가.
저와 무기를 맞대던 이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는 꼴을 본 그리페가 당혹감을 애써 눌렀다. 이 안에 자리한 중화기는 제가 무너트린 게 전부였으리라. 피아식별조차 불가능한 이능을 짙게 퍼트리는 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정체 모를 독을 더 들이켜지 않도록 숨을 눌러 참은 그리페가 매섭게 창을 휘둘렀다. 그들을 쓰러트리는 건 이전보다 쉬워졌다. 독을 들이켠 이들이 제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으므로.
전반적인 능력 저하를 겪는 건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흰자는 온통 새빨개지고, 누군가는 코피를 흘렸다. 유난히 독을 많이 들이켠 이들은 더 돌입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몸을 뺐다. 그럼에도 그리페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더 가까웠지. 아군을 살핀들 실질적으로 그리페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었다. 아군의 상태를 독려할 시간에 독을 퍼트리는 이를 쓰러뜨려야 했다.
그러잖아도 목이 졸린 이후로 내내 목 안의 미미한 통증이 거슬렸건만, 이제는 독까지 더해져 자꾸만 기침이 터졌다. 입을 막은 채 기침하면, 가슴 속 깊은 곳이 화끈거리며 새빨간 선혈이 튀었다. 입안이며 콧속에 온통 비릿한 향이 퍼졌다. 이럴 때만큼은 협회의 제복이 온통 검은색이어서 다행이었다.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젖은 손바닥을 옷에 대강 문질러 닦은 그리페가 독무의 근원지로 향했다. 다만 이리트만은 제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 버렸다. 통신을 잠시 끊었어야 했건만. 후회가 스쳤으나 이미 이리트는 제 이름을 내어 불렀다.
[그리페, 제발.]
“누군가는 해야 해요.”
[그게 왜 꼭 이런 식이어야 해. 안에 있는 게 너 하나도 아니잖아.]
“누구도 나보다 적을 빠르게 죽이진 못해요.”
[네 상태가 너무 나빠 보여……]
“괜찮아요.”
그리페가 다가서는 모습을 보면서도 상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도 닿아서는 안 될 것처럼 보이는 녹색 빛 안개가 더 짙어졌을 뿐.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건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치미는 기침을 억지로 누르고, 목 끝까지 차오르는 피를 삼켰다. 진득한 독무가 이리로 흘러오고 있었다. 피해는 이미 불가피한 일이었으나, 이대로 대치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제게 또 한 번 욕을 갈기고는 입을 다물었던 이리트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먼 곳에서 어렴풋이 들렸다. 화면에서 눈을 뗀 걸까.
차라리 그 틈을 타 발을 떼려는 순간, 한층 더 짙은 독기가 이쪽을 향했다. 점막도 아닌 살갗이 따끔거리고, 눈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눈을 깜박이면 눈앞이 흐릿하게 번졌다. 새빨갛게 물든 시야가 낯설었다. 액체가 뺨을 간지럽히며 흘러내리는 감각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기어이 피가 배어 나오는 모양이지. 눈을 몇 번 깜박여도 시야는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즈음, 누군가 제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반사적으로 손을 쳐내려다, 소매가 아군의 것임을 가까스로 알아본 그리페가 고개를 돌렸다.
“여기 당신 혼자만 있는 줄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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